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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라를 사랑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완수하며, 죽어도 명예를 지켜라.
- 김홍일
助人快樂之本
남을 돕는 것이 기쁨의 근본이다.
- 해은공 가훈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
초명은 홍일(弘日)이며, 중국어 이름으로는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등을 썼다.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중장이다.
구한말에 태어나 국권 피탈 직후인 1910년대 무장투쟁 시기부터 광복 때까지 수십 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며 무장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동시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군인으로서 국민당의 중국 통일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중일전쟁에서는 최전선에서 중국국민당군을 이끌고 일본의 침략에 맞섰다. 6.25 전쟁에서는 초반에 붕괴된 국군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북한군의 선봉을 일주일 간이나 막아내어 대한민국을 구원한 전쟁영웅이다.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그 활동 범위가 만주, 러시아의 시베리아부터 중국 강남, 한반도까지 사실상 동아시아 전역을 아우른다. 6.25 전쟁 이후에는 주 중화민국 대사,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민정 참여, 한일협정 체결 등에 반대하면서 정계에 투신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삶 덕에 항일 독립투사 · 반공 참전용사 ·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의 정체성을 모두 지닌,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유공자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김홍일(군인)/생애 문서 참고
3. 평가
3.1. 한국 무장독립운동의 기수
"놈들의 발굽 아래 정의가 유린되고 민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말살되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취할 길은 오로지 투쟁에 의해 국권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파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제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내가 장차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확실히 깨달은 셈이다."
- 회고록 <대륙의 분노>에서.
김홍일 중장은 군문에 뛰어든 1920년대부터 1945년 독립에 이르기까지 국외 항일무장투쟁의 일선에서 계속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이저우 군벌군에서 교육을 마친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으며, 곧 만주와 연해주로 넘어가 독립군 부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대한의용군사회의 무관학교 교관으로서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중국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일본 요인 암살 및 사보타주 작전에 적극 조력했다. 김홍일은 19로군 정보국장으로서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 자산이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에 관한 동향정보들을 김구 주석과 안창호 선생과 공유하며 임정의 전략 수립에 기여했다. 가령 쇼와 천황을 암살 시도한 이봉창의 사쿠라다몬 의거나, 일본군 대장을 암살한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등에는 전부 김홍일의 관여가 있었다. 그 외 일본 해군 장갑순양함 이즈모의 함저에 폭탄을 설치해 침몰시키고자 시도했다.
중일전쟁 발발부터 1940년대에는 중국 국민정부군 장성으로 진급하여 본격적으로 야전부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는 우한 전투와 샹가오 전투 등에서 수만의 일본군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동시에 중국군 특별훈련반의 교관직을 맡아 의열단원들과 조선의용대원들을 교육하고 한국광복군에 참모장 신분으로 가담하며 후임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이 중국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 작전 능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45년 종전 직전에는 미국 정보부 OSS와 협력하며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전후에는 다시 중국군으로 복귀하여 중화민국의 중국에 있던 한인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지원하였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한국의 독립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변절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수십 년간 동아시아 곳곳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나갔다. 해방 후에도 그는 비로소 설립된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몸담으며 자신이 몸소 세운 조국 수호자로써의 정신을 후세대 군인들에 물려주었다. 그리고 단순히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지 않고 다시 한 번 침략자들을 막아내며 그러한 자세가 무엇인지 몸소 후학들에게 보여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노년에도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며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힘썼다.
3.2. 한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사상가
국방대학교와 여타 국내 군사학과 교수진들이 결성한 학회인 군사학연구회, 그리고 육군군사연구소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연구진들은 김홍일 중장을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대한민국 국방장관인 이범석, 그리고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과 함께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군사사상가로 꼽는다. 대한민국 국방부 역시 그가 "건군의 사상사적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3.2.1. 육군사관학교 체계 정립과 국군 장교 양성
김홍일 중장은 육군사관학교 제7대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건군 초기부터 6.25 전쟁 발발 직전까지 가장 긴 임기 동안 육사 교장을 맡은 인물이다. 조승옥의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각 교장들이 평균적으로 6개월 간 임무를 수행했던 반면 그의 임기는 자그마치 1년 6개월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표어를 제정하고 커리큘럼을 제정하는 등 육사의 기틀을 닦았다. 단기복무자와 장기복무자를 분리하여 모집할 것을 상부에 건의하여 보병학교에 갑종간부후보생 과정을 신설하도록 한 것 역시 김홍일 중장이다.
