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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령 산친구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솔바우
조개골.
............찾아가는 길...................
조개골은 지리산 동부 유평계곡 최상류부 계곡
유평계곡이 품은 손씨골,삼밭골,밤밭골,맹생이골,
물골,한판골,앵골, 신밭골,조개골 중 대원사뒤 골
다른 골짜기에 비해 아직은 사람 발길이 뜸한 곳.
서울 전주 방면에서 접근하기가 최근 한결 쉬워졌다.
평촌리에서 산청으로 넘어서는 밤머리재 도로가 개통.
남원까지 간 다음 88고속도로 인월 나들목에서 나와
지리산 북쪽 임천강변 1084번 지방도로로 접어든 뒤
산청군 소재지 직전 우회전하여 군도 6번 즉 밤머리재
밤머리재길이 나기 전에는 3번 국도를 타고
산청 하정리 덕산으로 빙 돌아 들어가야 했다.
밤머리재 고갯길을 거의 다 내려간 다음
평촌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5km 가면
널찍한 주차장과 대원사 입구 매표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대원사 앞까지 붉은 보도블럭을 깐 산책로
늘 사람이 다니고 노폭이 좁아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대원사 입구를 지나면 다시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변한다.
도로가 좁기는 하지만 차량 두 대가 교행할 정도이다.
용수동 삼거리, 중땀, 아랫새재 마을 지나 윗새재 마을
이 길이 끝나는 곳까지 승용차도 무리없이 갈 수 있다.
해발 700m 윗새재 마을엔 깨끗한 민박집들이 들어섰다.
이 마을 제일 끝집인 비둘기봉 산장에서 도로는 끝나고
왼쪽 조개골 물소리가 짙은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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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국 왕조들의 패망원인 뒤에는 미녀가 있다.
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왕은 정사를 망친다.
조개골은 그러한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고대 중국의 패망한 사례들을 살펴보자.'
진시황의 환관 조고는 충신들의 황제 배알을 막고
간신들만 출입시켜 황제를 정사에서 손 떼게 만든다
술과 여자만 탐닉하며 만수무강하기만 바랬던 진시황.
끝내 객사하고 진시황의 2세도 조고의 농간에 빠진다.
결국 진나라는 진시황의 2세에 초나라에게 망하고 만다
당나라 현종 역시 양귀비 미모에 빠져 나라를 망친다.
양귀비 사촌오빠 양국충은 당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
그러나, 양귀비를 사로잡은 안록산에게 권력을 뺏긴다.
현종을 아버지라 부른 안록산.
현종이 아들처럼 믿은 안록산.
양귀비를 어머니라 부른 안록산.
양귀비보다 나이가 많았던 안록산.
사실은 양귀비의 숨겨인 연인 안록산.
훗날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
얼마후 아들(안경서)에게 살해되고,
다시 안경서도 사사명에게 살해된다.
(안록산 난 + 사사명 난 = 안사 난)
당시 지배계급은 귀족으로 관리가 되는 경우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경우., 두 계층.
하지만, 두 계층은 치열한 암투를 계속하였다
하여, 환관에게 뇌물을 공여하는 부패정치 만연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환관왕조가 된다.
끝내, 주전충에게 패한 당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명나라의 패망원인은 정덕제와 만력제 탓.'
당시, 정덕제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에 빠져,
방중술에 열중하더니, 여성과의 환락에 몰두,
모든 정무를 환관인 유근 등 8명에게 맡겨졌다
그 다음 만력제는 열살의 나이에 황제로 즉위,
초창기에는 장거정 재상을 통하여 개혁을 추진,
일단 성공하였으나, 장거정이 죽자 갑자기 돌변
환관에 의한 부패정치를 부활하여 명나라는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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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왕조 운명을 좌우했던.. 4대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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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침어(물고기가 헤엄치기 조차 잊을 미모.)
춘추 전국시대 말기의 월나라 여인 서시
오나라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보복을 위해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친 미녀.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 잡혀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한다.
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기러기가 날개짓 조차 잊어 땅으로 떨어질 미모.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 흉노와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
선우와 정략 결혼을 시킨 중국4대 미모의 여인으로 유명.
초선(貂嬋) = 폐월(閉月)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릴 미모.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한나라 대신 왕윤의 양녀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의로운 목숨을 다한다.
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을 정도의 미모.
당대 미녀 양옥환은 당명황에게 간택되어 입궁
당명황이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찬탄하여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하였을 정도의 미모.
삼국지 연의에서 왕윤(王允)은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과 여포를 유혹해 둘이 싸워 몰락하게 만든다.
서시는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이 싸우던 때의 미녀.
구천은 패하여 항복하고 부차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한다.
구천은 미인계를 쓰느라 요조숙녀 서시를 부차에게 바친다.
요조숙녀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 '군자의 좋은 짝’이란 뜻.
부차는 서시에게 푹 빠진 사이에 구천은 부차를 패망시킨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고사숙어는 그렇게 해서 생긴 말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미인이자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영웅.
한나라 왕이 흉노족과 화친을 위해 보냈던 한나라 궁녀.
전쟁이 끊이질 않던 두 나라는 오십년간 화목하게 지낸다.
양귀비는 원래 당나라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의 아내였다.
그런데 현종이 양씨의 미모를 보고 혹하여 첩으로 삼은 것.
황제로 하여금 불륜을 저지르게 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여자.
우리나라 역사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
특히, 중국 4대 미녀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
지리산 일대는 역대 중국 패망왕조 유민들 정착지.
중국 주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단이 노나라를 창건
그후 노나라 패망 후손들이 나라 이름을 따서 노씨.
우리나라 노씨의 시조 노수(盧穗)는 중국 범양 사람
755년(신라 효성왕 14년) '안록산의 난'을 피해
9 형제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각각 본관
광산 노씨가 큰집이고, 교하, 풍천, 남원 노씨 등.
'중국 역대 고대 왕조들과 밀접한 한반도.'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으로 형성된 당벌.
당씨 성을 갖고 있는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 마천.
원나라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귀화해 정착한 산청.
삼한시대부터 지리산 일대에 뿌리내린 원주민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이조 구한말을 거쳐 오늘날.
지리산은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
아울러, 고대 중국 역사까지 그대로 품고 있는 곳.
우리나라 성씨를 보면 중국 왕조와도 밀접한 관계.
지금부터 그역사적인 사실을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중국 랴오둥 산둥 해안은 원래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촌.
이정기 왕국 이후에 신라방과 신라촌이 형성됐던 곳이다.
당나라 각지에 흘러 들어갔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
심지어 중국 둔황 지역에 신라촌이 수수께끼처럼 있었다.
당나라가 소수민족을 분산시키는 이주 정책을 구사한 결과.
