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 하권
5. 무색계의 4선정 허공처/ 식처/ 무소유처/ 비유상비무상처/
[허공처]
만약 수행자가 허공정(虛空定)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색(色)은 갖가지 온갖 괴로움의 도구[苦具]이니, 마치 채찍과 몽둥이나 가르고 잘라서 살해하는 것이나, 배고픔ㆍ추위ㆍ늙음ㆍ병듦의 괴로움 등이 모두 색으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색을 버리고 떠나 허공처(虛空處)를 얻을 수 있다.
【문】수행자는 지금 색을 몸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답】모든 번뇌는 색을 인연으로 하고 또한 색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번뇌들을 멸하였기 때문에 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닦아 익혀서 색을 파괴하고 법을 허공처럼 관하면 색을 떠날 수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제4선의 5음(陰)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겨야 하며,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관하면 제4선의 5음을 떠날 수 있다. 그 밖의 나머지 음(陰)들도 색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색이 결국에는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자가 색을 관하여 조각조각 부수고 찢으면 색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치 몸을 나누면 머리ㆍ발ㆍ어깨ㆍ팔 등 각각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몸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머리[頭]는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수염ㆍ머리털ㆍ뼈ㆍ살 등 여러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눈[眼]은 4대(大)와 4진(塵)ㆍ신근(身根)ㆍ안근(眼根) 등 열 가지 것[十事]이 백색과 흑색 등의 살덩어리로 합쳐져 이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각각 나누어 구별하면 곧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땅[地] 등의 여러 부분도 각각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안근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색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답】4대 및 4대로 만들어진 정색(淨色)이 화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이 색이 제거되면 눈은 없는 것이다. 또 이 정색은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있고,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없는 것이다. 또한 능히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눈[眼]이라고 하니, 만약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색을 제거하면 눈은 없다. 만약 눈이 없는데 색을 볼 수 있다면 귀[耳]도 또한 마땅히 눈이 될 것이다.
만약 눈이 색법(色法)이라면 일체의 색법에는 처소가 있고 부분[分]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할 수 있으니, 만약 분별할 수 있다면 눈[眼]이 많게 될 것이다.
만약 4대로 지어진 뭇 미진(微塵)이 눈이라면 하나의 눈이 될 수 없으며, 만약 모두가 다 눈이 아니라면 역시 하나의 눈도 없다. 만약 미진이 눈이라면 이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 미진에 색이 존재하면 곧 시방(十方)이 있게 되므로 미진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만약 색이 아니라면 눈이라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진의 체(體)에는 결정적으로 네 가지 분(分), 즉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이 존재한다.
그런데 눈은 결코 이 네 가지 것[四事]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은 내입(內入)에 속하고, 그 네 가지는 외입(外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미진이 눈이 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여러 가지 것들[衆事]이 화합하여 색을 보는 것을 가명(假名)으로 눈이라 하는 것이니, 정해진 실체는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귀ㆍ코ㆍ혀ㆍ피부ㆍ살ㆍ뼈 등도 또한 이와 같이 논파(論破)될 수 있으니, 이것은 내신상(內身相)을 깨뜨린 것이다. 외색(外色)인 궁전ㆍ재물ㆍ처자 등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분별하여 논파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나타(羅陀)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부터 마땅히 색을 깨뜨려 흩어지게 하고 색을 무너뜨려 찢어서 색이 존재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을 색을 떠난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만약 비구가 색을 떠나려고 한다면, 일체의 색상(色相)을 넘어서고[度] 일체의 대상(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상[異相]을 생각하지 않아서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에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을 말하며,
일체의 대상을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대상이란 유대(有對)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색(色)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相)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무대(無對)인 색을 말한다.
또한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홍색ㆍ자색 등 여러 가지 색상을 말하며,
유대(有對)를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유대란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네모나고 둥글고 멀고 가까운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체 색상을 떠나면 허공처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몸의 내부가 허공과 같다는 마음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입ㆍ코ㆍ목구멍ㆍ눈ㆍ귀ㆍ가슴ㆍ배 등이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색은 온갖 번뇌가 되고, 공(空)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까닭에 마음이 즐거워 허공과 같게 된다. 만약 마음이 색에 속하는 상태에서 공(空)이 되게 하면, 마음이 점차 유연해지고 몸 가운데서 허공이 점점 광대해져 스스로 색신(色身)을 연뿌리의 구멍처럼 보며, 그것을 익혀 계속해서 이로움을 얻으면 몸이 다하여 공해져서 다시는 색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외색(外色)도 또한 그러하여,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이 허공과 같아 똑같이 하나의 공이 된다.
이때 마음은 허공을 반연하여 한량없고 가없어 문득 색에 대한 생각[想]을 떠나 편안하고 즐거워지니,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는 새가 병이 깨지면 그 속에서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라도 저촉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과 같다.이를 초무색정(初無色定)이라 이름한다.
수행자가 허공 가운데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기고,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임을 알아,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하면 곧 공(空)의 연(緣)을 떠나니,
왜 그런가? 이 마음이 생각하는 허공이 속임이고 허망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는 다시 없어지니,
그 병통은 바로 이 허공이 식(識)을 좇아서 있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른바 식이 진실하다 할 것이니, 단지 식만 관하고 공연(空緣)은 버린다.
[식처]
식을 관하는 것을 익힐 때는 점차 식상(識相)이 서로 이어져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이나 등불의 불꽃과 같다.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식은 그 식이 서로 이어져서 가없고 한량없다.
【문】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식처(識處)가 가없고 한량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식은 능히 멀리 있는 것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없고, 가없는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가없다.또한 먼저 허공이 가없음을 반연하니, 만약 가없는 허공을 깨뜨린다면 식도 마땅히 가없을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능히 식을 크게 하여 마침내 가없음에 이르게 하니, 이를 가없는 식처(識處)라 이름한다.
