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박 현 규*
【목 차 】
一. 서론
二. 민간신앙이 세운 南山臥龍廟
三. 민간동제를 지내는 普光洞武侯廟
四. 결론
一. 서론
諸葛亮(181~234)은 삼국 蜀(漢)나라의 재상이다. 자는 孔明이고, 호는 臥龍이며, 시호는 忠
武이다. 후한 말에 琅邪陽都(오늘날 산동 沂南)에 태어났고,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한 후에
荊州에서 숙부 諸葛玄의 밑에서 자라났다. 207년(建安12) 南陽의 초야에 묻혀있을 때 劉備로
부터 三顧草廬의 예를 받고 출사하여 각종 전쟁에서 지략으로 승리를 일구었고, 훗날 촉나라
를 세우고 위․오와 함께 중국 대륙을 삼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비 사후에 後主
劉禪을 보필하며 촉나라의 경영에 힘을 썼다. 234년(建興12)에 위나라 司馬懿와 五丈原전투
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의 명성은 비단 생전에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만인들의 입에 오르내
렸고, 심지어는 한국, 일본 등 주변 국가에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한국에서 예나 지금이나 제
갈량을 충의와 지략의 대표적인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제갈량이라는 이름보다
그의 자를 붙인 제갈공명으로 더 알려졌다. 제갈량의 이름과 작품은 일찍이 중국 문헌을 통
해 알려졌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파 속도와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당시 군주
와 신하, 유림에서는 제갈량을 숭배하여 묘우를 세웠고, 민간에서는 제갈량을 신앙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오늘날에도 각종 책자나 언론 매체에서 제갈량의 이름을 자주 거론할 정도로 인
용되는 빈도수가 매우 높은 편이다.
이번 주제는 한국에서 제갈량 사당의 유래와 현황에 대한 연구이다. 필자의 제갈량 사당에
대한 관심은 삼국 촉나라의 영웅인 關羽사당에서 촉발되었다. 한국 소재 관우 사당을 조사
하는 과정에 수도 서울의 南山(木覓山)과 龍山普光洞에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남산 臥龍廟는 2009년 3월부터 6월까지 본교 재학생과 더불어 현장 답사
* 順天鄕大學校中語中文學專攻敎授.
140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를 했고,1) 普光洞武侯廟는 동년 6월에 필자 단독으로 현장 답사를 했다. 이와 동시에 각종
문헌에서 제갈량 사당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했다. 이번에 그간 조사한 결과물을 가지고 본격
적으로 논문 작성에 나서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인이 제갈량의 사당을 접촉하거나 시
문을 읊은 과정, 한반도에서 제갈량 사당이 건립되고 전파된 과정, 현존하고 있는 남산 와룡
묘, 보광동 무후묘의 모습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편폭 관계
로 오늘날 제갈량 묘우의 신앙 현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술하고, 조선 말기 이전의 제갈량
묘유의 유래에 대해서는 따로 논술했다.2)
二. 민간신앙이 세운 남산 臥龍廟
조선 문인들은 제갈량이란 인물을 주로 정사 三國志 , 文選 , 朱熹문집 등 중국 문헌을
통해 접촉했다. 그렇다면 민간에서는 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제갈량이란 인물과 접촉했을까?
물론 상기 서적을 통해서도 제갈량이란 인물과 작품을 알았겠지만,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서적은 소설 三國演義 이다. 삼국연의 는 羅貫中이 정사 삼국지 , 元代 三國志平話 , 송
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전해오는 각종 고사와 기록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각색된 소설이다. 이
책자는 명나라 때 민간 저자에 여러 판본이 나올 정도로 널리 유포되었고, 특히 毛宗崗이 개
작한 120회본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 이 책자의 유포는 중국 사대기서 중의 하나로 중국 대
륙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주변 국가로 널리 퍼졌다. 삼국연의 는 임진란 이전에 한반도
로 들어왔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각종 필사본과 번역본이 나올 정도로 대중적인 읽을거리로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각종 서적, 공연물이 나오거나 언론 노출이 빈번한 편이
다.
촉한을 정통 사관으로 삼은 삼국연의 에는 촉한의 인물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활약
상이 돋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촉한의 주인공을 추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특히 관우에
대한 숭모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훗날 관우 숭배는 민간 신앙으로 크게 발전하여 곳곳에 관
제묘가 세워졌고, 또한 신앙 단체인 관성교가 생겨났다. 관우 묘우는 임진란 때 明將陳寅에
의해 南廟가 처음 세워졌고, 곧이어 또 다른 관우 사당인 東廟를 세워졌다. 그 후 역대 국왕
이 자주 관우묘를 찾아보거나 관원을 보내어 치제했다. 1883년(고종 20)에 고종은 황실을 보
호하고 관우의 충의를 권장하기 위해 북묘를 세웠다. 북묘는 명성황후가 眞靈君(李氏)의 청을
받아 세워졌고, 고종은 친히 奠酌禮를 지냈으며 갑신정변 때 북묘로 피난했다.3)
또 1902년(광무 6)에 고종은 유비, 관우, 장비를 모신 三義祠(일명 西廟)를 세웠다. 삼의사
는 趙秉式의 상소에 의해 건립되었고, 일설에는 純獻皇貴妃가 賢靈君(尹氏)의 청을 받아 세워
1) 조사 참여자는 강선화, 이서희, 김윤지, 박수진, 박하나이다.
2) 朴現圭(2009),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유래; 조선 말기 이전을 중심으로」, 2009년도 중어중문학 聯
合國際學術大會, 誠信女子大學校水晶館, 2009.11.21, pp.219~231.