김홍일이 부족한 환경에서나마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군인정신을 주입한 생도들은 스승과 함께 6.25 전쟁 초기에 각지에서 훌륭하게 분전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김홍일은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후방에서 임시 군사학교인 육군종합학교장을 역임하며 국군의 장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따라서 건군 초 장교 임관 시스템 중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군사영어학교 등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초반의 혼란기에 육사가 잠시 폐교되었다가 1952년에 재개교하면서 김홍일이 닦은 기반은 현대의 육사로 많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개교한 육사는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본떠 4년제 정규 과정으로 재탄생하였으며 이한림 대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현대적인 시설을 구비했다.
3.2.2. 총력전과 국방론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하고 국군 건설 작업에 참여한 김홍일은 그의 저서 "국방개론"을 통해 현대적 개념의 국방 개념과 사상을 피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군의 현대적인 군사력 건설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그가 국방건설을 단순히 군사력 건설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건설 문제와 연계시켜 파악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군사학연구회, <군사사상론>, 584p
이처럼 김홍일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총력전 수행을 위한 서방국가들의 국방에 대한 사상과 2차 세계대전 시기 등장한 신무기체계의 영향을 받아 미래전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논리’를 『국방개론』을 통해 피력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군사사상의 핵심은 월등한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연성 국력(soft power)’과 전쟁 기재를 생산할 수 있는 자원과 같은 물질적인 요소로 대변되는 ‘경성 국력(hard power)’을 통해 올바른 국가관과 건강한 심신을 지닌 국방 국민으로 대변되는 국민(people)이 건설한 강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지닌 국방정신 즉, ‘사상’을 통해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김영환, <창군기 기동군 창설 담론에 관한 연구>, 군사연구 제156집
김홍일 중장은 군경력을 시작할 때부터 병공 분야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구이저우 강무당 생도 시절 "포의 구경은 갈수록 커지고, 소총의 구경은 갈수록 작아질 것"이라고 주장한 그의 졸업논문은 강무당 교관들에 의해 수작으로 선정되었고, 실제로 그의 이론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후로도 김홍일은 중국군에서의 오랜 군수행정직 경험을 통해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는 야전 지휘관뿐만 아니라 군사위원회의 군계처 통계과장, 상하이 병공창 병기 생산 주임 및 군사위원회 군수설계위원 등을 역임했다. 난징 10년(南京十年) 기간 동안에는 중국의 국방건설에 참여하며 질적 변화를 체감했으며, 중일전쟁 직전에는 전쟁에 대비해 후방으로의 생산 시설을 재배치하고 여러 부대들을 신설하는 업무 역시 수행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서기훈련단과 육군대학에서 현대적 총력전에 대한 교육까지 받았다. 결국 김홍일은 막 독립했던 한국에서 비단 단순한 군사뿐만이 아니라 국방경제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국방정책 수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김홍일의 군사사상은 현실주의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다. 그는 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벌어질 현대전의 기본적인 상황을 총력전으로 가정하며, 인적, 물적, 그리고 종합 요소라는 3요소가 조화되는 것이 총력국방의 핵심이라 정의했다. 그에게 있어 국방이란 비단 국가 생존의 길이자 국민과 주권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국방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중 종합 요소는 바로 기술과 조직이다. 그는 인적 요소의 양성을 위해서는 사관학교와 국방대학원의 설립이 필수적이며, 물적 요소의 획득을 위해서는 군수산업과 중공업, 그리고 교통 인프라를 양성할 것을 주장했다. 두 요소를 종합하여 현대전 수행에 필요한 기술이 성취된다. 또한 군사와 생산 그리고 문화와 총동원으로 나뉜 종합적인 국방조직을 통해 조직적인 전쟁수행이 가능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 중에서도 특히 경제동원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그의 군사사상을 집약적으로 담은 서적이 바로 1949년에 출판한 "국방개론"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한 국가의 힘만으로 총력국방을 온전히 이뤄낼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가 이범석과 함께 구상한 것이 바로 "연합국방론"이다. "침략전선이 생기면 반침략전선이 생겨 정치, 경제, 군사의 세 가지를 종합한 대립적 국제연합전투체제가 형성되기 때문에 2개국 간의 단순 전쟁에서 집단과 집단 간의 연합전쟁으로 번지게 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둔다. 오랜 기간 동안 대일본 한중연합전선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그 자신의 경험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이 결성되는 국제 현실에 기반한 통찰이었다. 김홍일과 이범석의 가설은 몇 년 후 벌어지는 6.25 전쟁을 통해 실제로 입증되었다.