고구려의 반항적 유민은 티베트로 보내져 동남아로 흘러갔다.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
그를 통해 잊혀진 고구려 후손들의 역사를 알아보자.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고, 민족의 후예는 곧 선조의 얼.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 패자로 군림한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동이족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왔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불세출의 영웅들
수백만 중국인 뼈를 고구려 산하에 묻었던 영웅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
고구려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다시는 고구려 같은 강국이 생기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900년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670년 4월, 보장왕 외손 안승,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일어났다.
뒤이어 대중상,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 국통을 계승
대진국을 세우고 당군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도 다시금 당나라로 쫓겨가야 했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핏줄을 이어가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역만리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고구려 후손.
그들은 뿌리가 고구려일 뿐,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
당나라에서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고구려인도 많았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 심장부에 나라를 세워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기는 당나라에서 모욕 당하는 고구려인들을 보았다.
그래서,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큰 꿈을 키웠다.
이정기는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
755년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하북 지역을 장악.
하여, 요동 평로절도부와 장안 당나라 정부는 분리.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한다.
동쪽에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해 나라를 세우자
이정기는 당나라를 정벌해 중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에 상륙.
당시 산동성 부근에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대군이 왔다는 소식
산동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정기 병력에 합류했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작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몇 만의 병력을 보유했지만
패망 고구려의 유민들의 애국심과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군대는 10만 당군을 격파하고 10개 주를 장악.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
총 15개 주 영토를 통치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 준비.
781년, 당나라의 대동맥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한다.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해 20만 대군으로 총진격
그러나, 안타깝게도 49세의 나이로 이정기는 갑작스런 죽음
이정기의 대군은.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인 병력은 퇴각한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 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
황제에 오르자 그의 사촌과 측근들이 당에 투항하였다.
이납은 결국 당나라 정복의 꿈이 꺽이고 41세로 단명.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등극.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한
하음전운원 150칸 창고의 200만 섬 군량미를 불질렀다.
이어, 낙양성을 기습 궁궐을 불사르며 당나라 후방을 교란
그러나, 말년에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자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 헌종은 제국 공격을 명령.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서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또 한번 가슴 아픈 동족상잔 비극이 벌어진 것.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
이정기를 통해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역사의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망한 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
청해진을 무대로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
장보고는 이정기가 못다한 꿈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다시 10년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 승려 원인이 장보고의 배를 타고
중국 산동 지방 고구려촌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모여 사는 고구려촌을 보고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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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예이자 잊혀진 영웅 이정기와 고구려촌.
중국과 한반도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밀접한 관계.
지리산 일대에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래와 전설들
우선 조개골이 품은 유래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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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골은 일명 얼음골 허공다리골이라 한다.
(얼음골 허공다리골은 함양 방향에서의 지명)
얼음골은 골짜기에 어름터가 있어 유래된 이름.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조개골은 조개골이고
허공다리골은 얼음골 또는 허공다리골이다.
그 이름에 걸맞는 유래를 품고 있는 지명.
그 지명만 들어도 그곳 유래가 짐작될 만큼.
쑥대밭은 불타 모든 식물의 싹조차 나올 수 없는 곳.
불탄 곳에서 제일 먼저 올라오는 식물이 쑥과 대나무.
하여, 쑥과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에서 유래된 '쑥밭골.'
.....................쑥밭재...........................
벽송사-쑥밭재-왕등재-밤머리재-웅석봉-내리마을 27Km
함양 마천과 산청 삼장을 잇는 고개마루.. 쑥밭재
독바위 아래 경사가 제법 부드러운 고개마루..쑥밭재
544년 전 김종직의 유두류록 속 청이당이 바로..쑥밭재.
원래 쑥밭재는 '하룻밤을 쉬어가는 숙박(宿泊)재'
현재 쑥밭재는 '쑥이 많이 나는 고개마루'라는 뜻.
6.25 전란후 38선이 가로막아 피난길이 막힌 인민군.
좌익 세력과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왔던 조개골
결국, 토벌군에 쫓겨 총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은 곳.
그후, 불탄 곳에서 쑥과 대나무가 무성해져, 쑥밭재.
벽송사는 남부군 부상자를 치료하는 임시 환자 수용소.
쑥밭재는 남부군과 토벌대 간에 치열했던 격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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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무심히 쓰는 말속에도 깊은 사연이 담겨있다.
예를 들면 "금테 두르다."는 여인의 신분을 빗댄 말.'
옛날 사대부 여인들이 피임 도구로 사용했다는 금테.
서민 여인은 몸속에서 변하지 않는 마대를 사용했다.
지금은 부작용이 많아 사라진 루프와 같은 피임 기구.
'남녀의 성기를 일컫는 우리말 같은 외래어.'
여성은 步(걸을 보) 藏(감출 장) 之(갈 지)라 보장지.
남성은 座(앉을 좌) 藏(감출 장) 之(갈 지)라 좌장지.
걸으면 감춰지고, 다리를 꼬아 앉으면 감춰진다는 뜻.
'여기서, 감출 장(藏)을 빼 지칭한 말이 남녀 성기.'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다정한 연인도 헤어진다.'
덕수궁 돌담길 지나 가정법원이 있었기에 비롯된 말.
우리말 지명은 그 이름만 들어도 유래를 알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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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골은 치밭목 산장으로 가는 인적드문 지름길.
높은 산은 그곳 만의 산 다운 체취가 물씬 풍긴다.
골짜기는 그곳만의 골짜기 다운 체취가 배여있다.
유평리 대원사계곡을 조개껍질처럼 애워싼 동부능선.
천왕봉 - 중봉 - 하봉 -왕등재 - 웅석봉 = 동부능선.
조개골은 그 안 깊숙히 감춰진 여인의 신비 같은 곳.
윗새재-조개골-하봉-국골사거리-독바위-왕등재-외곡리.
웅석봉 - 왕등재 - 쑥밭재 - 하봉 - 천왕봉 - 웅석봉.
<웅석봉 들머리 : 산청읍 남쪽의 어천마을에서 오름.>
조개골 일대를 오르는 등산로는 모두 인적이 드물다.
끝없이 가리워져 그 끝을 허락하지 않는 베일 속 신비.
마치, 여인의 치마 속에 깊숙히 가리워진 골짜기와 같다.
태고부터 산속에 있었을 흙과 돌, 원시림, 맑은 개울과 공기.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그곳 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분위기는 자연 그대로 남아 있을 때 더욱 그 체취가 진하다.
'날이 갈수록 그 체취가 희미해져 가는 산과 골짜기 풍경.'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도 독특함을 잃어가는 듯 싶다.
그나마 아직은 색다른 체취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골짜기..조개골.
지리산에서 가장 청정하고 깨끗한 계곡 중 하나로 손꼽힘은 당연.
'지리산 주능선은 크게 S자 형태로 흘러가는 산맥.'