3) 승정원일기 , 고종 21년 10월 21일(무진)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北廟碑」; 梅泉野天 권1상 眞靈
君조항(國史編纂委員會本, p.69); 朝鮮の類似宗敎 (朝鮮總督府本, pp.438~439) 등 참조.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41
졌다고 한다.4) 한말 시기 민간에서는 황실의 북묘․서묘 건립과 신앙 활동을 쫓아 삼국연
의 의 주인공을 숭배하는 신앙이 크게 확산되어 사당이나 굿판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조선
조야에서 제갈량을 숭모하는 열기는 비록 관우를 숭모하는 열기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앞
서 보듯이 조정과 유림들이 제갈량 묘우를 세우고 치제를 드렸고, 훗날 사회적 분위기에 편
승하여 민간신앙으로 발전되어 서울 남산(木覓山)에 臥龍廟, 普光洞에 武侯廟가 각각 세워졌
다.
그렇다면 남산 와룡묘는 언제 건립되었는가? 크게 4가지 설이 있다. 첫째, 李成桂창건설이
다. 오늘날 와룡묘의 본전 좌측 벽면에는 崔基南이 1934년(단기 4267년)에 작성한 「武侯廟記
實」이 걸려 있다.5) 이 기실에 의하면 남산 절벽에는 언제 누구에 의해 새겨졌는지 모르는 제
갈량 석상이 있는데, 고려말 이성계가 잠룡으로 있을 때 장차 수도를 정하기 위해 남산에 올
랐다가 제갈량 석상 조각을 보고 치제를 드리고 묘우를 세웠다고 했다.6) 현 와룡묘 시봉자
安明煥의 말에 의하면, 남산 와룡묘의 본전 뒤편 암벽에 제갈량 영정이 새겨져 있는데, 1934
년에 와룡묘를 중건할 때 본전을 암벽과 맞대어 짓는 바람에 제갈량 영정이 가리게 되었다고
한다. 李慶善은 1969년 8월에 남산 와룡묘를 조사했다. 그의 조사에도 약 50년 전에 큰 바위
에 와룡(제갈량)상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7) 필자가 와룡묘 본전 뒤편을 찾아보니 본전과 암
벽 사이에 조그만 틈이 있으나, 건물이 암벽을 가리고 있어 암벽에 조각된 제갈량 영정이 있
는지는 자세히 살펴보기 힘들다.
그러나 현존 문헌에서 이성계가 제갈량 묘우를 세웠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 다른 기록을
찾지 못했다. 만약 이성계가 남산 와룡묘를 창건했다면, 그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궁궐과 지
척에 있는 남산 와룡묘를 다시 찾아보거나 후대 조선 조정이 이곳을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로 삼아 치제를 드리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남산 와룡묘에는 조선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치제했다던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둘째, 고종 純獻皇貴妃창건설이다. 이경선은 남산 와룡묘의 삼성각이 갑술년(1934)에 嚴妃
에 의해 세워졌다고 했다.8) 엄비는 純獻皇貴妃를 지칭한다. 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에 의하
면 조선시대 嚴尙宮이 始建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9) 필자가 남산 와룡묘의 시봉자에게
4) 승정원일기 , 광무 6년 9월 3일(경신)조; 朝鮮の類似宗敎 (朝鮮總督府本, pp.438~439) 참조.
5) 崔基南(1875~1946)의 호는 餐松居士또는 餐霞居士이고, 경성군 출신이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
점기 초기에 일진회 간부, 간도파출소 감찰과장 등을 지낸 친일파 사람이다. 훗날 관직을 그만두고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 연구와 수행에 나섰다. 이광수는 「금강산유기」에서 1921년에 금강산 華嚴閣에
서 화식을 끊고 수행하고 있는 최기남을 만났다고 했다. 서울 봉은사에는 일찍이 최기남이 쓴 ‘千佛’
과 ‘佛’ 글씨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고, 그의 후손이 그 중 일부를 추슬러 수유동 華溪
寺에 봉안하였다.
6) 崔基南「武侯廟記實」: 「槩聞高麗之末, 李太祖潛邸之時, 密行視察漢陽, 肇鼎之基, 漸次南山, 登麓仰觀
懸崖, 有雕刻武侯之石像, 而亦未詳其何代誰人之手功, 於是焚香齋, 供奠都之後, 斲建廟宇.」(와룡묘 원
본; 이하 동일)
7) 李慶善著(1974),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논문집 , 8집, 한양대학교, p.45.
8) 여기의 嚴妃는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로 보인다. 다만, 순헌황귀비의 생졸 연도로 보아 삼성각
의 창건년인 갑술년은 1934년이 될 수가 없다. 아마 착오가 있는 것 같다. 이경선,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앞의 서지, p.45.
9) 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http://www.cha.go.kr) 참조.
142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문의해보니 엄귀비 또는 그녀가 보낸 사람이 帝釋殿에 나가 치성을 하여 英親王을 낳았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고 했다. 영친왕은 1897년(광무 1)에 태어났다. 만약 純獻皇貴妃가 남산 와
룡묘를 창건했거나 치성을 하여 영친왕을 낳은 것이 사실이라면, 고종이 북묘에 내린 여러
특별한 조치처럼 남산 와룡묘에도 특별한 하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
을 찾아볼 수 없다.
셋째, 1862년(철종 13) 창건설이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의 전통문화 에서 哲宗때
(1862)에 유지들이 제갈량의 위대한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했다고 했다.10) 현재
남산 와룡묘 안내판에도 철종설을 언급해놓았다. 그러나 현존 문헌에서 철종 연간 창건설을
뒷받침해줄 어떠한 기록들도 찾지 못했다.