또한 김홍일은 잠재적 주적을 중국과 소련으로 상정한다. 부활을 시도하는 일본의 해상 위협 역시 존재하나, 한국은 해외 식민지를 보유하지 않고 있기에 해군을 대양해군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그는 통일 이후를 대비하여 육군 위주의 군사전략을, 그것도 만주에서 기동할 수 있는 고도의 기계화 전력과 공군 전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기동전 단락에서 설명한다.
3.2.3. 정신교육론
3.2.3.1. 군대정신교육
김홍일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재임하던 시절 입교하던 생도들 중에는 광복군과 일본군, 만주군 등의 상이한 군경력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군문에 들지 않았던 민간인들까지도 대거 포진했다. 교장 김홍일은 이러한 이질적인 집단을 하나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바칠 군인들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을 국가의 사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통일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육사 교장 재임 도중 그 무엇보다도 정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여기는 그의 중국군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상통일을 내세운 그의 주장은 서기훈련단에서 학습한 장제스의 역행철학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결국 공산군에 패배하여 대만 섬으로 쫒겨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김홍일은, 국민당의 패전 원인을 군벌로 대표되는 그들의 분열적 속성 때문으로 파악했다. 한국이 중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군, 그리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강력한 사상적 단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군대정신교육의 핵심은 바로 오달덕(五達德)이다. 지(智)⋅신(信)⋅인(仁)⋅용(勇)⋅엄(嚴)의 다섯 가지 덕목으로 구성된 오달덕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내려오는 군인의 전통적인 덕목이자 장제스가 서기훈련단에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했다. 다만 김홍일은 이를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의 방법으로 다시 해석하여 후학들에게 강의했다.
우선 '지(智)'는 '자동 정신'으로, 김홍일은 이를 지휘관이 상급자의 명령 없이도 자체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이라고 말한다. 매사에 명령을 받을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때마다 각 지휘관은 주체적인 판단과 창의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信)'은 협동정신이며, 이는 서로를 믿고 희생할 줄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신념과 가치를 전군이 공유해야 한다. 그는 이를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세 번째 요소인 '인(仁)'은 애국정신이며, 이는 독립운동가들과 순국선열들이 이어 온 애국심을 군인들 역시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용(勇)'은 희생 정신으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엄(嚴)'은 복종정신을 의미한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집단이므로 상급자의 명령에 대해 복종하여 다 같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사적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공평무사와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다스려져야 한다고 김홍일은 첨언한다.
이 오달덕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상급자 스스로가 이 덕목들을 갖추고 어려운 일에 앞장섬으로써 타인의 모범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김홍일은 주장한다. 한솥밥을 먹는 군인들은 대장의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닮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홍일은 상급자의 부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중요시했다. 부하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고충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고자 노력하는 것이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사랑과 관심을 받은 부하는 자발적으로 상급자를 따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주장한 바를 실천하며 생도들의 생활에도 적극 관심을 가졌고, 육군사관학교 내에 만연했던 일본군식 병영부조리를 척결하는 데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그는 엄격하고 통제된, 그러나 절제되며 신속한 내무생활을 통해 정신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박한 생활과 간단명료한 명령을 통해 실용적인 행동 패턴을 갖추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한편으로는 국기계양식 등을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실한 태도를 길러 사적인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2.3.2. 국민 개조
특기할 만한 점은, 김홍일은 군 지휘관의 또다른 책임으로 국민개조를 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제 식민지를 겪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마침 새로이 시행되는 징병제를 통해 군에 의무적으로 입대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국민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그는 상술한 군인의 오달덕을 국민들에게도 교육하고, 체육 단련과 보건위생 교육을 통해 체격을 개조하며,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국가지상과 민족지상의 사상이 우선하도록 정신을 개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전역 후에도 민간에서 쓸 수 있도록 여러 병과를 통해 각종 기술 역시 가르쳐야 한다.
징병제를 통한 국민 교육이라는 그의 생각은 당대 민족주의 시대의 여러 국가들과 급진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던 후진국들이 공통적으로 추진하던 국민 만들기 운동과 일맥상통한다. 가령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일본의 경우 군대를 통해 공통의 국민의식을 심었다. 김홍일의 국민개조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후술한다.
