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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30)
2019년 04월 18일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
<해설> - 무각
응당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성철 스님은 해석하기를 그 마음이 난다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가 되면 이생기심(而生其心)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응무소주가 돼서 응당히 참으로 머무는 바가 없이 들어가게 되면, 저절로 자기 마음 가운데서 지혜가 나오고. 그러면 그게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응당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그 마음이 난다).
이 구절은 금강경에서 유명한 구절입니다.
【說誼】
不須空然逐風波하고 常在滅定應諸根이니 是可謂暗中有明이로다 又無所住者는
불수공연축풍파 상재멸정응제근 시가위암중유명 우무소주자
了無內外하고 中虛無物이 如鑑空衡平하야 而不以善惡是非로 介於胸中也요
요무내외 중허무물 여감공형평 이불이선악시비 개어흉중야
生其心者는 以無住之心으로 應之於事호대 而不爲物累也니라 孔夫子가
생심심자 이무주지심 응지어사 이불위물루야 공부자
云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하며 無莫也하야 義之與比라하시니 此는
운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차
言心無所倚하야 而當事以義也니 當事以義則必不爲物累矣며
언심무소의 이당사이의야 당사이의즉필불위물루의
不爲物累則必不失其宜矣니라 聖人이 時異而道同하고 語異而相須를 於斯에
불위물루즉필불실기의의 성인 시이이도동 어이이상수 어사
可見也已로다 謝氏가 於無適莫註中에 引經此句하야 以爲猖狂自恣하야
가견야이 사씨 어무적막주중 인경차구 이위창광자자
而卒得罪於聖人이라하니 何其言之不審이 至於如是之甚耶아 昔者에 盧能이
이졸득죄어성인 하기언지불심 지어여시지심야 석자 노능
於五祖忍大師處에 聞說此經하고 到此하야 心花頓發하사 得傳衣盂하야
어오조인대사처 문설차경 도차 심화돈발 득전의우
爲第六祖하사 自爾로 五葉이 結果하야 芬芳天下하시니 故知只此一句가
위제육조 자이 오엽 결과 분방천하 고지지차일구
出生無盡人天師也로다 鳴呼라 謝氏여 何將管見하야 擬謗蒼蒼乎아
출생무진인천사야 명호 사씨 하장관견 의방창창호
<번역>
공연히 바람과 물결을 쫓아가지 않고 항상 멸진정(滅盡定)에 있으면서 여러 근기를 응하여 주니 이를 일러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다고 하겠다.
또는 <주함이 없다.>는 것은 안과 밖이 없으며 중간도 비어 물건이 없어 마치 거울과 저울이 공평 무사함과 같아서, 선악과 시비를 가슴 속에 개의치 아니함이다.
<그 마음을 빈다.>는 것은 주함이 없는 마음으로 사물에 응하여서 사물의 더러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공부자(孔夫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천하에 있어서 적막(適莫)함이 없어서 오직 의리만을 비긴다.”고 하였다.
이는 마음이 따로 기대는 데가 없이 일을 대하여 의리로 하는 것이니 사물을 대하여 의리대로 하면 반드시 사물의 누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마땅함을 잃지 아니할 것이니 성인들은 시대가 달라도 도는 한 가지요, 말씀한 것은 달라도 서로 수구함을 여기서 보겠다.
그런데 사씨(謝氏)는 <적막이 없다는데> 주석할 적에 금강경의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성인께서 죄를 지었다고 하였으니.”고 하였으니 그가 말을 살피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였는가.
옛적에 노능(盧能)은 오조 홍인 대사의 처소에서 이 경 설함을 듣고 이 대목에 이르러 마음의 꽃이 돈발(頓發)되어서 마침내 전법(傳法)의 표시로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아 제육조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다섯 잎이 결과를 맺어 천하에 분방(芬芳)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한 글구는 다함없는 사람과 하늘의 스승을 출생하였음을 알겠다.
아! 슬프다. 사씨는 어찌하여 관견(管見)을 가지고서 푸른 하늘을 비방하였는가.
