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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그라운드
제 4 화 - " 스카웃? 테스트? "
"유세아 군. 뭐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야. 우리 타이거즈에 자
네를 갈고 닦고 싶어서 안달이 난 코치들이 한 둘이 아니란 것만 알아줘."
세아는 의자에 앉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의욕적이고 활기찬 상대의
목소리와는 달리 듣고 있는 세아의 모습에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저.. 저는 프로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 야구도 그만두었구요."
"유세아 군. 물론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야구를 그만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네가 2~3년
만 조련을 받으면 프로야구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네. 세아 군도
잘알고 있겠지만 사람에겐 때가 있는 법이야. 특히 자네 같은 잠재력 넘치
는 유망주에겐 더더욱 그렇지."
"죄송합니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세아가 잘라 말했지만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런가? 정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지만 전화로 말고 직접 만나서 이
야기 해보는게 어떤가? 프로의 협상이란게 어떤 건지도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 그런가요."
세아는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손으로 리모콘을 눌러 TV를 켰다.
'축구소식입니다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 아스날이 여자축구선수의 영입을
발표해 유럽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에서 페루지아가 영
입을 시도하려다 촌극으로 끝난 바가 있지만 이번 영입은 구체적인 움직
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대는 22살의 루시아 펠럼이라는
여자축구선수이며, 현재 아스날 선수단과 같이 훈련 중이라고 합니다.
아스날 팬들은 이에......'
"유세아 군 어떤가? 타이거즈의 스카웃부장이 직접 갈걸세. 같이 허심탄
회하게 대화를 나눠봅세나. 자네가 왜 야구를 그만두었고,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나 해보세. 이봐? ...... 세아 군? 유세아 군? 안들리나?"
루시아? 루시아 펠럼?
프로야구의 스카우터가 들고 있는 수화기 너머로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문을 박차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스카우터는 굉음에 놀라
전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세아를 찾았지만 답이 없었다.
"끊은 건가?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이란...... 그나저나 참 아까운 친군데."
세아는 집에서 뛰쳐나와 평소 눈에 띄는 곳에 있던 여행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번화가의 사람들을 피하고 뚫으며 전력으로 달렸다.
"꺄악!"
"야! 뭐야!"
사람들은 충돌할 것 같은 기세로 달려가는 세아를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세
아는 차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신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트럭이 부
딪칠 듯 스쳐 지나갔다. 트럭이 몰고 온 바람도 세아를 끌어당길 수 없었다. 빌
딩에 도착해 전력으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이렇게 숨 쉴 생각없이 발악하듯
질주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그때부터 기억은 되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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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런던구 콜리스터 공원에 있는 잔디구장은 바넷FC의 연습구장이었다. 런던의
공원들이 대게 그렇듯 드넓게 펼쳐진 잔디벌판 위에 축구골대 십여 개가 널려있
고 가장자리에는 오랜 수목들이 피크닉 장소를 마련해 줬다. 그 한켠에는 철망
으로 둘러싸인 콜리스터 구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든 영감은 콜리스터 구장
입구에 박혀있는 "콜리스터 공원 여자축구팀 홈구장" 이라는 팻말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연습할 곳이 정녕 여기 밖에 없단 말인가?"
고든 감독이 이곳에 올 때마다 내뱉는 멘트다. 바넷FC는 일주일에 두세번 이
곳에서 훈련을 하는데 가끔씩 이곳의 진짜 주인이 찾아와 시간엄수 엄포를 놓곤
한다. 콜리스터 공원 여자축구팀과 연습시간이 빡빡하게 연결되어 있어 버티지
도 못하고 퇴장시간에 칼 같이 나가야 했다. 구장 모서리에 서있는 조명하나 덕
분에 그나마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연습할 수 있었지만, 쫓겨난 후에는 공원에
널려있는 투박한 잔디에서 공과 선수가 보이지도 않는 어둠에 쌓인채 훈련해야
했다.
"돈까지 받아먹는 주제에!"
구장과 조명 사용료까지 지불하고 사용하고 있었지만 넉넉하고 여유로운 다른
연습구장과는 인심이 빡빡했다. 그뿐 아니라 잔디관리까지 형편없어 잔디길이가
발목까지 오는 곳도 있었다. 바넷FC 중 정원사로 일하고 있는 선수가 보다 못해
잔디깍이 기계를 실어와 깍아버린 적도 있었다. 전보다 다듬어져 정돈된 잔디를
보고 콜리스터 공원 여자축구팀 감독도 겸하고 있는 주인이 자기팀 여자선수들
이 넘어질 때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하냐고 따져댔다. 축구보다 여자가 목적일
듯한 이 영감탱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참을 수밖에.