3.2.4. 기동전과 공지전
김홍일 중장의 군사사상 중 또 하나 특이한 점을 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동전 사상이다. 김홍일은 건군기에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과 함께 기동전에 대비할 것을 주창한 대표적인 군사사상가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김홍일은 육군 위주로 군사력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는데,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적 공산 세력이 남하하여 한반도의 방어선으로 들어오기 전에 공세를 실시하여 전략적인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1500대의 전차와 그 이상의 오토바이 및 트럭을 바탕으로 총 3개의 장갑사단과 3개의 모터화사단을 마련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약 15개의 상비사단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공군을 활용한 입체전 역시 주장한다. 폭격기 250대와 전투기 500대를 중심으로 한 1000대의 항공전력을 육상 기동전력과 통합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림대 강사 김지훈은 육군 군사편찬연구소 학회지인 <군사>에 기고한 논문에서 이것이 김홍일이 중국군 경험을 통해 독일군의 소위 '전격전'으로 대표되는 기동전 이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해석한다. 육군군사연구소의 김영환 박사 역시 김홍일이 미군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공지전을 주장한 것은 매우 앞서나간 것이라고 고평가한다.
3.2.5. 의의
국방개론 발간 당시 그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의 주장은 과도한 군사비를 필요로 하며 이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국방론은 통일 이후를 상정하여, 한반도의 남부 절반만을 점유하고 있는 한국의 현 실정과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학연구회에서는 김홍일이 통일 이후 한국의 군사력과 운용방향을 제시했다고 보아 그 의의를 고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의 국방건설 비전은 결국 시간이 지나며 대한민국이 자주적인 국방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은 김홍일 중장이 구상했던 모습과 역량을 거의 모두 갖추었다.
3.2.6. 한계
다만 연구자들은 김홍일 중장의 군사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평가 역시 같이 내린다. 그의 총력국방이론은 군사 외에 경제, 심지어는 문화와 국민 총동원까지도 국가가 조직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으로 악용될 위험성 역시 강하게 띄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일 중장에 따르면 '국방이야말로 모든 국가정책에 우선하며, 인류사회의 모든 요소는 국방 요소로 일치시켜야'했다.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그의 중국군 경험에서 기인한다.
그의 정신교육론에 큰 영향을 끼친 루산 서기훈련단에서는 파시즘으로도 분류되는 장제스주의에 입각한 사상 통일을 총력전 수행의 핵심이자 선결과제로 보았다. 그의 총력전 이론의 기반이 된 중국의 국방건설은 국가총동원에 기반한 군국주의 일본의 동원 정책을 참고대상으로 삼았다. 당대 일본은 중국의 적임과 동시에 동아시아 최고의 군사 선진국이었으므로, 그들을 이기기 위해 중국군은 일본군의 교리와 정책을 면밀히 연구했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육군대학에서 연구하던 독일의 총력전은 명백한 파시스트이자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실권자로써 무제한적인 전시경제 정책을 주도한 제국군 병참총감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방식이었다.
또한 국민혁명군 육대에서 가르치던 독일군 장교 쿠르트 헤세의 총력전 이론은 나치즘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헤세는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패전의 원인을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는 1922년의 저서 <야전 군인의 정신철학: 독일의 미래를 위한 지도자 탐색(Der Feldherr Psychologos. Ein Suchen nach dem Führer der deutschen Zukunft)>에서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복종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실제로 그는 훗날 독일 국방군 선전국에서 복무하며 장병들에 대한 프로파간다 활동에 적극 나선다.
위의 셋 모두 20세기 전체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들에게 영향받은 김홍일 중장의 국방론과 정신교육론 역시 같은 위험과 시대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는 그 역사적인 의의를 인정할지언정 한계점에 있어서는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3.2.7. 영향
일각에서는 육사 8기생들이 5.16 군사정변에 대거 가담하여 군사정권을 개창하는 데에 김홍일 중장의 군사사상이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이 주장의 시초는 다름 아닌 김홍일의 전기소설을 쓴 작가이자 현재까지도 김홍일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로 남아 있는 박경석 준장이다. 박 준장은 생도 2기로, 그 역시 김홍일 중장의 제자이자 현대까지 남아 있는 최후의 제자들 중 하나다.
김홍일 중장이 교장을 맡고 있던 시절 육사에 재학하며 그에게서 교육받은 이들이 바로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다. <오성장군 김홍일(1984)>에서 박 준장은 육사 8기가 이미 퇴역한 지 오래였던 스승 김홍일을 삼고초려 끝에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직에 위촉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생도들과 같이 동고동락하던 교장 김홍일은 육사 8기생들에게 있어 단순한 존경의 대상을 넘어 "우상" 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림대의 김지훈 강사 역시 김홍일의 사상과 국방건설 계획이 훗날 한국의 국가 주도 발전에 미친 영향을 긍정한다. 다만 그는 군사정권과 김홍일의 군사사상 간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밝히기보다는 훨씬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 김홍일의 사상은 그 자신이 영향받은 중국, 독일과 일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보편적인 국방이론이자 국민국가 건설 운동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3.3. '오성 장군'의 신화
국부군에서 중장(★★), 한국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기록 때문에 합해서 '오성'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군에서 임관할 당시 계급이 준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예편한 김홍일 중장의 전공을 치하하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1962년에 수여받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까지 더하여, 김홍일은 건국공로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모두 받은 독립운동가이자 전쟁영웅으로 기록되었다.