<해설> - 무각
공연히 바람(風)과 물결(波)을 쫓아가지 않고, 세상의 풍파에 쫓아가지 않고 항상 멸정(멸진정 滅盡定) 즉 고요하게 쉬는 곳에 있으면서, 응무소주(應無所住) 그 자리라는 것도 없이 다 놓고 쉰다면, 머문 바가 없으므로 모두 성품자리에 전부 맡겨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문 바 없는 그 자리는 공연히 바람과 물결을 쫓아가지 않고(경계에 쫓아가지 않고) 멸진정에 있으면서, 여러 근기에 응하여 주니 이를 일러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다고 하겠다.
어두움이라는 것은 무명(無明)입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다고 하겠다. 전부 다 쉬어버리면 그게 어두운 것이거든요, 다 놓아버리고 쉬어버리면 그걸 어두움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어두움(무명)이 아니라 그 자리는 그냥 쉬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밝음이 나옵니다.
즉 자기 자성자리에 맡기면 이를 일러 어두움이라고도 하고 무명(無明)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자성 자리에 맡겨진 무명 속에는 항상 밝음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작용따라 가버리면 밝음이 안나오는데 다시 나온 그 자리에 되놓기만 하면 어떻게 되느냐?
거기에 밝음(지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두움(선정禪定, 멸진정滅盡定)속에 있으면 거기서 항상 밝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무소주(無所住 주함이 없다)라는 것은 안과 밖이 없으며 중간도 비어 물건이 없어 그것이 마치 거울과 저울이 공평 무사함과 같아서,라고 했는데,
거울은 항상 공평하게 있는 그대로 비추고, 저울은 항상 평평하여 삿됨이 없어 정확합니다.
그러니 거울과 저울이 공평무사함과 같아서, 선악과 시비를 가슴속에 개의치 아니한다(두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즉 선악과 시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함이 없다(무소주 無所住)는 것이 뭐냐면 안팎이 없고 중간도 비었으므로 물건이 없어요, 그래서 물건이 없으니 거울과 저울이 공평무사함과 같다는 것이고.
선악과 시비를 가슴속에 두지 아니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머묾이 없는 것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 시비, 옳고 그름을 가슴속에 두지 않는 것이 무소주입니다.
또, 옳은 것을 보고 놓아버리는 순간 옳고 그름이 없지요!
이렇게 놓으면 옳고 그름이 없거든요, 이것도 무소주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소주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경계속에서 끝없이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좋다 나쁘다는 온갖 분별을 놓기만 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무소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應無所住)
다음에 그 마음을 낸다(이생기심 而生其心) 또는 그 마음이 난다는 것으로, 생기심(生其心)이란 주함이 없는 마음(無所住)으로 경계에 응하여서 사물에 더러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사물이라는 대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둘 아니게 마음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무소주가 되어야 이생기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생각을 내도 도인은 사사로운 마음을 내지 않거든요, 범부들은 항상 사사롭게 마음을 내고.
그러니까 응무소주라 하여 머문 바가 없으니 사사롭게 마음을 내지 않으므로 법에 적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몸이 약해서 보약을 먹어야겠다고 할 때도, 사사롭게 나만을 위한 욕심으로 약을 먹으면 이것이 응무소주가 된 마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겁니다.
한 생각의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뭐가 아픈 것이지요,
내가 아픈게 아니고 중생이 아픈 것입니다.
중생이 아프니까 지금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의 중생들이 고통스러우니까 내 몸을 통해서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약을 먹어도 어떻게 먹느냐는 겁니다.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먹는 겁니다. 중생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니까.
이렇게 한 생각을 하면 이게 바로 보살만행입니다. 즉 보리심이지요.
똑같이 약을 해 먹어도 욕심으로 먹는 것하고, 보리심으로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행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들어가기는 입으로 똑같이 들어가는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 한 근을 먹어도 돼지의 업식이 둘 아닌 나의 모습인 줄 알고, 이 업식도 내 모습입니다.
이게 다른게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쫓아서 나온 것이고, 지금 현재의 나도 마음으로부터 쫓아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한 근의 돼지고기도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다른데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 업식도 나와 인연이 돼서 온 것이니 건져야 합니다.
그렇게 먹는 것이 보살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되고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생각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지혜가 어떻게 생길까요? 법문을 자주 들어야 그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가 여러분의 한 생각에 달렸다는 겁니다.