넷째, 한말 安奭鉉창건설이다. 이강오는 한국신흥종교총감 에서 한말 안석현이 남산 약수
터 위에 묘당을 짓고 이곳에 제갈량을 봉안하여 시민의 祈福, 消災, 治病을 기원했다고 했
다.11) 필자가 남산 와룡묘 사당에 문의해보니 安奭鉉은 현 시봉자의 조부이다. 아래에서 언
급하겠지만 한말 일제강점기에 남산 와룡묘를 지켰던 김선옥이 있다. 만약 안석현과 김선옥
이 특수 관계인이였다면, 남산 와룡묘가 이들의 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 하겠다.
한말 신문보도에 따르면, 남산 와룡묘는 늦어도 한말에 이미 창건되었음이 분명하다. 독립
신문 1899년(光武3) 4월 20일자의 보도를 옮겨본다.
와룡 션) 제갈 무후의 신샹을 돌에 삭여 위 집이 남산 룡와등에 잇 김션옥씨가 그
집을 즁슈 다더라(mediagao본)
독립신문 보도는 남산 와룡묘를 취재한 것이다. 보도에서 제갈량의 신상을 돌에 새긴 집
이 남산 룡와등에 있다고 했다. 여기의 ‘룡와등’은 ‘와룡등’의 오류로 보인다. 와룡은 제갈량의
호이다. 당시 신문 제작은 식자 인쇄법을 도입하고 있는데, 가끔 활자를 위 아래로 거꾸로 심
는 경우가 있다. 여기의 김션옥은 1924년 화재 사건의 김선옥(金善玉)과 동일한 인물이다. 김
선옥은 와룡묘를 중수한다고 했다. ‘중수’는 낡은 건물을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와룡묘의 창건 시기는 늦어도 1899년(광무 3년)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산 와룡묘는 1924년에 소실되었다. 1924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에 “南山臥龍堂에 火
災”라는 제목을 단 보도가 실렸다. 보도 내용을 정리해보면 동년 10월 28일에 남산 臥龍堂
(와룡묘) 신전에 켜놓은 촛불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하여 7칸 자리 기와 신전과 제갈량 초상
이 소실되었고, 당직 金善玉(당시 65세)은 얼굴과 머리에 화상을 입고 입원하였다. 여기의 김
선옥은 독립신문 에서 1899년 남산 와룡묘를 중수한 ‘김션옥’과 동일한 인물이다. 김선옥은
와룡묘를 관장한 햇수가 최소한 25년이 넘는다. 1924년 10월 30일자 시대신문 중 “火焰中
에 臥龍先生” 보도에도 동아일보 과 비슷한 보도 내용을 담아놓았다. 와룡당 재산 손실이
약 5백 원이고, 화재 진압에는 京城消防隊, 龍山消防隊와 청년단원이 맡았다.
10)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편저(1986), 서울의 전통문화 (제2권), 서울특별시, 서울, p.845.
11) 李康五(1992), 韓國新興宗敎總監 , 大興企劃, 서울, p.738.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43
동아일보 1926년 12월 29일자에 한 거지가 남산 와룡당에 들어왔다가 동사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남산 와룡묘는 1924년 화재 이후 계속 운영되고 있었으나 관리 상태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34년에 이르러 남산 와룡묘는 다시 세워졌다. 중건 작업
에 金敎商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상은 다시 묘각을 짓고 무후사라 불렀고, 관운장
(관우)까지 봉안하여 한 때 관왕묘의 지부 행세를 하기도 했다.12) 최기남의 「무후묘기실」은
남산 와룡묘를 중수한 직후에 기술한 문장이다. 「무후묘기실」에는 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산
와룡묘의 석상이 박락되고 묘우가 붕괴되어 석실로서 근근이 수호하고 있는데, 이번에 신령
의 도움과 신도의 출자로 인하여 묘우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했다.13) 「무후묘기실」에는 의
도적으로 1924년의 화재 얘기를 담지 않았다.
1969년 8월에 이경선은 남산 와룡묘를 조사한 바가 있다. 조사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전에는 ‘무후묘’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속칭 와룡당이다. 당시 시봉자는 安相圭(55세)
이며, 승복 차림이다. 약 50년 전에 큰 바위에 와룡상을 새겨진 것이 있었다. 그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무인년(1938) 7월에 재건했다. 본전의 중앙에는 제갈량을 모시고, 우측에는 단
군,14) 좌측에는 관우를 각각 배향하였다. 신상은 화상으로 되어있다. 본전 위에 극락보전이
있고, 또 그 위에 삼성각이 있다. 극락보전은 일제강점기에 묘우 옆에 소재한 朝鮮神宮을 대
항하기 위해 세워졌다. 삼성각은 갑술년(1934)에 嚴妃에 의해 세워졌다.15) 1976년에 전 시봉
자 安相圭와 신도들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시행했다.
아래에 남산 와룡묘의 현황에 대해 적어본다. 현 행정구획으로 서울시 中區藝場洞산 5-6
번지에 소재한다. 1974년 1월 15일에 서울시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남산시립도서관에
서 남산순환산책로의 북쪽 길로 따라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에 ‘木覓山臥龍廟’이라는
비석과 홍살문이 보인다. 와룡묘 아래쪽이 범바위 약수터이고, 약수터 옆에는 1968년에 준공
한 반공청년운동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홍살문에서 와룡묘 묘우로 들어가는 돌계단 주변에는
「臥龍廟重修竣工永世紀念碑」를 비롯한 일련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경내에는 와룡묘, 檀君聖
殿, 三聖閣, 帝釋殿, 藥師殿, 文臣閣, 寮舍가 있다. 대지 면적은 1,244㎡이고, 건물면적은 145㎡
이다. 토지 소유권은 산림청이고, 건물 소유권은 臥龍庵이다. 묘우 관리는 와룡묘 安明煥이다.