대장 및 원수 계급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매우 박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김홍일의 중장 진급은 당시 한국군의 제도 상 최대의 영예를 베푼 것이었다. 53년 1월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대장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군에는 원수는 물론이고 대장 계급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채병덕의 전사 이후 각군 참모총장은 소장 계급이었으며 3군총사령관 정일권 역시 소장이었다. 그런 상황에 일개 야전사령관이었던 김홍일을 중장으로 진급시킨 것은 현대 기준으로는 원수로 진급시킨 것에 준하는 무게감을 지닌다. 이승만 대통령이 괜히 오성장군 운운한 것이 아니다. 대장으로도, 원수로도 볼 수 있는 남북 전쟁 당시 미군 원수들의 사례와 유사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3.4. 6.25 전쟁 4대 영웅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월튼 워커
더글라스 맥아더
김홍일
김종오
휴전 30주년을 맞은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이후 선배 장군들을 몰아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6.25 전쟁 영웅을 선정해달라고 선배 장교인 박경석 장군에게 부탁한다. 둘은 육군대학 정규과정(박경석 중령, 전두환 소령 시절)에서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은 인연이 있다. 당시 박경석 장군은 혼자서 4대 영웅을 선발할 수 없다면서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한림 장군, 제2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병형 장군,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한 박정인 장군을 초청하여 회의를 했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당시에는 6.25전쟁에 참여한 장군들 거의 생존했고 이들에게 여론조사를 했을 때도 역시나 만장일치로 위의 4인이 선정됐다. 각자의 선정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박경석 장군의 관련 증언. 영상 15분부터
김종오: 6.25 개전 직후의 춘천 전투에서 6사단장으로 북한군 선봉 부대의 남침을 포격으로 저지시켜 수도권 지연 방어에 공헌했으며, 이후 9사단을 이끌어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파.
김홍일: 당시 국군에서 대규모 작전을 지휘한 거의 유일한 경험자로서, 제1군단장 자격으로 전쟁 초반의 지연 방어를 진두지휘. 이후의 낙동강 방어전, 반격을 위한 전력 보전을 실현해냄.
월튼 워커: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6.25 전쟁의 주요 전투를 이끌었고,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전세 역전으로 서울 수복, 북진을 주도했음.
이듬해인 1984년 박경석 장군은 김홍일의 일대기를 각색하여 소설 <오성장군 김홍일>을 출판했다. 이 소설은 이듬해인 1985년에 대한민국 국방부 지원 하에 KBS에서 국군의 날 특집으로 드라마화되었다.
3.4.1. 백선엽과의 비교 논쟁
2020년 7월 10일, 대장 출신 백선엽이 사망한 직후 다시금 그에 대한 명예원수 추서 주장이 나오고, 이를 두고 이념 논쟁이 재현되면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의 대항마 비슷하게 부각되고 있다. 항일 투사로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고, 창군 이래 최초의 장성급 임관자이며, 6.25 전쟁에서도 백선엽 등의 상관으로서 극도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 방어 작전을 이끌어 성공시킨 김홍일이야말로 국군 명예원수의 자격에 합당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과거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유용원의 경우 김홍일과 백선엽의 동시 명예원수 추대를 주장한 바 있다.
참고로 백선엽 장군 사망을 전후하여 일각에서 제기한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보다 더 중요한 전공을 세웠는데 백선엽만 띄워줬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선 전투의 병력 수습 및 이후 지연전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한국이 패망할 위기가 수차 있었지만 그 하나가 한강전선이었고 그 다음 전선이 낙동강 교두보였다고 했으며, 이 한강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졌다면 미국은 지상군과 전투장비를 투입할 시기를 놓쳐 전세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6.25전쟁사에서도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부대지휘를 한강선 방어선 지탱의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지연전은 어디까지나 지탱 가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실시된 여건조성작전(shaping operations)의 영역에 속한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선에 구축됐고, 여기서 공세를 저지하고 적을 공세종말점에 도달케 함으로써 여건조성작전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결정적 작전(decisive operations)은 1950년 8월 북한군이 대구를 목표로 3개 사단을 투입하여 강력한 주공을 실시했을 때 벌어졌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다. 8월 공세의 좌초 이후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초과했다는 것은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의 공세이전(counter-offensive)도 가시화되었다. 따라서 여건조성작전을 담당한 김홍일 장군의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결정적 작전을 수행한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스스로 자서전에 김홍일 장군에 대한 업적을 칭송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략과 전술적 측면에서 두 장군 모두 업적이 있다.