다른데 있는게 아닙니다. 지혜가 없으면 없는대로 그 과보를 받고 살지만, 지혜가 있으면 똑같이 일체에게 이익을 주는 겁니다.
여기 내안의 중생들도 보살피고, 앞에 있는 돼지의 업식도 건지면, 안팎을 다 건지는 겁니다.
고기를 먹으면 수행이 아니고 야채를 먹어야 수행인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인연입니다. 일체가 중생들입니다.
산 중생이나 죽은 중생 모두를 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취해야 나라는 이 생명이 유지되잖아요. 왜 유지시키느냐? 도(道)닦기 위해섭니다.
내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본분사입니다.
여기에 이것은 틀리고 저것은 옳다는 옹졸한 생각을 갖고 어떻게 도를 닦을 수 있겠습니까?
겉모습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 마음을 알아야, 그 사람이 제대로 된 공양을 하는지, 제대로된 수행을 하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을 보고, 저것이 옳은지 수승한 것인지 생각 자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규정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개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이런 분별을 가슴속에 두지 말고 다 놓으라는 겁니다.
알량한 알음알이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끝없이 이야기하는데 이런 말을 하면 사실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함이 없는 마음으로 사물에 응하되 사물에 얽매이지(물들지)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생기심입니다.
즉 이렇게 작용하라는 것이고, 이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공부자(孔夫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천하에 있게 되면 적막(寂寞 옳고 그름)함이 없어서,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군자가 천하에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 뭐가 있느냐, 여기서는 의(義)라고 했는데 뭐가 의(義)냐면, 유교에서 보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하잖아요, 처음에는 인(仁 어질 인)이고 다음에 의(義 옳을 의), 예(禮 예도 예)고, 다음에 지(智 지혜 지), 그리고 신(信 믿을 신)이 다섯가지가 항상 한다고 했습니다.
즉 진리가 드러날 때는 인의예지신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云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하며 無莫也하야 義之與比라하시니
운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군자(깨달은 사람, 공부가 된 사람)가 천하(세상)에 있게 되면 무적야(옳은 것도 없고)하며, 무막야(그른 것도 없다)하다는 뜻이고.
의지여비라 하였는데 의(義)란 옳은 것 바른 것을 뜻하고,
비(比)란 화합한다 또는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 뜻은 의와 더불어 비긴다(화합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 종합하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서 의와 더불어 화합한다는 것입니다.
즉 군자는 어떻게 해도 다 옳다는 말입니다.
모로 가도 옳고 가로 가도 옳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뭐가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지요?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위에서 말하는 의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정(正)자라고 해도 됩니다.
정(正)자는 밝다와 바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밝게 보고, 밝게 말하고, 밝게 행하고, 팔정도가 굴러가잖아요.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사는 이 세상의 삶을 이야기 하는데 공자님은 옳을 의(義)자를 썼습니다.
여기서 옳을 의자가 어디에 해당됩니까? 무엇에 바른 겁니까?
어떤 것이 바른 것이지요?
자기 마음에 바른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요 세상에서는 선악과 시비를 가슴에 두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옳을 의자를 썼거든요, 이게 뭐냐 이겁니다.
이건 자기 양심에 비춰서 바른 것입니다. 이걸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양심에서 흘러나오는 말, 이미 여러분이 잘못하면 잘못한 것을 알고 있거든요,
누가 아느냐면 양심이 압니다. 이게 바로 의(義)자입니다.
게으르면 게으른 것을 알고, 거짓말하면 거짓말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요새 TV에서 이런 이야기 자주 나오지요,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두르다가 혼나고 있지요, 그런 것을 본인이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가슴에서는 알고 있는데 그걸 무시한 겁니다.
이걸 모르면 사람도 아니지요. 일체 중생은 실유불성이니 다 알고 있다고요.