전남 남원시 인월의 덕두산에서 바래봉, 세걸산, 고리봉,
만복대, 노고단으로 이어진 능선은 다시 천왕봉까지 1백리.
천왕봉에서 능선은 다시 중봉, 하봉, 쑥밭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를 거쳐 웅석붕까지 연결된 코스.. '지리산 태극종주'.
그 中 지리산 동쪽 끝 하봉에서 웅석봉 사이는 찾는 이가 드물다.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밤머리재 5개 고개가 연 이은...구간.
옛날 마천 주민들이 산넘어 산청으로 왕래 했음을 엿볼 수 있는 곳.
'쑥밭재 새재 중봉 하봉 물줄기가 모이는 조개골.'
대원사 계곡 내원골 지류 중 하나지만,
물이 많아 운치 있는 골짜기인 조개골.
대원사 골 지류로는 손씨골, 삼밭골, 밤밭골, 망생이골, 물골, 한판골,
앵골, 신밭골, 조개골 이름을 갖고 있는 9 골짜기 中 조개골이 맨 위쪽.
대원사를 지나 유평마을, 중땀, 새재마을 거쳐 하봉으로 오르면 보인다.
'아!.. 보인다. 보여.,숨겨진 조개골.'
중봉 하봉 써리봉의 물줄기가 합류
유평 계곡으로 흘러 내리는 조개골.
깊고 높은 산속 특유의 체취마저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이 큰 매력.
지리산 북동쪽 가장 높고도 깊은 곳에 꼭꼭 숨어있는 듯한 골짜기.
그 옛날 마천 사람들이 쑥밭재, 새재를 넘으며 갈증을 해소하던 곳.
조개골 등반 목표지점은 치밭목 산장.
계곡 따라 하봉 써리봉으로 직등 코스.
중봉을 거쳐 천왕봉 당일 등정도 가능하지만,
시간과 거리상으로 치밭목 산장 하룻밤 좋을 듯.
조개골 상단부는 치밭목 산장을 찾는 등산객이나 찾는 곳.
대부분, 유평리, 새재마을, 신밭골, 한판골 따라 무재치기폭포.
치밭목 하산길에도 조개골 대신에 무재치기 폭포를 거쳐 유평마을.
하여, 조개골의 상단부는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골짜기를 타고 치밭목 산장으로 가는 길은 단조롭다.
다른 등산로처럼 미로 속의 길이 아니고 확실히 열려있다.
치밭목 산장을 통해 천왕봉을 가려면, 여기까지만 알면 된다.
'아!....확실히 열려 있는.. 조개골..'
......................................................................쑥밭재...........→
....................................↙........................↖.../........................↘*유평계곡
.................................↙............................ >하봉....무재치기 폭포↘~~장당골↘
..............................↙................................/....*치밭목 산장..조개골*~*대원사..*내원골
................국골.....↙...............마야계곡....*중봉
....................↖......................................./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통천골..천왕샘..법천골...중산리
..........................↖................↙.........제석봉............................↗
......하동바위..........>백무동...............장터목 산장...산희샘......↗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조개골 따라 하봉 쑥밭제로 가는 길.......
유평마을의 산판도로 따라.. 한판골 신밭골 따라..
무재치기 폭포를 거쳐 새재마을 지나면 집터 흔적
깊은 산속 답지 않게 넓은 산판도로가 눈앞에 보인다.
조개골 주민이 원시림 목재를 실어나르던 생계수단의 길.
주변의 광활한 지역은 화전민이 떠난 후, 버려진 옛 화전.
이곳을 떠난 화전민들이 그들만의 이상향을 꿈꿨던 흔적들.
쑥밭재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조개골이 합류.
유평계곡을 거쳐 대원사계곡으로 흐르는 지점.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쑥밭재 지나 마천 가는 길.
현재 등산로만 있지만 예전엔 두 마을이 있던 곳.
마천의 광점동 얼음터로 가거나 쑥밭재에서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뚜렷하다.
조개골 비경을 보려면 왼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된다.
새재마을에서 조개골 입구까지는 평평한 분지인 고산.
마치 조개 껍질을 닮은 듯 아늑하게 들어간 산 속 분지.
'아하!....조개를 닮아서 조개골이로구나.'
조개골 입구에 들어서면 하늘을 가리는 듯한 원시림.
맑은 물 아름다운 계곡과 울창한 수림은 조개골의 매력.
조개골 등반은 계곡 상단부 오른쪽 하봉으로 갈 수도 있다.
아울러, 설악산의 공룡능선 같은 써리봉 능선도 매력적이다.
써리봉은 오랜 세월 조개골의 처녀지 신비를 지켜왔던 관문.
지리산에서 접하기 드물만큼 험준한 암릉으로 이어진 써리봉.
써리봉은 조개골 천년의 신비를 고이 지켜온 숨은 공로자.
써리봉이 없었다면, 조개골의 신비 또한 유지 어려웠을 듯.
조개골 따라 지리산 동쪽 크고 작은 봉우리와 암릉능선, 계곡,
......................................................................................
옛 화전민들의 애환과 '먼 옛날 가락국 마지막 왕'의 발자취
이곳 어디엔가에 그 역사의 발자취가 있을 것 만 같은 곳이다.
조개골이란 지명은 그 옛날 해상왕국 가락국을 떠오르게 한다.
조개골은 김해와 낙동강의 구석기시대 패총을 상징하는 지명.
낙동강 유역은 구석기시대의 패총유물이 출토되는 곳이 아닌가?
혹시,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가락국과 관련된 유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을 알아 보는 것이 좋을 듯.
기원 전 2500년 신석기시대 김해지역에서 발굴된 집단 주거지
조개 무지, 장유수가리 덧띠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 뼈 낚시바늘
기원전 10세기∼1세기 청동기시대, 108년 고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구간사회(九干社會) 김해지역이 가락구촌(駕洛九村) 촌장에 의해 영도,
연합하여 부족사회 단계의 사회생활을 했던 가락국 이전의 고인돌 유물들.
구산동 구지봉, 장유면 무계리, 주촌면 양동리, 대동면 감내리,
상동면 우계리, 진영읍 본산리 독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돌널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좁은놋단검 대롱옥 구슬옥 간돌검 간돌촉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널무덤 구지로12호분, 내덕리19호분, 양동리17호분 427호분.
봉황대유적 철제관 가야식동검 가야식본 뜬거울 중국식청 동거울
그 중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적>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
봉황대 유적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 사랑 이야기가 눈물겹다.
..............가락국의 유물 <회현리 패총>을 찾아서.......................
회현리 패총! 1907년 우리 나라 고고학상 처음으로 발굴 조사한 곳.
그 뒤, 1920년 일본인 하마다, 1998년 부산대 박물관에서 다시 발굴.