런던의 그 많고 많은 잔디구장 중에 바넷 마을 가까이에 있는 구장은 이곳뿐이
었다.
바넷FC의 홈구장인 언더힐 스타디움은 소규모인지라 연습구장이 없었다. 게다
가 컨퍼런스에서 홈구장에 연습구장까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차라리 언더
힐에서 연습해버릴까 했지만 잔디관리 때문에 힘들었다. 아스날 2군들의 홈경기
가 언더힐에서 열리다보니 정작 바넷FC 선수들은 언더힐에서 훈련하는 시간이
적었다. 아스날에서 짭짤한 보조금을 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돈으로 프로급
선수를 한두명 더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든은 언더힐 스타디움의 주인에 바넷FC의 구단주이자 감독이었다. 육십도
넘는 나이에 구단주에 감독까지 하려니 종종 명이 단축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
었다. 하긴 구단주에 감독까지 해서 그 나이 대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고든 씨
밖에 없었다. 재작년에 잉글랜드 4번째 리그에서 구단주겸 감독까지 했던 친구
는 결국 혈관계통질환으로 가족들에게 유언도 못남기고 저세상으로 갔었다. 이
제 슬슬 감독에서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십여년 전부터 스스로에게 되물
어 봤지만 그만두지 못했다. 고든은 때를 놓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고든
자신도 그 친구처럼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거나 아니면 침대에서 깨어나지 못할
운명일 것이다. 침대나 땅바닥보단 푸른 잔디, 그것도 언더힐 그라운드의 깨끗
한 연두색 잔디 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봐. 아나레스."
고든은 훈련 파트를 막 마치고 쉬고 있는 호세 아나레스를 건드렸다.
"예. 영감님. 아니 감독님."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치렁한 긴머리의 스페인 청년은 언제나 익살스러웠다.
"자네가 데리고 온 한국인 녀석 말이야."
"아 세아요?"
"아 그래. 세아. 자네 애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사실인가?"
"예? 에? 아. 하.. 하하하."
영감이라고 한 것을 되받아친 복수치곤 쓸만했다.
"농담이고. 그 세아라는 선수말이야. 성실하다더군. 이안 코치가 세아 덕
분에 2군 연습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하더군. 설렁설렁 놀면서 연습하던 2군
녀석들도 그 녀석 분위기에 휩쓸리더래."
"아하하. 저도 열심히 할 녀석이라 생각했지요. 어떤가요? 쓸만해질 것
같나요?"
"으음.. 잘모르겠어. 아직은 더 두고 봐야겠지. 자네 어디서 그런 녀석을
데려왔는지는 모르지만 잘하면 팀에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러니
자네도 그 녀석을 잘 관리해 주게."
"하하. 다 감독님이 덕이 있기 때문이죠."
"어느 나라에서 배운 말인가? 낯뜨겁게 시리. 자네 같은 괴짜도 처음 보지
만 컨퍼런스에 찾아온 한국인도 처음 본다네. 거참."
아나레스는 젊은 주제에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선수생활을 하는 특이한
놈이었다. 세계각지를 떠도는 것이 여행이 목적인지 축구가 목적인지 알 수 없
는 친구였다.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든은 가끔씩 아나레
스의 플레이를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저 녀석이 이 컨퍼런스 리그에서 뛰는지 해
깔리곤 했다. 하긴 이 컨퍼런스 리그라는 곳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공을 차는
녀석들이 모인 곳이었다. 하지만 두달 전 아나레스의 손을 잡고 따라 온 유세아
라는 한국 녀석은 그 정도가 심했었다.
-두달 전-
"고든 감독님이시죠?"
피곤에 쩐 얼굴을 한 동양인 청년이 바넷FC 사무실을 두리번 거리면서 들어와
서 고든에게 말을 걸었다. 이 친구군.
"그렇다네.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
"예.. 에에."
고든은 아나레스에게 이 한국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었지만 지금은
모른 척 했다. 이 어린 동양인의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바넷에서 뛰고 싶습니다."
"......"
고든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바넷FC 그리고 컨퍼런스 리그에서 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프로에 소속되어 뛰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어려움이다.
고든은 이 청년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 예. 유세아라고 합니다."
"그래. 유세아 군. 자네 혹시 아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하물며 펍에서 매일 굴러대는 술꾼녀석까지 나에게 그런 소
릴 하지."
"예에.."