그 안에서 하는 말씀을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하는데 이걸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무시해버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점점 어두워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무명에 갇히는 겁니다. 여기서 공자님이 말하는 의와 더불어서 바르게 화합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가슴속에 있거든요, 우리의 가슴속에 참 부처가 있는데, 그 속에 있는 부처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부처의 본체는 그 자리에서 고요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요하게 있지만,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작용이 나오면 밝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알아서, 여기서 너! 잘못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소리를 우리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몇 번 무시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두움이 계속 증장되고,
그러면 점점 어두워져서 결국 무명에 거의 완전히 갇히니 그때는 양심이 붕괴 되었다고 합니다.
양심이 있기는 있는데 너무 무명에 갇혀 있으니까 밝은 빛이 나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니 삶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어둡게 말하고, 어둡게 행하는 등 전부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류(類 무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류란 삼악도입니다.
그리로 가버린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게 지금 드러나서 모욕을 당해야 이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미래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거든요, 끝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지금 치욕적이고 힘든 과보를 받으면 이게 훨씬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잘못을 터트리고 감수하고 있는 것도 누구의 자비입니까?
자기 부처의 자비입니다. 이걸 내버려두고 계속 덮어두면 언젠가는 이것이 점점 커져서 자기 삶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립니다.
그때는 삼악도에 빠져서 나올 기약이 없어져 버립니다.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이걸 생각해 보면 나쁜 것이 나쁜게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게 아닙니다.
즉 최악의 상황이 최선의 상황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죽이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준이라는 건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살펴보십시오. 바로 그 지점입니다.
군자가 천하에 있으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서 오직 의와 더불어 합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양심)에 비추어서 바른 것(옳은 것)이 뭐냐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義)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입니다.
이는 마음이 따로 기대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따로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양심)이라는 것, 찾아보세요, 찾아보면 있습니까?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어디에 의탁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뭔가에 의탁해서 나오면 이것을 풀에 붙은 정녕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헛깨비라고도 합니다.
즉 자기 마음은 어디에도 의지한 바가 없습니다. 이는 마음이 따로 기대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양심)이라는 것은 일에 대하여 의(義)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바르게 돌아간다는 것으로 경계가 닥쳤다 하면 여지없이 바르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물에 대하여 의(義)로 하면 반드시 마음에 대하여 밝게 비추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바르게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물에 대하여 의로 대하면 반드시 마땅함(옳은것)을 잃지 않을 것이다.
즉 옳지 않은 것이 없으니 반드시 다 옳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악한 행을 저질러도 모두가 이익되게 돌아가고, 악인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나쁘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기꾼이 부드럽게 좋은 말을 해도 그건 사기 치려고 하는 소리고, 성인이 악을 쓰고 욕을 하고 때리고 난리를 쳐도 그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런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땅함(옳은 것)을 잃지 않을 것이다. 즉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말씀한 것은 달라도 서로 필요로 함을 여기서 보겠다
이 말은 성인들은 시대가 달라도 보는 것은 한가지요, 즉 성인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시나 공자님이 말씀하시나 도(道)는 한가지라는 겁니다.
可見也已로다 謝氏가 於無適莫註中에 引經此句하야 以爲猖狂自恣하야
가견야이 사씨 어무적막주중 인경차구 이위창광자자
而卒得罪於聖人이라하니 何其言之不審이 至於如是之甚耶아 昔者에 盧能이
이졸득죄어성인 하기언지불심 지어여시지심야 석자 노능
그런데 사씨라는 이름을 가진 선비는 경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공자님이 말씀하신 적막(適莫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는 것)에 대하여 금강경과 비유하여 이 구절에 대해서 말하기를 창광자자(미쳐서 스스로 방자하게 성인께서 죄를 지었다)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자님의 말이 부처님 말씀과 다르니 틀렸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씨가 하는 말이 공자님이 미쳐서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함허 득통 선사는 그가 말을 살피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옛적에 노능(盧能 육조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 대사의 처소에서 이 경의 설함을 듣고 이 대목(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에서 마음의 꽃이 돈발(頓發)되어, 마음의 꽃이 돈발된다는 것은 크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득 전법의 표시로 가사와 발우를 전해받고 제 육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을 일자무식이라고 하는데 오조 홍인 대사가 금강경 강의하는 소리를 듣고,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이 법문에서 완전히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법(의발과 가사)을 전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다섯 잎이 결과를 맺어 천하에 분방(芬芳 향기롭게)하였다. 즉 천하를 향기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글구는 다함이 없는 사람과 하늘의 스승을 출생하였음을 알겠다.