회현리 패총은 2001년에 봉황대 유적과 합쳐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
조개무지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골각기,
철기 등과 함께 '화천'이라는 중국 동전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된 불에 탄 쌀
벼농사 기원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가야의 유적들이 전시된 국립 김해박물관
찬란했던 가락국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가야 시대의 집은 반 지하식 위에 벽과 지붕을 올렸다.
전시된 대형움집은 봉황동 소방도로 안 유적 46호를 복원.
고상 가옥은 곡식 저장창고나 제사 때 사용된 특수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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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봉황동 유적지에 얽힌 사랑 이야기..............
봉황동 유적지에는 겹겹이 산책로가 있어 운동하기에 알맞다.
오래 전부터 하늘을 숭배했음을 알려주는 '가야국 천제단' 유적.
봉황동은 청동기 시대 금관 가야의 지배계층들의 거주지로 보인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가야시대의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를 설치
조경수목을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 교체해 가야역사를 재현한 곳이다.
봉황동 유적지 정상은 높은 산이 아닌 언덕에 지나지 않는 곳.
하지만 이곳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비련이 담겨진 황새바위.
가락국 9 대 겸지왕 때 황 정승과 출 정승 두 사람은 가까웠던 친구.
두 사람은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맺고,
아들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
그후 몰락한 황 정승은 아들을 낳았고, 출 정승은 딸을 낳았다.
그렇지만, 출 정승은 몰락한 황 정승과 사둔 맺고 싶지 않았다.
하여, 출 정승은 딸을 아들로 위장해 의형제를 맺었다.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출정승의 딸 여의낭자와 의형제.
'혹시 여의는 여자 아닐까?'
황세는 여의가 아무래도 여자 같이 느껴졌다.
바위 위에서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
여의 낭자는 삼대 줄기를 사용해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여성스러움이 점점 더해가는 여의낭자.'
어느날 황세는 여의에게 개울에서 같이 목욕하자고 한다.
여의는 마침내 스스로 여자 임을 밝히고 혼인을 약속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황세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은 그 공으로 황세 장군에게 유민 공주와 혼인하라 했다.
황세장군은 여의낭자를 두고 유민공주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황세장군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여의 낭자는 슬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민 공주와 결혼한 황세장군은 여의낭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황세장군도 사랑하는 여의 낭자를 뒤따라 죽고 말았다.
유민 공주는 황세장군이 죽은 후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가 오줌누기 시합을 한, 황세 바위.
여의 낭자의 혼이 돌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늘문,
둘이 앉아 놀았던 여의좌, 여의 낭자가 책을 읽었던 독서대.
지금도 두 연인의 속삭임이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듯.
하여, 24살에 죽은 여의낭자의 혼령을 달래어 주는, 사당.
973년에 세운 회운리 사당에서 해마다 단오날 추모제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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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유물들은 가락국의 화려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
조개골은 두 연인의 비련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조개골은 그 옛날 가락국 조상들의 역사를 품은 듯한 이름.
.......................패총(조개더미)..................
선사시대 생활 쓰레기들이 쌓여 이루어진 유적.
바닷가나 강가에 버린 조개, 짐승뼈, 폐 연장, 등
당시 사람들이 버린 조개가 대부분이라 조개더미 유적
그러나, 살림살이에 썼던 토기, 석기 연장, 치레걸이,
예술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드러나기에 생활 쓰레기 터
패총은 무덤을 뜻하므로.. 패구(貝丘)가 더 적절한 용어.
인류가 바다로 식량을 찾아나선 것은 구석기시대.
8만 년 전에도 바다 자원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 바닷가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은 중석기시대
중석기시대는 후빙기의 따뜻한 환경이었으므로
추운 기후에 살았던 큰 짐승들이 북쪽으로 가서
먹이가 줄자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먹이를 찾았다.
한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을 이용했던 남해안의 통영.
상노대 패총에서 중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이 드러난다.
조개더미 유적은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많이 나타나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섬지방에도 많이 있다.
하여,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조개더미 유적은 단순한 생활쓰레기 터가 아니며
그안에 집터를 만들거나 무덤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가비와 흙을 섞어 바닥을 다진후 그위에 지은 집.
통영 연대도 유적과 욕지도 유적에서는 무덤으로 이용
패총 유적은 생활쓰레기가 대부분이지만 인근에 집터들.
서해 바닷가와 섬의 작은 조개더미들은 거의 1차 가공터.
1차 가공한 조개만 멀리 떨어진 집까지 운반.
조개 성분은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일반 유적에는 남아 있기 어려운 짐승뼈·뿔·나무 등
유기질 유물들이 잘 남아 고대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선사시대 살림살이 사회구조 등을 알려주는 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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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한 부동항 보유국 한반도.
조개는 선사시대 한반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량.
특히, 먹이가 귀한 겨울에도 조개는 식량 공급원.
육식 유목민은 큰 동물 사냥감따라 북상.
채식 어업 농민들은 바닷가에 남았던 듯.
한반도 옛 조상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출발
따듯한 한반도에 정착했다가 또 다시 북상한 듯.
특히, 가야 문명은 낙동강 섬진강따라 북상한 흔적.
유목민 기마 민족은 동해안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
농본 민족은 서해안일대 기름진 평야를 따라 북상.
청동기 철기문화를 보유한 민족들은 한반도로 남하
'포경 및 농어업 민족은 일본으로 건너간듯.'
.............
구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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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는 계절따라 월동 서식처를 이동하며 사는 새.
북쪽에서 번식하고 겨울에 우리나라에 오는 겨울새
봄에 남쪽에서 와 번식하고 가을에 되돌아가는 여름새
'그외 구름에 달가듯 떠도는 나그네새와 떠돌이새.'
한반도의 대표적인 여름새는 뻐꾸기, 백로, 파랑새
겨울새로는 기러기, 독수리, 두루미, 부엉이가 있다.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
넓은 하구지역으로 수많은 삼각주와 모래언덕(사구)
낙동강이 넘치거나 태풍이 불면 사라지기도 하는 사구.
철새들은 사구 주변 개펄의 먹이를 먹고 살아간다.
특히, 갈대밭은 철새와 물새들의 안식처로 적합하다.
낙동강 하류 삼각주는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새 낙원.
간혹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저어새 등이 보이며,
제비물떼새, 넙적부리요 등의 희귀한 새도 있다.
낙동강은 러시아 한국 일본을 잇는 철새 도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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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에 철새처럼 떠돌며 살았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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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중국 양자강과 황하강 하류로 이동.
중국에서 한반도까지 대 이동을 한듯
중국 양자강과 황하강은 서해로 모여든다.
두 강 모두 티벳고원에서 발원한다는 공통점.
한반도는 제4 빙하기 전에 황하강과 양자강 하구
제 4 빙하기가 지나며 서해가 형성된 흔적.
양자강과 황하강에서 그 흔적들을 살펴보자
..............양자강 하구.........................