북한군 8월 공세 종결 시점에서 두 사람의 전공이 비슷하다고 쳐도, 김홍일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 비해 한국전에서의 전공이 크다고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김홍일 장군은 1950년 9월 1일 1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영원히 야전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백선엽 장군은 1951년 중공군 5월 공세 기간까지 야전의 사단장과 군단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이후에는 백야전사를 이끌며 후방 빨치산 토벌작전까지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백선엽 장군은 평양 탈환, 중공군 5월 공세에서의 한계령-대관령 방어, 지리산 빨치산 소탕 같은 굵직한 전공을 세우면서도 크게 흠잡을만한 군사적 실책은 저지르지 않았다. 따라서 김홍일 장군의 성과를 강조하더라도 백선엽 장군의 전공이 그보다 못했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복무기간이 너무 짧았다.
물론 이 말이 김홍일이 백선엽보다 지휘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일례로 전쟁 초기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로 우인접 7사단이 위기에 빠지자 측방노출을 우려한 김홍일이 제1보병사단장이었던 백선엽에게 전술적 후퇴를 지시하였지만, 백선엽은 육군본부의 철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1사단의 진지 고수를 고집하다 이후 사단 전체가 분산철수하는 위기에 빠진다. 즉, 사단장급 되는 지휘관은 현장 상황에 따라 독단적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당시까지는 위관급 장교 수준의 소규모 부대 지휘경험만 있던 백선엽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백선엽의 경우 회고록 "군과 나"에서 김홍일이 만들어준 6일의 시간 덕분에 한국군이 이겨낼 수 있었으며, 중국 국부군에서 전투 경험 덕분에 지연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이 시점의 백선엽 장군은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 할 나이인 만 30세의 젊은이고, 김홍일 장군은 국부군에서의 실전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52세(오늘날에도 장성급 지휘관의 나이다)의 숙장이자 까마득한 선배 장군이라는 사실 역시 감안해야 한다.
사실 군사적 성과를 넘어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80년대 후반 전쟁 회고록이 새로운 신문 기획연재물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좌담회, 인터뷰 등을 연 경우는 있었으나 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회고록을 연재한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정일권의 회고록 기획 연재였고, 그 이후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이 백선엽의 군과 나 기획 연재였다. 만약 이 연재가 없었으면 백선엽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을 것이다. 백선엽의 부각은 군과 나 기획연재의 성공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자서전의 유통량이다 백선엽의 경우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김홍일 자서전의 경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한국전 참전 장성 중 김종오, 김홍일처럼 빛나는 전공으로 백선엽만큼 "스타성"있다고 할만한 장군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장군들은 김종오처럼 이른 나이에 요절하거나, 김홍일처럼 연배가 한참 위라 회고록 신문 연재가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결국 백선엽이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국군 장성이 된 데에는 본인의 전공, 미군의 지속적인 우대, 신문 기획연재의 상업적 성공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지만 경쟁자들 중 유일하게 99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홍일과 백선엽 모두 6.25 전쟁 당시 국군의 일원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현재는 백선엽이 다른 전쟁영웅의 업적을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 국군 원로들이 반발하는 이유이고, 백선엽의 대항마로 김홍일을 부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단, 원로들의 이러한 반발 역시 마냥 객관적이라기보단 "일군 출신", "만군 출신", "국부군 출신", "평안도 파벌", "함경도(알래스카) 파벌", "영남 파벌" 등 건군 초부터 1950년대까지 군 내에서 벌어진 출신 및 지연에 따른 파벌 다툼과 이로 인한 개인적 은원이 깊게 엮여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둬야 한다. 일례로, 국방일보에서 2010년대 초 진행한 "다시쓰는 6.25 전쟁"이라는 기획연재를 담당하던 국방일보 기자 겸 군사사 연구자는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 장성들이 연재의 전황이나 전공 서술보다 상대 파벌 사람들이 어떻게 묘사됐는지에 가장 신경썼다고 기억할 정도였다. 60년이 지나서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끼리도 이랬다니 정말 지독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셈인데, 1950년대 "평안도 파벌"의 최선임이던 백선엽이 이러한 갈등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개전당시 야전포병단장),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이처럼 군 내에서 파벌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채병덕의 경우 인품이 뛰어나서 총참모장을 했던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파벌 문화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채병덕이 김홍일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응준 덕분이었다.