아! 슬프다. 사씨는 어찌하여 관견(管見 좁은 소견)으로 푸른 하늘을 비방하였는가.
다섯 잎(5종 가풍, 임제종‧조동종‧위앙종‧법안종‧운문종으로 육조스님 제자로부터 퍼져 나왔습니다.)
【冶父】
退後退後어다 看看하라 頑石이 動也로다
퇴후퇴후 간간 완석 동야
<번역>
뒤로 물러설지어다. 보고 보아라 미련한 돌이 움직이네.
<해설> - 무각
뒤로 물러서고 물러설지어다(退後退後어다).
살피고 살펴라. 굳은 돌(완석 頑石)이 움직이노라(看看하라 頑石이 動也로다).
여기, 뒤로 물러선다는 말은 자기 자성을 믿고 반조(反照)하는 것으로, 거기다 다시 놓고 쉬는 겁니다.
보고 보아라! 그리고 다시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무소주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뒤로 물러서고 물러서는 것입니다.
즉 머문 바 없는 거지요,
누가 악을 쓰고 욕을 하면 그렇게 악을 쓰고 욕을 한 사람이 실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그 죽일놈이라는 생각을 그 자리에 다시 놓아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뒤로 물러서는 것이고,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반조법입니다.
그리고 보고 보아라! 즉 맡겨 놓고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옛다 모르겠다! 하고 던져놓고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저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살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완석이 움직인다는 것은 강고한 업식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선다는 것은 무소주(無所住)를 뜻하고, 보고 보아라.는 것은 완석이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생기심(而生其心)을 말하는 것으로 지혜의 작용입니다.
【說誼】
明中에 莫留蹤하고 卻向暗中歸어다 看看하라 可不動底가 如今動也니
명중 막유종 각향암중귀 간간 가부동저 여금동야
動還無動하야사 始得다
동환무동 시득
<번역>
밝음 가운데 자취를 머물지 말고 문득 어두운 데를 향하여 돌아갈지니 보고 보아라.
움직이지 않던 것이 지금에 움직인다.
그러니 움직임이 움직임 없는데 돌아와야 비로소 맞겠다.
<해설> - 무각
밝음 가운데 머물지 말고 문득 어두운 데를 향하여 돌아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야기 했지요.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 있다고 하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어두움과 밝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가 다시 놓고 쉬게되면 그 자리가 밝음인가요? 어두움인가요?
여기서는 밝음 가운데 머물지 말고, 즉 쉰 자리에 머물지 말고, 어두운 가운데(頑石)를 향하여 돌아갈 지어다. 즉 작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용하면 또 다시 밝아지니까요. 어둠이 어둠으로만 있는게 아니고, 밝음이 밝음으로만 있는게 아니거든요.
밝음을 가지고 어두움을 비추는 거지요. 그래서 광명이 있으면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겁니다.
보고 보아라 움직이지 않던 것이 지금에 움직인다.
그러니 움직임이 움직임이 없는데 돌아와야 비로소 맞겠다.
【冶父】
山堂靜夜坐無言하니 寂寂寥寥本自然이라 何事西風動林野하야 一聲寒鴈이 唳長天고
산당정야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 하사서풍동림야 일성한안 려장천
<번역>
산당(山堂) 고요한 밤에 말 없이 앉았으니 고요하고 고요하여 본래 자연 그대론데, 무슨 일로 서쪽 바람이 숲 우거진 돌을 움직여서 한 소리 찬 기러기가 긴 하늘에 울리는가.
<해설> - 무각
산당(山堂)에 즉 산사의 고요한 방에 삼매에 들었으니 고요하고 고요하여 본래 자연 그대로다(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체험해서 깨닫고 보면 본래 고요하고 고요하더라(寂寂寥寥),
그리고 요요(寥寥)는 조용한 모습을 뜻합니다. 여기에 조작이 없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체험을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성진 스님하고 수련회 이야기하면서 신도들의 체험 정도는 끌어 줘야 수련회의 목적을 다하는 것이고, 그렇게 돼야 불자라고 할 수 있는데, 체험을 못하니까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거든요, 체험 했다고 끝난게 아닙니다.