그는 조부 安奭鉉, 부 安相圭를 이어 3대째 와룡묘를 시봉하고 있다. 문화재 관리 기관은 서
울시 중구청 공원녹지과이다. 묘우 개방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본전 와룡묘는 전면 3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본전 정면에는 ‘臥龍廟’라는
12) 이강오(1992), 한국신흥종교총감 , 앞의 서지, p.738.
13) 崔基南「武侯廟記實」: 「玆李朝末葉山河革新之時, 石像剝落, 廟宇崩頹, 不遇重修之機會, 石广安肖, 僅
僅守護, 鬱結輿情之憾恨, 旣有年所矣. 神運回泰, 天人合發, 出願當局, 旣承許可, 神不自進, 依人成事,
公之精靈, 黙示於東悟道人, 全敎商之眞夢, 首出發起, 通告于平日崇拜諸處, 咸願出資, 重建廟宇, 經始
營之, 不日成之, 神之能力優越於人之智力, 於玆觀感歎服處也.」
14) 현재 와룡묘 본전에는 제갈량과 관우만 봉안되어있고, 단군은 따로 독립된 전각에 봉안되고 있다.
1969년 이경선의 조사 때 혹시 단군이 와룡묘 본전에 모셔져있었는지 아니면 이경선의 오기인지
확인할 수 없다.
15) 이경선이 언급한 嚴妃는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를 지칭한다. 다만, 순헌황귀비의 생졸 연도로
보아 삼성각의 창건년인 갑술년은 1934년이 될 수가 없다. 아마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선(1974),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앞의 서지, p.45.
144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 우측에는 1998년(무인)에 李用植이 와룡묘를 읊은 한시 편액이 걸려있
고, 현판 좌측에는 1976년(병진)에 李用植이 작성한 「臥龍廟上樑文」편액이 걸려있다. 영련은
제갈량의 일대기를 담았다. 본전에는 제갈량과 관우를 모셨다. 중앙은 제갈량 신단이고, 좌측
은 관우 신단이다.
제갈량 신상은 석고상이며, 크기는 2.5m 정도이다. 신상은 제갈량이 독서를 하고 있는 모
습을 형상화했다. 머리에 흑색 와룡관을 쓰고 연한 녹색 도포를 입고 좌정하고 있다. 오른손
은 깃부채(羽扇)를 들고 가슴에 모으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신상 왼편에는
문방사우, 諸葛武侯全集 , 거문고가 각각 놓여있고, 신상 뒤편에는 제갈량 영상이 걸려있다.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반기 1개, 갱기 1개가 놓여있다.
관우 신상은 석고상이며, 크기는 2.5m 정도이다. 머리에 갈색 모자를 쓰고, 황색도포를 입
고 좌정하고 있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드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고 있다. 오른손에는
책( 左傳 )을 펼치고 왼손에는 책 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쪽 다리에는 칼 한자리가 기대어있
다. 신상 왼편에는 문방사우와 偃月靑龍刀가 놓여있다. 신상 좌우에는 關平, 周倉, 廖化영정
이 걸려있다.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제기 2개가 놓여있다. 본전의 오른쪽 벽면에는
오색 깃발과 삼지창 1자루, 청룡도 2자루가 꽂혀있다. 그 앞에 향로 1개, 잔 1개가 놓여있다.
왼쪽 벽면에는 최기남의 「武侯廟記實」이 걸려있다. 제갈량 신단 옆에는 1955년(을미)에 제작
된 平和鼓와 근자에 제작된 坐鐘이 있다.
본전 위쪽에는 단군성전이 있다. 전면 3칸이고, 측면 2칸이며,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경선
의 조사와 현 시봉자 안명환의 말을 종합해보면, 단군성전은 원래 極樂寶殿인데, 1970년대 문
화재로 지정할 때 단군성전으로 바꾸었다. 전각 처마에는 ‘檀君聖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단군 신상은 석고상이며, 크기는 2.5m 정도이다. 녹색과 황색이 뒤섞인 도포 차림으로 좌정
하고 있다. 검은 머리에 기다란 수염을 하고 있으며, 양손은 소매 속에 넣고 있다. 신상 오른
편의 벽면에는 신상과 비슷한 모습을 한 단군 영정이 걸려있다.
단군성전 위쪽에는 통칭 山神閣인 삼성각이 있다. 전면 3칸이고,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전각 처마에는 ‘三聖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전각 내부의 중앙에는 산신, 오
른쪽에는 七星, 왼쪽에는 獨聖을 각각 모셨다. 산신 영정은 검은 두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
리며 좌정하고 있다. 겉옷은 붉은 도포를 입고, 아래는 녹색 옷을 입었다. 오른손에는 백선을
들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뒤편에는 산신을 수호하는 맹호와 시동이 그려져 있
다. 제단 좌우에는 木覓山을 지키는 대왕(木覓山王大神)과 왕후 휘장(木覓山后土聖母)이 쳐있
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일컫는다. 신단에는 칠성 변상도가 모셔져 있다. 독성은 일반적으로
那畔尊者를 일컫는다. 앞쪽 신상은 민머리에 붉은 도포를 입고 좌정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단
장을 잡고 있고 왼손에는 염주를 굴리고 있다. 뒤편 영정은 민머리에 흰 눈썹을 길게 드린
노인이 그려져 있다. 도포는 홍색과 녹색이 섞여있다. 산신과 칠성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
대 2개, 제주잔 2개가 놓여있고, 독성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다. 삼
성각 옆에는 제석전이 딸려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이며,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제석전
에는 제석천 탱화를 모셨다. 제석천은 불법과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신단 앞에는 향로 1
개, 촛대 2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다.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45
본전에서 단군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약사전이 있다. 전각은 돌로 쌓았고, 그 옆에 묘우
수원인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에는 통상적으로 약사불과 용왕을 모시는데, 와룡묘도 마찬가지
다. 약사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이다. 좌상으로 오른손은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단
지를 들고 있다.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머리에 붉은 관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고 좌
정하고 있다.