길이(6,300km), 동서 유역 3,200km, 남북 유역 970km
중국 서부 티벳에서 발원해 12개 성(省)과 지역을 통과.
세계 3번째 길이라 장강, 중국의 쌀 70%를 생산하는 곡창.
목화·밀·보리·옥수수·콩·대마 그밖 작물들 재배지역
중국에서 인구 백만 이상 도시가 양자강 유역에 모여있다.
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충칭[重慶] 등등.
중국(한족) 후이족[回族] 네팔 인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남서쪽 고지에 인접한 산악지대에는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티벳고원 동쪽 끝 빙하 만년설 사이로 흐르는 양자강
상류 끝지점에 이르러 해발 300m로 낮아지며 중류 지점.
양잠업. 석탄·구리·인·금·석유 가스 광물이 집중 매장
인구는 성도(成都) 부근 평원에 밀집된 거대한 산업 중심지
하류는 온화한 해안성 기후로,
봄은 따뜻하고 여름은 더우며
가을은 시원하고 겨울은 춥다.
계절풍이 날씨를 좌우하며
여름 가을에 정기적인 태풍
벼농사 2모작 3모작도 가능.
넓은 계단식 모양 경사면에는 호수가 수없이 많다.
양자강 유역은 비교적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바다로 들어가는 수량은 1년에 1,072㎦로, 세계 4위.
우기에 양자강은 낮은 지역을 크게 범람시킨다.
양자강 유수량이 황하강보다 많지만 토사는 적다.
양자강 하구 삼각주는 64년 만에 1.6km 더 늘어났다
양자강 범람은 인근 평원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협
기록에 따르면 BC 206~AD 1960년 1,030차례 대범람
양자강 유역은 평균 50~55년에 1번씩 대범람이 발생.
양자강은 중국에서 수송을 위해 사용되는 주요한 강.
2,700km에 걸쳐 화물과 승객을 실어나르는 교통수단.
화물 수송에 정크가 이용되며 50~100t인 선박도 이용
배수량 1만t 선박은 해안에서 1,100km 떨어진 우한까지
2,000t 선박은 이창까지 갈 수 있으며, 소형선박은 平川.
양자강은 대운하를 통해 황하강 및 웨이허강 지류와 연결.
양자강 유역은 인간 거주역사가 긴 지역 중 하나.
직립원인 화석이 강 북쪽 안후이 성에서 발견되며,
호모사피엔스 유적지도 타이후 호 주변에서 발견
중국 정치 역사는 중국 북부와 황하강 주변에 집중
경제적으로는 양자강 지역 농업 잠재력의 중심지역.
양자강 대운하가 만들어진 것도 곡물 수송을 위한 것.
이 운하의 남쪽은 이미 BC 4세기에 사용,
운하의 대부분은 7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양자강은 정치적·문화적 경계의 역할을 해왔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에 많은 제국 침입의 목표.
양자강 어귀 상하이는 주요한 외국 통상기지 중심지.
.........................................................
"당신들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어도
결코 황하강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하를 무시하는 것은 중국을 무시하는 것.- 모택동-
'황하는 곧 중국인들의 자존심인 강.'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황하.......................
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중국 제 2의 강
길이 5,464km. 유역면적 75만 2443km2. 티벳고원 발원.
중국문명의 발상지이자 신석기시대부터 농경 문화 발달
황허강 유역에는 은(殷)나라의 유물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역대 왕조의 사적도 무수히 많고 토사가 많은 강.
황하 문명은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즉, 은나라 및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는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1.황하강 2.나일강 3.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4.인더스강
왜 중국 문명은 양자강 아닌 황하에서 일어났을까?
신석기시대 양자강은 무덥고 강우량이 많은 늪지대.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많고 무성한 장글.
반면, 황하는 대륙성기후로 건조하고 비옥한 퇴적층.
B.C.770년부터 B.C.221년까지는 제후국들의 싸움
중국 신흥귀족 세력다툼이 만연했던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에 중국 대표적 사상가 노자와 공자가 등장.
최초 중국통일, 문자 화폐를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
중앙집권제 확립, 만리장성 아방궁을 축조한 진시황.
지나친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률로 백성들 원성을 샀다.
진나라 이후 등장한 한 왕조에 열린 실크로드.
수에 이어 출현한 당나라는 인도와 페르시아, 일본,
우리나라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하며 경제 문화 발전.
귀족적인 특징을 갖춘 당 문화는 국제적으로 성장한다.
황하 유역 황토층에서 발굴된 B.C 5000년 ~ 4000년경
신석기시대 좁쌀 등이 재배되고 개 돼지 가축들이 사육.
B.C4000 ~ B.C 2000년 경, 칠무늬 토기를 만들어 썼다.
B.C 2500 ~ B.C1500년경 용산문화 검은 간 토기가 사용.
그 중심지가 산둥성의 용산이므로 이를 용산 문화라 한다.
신석기시대 끝무렵 청동기시대 은(殷)나라 탄생.
가축 소를 이용한 농경문화, 수리공사, 분묘, 청동화폐
상공업이 발달되며 도시가 형성되어 부강한 국가를 형성.
전한의 무제(BC 171~BC 87) 무렵에 철기문화가 거의 보급
황하문명은 널리 확산되며 한문화(漢文化)가 발전.
..........................................................
..........황하문명 발생 연대표..................
~ B.C.6000 : 구석기 시대
B.C.6000 ~ B.C.2000 : 신석기 시대
- B.C.5000년 서안 반파촌을 중심으로 양소문화 발달
- B.C.2800년 전설상의 5제시대
B.C.2000 ~ B.C.1000 : 상왕조
- 탕왕이 하를 멸망시키고 상 왕조를 세움
- 갑골문자에 의한 역사시대의 시작
- B.C.1133년 주 무왕이 '호경'에 도읍을 정함
- B.C.1027년 상왕조 멸망
B.C.1000 ~ B.C. 475 : 서주 / 동주
- 노자와 공자의 출현
- B.C.770년 도읍을 '낙읍'으로 옮기며 동주시대가 시작
B.C. 475 ~ 0 : 전국시대 - 진 / 서한
- B.C.221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 왕국을 세움
- B.C.206년 유방이 황제로 즉위하고 '장안'에 도읍을 정함
- B.C.138년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비단길이 열림
0 ~ A.D. 220 : 동한
- 25년 광무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
- 105년 채윤이 종이를 발명
- 220년 동한 왕조 멸망
A.D. 220 ~ A.D. 420 : 삼국시대 - 서진 / 동진
- 263년 촉의 멸망
- 265년 사마염이 제위에 올라 '서진'을 세움
- 위나라 멸망
- 280년 오나라 멸망
- 5호 16국 시대가 지속됨
A.D. 420 ~ A.D. 900 : 남북조 시대 - 수 / 당
- 420년 남조의 송 건국
- 581년 양견이 남조의 진을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어 수나라를 세움
- 681년 당고조가 수도를 장안으로 옮김
-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가 중국 최초의 여제가 됨
- 881년 황소의 난
..........................................................