그때가 제대로 된 시작입니다.
체험이라는 것이 뭐야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입니다.
본래 그러한 것, 본래 본무생사(本無生死)라는 것으로 원래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부처라는 겁니다. 이걸 이치로만 아는게 아니라, 참으로 손바닥에서 구슬 보듯이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드디어 생재여래가(生在如來家) 라고 하여 여래의 가문에 태어났으니까 그 집 호적에 오른 거고, 그때 그 집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불자(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거기다 둔 것입니다.
수련회의 목표도 그렇고, 우리 선불교 대학의 목표입니다. 체험을 하게 해주는 것.
그러면 자신이 알아서 더이상 물러서지 않거든요, 그 정도는 끌고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건 아닙니다.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 즉 산사에 있는 고요한 방에 말없이 삼매에 들어 있으니 경계 속에서도 그 자리(자성자리)에 항상 앉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자리, 좌선 할 때 ‘좌(座)’란 뭐냐? 자기 자성자리에 머무는 것으로, 거기에 항상 머무르게 되면,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이라 하여 본래 고요하고 고요하며 요요한데, 더 이상 닦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하사서풍동림야(何事西風動林野)’ 서풍(부처님)은 수행을 하고 보살행을 하라고 할까요? 왜 해야되느냐 이겁니다.
이렇게 체험하고 깨달아서 알았다 하더라도 또다시 부지런히 닦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에 체험하고 난 다음에도 한조각 굳은 돌(완석)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즉 “한생각 일어나기 이전자리에 돌아가서 주시하고 주시하여 홀연히 타파하면 가슴속에 오색 실이 자연히 끊어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문을 체험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난게 아니라, 체험했으면 그때부터 제대로 된 수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수행이라고 열심히 했지만 정확하게 맞아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무생사(知無生死)라 하여 생사가 없는 것을 법문과 어록을 통해서 아는 정도입니다.
즉 믿어 들어가고, 믿어지는 것으로, 이렇게 하다보면 그 믿음이 수승해지고 확연해지면 반드시 체험하게 되어있습니다.
화엄경에서도 단계 없는 단계를 말했습니다.
십신(十信) 다음 십주(十住)로, 십주초주가 초발심주로 그 초발심주 자리가 체험의 자리고, 그 체험한 자리가 변정각(便正覺)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부터 보살행을 통하여 낱낱의 업식을 닦아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행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을 닦아나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십회향 법문에 들어가서 스승 노릇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십회향은 스승이 되는 것으로, 제자에게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십지(十地) 법문에 들어가서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공부의 단계 없는 단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사서풍독림야(何事西風動林野)라 하여 서풍(부처님)은 무슨 일로 임야를 움직이게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즉 무슨 일로 작용을 닦게 하는가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고, 이렇게 닦아라 저렇게 닦으라고 잔소리를 하잖아요. 부처님이라는 늙은이가.
그래서 부처님을 황면노자(黃面老子)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얼굴이 누런 늙은이.
우리는 그 말씀을 낱낱이 따라야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한 소리 찬 기러기가 먼 하늘을 울리는가 라고 했습니다.
즉 한 소리 울음을 듣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說誼】
本自無動이어니 何須動也리오 須信道어다
본자무동 하수동야 수신도
四海에 浪靜龍穩睡하고 九天에 雲淨鶴飛高로다
사해 낭정용은수 구천 운정학비고
<번역>
본래 움직임이 없었거니 어찌 움직이겠는가. 모름지기 이렇게 믿을지어다.
사해(四海)에 물결이 고요하니 용의 잠이 편안하고 구천(九天)에 구름이 깨끗하니 학의 날음이 높지요.
<해설> - 무각
본래 움직임이 없거니 어찌 움직이겠는가 “(수신도 須信道어다)” 이렇게 말했는데 무슨 뜻이냐면 모름지기 이렇게 믿어 들어가라. 또는 이와같이 알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사해(四海 중생세계, 사천하)에 물결이 고요하니 용이 숨어서 잠을 자고(용의 잠이 편안하고), 왜 숨어서 잠을 잘까요? 흔적이 없으니 숨었다고 한 것입니다.