와룡묘 입구에는 나지막한 문신각이 있다. 문신각은 묘우를 수호하는 장군상 2기가 모셔져
있다. 우측 상에는 창을 가지고 있고, 좌측 상에는 칼을 가지고 있다. 요사채는 시봉자가 사
용하고 있다. 예전에 본전 왼편에 처마를 연이어놓은 종각이 있었다. 옛 사진을 보니 종각 처
마에는 ‘臥龍鐘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 종각은 10여 년 전에 해체되었다.
남산 와룡묘의 신앙대상은 기본적으로 샤머니즘 신앙에 속한다. 이강오는 와룡묘의 신앙을
분석하면서 제갈량과 관우를 모시는 것이 충절을 숭봉하는 유교적 측면이 있고, 단군을 모시
는 것이 민속의식을 고취시키는 국조숭배의 현상이 보이기는 하지만 신앙대상의 중심은 祈
福, 治病의 샤머니즘적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16) 1969년 이경선은 와룡묘 신도가
약 5백 명이라고 했고,17) 1972년 張籌根은 명단상의 신도가 2천 세대가 된다고 했다.18) 현
시봉자는 신도가 수백 명 정도라고 했다. 필자가 조사할 때에도 몇 몇 신도가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시봉자는 아침저녁으로 일과를 지낸다. 음력 7월 23일 제갈량 탄신일, 8월 24일은 제갈량
기일, 6월 24일은 관우 탄신일, 10월 19일에 관우 기일, 3월 16일은 산신, 10월 3일은 단군, 1
월 9일에 제석천에 각각 제를 지낸다. 이외에 매달 8일에 봉안일을 지내고, 3월 1일~21일, 9
월 1일~20일 각각 21일 동안 춘추제를 지낸다.19) 1924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의 화재 보
도를 보면 매달 초하룻날에 제례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근자에 들어와서 많이 간소화되었
다. 祭儀는 시봉자가 讀祝, 拜禮순으로 진행한다. 제갈량 독축문은 “天樞上相淡泊, 明志寧靜
致遠, 至仁至聖廣明, 正大忠武眞君”이고, 관우 독축문은 “大聖大慈眞元, 顯應翊漢天尊, 三界伏
馬關聖, 帝君大悲大願”이다. 이 독축문은 신상 좌우 휘장에 적혀있다. 祭物은 떡․제육․채
소․과실 등이며, 祭酒는 주로 법주를 쓴다.
三. 민간동제를 지내는 普光洞武侯廟
서울에는 제갈량을 모시는 또 하나의 묘우인 普光洞武侯廟가 있다. 보광동 무후묘는 마을
사람들이 1백여 년간 동제를 지냈고, 오늘날에도 이곳 토박이들이 무후묘제전위원회를 구성
하며 동제를 지내고 있다. 보광동 무후묘는 원래 용산 屯芝味마을에 있었다. 보광동 무후묘
16) 이강오(1992), 한국신흥종교총감 , 앞의 서지, p.738.
17) 이경선(1974),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앞의 서지, p.45.
18) 張籌根著(1986), 「서울시 洞祭堂調査」, 韓國民俗論攷 , 啓蒙社, 서울, pp.80-81.
19) 1969년 이경선의 조사 기록에 추제 9월 1일~20일을 8월 1일~20일이라고 했는데, 오기이다. 이경
선(1974),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앞의 서지, p.45.
146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으로 이전된 과정에 대해 崔天玉의 武侯廟略史 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무후묘략사 에서:
現在의 武侯廟가 그 예전에 자리잡고 있든 곳은 龍山區龍山洞四町屯芝洞이라는 곳, 속되
게 일커르기를 둔지미라 하였다. 辱된 韓日合邦이 있는 뒤 日軍의 練兵場이 되어 둔지미에 살든
착하기만 하든 百姓들은 삶의 터전을 뺏기고 지금 普光洞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따라서 武侯廟
도 受難을 당하여 現在의 位置에 모시게 된 것이다. 둔지미에서 住民이 옮겨올 當時는 高陽郡
漢芝面普光里였다. 둔지미때부터 마을 指導者는 金善有氏였으니 普光洞으로 옮겨 모실 當時의
武侯廟奉祀도 勿論金善有氏中心으로 되었다. 武侯廟를 보통 부군당(府君堂)이라 하는데 이것
은 마을의 가장 웃어른이 게신 집이란 뜻일 것이다. 이 부군당이 普光洞에 이륙되게 힘쓰신 분
은 總監役金善有氏, 財務張先源氏, 會計閔相千氏, 金朱景氏, 川順旭氏, 石春吉氏, 金尙云氏.