이 두 사람은 6.25 전쟁이라는 국난을 서로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백선엽의 자서전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선엽이 소문을 듣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 찾아가니 김홍일 장군이 나를 보자 잘 왔다고 반가워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과연 이러한 전공논쟁이 진정으로 두 전쟁영웅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러한 전공 논쟁은 무의미하기도 하다. 전쟁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서로를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단, 채병덕만은 예외다.
한편 6.25 전쟁 4대 영웅 명단에 김홍일은 포함된 반면 백선엽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백선엽과의 비교에서 김홍일의 비교우위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단 백선엽이 제외된 이유는 백선엽이 처음 명성을 얻은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방어전의 일부여서 월튼 워커의 공로와 중복 되는 면이 있고, 당시 백선엽은 아직 생존한 상태여서 이미 고인이 된 4명과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였다. 일각에선 백선엽이 해당 명단에 없다는 것을 근거로 '백선엽은 대단한 공로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휴전으로부터 불과 30년 후에 나온 선정이, 관련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된 이후의 것보다 절대적으로 신뢰성과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명단에 없더라도 6.25 전쟁에 지대한 기여를 한 다른 전쟁영웅들도 수없이 많은데, 자칫 그들의 공로마저 폄하될 수도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명분적으로 따진다면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특설대 복무 및 친일 행적이라는 크나큰 과오가 존재한다. 백선엽이 6.25 전쟁에서 큰 성과를 올렸음에도 아직까지 공공연하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김홍일의 경우 이러한 역사적 과오 문제에서 자유로우므로 특히 명분론이 전 세대에 걸쳐 강하게 지배력을 발휘하는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더더욱 고평가받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즉 현대에 와서 이 비교는 정치적 스탠스 이전에 실질적 공과 명분론의 대결이며, 이것이 역으로 각 진영의 스탠스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3.4.2. 일본군 출신자들에 대한 김홍일의 시각
진성 민족주의자였던 김홍일은 누군가가 동지가 되었다면 그 출신은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한국인끼리 의견과 집단이 갈라져 싸우는 것은 파벌 싸움이라며 매우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당장 연해주 독립운동 시절 그는 독립군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내분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며 격분하기도 했다. 국민당군이 여러 군벌로 갈라져 이권 다툼을 벌이다 외적과 공산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꼴을 목도한 것 역시 그의 이러한 파벌 혐오 정서를 강화했다.
해방 후 건군기 당시에도 김홍일 중장은 새로운 조국의 군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에 딱히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의 시각에서는 그들 역시 압제에서 해방된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산학교 시절 누군가 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안 누군가는 조선 땅에 머무르며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남강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김홍일은 정통성에 있어서는 독립운동에 앞장선 광복군 출신이 그 누구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병력 운용 경험 및 군사 교육을 받은 정도에 있어서는 일본군 출신들이 우월하다는 것 역시 인정했다. 그는 그들이 조국의 군대에 복무할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신생 한국군에 적극 불러들였다. 대신 김홍일은 이러한 수많은 출신자들을 한데 엮어 일본의 물을 빼고 새 조국인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군인으로 길러내는 산실로써 육군사관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육사 교장을 맡으면서 사상통일과 정신교육을 중시 여겼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그는 제7대 육사 교장 부임식에서 홍사익 중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홍사익은 일본의 고관직에 오르면서도 창씨개명도 안한 인물이었고, 끌려간 조선인 장병들과 노무자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같이 전선으로 갔다가 불행히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낙점되어 희생당한 인물이라는 논리였다. 한편으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응준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홍일과 이응준은 1976년 『세대』의 지면을 통해 광복군과 창군 시절을 회고하는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李 = 만주와 중국 출신 그리고 일본 출신 더러는 유해준, 이성가 씨와 같은 광복군도 대거 새로운 조국의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金 = 그때의 보기 좋았던 광경은 출신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 추천하고 천거하는 모습”
이응준, 김홍일 「光復軍․創軍時節」(1970). 『세대』 제14권(통권 157호) 71쪽
중국 망명 당시 김홍일 장군의 편지를 망명 3개월 만에 국내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이응준 장군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이던 이응준 장군이 한강을 도강하자 노량진에서 혈혈단신 병력을 수습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수원의 육군본부로 가서 각각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수원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응준 장군이 김홍일 장군을 도와 채병덕 총참모장을 적극 설득하여 김홍일 장군이 시흥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김홍일 중장이 민족주의가 극에 달했던 20세기 초중반을 살아가던 인물이며, 정치와는 관계 없이 조국의 독립과 방위라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군인'이었기에 가졌던 지극히 현실적인 관념이다. 그가 일본군 출신 동료들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는 별개로, 역사학계에서는 이응준과 홍사익 등의 추축국 부역 혐의를 경시하지 않는다. 특히 홍사익 중장의 경우 포로 학대 혐의로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를 김 중장의 말과 같이 단순히 창씨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킨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저서
국방개론(國防槪論) - 1949
6.25전쟁 직전에 출판한, 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차기 국방 로드맵을 제시한 전략 연구서.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체급에는 걸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국방개론을 현대 한국 군사사상사의 시초로 보며 고평가하고 있다. 국방개론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대상으로 판매되었지만 민간에서도 구할 수 있었다.