흔적이 없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여 쉬어졌다는 것이고, 구천의 구름이 깨끗하지요.
또 물결이 고요하고 용이 숨어서 잠을 잔다는 것은 무소주(無所住) 즉 머문 바 없는 마음 입니다.
구천의 구름이 깨끗하니 학이 높이 날도다. 이것은 생기심(生其心)입니다.
학이 높이 난다고 했는데. 지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면, 보통 중국 사람들은 1층 난간에서 밖을 보면 일층 난간만큼 보일 것이고, 10층 난간에서 보면 더 멀리 보이겠지요. 그만큼 지혜가 많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구천에 구름이 없어 깨끗하니까 학이 높이 날아서 지혜가 광대무변 하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작용이 자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까 말했듯이 돼지고기 한 근을 먹을 때 그런 생각 해봤습니까?
이 세상은 지혜의 차원에 따라 세상이 보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는 개의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뱀은 뱀의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런데 성인이 되면 세상이 얼마나 틀려지겠습니까? 완전히 틀리지요,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서 딴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거든요, 똑같이 이 세상을 보는데 완전히 틀립니다. 1층에서 보는 것하고, 10층에서 보는 것하고 틀리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전에 했지요. 대롱을 가지고 시작과 끝이 없는 뱀을 보는데 대롱을 붙이고 보면 시작과 끝이 있지요. 즉 여기는 시작이고 저기는 끝이거든요, 이것은 너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듯이.
그런데 대롱을 떼어 놓고 한 번 보세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너와 나가 있는가,
생과 사가 있는가, 옳고 그른게 있는가.
그렇다고 생판 이것 말고 다른걸 보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똑같은 걸 보는 겁니다. 그런데 완전히 틀리지요. 의미가 달라지는 겁니다.
도인이 됐다고 해서 색다른 세계를 따로 보는게 아니거든요, 이걸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여기서 하는 말이 그겁니다.
사해의 물결이 고요하니 용이 숨어서 잠을 잔다(쉰다). 즉 무소주를 말합니다.
구천(九天)에 구름이 청정하니 학이 높이 난다고 표현했습니다.
오늘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는데,
많이 말해도 소용 없습니다. 제대로 알아야지, 이렇게 말해도 제대로 알기 쉽지 않습니다. 조금 이해하는 정도이지, 그런데 이해하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핵심은 뭐야 무소주(無所住), 머문바 없는 그 마음, 즉 거기다 모두 놓고 가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깨달은 다음에 즉 체험한 다음에도 한 조각 굳은 돌(완석) 같이 하라고 했잖아요.
이런 저런 반응한 것을 전부 한 곳에 놓고 쉬는 공부를 해라.
말을 안 들으니까 오즉하면 좀 죽어라! 이렇게 말하지요.
죽은 놈이 하는거 봤니! 이렇게 말하듯이, 죽은 놈은 아무리 욕을 하고 때리고 난리를 쳐도 거기다 반응하지 않지요. 이렇듯이 마음을 푹 좀 죽여라. 달리 말하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라! 이러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해의 물결이 고요하고 용이 숨어서 잠을 자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천의 구름이 깨끗하니 학이 높이 날아 전체를 통찰해서 시작과 끝을 다 보니 지혜의 작용이 여기서 나온다 이겁니다.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 세계를 한 눈으로 살펴본다는 겁니다. 안목이 그렇게 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똑똑하지 말라 즉 알음알이를 하지 말라고하는 겁니다.
알음알이가 많으면 공부가 어렵다고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참 지헤가 알음알이에 의해 덮여버리거든요, 알음알이가 구름과 같으니 구름이 다 없어져야 참다운 지혜의 광명이 뚜렷하게 나올 것 아닙니까?
지혜는 어디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이라고 했지요,
본래부터 적적하고 요요한 자연 그대로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특별한 위치에 서 있지도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똑같습니다.
공부를 해야 틀려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자르든 기르든 이런 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세월 다 가버리면 누구에게 하소연 할 것입니까?
이 공부를 누가 대신 해줍니까? 아무도 대신해주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