"자넨 아직 젊어보이니 차라리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하게나. 컨퍼런스 리
그에서 뛰는 것보다 그 편이 자네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게야."
"......"
고든은 진심이었다. 컨퍼런스리그에서 뛰는 것은 열정이자 추억이자 객기일
뿐이다. 연봉을 제대로 줄 수 있는 것도 두세명 뿐, 나머지는 각자 직업이 따로
있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지냈다. 컨퍼런스리그에서 잘해봤자, 4부리그 격
인 리그2로 올라가서 똑같은 생활을 할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선수생활을 거
기서 마칠 것이다. 이제 소년에서 갓 벗어난 듯한 이 한국인 청년은 바로 그런
곳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저는 진심입니다. 가벼이 생각할 마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그런가? 다들 하는 판에 박힌 말을 하는군."
표정을 보니 표현이 어려워 못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고든은 이렇게 바꿔 말하고, 답답함에 차있는 눈앞의 청년을 보면서 잠시 생
각에 잠겼다. 컨퍼런스리그가 선수등록이 비교적 자유로운 이유 때문에 아주 드
물게 수준급 프로 선수들이 계약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몇년에 한번 정도로 드
문 경우였고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차라리 상위리그팀에서 테스트멤버로 연습
하는 것이 보수 수준이나 감각 유지에도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혹시 이 청년도
그런게 아닐까?
"내가 자네에 대해 묻지도 않고 너무 말을 과히 한 것 같군. 이해해주게
나이가 드니 말버릇이 영고쳐지지가 않아. 그래 유세아 군. 자네는 어디서
축구를 했나?"
"한국에서 어렸을 때 했었습니다."
"언제까지?"
"14살까지 했습니다."
"이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어이없었다.
"유세아 군. 내 말 한번 들어보게."
"무슨 말씀하실 건지 압니다."
세아가 말을 가로막았다.
"어떤 말씀 하실 건지 압니다. 하지만 부탁 한가지만 들어주십시오. 그라
운드에서 제가 하는 것을 한번 봐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고든은 세아가 이 말을 연습해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태까지와 달리 발음
과 속도가 적당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 정말 간절한가보군. 그 간절한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내리고 고민했다.
'그래... 혹시 모르지.'
고든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세아도 고든을 따라 그라
운드 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 * *
고든 감독은 그때 일을 생각하고는 웃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팀훈련 도중에
이게 무슨 꼴인가 싶어 더 속웃음에 시달렸다. 오늘 바넷FC의 훈련스케쥴이 막
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훈련 중인 이안 코치와 선수들에게 들킬까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너무 황당했다. 그 유세아라는 청년이 보여준 것이. 세아가 자신
의 실력을 대충 보여주리라 생각했지만 축구가 아니었다. 그 친구 얼마전까지
일본에서 야구를 했다던가? 그때 그 곳에서 언더힐 스타디움의 잔디를 관리하는
노인도 같이 지켜봤었다. 그 주름진 얼굴에 황당해 하는 표정이 고든의 머리 속
에 다시 떠올라 또다시 크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킥.. 큭.. 쿡쿡.."
연습장에서 선수들에게서 몸을 돌리고 웃음을 겨우겨우 참았지만 소리가 새어
나갔다. 참느라 얼굴도 목덜미까지 벌게져 있었다.
"야. 저것 봐."
훈련하던 한 바넷 선수가 감독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껴 같이 보조
를 맞추던 동료에게 말했다.
"왜? 왜? 여자 축구팀이라도 온거야?"
"아니 감독님 봐. 이상해. 목덜미가 벌게 가지고 켁켁대고 있어."
"어.. 저거! 저거! 위험해! 호흡곤란이야!"
바넷FC의 얼간이 골키퍼가, 뒤돌아서 킥킥대고 있는 고든을 덮쳤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양팔을 고든의 겨드랑이에 집어넣어 깍지를 끼고 고든을 들어올리면
서 콱콱 압박했다.
"우어!!! 영감님!!!! 숨쉬세요!! 어서요!!"
"웩! 꽥! 꽥! 꾸엑!"
뒤에서 갑자기 강한 팔힘으로 가슴을 압박하면서 들어올려대니 경련이 일어나
정말로 호흡곤란이 일어났다. 평소 바넷의 얼간이라 불리는 골키퍼는 사정없이
고든의 가슴을 압박했다. 고든 영감은 그대로 기절했다.
그리고 구급차가 들어오고, 콜리스터 여자축구선수들과 콜리스터 구장의 주인
영감이 자신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을 때서야 정신을 차렸다.
ⓒ 축구만화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