..........................티벳...........................
'테베(Thebes)'는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도시 이름이다.
수메르인이 지배한 이집트 나일강 하류에서 중류까지 테베.
테베는 '티베트 고원'의 '티베트(Tibet)'에서 유래된 지명.
테베는 그리스 지명에도 있고 한반도 '태백산'도 같은 기원
중국 산동성 '타이산[泰山]'의 '타이',
타이랜드 '타이'도 테베에서 유래된 말.
'테베'는 우리말로 '토대가 되는 밭'이란 뜻
테베는 '텃밭'과 어원이 같고,
수메르인 중심지를 가리키는 말
슈메르인들은 큰 강 중상류 쪽에,
큰 산맥으로 둘러싸인 계곡을 선호.
그 입구만 막으면 방어하기 좋은 계곡.
'슈메르인 종족 거주지의 공통점.'
.....................................
제4 빙하기 후 중국에서 한반도 왜로 흘러간 문화.
티벳- 양자강. 황하강-서해 -낙동강 선사문명-일본.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까지 슈메르인 이동 경로.
'낙동강 선사문명은 가야 문명의 발상지.'
양자강과 황하 하구 퇴적층에서 농경문화를 형성.
지구온난화로 제 4 빙하기가 종식되며 대홍수 시작.
빙하가 녹아 홍수가 일자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탈출.
'중국 북경. 낙동강. 제주도 구석기시대 유적지들.'
창원 문화재 연구소가 관할하고 있는 가야 문화권역.
경상남도, 부산, 울산 등지는 구석기시대의 공백지대.
부산 해운대 중동·좌동유적, 밀양 고례리 유적지 등등
부산 경남지역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출토지.
좀돌날몸돌은 몽고 극동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에 분포
해운대 중동유적은 일본으로의 문화전파 경로로 보인다.
특히 진주 내촌리 남강유역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
그 지역에서 희소하던 구석기문화를 일부 밝히게 된 계기.
남해안 구석기시대 개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귀한 자료
일본의 화산분출물이 검출되어,
해당 유적지의 형성 연대의 근거.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정착생활
간석기,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사냥과 채집, 고기잡이 등을 생활기반으로 하였으며
농경도 이루어져 조개더미, 집터, 무덤 등이 보인다.
먼저, 해안 대규모 패총유적으로 부산 동삼동패총,
통영 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패총, 김해 수가리패총,
부산 범방패총, 울산 세죽패총, 하동 목도패총 등이 조사
패총에서는 이음낚시바늘 등의 각종 어로구와 조개껍질, 생선뼈
자연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의 어로를 통한 생업활동의 복원
특히 일본열도 죠몽토기와 큐슈 석기, 조개팔찌 자료 대량 출토
한편 부산, 경남지역의 대규모 생활유적의 발굴
남강댐 수몰지구에 화덕자리 갖춘 장방형 주거지
신석기인들이 경남에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는 증거.
합천 봉계리, 산청 강루리 등은 신석기시대 유적지.
기원전 800년 무렵 요령식동검 도끼 끌이 만들어진다.
기원전 300년 무렵 동검, 가지방울, 대쪽모양동기, 방패
자귀·대팻날·끌 등의 공구류, 괭이·가래 등 농기구류,
이삭 거두는 반달돌칼, 곡물 가공에 쓰인 갈판, 연장 숫돌,
이 밖에도 돌살촉, 간돌검 등의 무기 및 민무늬토기의 사용.
항아리·바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모양의 토기를 생산.
진주 산청을 중심으로 가야문화권역 청동기시대의 취락 유물.
울산 검단리 유적 이후 창원 남산유적, 울산 옥현유적, 산청
특히 남강수몰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유적들의 보고.
울산 옥현 유적지 경우, 구릉 사이의 낮은 저지대에 만든 논.
논의 면적은 한 평에서 세 평 미만이고 수로 등등도 발견된다.
이 경작지는 최고로 알려진 미사리 백제밭 보다 1천년 앞선 것.
......................주........................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급상승한 제 4 빙하기 말.
서해 저지대 민족들은 차츰 고지대로 이전한 흔적.
대홍수 시기에는 현재보다 해수면이 무려 140m 상승.
어지간한 산들까지 깊은 물속에 잠긴 청동기시대.
저지대 민족은 살길 찾아 한반도 고지대로 대이동.
청동기문명으로 한반도 신석기문명 원주민들을 제압.
'고인돌은 저지대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유산.'
철기문명 신무기가 개발되며 강력한 고대국가 탄생.
이 무렵 삼한시대가 열리며 고대국가 간 치열한 전쟁.
대홍수가 빠져나간 자리에 수북히 쌓였을 토사 퇴적층.
.......................................................
밭은 현지 표면의 2.5~3m 아래에서 발굴되었으며,
모래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보존된 듯.
밭고랑의 긴 부분 30m, 고랑 폭 35cm, 두둑 폭 50cm.
밭터에서는 반달돌칼·돌칼·돌낫·돌보습·돌괭이
경작용 연장 및 조·콩·쌀·참깨·수수 등이 발견.
.......................主 다랭이 논밭..........................
한반도 원주민들은 신석기 시대 문명.
저지대에서 이주한 민족은 청동기 문명.
원주민이 산으로 쫓겨간 흔적 다랭이 논밭.
지리산자락 산간마을 급비탈 다랭이 논밭들.
역시 고대사회 조상들로부터 치열한 삶의 터전.
지리산에서 사냥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산 흔적.
조개골 산간마을 터 역시
그 중 하나로도 추정된다.
............................................
산청 묵곡리유적, 마산 가포유적, 합천 영창리 유적,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 등에서 확인된 다양한 제사유적
청동기시대의 정신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기원전 300년부터 서력기원까지는 초기철기시대
그 이후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철기시대 후기,
삼한시대(三韓時代)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야문화권을 포함한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대체로 4기
대동강 유역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낙동강유역으로 파급
이것은 움무덤에서 발견된 중국 전한대 철기 유물로 추정.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기원후 300년까지 삼한시대.
진한과 변한은 뒤섞여 있었다
김해 봉황대유적과 거창 대야리유적,
산청 소남리유적이 가야국 시기에 해당.
봉황대유적에서는 3세기 집터와 마을 주위에 돌린 도랑
집터는 네모꼴 타원형이며 집터에서는 바리, 접시, 항아리
이 시기는 움집 형태이며 창고와 같은 부속 시설도 있었다.
가야지역은 철 생산지로서 그 자체가 발전의 원동력
무기 갑옷 등등을 여러 이웃 나라에 수출한 철의 왕국.
동으로는 낙동강 하류, 서남으로는 남해안,
서북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 남쪽
가야는 변한 때 김해 구야국(狗邪國)에서 유래.