--- 둔지미서 마을이 普光洞으로 옮겨진 것이 檀紀로는 四二伍○年西紀로는 一九一七년 丁巳
年이었다. 府君堂을 보광동에 옮겨 모신 것은 住民이 옮겨온 二年後己未年이었다. 檀紀四二五
二年이요 西紀론 一九一九年十月에 竣工하여 별치성을 드렸다.(서울역사박물관본, pp.178~179)
무후묘략사 는 崔天玉이 1964년 무후묘를 중수할 때 武侯廟重修工事進行抄錄 과 함께 작
성되었다. 자료 원문은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에 전록되어있다.20) 屯芝味마을은 오늘날 용
산 전쟁기념관 옆 미군부대 근처이다. 둔지미 명칭은 1751년(영조 27)에 반포한 都城三軍門
分界總錄 에 기록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屯芝山은 삼각지 로터리에서 동쪽으
로 나지막하게 구릉을 이룬 야산이며, 마을은 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 둔지미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건너편 銅雀津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또 서남쪽으로 가면 한강을 지키는
漢江鎭이 있었다. 이와 같이 둔지미 일대는 예로부터 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임진란 때 일본 小西行長이 진을 쳤고, 임오군란 때 청 吳長慶이 진을 쳤으며, 일제감정기에
는 일본군의 군용지로 수용되었고, 해방 이후에 미군의 주둔지로 바뀌었다.
둔지미는 한말 시기에 고양군 漢芝面소속이었고, 일제강점기에 龍山洞四町屯芝洞으로
바뀌었다. 1904년(광무 8)에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는 군용지 수용권 조문이 들어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08년에 용산 일대 300만평이 일본군의 군용지로 넘기기로 결정
했고, 실질 수용은 이보다 몇 년 뒤에 이루어졌다. 둔지미 마을도 군용지에 편입되어 부득불
타지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70~80%가 인근 지역인 보광동으로 옮겨 집단 촌
락을 형성하였다.21) 이들이 보광동으로 이주를 마친 시기는 1917년이다.
둔지미 부군당은 둔지미 무후묘의 통칭이다. 보광동 무후묘는 마을 사람이 보광동으로 이
전을 마친 2년 뒤인 1919년에 이전되었다. 이전 작업에는 마을 지도자였던 金善有를 비롯하
여 마을 사람들이 함께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둔지미 부군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당집으
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았고, 늦어도 한말 시기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둔지미 부군당은 언제 어떻게 창건되었는가? 무후묘략사 에는 둔지미 부군당의
창건 역사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1990년 11월에 보광동 무후묘를 조사한 서울民
俗大觀 의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 중국 상인들이 한강을 올라와서 강변에 배를 대고는 서낭
20) 서울역사박물관편(2008),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pp.178-182.
21) 서울역사박물관편(2008),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 앞의 서지, pp.24-43.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47
목이 있는 이곳 언덕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고, 이때 그들이 신봉하는 신인 제갈량을 모시
게 되었으며, 보광동 무후묘는 이에서 유래한다고 했다.22) 그러나 서울民俗大觀 의 조사 기
록에는 둔지미 부군당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아 보광동 무후묘가 중국 상인에 의해 창건했다
는 설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구태여 둔지미 부군당을 중국과 연관시켜야 한다면, 차라리 임오
군란 때 청 오장경 부대의 주둔설과 연계시키는 편이 나을 줄도 모르겠다. 둔지미 부군당은
제갈량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고, 제갈량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군사 지략가로 숭모하는 인격
신이였다.
비록 현존 기록에는 둔지미 부군당의 창건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길이 없지만,
이것을 조선 말기 민간 신앙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켜본다면, 그 해답이 유추될지 모르겠다.
앞 절에서 언급했듯이 조선 말기에는 삼국연의 에 나오는 촉나라 주인공을 숭배하는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고, 도처에 묘우가 세워졌다. 남산 와룡묘과 둔지미 부군당은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 속에서 촉나라 제갈량을 주신으로 모시는 묘우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광
동 무후묘는 1943년에 중수했고, 1964년에 재차 중수하였다.
아래에 보광동 무후묘의 현황에 대해 적어본다. 현 행정구획으로 서울시 龍山區普光洞
419번지에 소재한다. 보광동 주민센터에서 서쪽 장문고개 서4길을 따라 3백m 정도 가면 동
광약국이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북쪽 장문고개 서2길로 꺾어 50m 정도가면 오른
편에 장문고개 서3길이 나온다. 입구에 우리 보광사라는 팻말이 있다. 여기에서 50m 정도 가
면 무후묘 뒷문이 나온다. 무후묘 앞문 쪽으로는 골목길이 이리저리 나있어 찾아가기가 어렵
다. 무후묘 안에는 普光寺라는 사찰이 있다. 토착민들에게는 무후묘라는 이름이 익숙한 편이
고, 이주자들에게는 보광사라는 이름이 익숙한 편이다.
등기부등본에 의하면 보광동 419번지의 대지면적은 202㎡이고, 소유권은 보광노인회이다.
무후묘 정문에는 ‘玄武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측 기둥에 ‘보광사’와 ‘무후묘제정위
원회’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정문에서 마주보는 건물이 본전이다. 전면 3칸이고, 측면 2칸이
며,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본전 내 중앙 벽에는 제갈량을 모셨고, 오른쪽 벽에는 張將軍과 趙
將軍을 모셨으며, 왼쪽 벽에는 산신 할배와 부군 할매를 모셨다. 옛 신상은 1980년대 도난을
당해 유실되었고, 그 후 지금의 신상으로 대체되었다. 제갈량 신상은 검은 두건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으며 좌정하고 있다. 오른손에 우선을 들고 있고, 왼손은 탁자 위에 놓고 있다. 탁
자 위에는 문방사우와 서책이 놓여있다.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제주반 1개, 제주갱
1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고, 제기 옆에는 조화 1쌍이 놓여있다.