【문】이 식처는 4음(陰)을 갖추고 있는데, 왜 단지 식처만을 말하는가?
【답】일체의 내법(內法)은 식이 그 주인이며, 모든 심수법(心數法)은 모두 식을 따라 속하니, 만약 식을 말한다면 곧 나머지 것들도 말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욕계 가운데서는 색음(色陰)이 주인이고,
색계 가운데서는 수음(受陰)이 주인이며,
허공처(虛空處)와 식처(識處)에서는 식음(識陰)이 주인이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상음(想陰)이 주인이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는 행음(行陰)이 주인이다.
또한 세 가지 법, 즉 신법(身法)ㆍ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은 욕계나 색계에서는 몸[身]이 주인이니, 마음이 몸을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마음의 힘[心力]만 홀로 작용한다.
마음[心法]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공(空)을 반연함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반연함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2처(處)가 있으니,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이다.
다만 처음에 색을 깨뜨렸기 때문에 허공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며, 허공을 깨뜨렸기 때문에 오직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심수법에도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상(想)이고, 둘째는 행(行)이다.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2처가 있으니, 상무소유처(想無所有處)와 행비상비비상처(行非想非非想處)이다.
또한 식을 반연하기 때문에 허공처를 떠날 수 있으니, 이렇기 때문에 비록 다른 음(陰)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식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식처를 얻은 다음에는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해 식이 병통이 됨을 관해야 하니, 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식은 허깨비이고, 허망된 속임수이며, 온갖 인연에 속하므로 자재하지 못하다고 관하니,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멸하며,
식은 정(情)에도 머물지 않고 연(緣)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머무는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식상(識相)은 이와 같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식은 허깨비[幻]와 같다”고 하셨으니, 수행자가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면 식처를 떠날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5욕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색도 또한 이와 같으며, 색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허공 역시 그러하다. 허공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식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한 속임수인데, 중생들이 미혹되어 집착해서 법들[諸法]이라 한다. 공하여 무소유(無所有)한 것이 마음이 편안한 처소[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곧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간다.
[무소유처]
【문】허공처와 무소유처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전자는 마음속 생각[心想]이 허공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마음속 생각이 무소유를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차별이 된다.
수행자가 무소유처에 들어가면 예리한 근기[利根]를 지닌 사람은 이 가운데 수ㆍ상ㆍ행ㆍ식이 있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둔한 근기[鈍根]를 가진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또한 무소유처를 떠나는 인연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으니, 유견(有見)ㆍ무견(無見)ㆍ비유견비무견(非有見非無見)이다.
유견은 욕계로부터 식처에까지 이르며, 무견은 곧 무소유처이며, 비유견비무견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무견은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하니,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가 비록 미세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데, 어찌 하물며 무소유처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무소유처를 떠나야 한다.
【문】예컨대 불법(佛法) 가운데 또한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실재한다면 어찌하여 사견(邪見)이므로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불법 가운데서는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실재가 아니라고 한 것이니, 무소유처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애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중생은 정해진 과보를 받은 다음에 업의 인연을 따라 다시 온갖 과보를 받게 되니, 이런 이유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비슷하지만 그 실제는 각기 다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의 상지(想地)는 모두 거칠어서 근심스러우며,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다.
무상지(無常地)는 곧 어리석은 곳[癡處]이다. 지금 적멸(寂滅)의 미묘한 제일처(第一處)는 이른바 비상비무상처(非想非無想處)이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면 무소유처의 상지를 떠나 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게 된다.
[비유상비무상처]
【문】이 가운데서는 유상(有想)인가, 무상(無想)인가?
【답】이 가운데서는 유상이다.
【문】만약 유상이라면, 어째서 단지 아래의 7지(地)를 상정(想定)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지(地) 가운데 상(想)은 미세하지만 날카롭지 못하여 상의 작용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음속으로 이 처(處)를 비유상비무상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본래의 명칭을 따라 이를 비유상비무상처라고 이름하신 것이다.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이 가운데 4음(陰)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의 안온한 처소라고 하면서 증상만(增上慢)을 내니, 그 수명이 8만 겁이 지난 뒤에는 다시 여러 갈래[諸趣]에 떨어진다.
이 가운데 4음이 비록 미세하며 깊고 오묘하더라도 예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능히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달아 안 다음에는 환난을 싫어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 또한 화합하여 된 법이고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이어서 허망한 속임수이고 실재하지 않으니,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이다.
또한 이것은 나중에 인연을 생하므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환난이기 때문에 마땅히 4제(諦)를 배워야 한다.’
【문】그 밖의 다른 지(地)를 버릴 때는 왜 4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앞에서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ㆍ고ㆍ공ㆍ무아라고 말한 것은 4제를 간략히 설한 것이요, 다만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지(地)에서는 막음[遮]도 없고 어려움[難]도 없으니, 범부의 유루도(有漏道)도 능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간의 정상(頂上)은 오직 성인만이 무루도(無漏道)를 배워서 마침내 넘어설 수 있다.
비유컨대 노끈으로 새의 다리를 묶어 놓으면 처음에는 비록 날아가려고 하지만 노끈이 다하는 곳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범부인(凡夫人)도 역시 이와 같아서, 비록 그 밖의 다른 지를 넘어서더라도 마왕(魔王)이 놀라지 않지만, 만약 유정지(有頂地)를 넘어서면 마왕이 크게 놀라니,
마치 노끈이 끊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지를 떠날 때는 4제를 설하지 않은 것이다. 유정지는 삼계의 중요한 문이니, 이 중요한 문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4제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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