특히 하동지역은 신라시대 불교문화 중심지.
반야봉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50리 화개 계곡
신라 불교의 중심지를 이루기도 했던 지역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55년 전국을 10개도로 구분.
상주 소관의 지역을 영남도(嶺南道)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전주 소관 지역을 영동도(嶺東道)라 칭했다.
1106년에 경상도 지방을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 개칭
1204년에 상주안동도(尙晉安東道), 1314년에 경상도로 개칭
경남지역 남해안 일원은 예전부터 왜적이 자주 침입했던 곳.
특히 부산과 동래 일원은 우리나라의 관문
동래의 금정산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
임진왜란 병자호란후 숙종 29년(1703) 축성.
오늘날까지 그 전통적인 맥을 이어온.. 가야 문화권.
점령 국가가 뒤바뀌어 왔어도 그 맥은.. 가야 문화권.
구석기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가야 문화권.
치밭목 산장.
................치밭목 능선....................
경남 산청군 삼장면에 있는 치밭목능선,
치밭목 산장 동쪽에 있는 비둘기봉(1485m)에서
덕천강변 대포리까지 16km에 걸친 남동쪽 지능선
이 능선 상층부는 지리산 권역으로 편입이 되었지만
아직도 미개발 지역이라 산꾼들 호기심을 부추기는 곳,
써리봉(1642m)에 가려 천왕봉(1915m)을 볼 수 없어도,
동부 지리산의 남쪽사면을 고스란히 조망할 수 있는 곳.
이 구간 유일의 삼각점 무명봉인 1018.2m 암봉에 오르면
사방으로의 조망은 막힘이 없어, 북쪽 써리봉을 정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시선 돌리면 밤머리재까지 이어진 백두대간
그리고, 웅석봉의 달뜨기 능선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맑은날 1018.2m봉에서 바라본, 비둘기봉..장당골..
남쪽의 덕천강 건너 하동쪽 산하에서 시천면의 주산까지.
그리고, 구곡산(961m)에서 써리봉까지 치오르는 황금능선,
발걸음 아래로는 무재치기에서 발원한 12km 거리의 장당골,
그 사이엔 내원사능선과 헤일 수 없이 많은 지능선과 지계곡들.
어느 한 곳도 눈길을 뗄 수 없는 비경이라 넋을 놓아야 할 정도.
장당골, 대원사계곡 물은 덕천강, 진양호, 경호강를 거쳐
진주 남강 물길따라 낙동강으로 모여 부산 앞바다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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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 저기가 '달뜨기능선'이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달뜨기 능선은 여순 사건 패잔병이 들어선 지리산 초입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 지리산에 잠입.
1천 4백 눈동자가 연봉을 응시하며 일시에 탄성 "아아!"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 - 이헌상
마침내 그들은 살길을 찾아 지리산에 당도한 것.
덕유산, 백운산 거쳐 지리산으로 숨어든 남부군.
인민군 패잔병, 좌익세력, 여순 사건 동조자 등등.
1950년 6.25 당시 낙동강까지 남침했던 인민군.
UN군의 원산폭격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각한다.
그후 북으로 도주하던 남부군들에게 가로막힌 38선.
'최후의 퇴로' 태백산맥 마저 차단되자 다시 남하.
남부군은 여순사건 패잔병과 합류해 살길찾아 방황.
퇴로가 차단된 그들에게 마지막 숨을 곳은 지리산 뿐.
여순 반란사건은 지리산 '반란의 역사' 불씨.
....................여순 반란 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국군 제14연대 반란 사건.
제주 4.3사태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여수 무력 점거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19일 저녁 8시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14연대 병력을 집결시켜 반란에 동참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장악한다.
이어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 등 전남을 장악
초기 진압작전에서 실패한 정부는 여순지구에 계엄령
광주에 설치한 반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투입 소탕작전.
제2 여단, 제5 여단 예하의 5개 연대를 투입한 정부군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박격포 등을 동원
여순지역 탈환에 성공한 3개월 신생 정부에게는 큰 충격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 반대에도 불구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해 제거한다.
그 바람에 온건 민족주의 계통의 지식인들.
막스 레닌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남녀 대학생들.
북한 공산주의 세력에게 이용 당해 반정부 활동.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
미국은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군사지원을 훨씬 강화.
주한 미군철수를 1949년 6월 이후로 연기하게 된다.
1950. 6.25 당시 낙동강까지 남침한 인민군.
지리산 일대의 여순반란 사건 세력들과 합류.
남한은 공산주의 적화통일이 곧 되는 듯 했다.
미공군 B -29 원산폭격,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UN군 1951.9.18 서울 수복후 인민군 배후공격.
전세가 역전되자 인민군은 38선 이북으로 후퇴.
공산주의 세력에 동조했던 여순반란 세력.
지리산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 빨치산 투쟁.
1963년 11월 남장 여인 정순덕 외 2인 체포.
'마지막 남부군 체포로 반란의 역사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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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리산으로 잠입한 그들은 모두 토벌 당한다.
반세기 전 산속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은 그들
달뜨기 능선이 위치한 곳은 '곰바우산' 웅석봉(1099m).
웅석봉은 경남 산청 한가운데이자
백두대간 종주가 끝나는 지점이다.
지리산에서 달뜨기 능선을 보면서 달바라기를 했을 그들
그들이 달뜨기능선을 보며 달바라기 한 전망대가 치밭목.
남부군의 꿈과 한이 서려있던 전망대가 지금의 치밭목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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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평리에서 대원사를 거쳐 조개골을 오르면, 하봉과 중봉 사이.
하봉과 중봉 잇는 능선, 갈림길 왼쪽이 치밭목산장으로 가는 길.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걷다보면 아담한 산장이 나타난다.
고향 못 간 남부군들이 명명한..'달뜨기 능선.'
조개골과 쑥밭재 언저리에 마련한 남부군 비밀 아지트.
그 건너편 웅석봉 남쪽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처연한 달.
그 달 아래 두고 온 고향 식구들을 그리워 했을 빨치산들.
그 달뜨기능선의 전망대는 치밭목 산장 일대.
달뜨기능선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밤.
교교한 달빛 비친 산장 앞 마당은 꿈속의 분위기.
38선 이남 유격대 덕유산의 남부군들
살길 찾아 이헌상 따라 지리산에 잠입.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의 남부군들.
보름밤이면 앞을 다투어 뛰어 올랐다는 곳.
달맞이하며 고향이 그리웠던 마음을 달랜듯.
해발 1,450m 첩첩산중에 파묻혀있는 치밭목 산장.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원시림과 하늘.
써레봉 중봉 하봉에 둘러싸여 산새들 지저귐 소리뿐.
그외 간혹 비바람 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산장.
도시문명과 단절된채 지리산 태고의 숨결만 존재하는 곳.