장장군와 조장군은 무후묘를 지키는 수호신인데, 아마도 제갈량과 함께 촉나라를 수호한
장비와 趙子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장군은 삐쭉한 머리를 하며 양손으로 청룡도를
잡고 있다. 조장군은 활과 화살을 매고 양손으로 칼을 집고 있다. 각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제주반 1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고, 제기 옆에는 조화 1쌍이 놓여있다. 산신 할배
는 맹호 앞에 앉아 있고, 그 옆에 시동이 서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었다.
오른손으로 수염을 만지고 있고, 왼손에는 불자를 잡고 있다.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
개, 제주반 1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고, 제기 옆에는 조화 1쌍이 놓여있다. 부군 할매는 머리
22)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편(1990), 서울民俗大觀 (民間信仰編), 서울특별시, 서울, pp.271-272.
148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에는 족두리를 쓰고 연두색 원삼에 푸른 치마를 입었다. 뒤편에는 영지가 그려져 있다. 신단
앞에는 향로 1개, 촛대 2개, 제주반 1개, 제주잔 1개가 놓여있고, 제기 옆에는 조화 1쌍이 놓
여있다.
본전 왼편은 보광사이다. 무후묘 옆에 보광사를 건립한 사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
는 둔지미 사람들이 보광동으로 이주한 이후 주변에 불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무후묘 터
의 기가 세다는 소문이 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었다.23) 다른 하나는
현 무후묘제정위원회장인 김영환의 말에 의하면 사찰 건립은 임차료를 받고 묘우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보광사에는 진신사리 보탑을 중앙에 모셨고, 좌우에 관세음보살, 문수보
살을 각각 모셨으며, 관세음보살 옆에는 지장보살을 모셨다. 본전 옆에는 당목이 있다. 부속
건물로 요사채와 창고가 있다.
무후묘략사 에는 치성일이 적혀있다. 정례일은 음력 정월 1일, 10월 1일(다음날 진지공양
은 사례라고 부름), 6월 유두일(경우에 따라 칠월 칠석에 신과와 진매공양)이고, 이외에 별치
성이 있다. 별치성은 전통음악을 올리고 무당을 불러 춤과 노래를 하는 것이고, 보통치성은
떡과 술안주를 올리는 것이며, 진매공양은 밤과 나물을 올리는 것이다.24) 1995년부터 경비문
제로 인하여 간소화되어 음력 3월 3일과 10월 1일에 치성을 드린다. 3월 3일은 무후묘재정위
원회 임원을 중심으로 유교식으로 간단하게 지내고, 10월 1일은 대동제로 마을 사람들이 모
두 참석하는 제례를 지낸다.25) 이외에 정월 1일에도 간략하게 제례를 지낸다고 한다.
대동제는 10월 1일 정오부터 시작한다. 이날 보광동 토박이들은 모두 참여하며, 제관들은
도포와 두건을 쓴다. 정오부터 시작한다. 제물은 통돼지, 삼색나물, 튀각, 산적, 과일, 떡 등이
다. 술은 직접 담은 누룩 술을 사용한다. 상은 모두 9곳에 차린다. 즉, 신단 5곳과 대문, 당목,
부엌, 법당이다. 제례는 유교식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독축을 한 다음 초헌, 하헌, 종헌 순으
로 이루어진다. 제례를 마친 후에 소지를 올리고 음복을 한다.
남산 와룡묘, 보광동 무후묘 외에 제갈량 신단을 모시는 관성계 계통의 無量天道가 있다.
무량천도는 1945년 3월에 金振河(별호 月鏡)가 論山郡豆磨面夫南里에서 關聖敎이름으로
창교했고, 1947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1983년에 본부를 대전 대사동으로 이전했다.
1969년부터 1970년 사이에 문화공보부에서 무량천도의 실태 현황을 조사한 바가 있다. 신앙
대상은 관우(關聖帝君), 天父天皇, 上帝, 四斗星君, 地皇, 山王大神, 四海龍王, 臥龍(白月天師),
神將, 太乙天母이다. 臥龍은 제갈량을 지칭한다. 1960년에 발간된 경전에는 제갈량과 관련된
「臥龍先生寶誥」가 들어가 있다. 대제를 지낼 때 「臥龍先生寶誥」를 21誦한다.26) 이강오의 조
사에서도 신앙대상이 8개가 있는데, 그 중에 제갈량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27) 1969년~
1970년 신도수는 남 111명, 여 300명, 총 461명이다. 2009년 8월에 필자가 대전 본부를 답사
하였는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부터 제갈량을 더 이상 모시지 않고, 「보고」를 비롯
23) 서울民俗大觀 (民間信仰編), 앞의 서지, pp.271-272.
24) 서울역사박물관편(2008),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 앞의 서지, pp.178-179.
25) 서울역사박물관편(2008),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 앞의 서지, pp.171-173.
26) 문화공보부편(1970), 한국신흥 및 유사종교 실태조사보고서(1969~1970) , 문화공보부, 서울, pp.380
-387.
27) 이강오(1992), 한국신흥종교총감 , 앞의 서지, p.938.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49
한 관련 자료들을 모두 없앴다고 했다.
