275화 여든의 의미 2024 06 20
만 80년이 지났으니, 여든 살인지 여든한 살인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여든 살 몇 개월이라고 해야겠지. 물론 남 앞에서 내 나이 묻고 대답할 일이 거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신경 쓸 일도 아니긴 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일 아끼던 김건도 간지 (2015, 06, 12. 소천) 9년이나 된다. 이제는 120여 명만 남았다고나 할까, 경복 홈페이지의 회원이 119명이다. 살았지만 카페에 들어와 구경만이라도 할 수 없는 친구가 또 몇 명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14살 철부지 아이일 때 입학시험 보고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서 합격하고 집으로 달려가 소식 전하니 형(35회) 따라 경복 들어갔다고 집안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셨지. 1학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웃고 떠들고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 따라 쏼라쏼라 해보고 목소리가 엄청 굵은 선생님은 마이크라고 부르고 머리가 벗겨진 선생님은 뻔대라고 불렀지. 점심시간엔 찜뿡한다고 말랑말랑한 고무 정구공을 주먹으로 내치고 달려 나가 홈으로 들어오는 놀이도 엄청 재미있었지. 각자 나름대로 특별활동을 의미 있게 보냈지만 3학년 때 나는 하고 싶은 유도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은 보았지만, 본교 중학생들은 거의 다 합격했다. 교실 건물도 언덕 위로 오르고 또 다른 특성은 콧수염 턱수염 그리고 머리가 굵어졌다고 어른이 반쯤 되어가는 시기. 산악반 등산반으로 암벽 바위 기어오르고 줄 타고 내려오는 신비한 경험을 쌓으며 졸업하고 말았네.
농구부가 일본까지 갔다, 우승하고 왔다고 배 타고 외국 가는 것이 엄청 힘들었을 텐데---, 아직도 학교 운동장 건물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건물 중앙 통로에 서무과 창구가 있었다. 공립이지만 3개월마다 등록금을 서무과에 냈다. 고지서가 나오면 엄마에게 드리고 아버지가 돈을 주신다. 그러면 받은 날 학교 가자마자 낸다. 이유는 가방 속에 넣었다가 분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때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내지 못하는 친구도 없지 않아 있었고, 또 신문 배달 같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는 친구도 있었다. 복도바닥이 나무이지만 실내화를 신던 시절. 그래서 현관 입구에 깔판이 있어 실내화로 바꿔 신었었다. 실내화를 친구들과 뛰어다니고 도망가고 쫓아갈 때는 신내화 신고 그냥 밖으로 달려 나가기도 했었지. 1학년은 아래층 3학년은 3층이었다. 그래서 1학년은 3층에 올라갈 필요도 없지만 웬만해서는 잘 올라가지도 못했지. 나처럼 형이라도 있어 가끔 정말 돈이라도 필요할 때 가끔 올라갈 일이 있어야만 올라갔다. 물론 올라가 봐야 형도 돈이 있을 리 없었지만.
형과 2년 터울의 나이지만 내가 1학년일 때 형은 3학년 그리고 2학년에 되면 형은 고등학교로 가고 다시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되면 형은 3학년이 되니 6년 중 같이 학교를 4년 다녔어도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닌 해는 2년뿐이었다.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은 시간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속의 시간으로 변하고 말았구나.
마치 낳자마자 6년간의 경복 학생이 되었다가 그 추억 속에서 60년이 지났으니 어즈버 태평세월이 아쉽기만 하다는 이야기. 대학, 군대 생활, 직장까지는 혼자이었다가 결혼하니 둘이 셋 넷 다섯이 갑자기 되면서 정신없이 34년이 지나더라. 다행히도 교직이라는 천직을 근거로 남보다 직장을 10년 가까이 더 다니다가 이제는 무직(無職)의 세상, 아니 그래도 연금이라는 평생직장을 얻게 되더니 그것도 벌써 퇴직 19년이 지났다.
따지고 보면 퇴직 후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처음 6년은 혼자 놀다가 글공부한다고 1년 문학 강연을 들으니, 창작이라는 글쓰기 빛이 보이더라. 그냥 읽고 쓰는 것에다가 읽기에도 쓰기에도 그리고 생각하는 데 의미를 두게 되니 나를 하나의 물건,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더 욕심을 낸다면 예쁘고 참되게 만들고 싶더군. 미완성, 또 미완성을 완성으로 자꾸자꾸 더 잘 만들고 싶어졌다.
이제 다시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어떻게 지낼까를 생각했다. 사실 나도 나를 잘 알 수가 없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많이 하고 싶다.