대륙의 분노(大陸의 憤怒): 노병의 회상기 - 1972
대륙의분노
김홍일 본인의 행적에 대하여 진술한 회고록. 출판사는 문조사. 한국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고려인 및 조선족 디아스포라사, 러시아 내전사, 중화민국사, 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사, 그리고 국공내전사를 연구할 때 주로 참조되는 자료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1948년 중국에서 귀국하기 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김홍일은 그 이후 벌어진 한국 전쟁과 휴전 이후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오래된 서적인데다 절판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현재는 국립 또는 대학도서관들 정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 외 간간히 고서점에 비치되어 있다. 박경석 장군이 지은 김홍일의 전기 소설이자 동명의 KBS 드라마인 <오성장군 김홍일>의 원작이다.
5. 수훈 내역
대한민국
충무무공훈장 (1950-12-30)
태극무공훈장 (1951-07-26)
청조근정훈장 (1960-01-01)
건국훈장 독립장 (1962-03-01)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0-08-11)
중화민국
제남작전유공(濟南作戰有功) (1928)
만가령 회전 유공훈장(萬⊙領會戰有功受大功勳章) (1938)
상고회전 전용감수 화주영예훈장(上高會戰⊙戰勇敢受華胄榮譽勳章) (1941)
중국항일전쟁기념훈장(中國抗戰有功受勝利勳章) 및 항전기념장(抗戰記念章) (1945)
서북시가전유공육해군일등장장(四平街戰功作戰有功受陸海軍一等奬章) (1946)
충근(忠勤)
대수운마(大綬雲摩)
대수경성(大綬景星)
6. 연보
1898년 9월 평북 용천 출생
1920년 1월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및 소위 임관
1921년 대한의용군사회, 한국의용군 참여
1926년 10월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여 (동로군 인사참모 소교, 인사과장 중교)
1927년 3월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 진급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및 1대대장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 22사단 독립경비연대장, 용담전투 승리공훈, (공로장 수여받음)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상해 병공창 병기창주임, 19로군 후방 정보국장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거사에 쓸 폭탄을 구해 주다.
1933년 중국군 제2로군 총지휘부 참모
1938년 중국군 제4군단 102사단 참모장, 무한회전 참가, 만가령 전투
1939년 5월 중국 중앙군 소장진급 (중앙군 최초 한국인 장성), 중국군 19집단군 참모처장 부임
1941년 중국군 19집단군 19사단장 대리로 부임하여 중일전쟁 상고회전을 승리로 이끔 (대 일본군 33, 34사단)
1943년 중국군 육군대학 졸업
1944년 중국군 신편 2병단 참모장, 중국 청년군편련총감부 참모처 소장 처장
1945년 5월 중국 중앙군 중장 진급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사령부 참모장
1945년 11월 중국군으로 복귀,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및 한교사무처장 부임
1946년 9월 중화민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 (육군 중장)
1948년 7월 중화민국 국방부 중장 부원
1948년 대한민국에 귀국
1948년 12월 대한민국 육군 준장 임관 (창군 최초 장군임관자)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장
1949년 3월 육군 소장 진급(대한민국 육군 최초)
1950년 3월 13일 육군사관학교장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장
1950년 6월 30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한강 방어선 전투 지휘)
1950년 7월 5일 육군 제1군단장 임명
1950년 9월 1일 육군종합학교장
1951년 3월 2일 육군 중장 진급
1951년 3월 20일 육군 중장 예편
1952년 주중대사 및 타이베이 외교단장
1961년 5월 외무부 장관
1961년 12월 제9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1967년 6월 대한민국 국회 제 7대 국회의원
1971년 5월 대한민국 국회 제 8대 국회의원, 신민당 총재
1973년 1월 민주통일당 창당발기인
1980년 8월 8일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