四. 결론
본 논문은 한국에서 諸葛亮묘우의 유래 과정과 현존 모습을 살펴본 것이다. 제갈량은 충
정과 지략을 펼쳐 蜀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삼국 시대의 영웅이다. 제갈량의 명성은 중국
본토 외에 주변 국가로 널리 전파되었고, 한국에서도 제갈량을 매우 친숙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 조선 말기에 한반도에 소설 삼국연의 가 널리 유포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삼국연
의 중 촉나라의 주인공들을 숭모하는 北廟, 西廟를 세웠고, 민간에서도 이러한 열기가 더욱
뜨거워 촉나라 주인공들을 신앙 대상으로 삼아 각종 사당이 세웠고 신앙 활동을 전개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 제갈량을 신앙 대상으로 삼은 서울 南山(木覓山) 臥龍廟와 龍山屯芝
味府君堂(普光洞武侯廟)이 탄생하게 되었다.
남산 와룡묘의 창건연도는 늦어도 1899년(光武3) 이전에 이루어졌다. 1924년에 실화로 소
실되었다가, 1934년에 중수되었으며, 1976년에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했다. 1974년에 서울시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와룡묘에는 본전과 檀君聖殿, 三聖閣, 帝釋殿, 藥師殿, 文臣閣
등이 있다. 본전에는 제갈량과 관우, 단군성전에는 단군, 삼성각에는 산신, 칠성, 독성, 제석전
에는 제석불, 약사전에는 약사불과 용왕을 각각 모셨다. 오늘날 신도들이 와룡묘를 찾고 치성
을 드리고 있다.
둔지미 부군당은 마을 당집인 무후묘의 통칭으로 늦어도 한말에는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
다. 1917년에 둔지미 사람들은 보광동으로 이전했고, 당집은 이보다 2년 뒤인 1919년에 이전
했다. 1943년에 중수했고, 1964년에 재차 중수하였다. 보광동 무후묘에는 본전과 보광사, 당나
무 등이 있다. 본전에는 제갈량, 張將軍, 趙將軍, 산신 할배, 부군 할매를 모셨다. 보광사에는
진신사리,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을 모셨다. 오늘날 보광동 토박이들은 무후묘에서
洞祭를 지내고 있다. 1945년에 충남 論山에서 창교한 無量天道가 있다. 훗날 본사를 대전으로
옮겼다. 초기부터 근자까지 대제를 지낼 때 제갈량을 숭배하는 「臥龍先生寶誥」를 송독했으나,
최근에 이 경전을 폐하였다.
끝으로 필자의 심득을 첨부한다. 한중 양국은 오랜 세월을 거쳐 매우 다양하게 접촉했고,
양국의 문화가 서로 상대국으로 전파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선조들은 제갈량을 한
낱 중국 영웅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그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웅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은
본 논문에서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남산 와룡묘와 보광동 무후묘는 우리에게 중요한 민속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앞으로 이것들을 계속 보존하여 국내외 사람들이 많이 찾아보고, 또한
이러한 유적을 매개체로 삼아 한중 양국의 유대와 교류가 한층 더 밀접해지기를 바란다. [燁
爀之樂室; 己丑陰午月卄三日草藁; 夏至修訂, 資料補助, 車晙姬]
150 동북아문화연구 제22집 (2010)
참고문헌
黃玹著(1955), 梅泉野天 , 國史編纂委員會, 서울, p.69.
李康五著(1992), 韓國新興宗敎總監 , 大興企劃, 서울, p.738.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편저(1986), 서울의 전통문화 (제2권), 서울특별시, 서울, p.845.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편(1990), 서울民俗大觀 (民間信仰編), 서울특별시, 서울, pp.271-272.
서울역사박물관저(2008),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pp.24-43, 178-182.
村山智順(1935), 朝鮮の類似宗敎 , 朝鮮總督府, 京城(서울), pp.438-439.
張籌根著(1986), 「서울시 洞祭堂調査」, 韓國民俗論攷 , 啓蒙社, 서울, pp.80-81.
李慶善著(1974), 「關羽信仰에 대한 考察」, 논문집 , 8집, 한양대학교, p.45.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151
【논문초록 】
키워드
(Key words)
諸葛亮, 南山臥龍廟, 普光洞武侯廟, 府君堂, 韓中民俗
Zhuge Liang, Namsan Warongmyo, Bogwangdong Muhumyo, Fugundang
Korean and Chinese Folklore
Origin and Status of the Shrine of Zhuge Liang(諸葛亮) in Korea
Park, Hyun-Kyu
This article is focusing on poetries and proses, written by Korean after visiting the shrines
of Zhuge Liang(181-234), how the shrines were established, and the present of them. Zhuge
Liang was a statesman and a man of resources of the country Shuhan(蜀漢). His trade name
is Kongming(孔明), formal name is Wolong(臥龍), and posthumous name is Zhongwu(忠武).
Koreans have been known him by texts such as, authorized history of Shanguozi( 三國志 ),
Wenxian( 文選 ), Shanguo yanyi( 三國演義 ), and collections of Zhu Xi(朱熹)'s works. At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folks built shrine Warongmyo(臥龍廟) in Namsan(南山), and
shrine Fugundang(府君堂) in Dunjimi(屯芝味), Rongsan(龍山).
필자
인적사항
성명(한글): 박현규 (한자): 朴現圭(영문): Park, Hyun-Kyu
국문제목: 한국에서 諸葛亮廟宇의 신앙 현황
영문제목: Origin and Status of the Shrine of Zhuge Liang(諸葛亮) in Korea
소속: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전공 교수
E-mail: parkhk@sch.ac.kr 혹 jongyeop99@hanmail.net
논문작성
일시
투고일: 2010. 01. 31. 심사일: 2010. 02. 08. 심사완료일: 2010. 0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