5월 31일 금요일부터 왼쪽 편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좀 아프다 말겠지,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계속 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진통제를 먹으면 좀 살만했다. 그렇게 토요일 일요일이 되어도 낫지를 않아 월요일에는 한의원으로 갔더니 뜸을 뜨고 침 맞고 아픈 부위에서 피도 뽑아내고, 무엇인지 이리저리 처리를 해 준다. 먹는 약은 별로 없다. ‘하루 이틀 다니면 낫겠지!’ 생각하고 화요일도 한의원 진료를 받았다. 좀 낫는 듯하다가 그래도 집에 오면 또 아프다. 하는 수 없이 수요일은 일반 가정의학과에 갔다. 의사가 진료하고 약 처방전 외에 큰 병원 가보라는 듯 소견서까지 써준다. 집으로 와서 생각하다가 소견서를 써준다는 것이 아마도 <뇌경색>이나 <뇌출혈>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고 그냥 편두통이 아니라 뇌혈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몰려왔다. 다시 저녁 무렵에 소견서 가지고 의정부에서 제일 크다는 성모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이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혈액검사 용 피뽑기를 하고 이곳저곳 머리 MRI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그리고 정말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4시간 지나서야 거의 이상이 없다며 목요일은 현충일 휴무라 금요일 오면 자세히 알 수 있단다.
편두통이 고질적인 병은 아니지만 특별한 병인을 알 수 없고 신경성인 듯 치료도 쉽지 않다는 식이다. 금요일 다시 전문의를 만나보니 뇌혈관 사진을 보면서 약간 상처가 나듯 흔적은 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란다. 홍역을 치르듯 편두통이 지나가고 이제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은근히 걱정된다. 아니면 이렇게 또 건강검진을 요란하게 받은 격이 된다. 몇 년 전 허리 통증으로 그때도 성모병원 갔다 왔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그냥 걸어 나왔었다. 두 번이나 난리를 치고 응급실로 요란하게 갔었다고 딸아이는 아빠가 도통 아프신 것을 못 참는 엄살쟁이라고 놀리는 듯하다.
물론 가는 곳마다 진료 후에는 한의원 약, 가정의학과 약, 또 성모병원 약이다. 주는 대로 받아서 꼬박꼬박 잘도 먹는다.
여든, 여물고 튼실하다는 의미라 생각했는데 편두통을 앓고 보니 ‘나도 이렇게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에 ‘이제 또 한고비 넘겼다’는 마음이 들었다. 편두통으로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운동이 과해서인지 편도선이 조금 부은 듯했고 허리도 빨리빨리 펴지지가 않아 일어서면서 천천히 서야 했다.
이제 주변 정리를 슬슬 해야겠다.
무엇보다 책 정리인데 읽은 책은 읽은 추억도 있고 책갈피마다 메모도 있어 읽었을 때의 기억도 되살려 주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안 읽은 책은 읽어야지 하면서 이제라도 더 열심히 시간을 내어 읽고 싶을 따름이다. 특히 두꺼워서 미루었던 책을 올해에는 많이 읽어야겠기에 따로 모아 놓았다. 시집은 대개 하루 이틀이면 읽지만 소설은 보통 일주일은 간다. 작년부터 사위가 때마다 사주는 책을 과감히 거절했다. 그동안 매년 10권 이상 사다 주었었다. 앞으로 10년을 열심히 읽으면 안 읽은 책은 그래도 줄어들겠지. 가끔씩 재활용으로 책이 나오면 열심히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안 읽은 책이 더 많아졌다. 다만 취향이 달라 원하지 않은 책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책도 있다.
여물대로 여물었고 이제는 말라 시드는 시절만 남았는데 어떻게 내가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오늘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생각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 그래, 느리게라도 걷고 울퉁불퉁한 길도 걸을 수만 있으면 나아지겠지. 정신은 말똥말똥하니 무엇인들 못 하겠냐!
‘몸이냐 마음이냐? 무엇이 문제이냐!’
아프면 힘들지, 참기는 더 힘들어, 어떻게 해야 안 아파지나 생각뿐이지만.
첫댓글 정민 성님 고생 하셨습니다.
80살 이라는것이 건강의 고빗 길 인듯 합니다.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 나는데 쉽게 회복이 잘 안되는 군요, 전에는 하루밤 자고나면 회복되였는데, 지금은 몇날 몇일 걸려야 하니....
어느 의사의 말 " 철로 만든 기계도 80년 사용하면 고장 나는데, 사람도 나이80에 고장 날때가 되였으니 잘 달래가며 쓰세요 "
누구나 비슷한듯.......그래도 잘 관리하며 살어 갑시다. 남은 인생
힘 내세요
진 회장님 고맙습니다!
맞아요! 전과같이 운동하는데도 피로가 안 풀리는지 편도선이 아프기도 하더라고요!
허허! 웃으며 몸에 맞춰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