짙은 안개, 비바람, 혹한, 울창한 침엽수림과 취나물 군락.
마치 바다 한가운데 외딴 섬에 동떨어져있는 등대와 같은 곳.
무인고도 같은 산장에서는 낯선 산꾼끼리라도 반갑다.
치밭목산장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은 무뚝뚝한 산장지기.
고무신 등산복 차림인 그는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존재.
치밭목산장에 들어와 피와 땀과 젊음을 다 받친 민병태 씨.
전기도 전화도 없이 버너 등불로 어둠을 밝혔던 치밭목 산장.
이곳에서 혼자 살며 수많은 조난객 목숨을 구해냈던 산장지기.
'단지 지리산이 좋다' 는 이유 만으로 지리산의 일부가 된 '민 병태'.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입영 영장을 움켜쥔 채, 토왕성 빙폭등반.
87. 12. 14 에 산장 개장후 부인 정연숙씨와 지영 지현 두 아들은 진주.
'신혼 6개월 만에 16년간 방치된 무인산장에 들어온 그.'
홀로, 지리산 제 2 의 폭포 '무재치기'를 보며 산장생활에 만족해한다.
마차푸차례 산악회의 97년도 인도 히말라야 케다르나스 원정대장인 그.
아직도 산악회 활동에 꾸준한 그의 소박한 바램은 가족들의 경제적 안정.
'이젠 발전기로 전기불이 켜지고 2004년 보수로 달라진 산장.'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진 <치밭목 산장>에서의 낭만적인 밤.
대원사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하는 산악인들 즐겨 찾는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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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밭목은 '취나물 밭 길목'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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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엔 무재치기폭포보다 이곳 경유하는 코스가 안전하다.
이곳에서 일박 후에 중봉에서 맞는 일출은 환상적인 아름다움.
치밭목 산장은 전화 난청지역이라 사전예약 할 수 없는 것이 특징.
일박 5,000 원.. 수용인원 50~60 명.. 민간 위탁산장이라 맥주 판매.
지리산에서 맥주를 파는 산장은 <피아골, 뱀사골, 연하천, 치밭목>
지리산 종주를 하며 치밭목 산장에서 첫날 밤을 보내면 술이 그립다.
때로는 이곳에서 술로 밤을 지새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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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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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민병태
산청군 생초 출생, 거창에서 중고등학교 졸업, 부산에서 대학졸업.
거창 무심(無心)산악회에서 활동하다 진주 마차푸차레 산악회 가입
1997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케다르나스 원정대 원정대장으로 참여
1986년 3월 정연숙씨를 만나 결혼
6개월만에 치밭목 산장지기를 자원.
2005년 현재 그의 나이 52세!
무뚝뚝한 외모에 따듯한 인간미.
“산이 좋아 막무가내로 지리산에 들어오긴 했지만
신혼에 부인을 남겨두고 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고
애들 태어날 때도 곁에 있지 못했기에 늘 미안했지요.”
“이제는 아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해주고 있지만
예전에 산에서 내려와 집에 다녀오면 어린 아이들이
가지 말라고 어리광 부렸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지요.”
민병태 씨는 보통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퉁명한 말투.
그러나 그 순박하고 부담없고 성격에 푹 빠져 들고 만다.
민병태씨가 치밭목 산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6년부터.
1971년 정부는 전국 국립공원에 산장건립 계획 방안을 세웠다.
당시 치밭목 산장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산장으로 방치되었다.
특히 치밭목을 중심으로 인근 써레봉에서 동남쪽으로 구곡산까지
황금능선은 지리산의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이 최후까지 활동한 곳.
1971년에 세워진 치밭목산장은 16년간 방치되며 쓰레기 더미로 둔갑.
등산객들의 반감으로 산장을 폐쇄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국립공원협회 경남지부에서 산장 관리를 맡아달란 제의를 받았던, 그.
민병태 씨는 진주 마차푸차레 산악회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보수작업
1986년 9월 유평리, 새재, 무재치기폭포를 거쳐 이곳에 정착.
써레봉과 중봉에 일제 때 벌목한 나무와 방치한 철도침목 건축재
참나무 원목과 고사목으로 산장의 침상과 주방 조리시설을 만들었다.
산장 뜰에는 7개의 식탁과 의자를 만들어 아늑한 산장을 만들어 냈다.
'2004년 보수로 사라진.. 치밭목 산장의 옛 정취.'
중봉부터 무재치기 폭포까지 8㎞ 등산로 주변 쓰레기를 수거.
안전산행을 위한 나무 사다리를 만들고 등산로를 새로 다듬었다.
1986년부터 3년 간 등산로 개척과 조난 등산객들에 대한 구조활동.
경관이 뛰어난 써레봉 4㎞ 위험구간 새 등산로도 개척.
예전에 치밭목 -천왕봉 코스는 써레봉 암릉을 거치는 8㎞ 외길.
치밭목 산장 뒤에 있는 샘터에서 천왕봉 7 km 새 코스를 개척했다.
거리도 1km 단축되지만, 산책로 같고 주위 풍경도 좋은 등산로이다.
'해발 1,450m에서 치밭목 산장지기의 22년 집념.'
써레봉, 중봉, 하봉의 원시림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었다.
198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수백명의 조난객들도 구조했다.
1997년 부산고신대생 4명 인명구조가 그의 대표적인 활동상.
폭우로 4명이 무재치기폭포 인근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극적 구조.
지금까지 수백여명 조난자들을 구조해 ‘훌륭한 도민상’을 받았다.
이곳에서 1박하며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산행의 즐거움.
철 없는 등산객이 잠든 밤에 그 젖은 운동화까지 말려주는 심성.
청소년들 행여 다칠까 혼내고도 동상 걸릴까 배려해주는 속마음.
치밭목 산장지기 그는, 무인고도 등대지기와 같은 지리산 지킴이.
무뚝뚝한듯 하여도 따듯한 마음씨.
그가 있어 그곳 찾는 발길이 가볍다.
중봉.
......................................................................쑥밭재.
....................................↙........................↖. /
.................................↙............................ >하봉....무재치기 폭포~~장당골
..............................↙................................/.....치밭목 산장.. 조개골..대원사↖..내원골
................국골.....↙.............*마야계곡....*중봉
....................↖......................................./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통천골..천왕샘..법천골...중산리
..........................↖................↙.........제석봉............................↗
......하동바위..........>백무동...............장터목 산장...산희샘......↗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천왕봉 이름은..'상봉'.
'중봉'이란 이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듯 하다.
지리산에서 가장 지리산다운 봉우리를 꼽는다면 중봉.
천왕봉은 이미 환경 훼손으로 지리산다움을 상실.
연일 계속되는 일출 인파로 어느덧 신비감을 상실.
중봉은 아직 지리산 종주 인파의 발길조차 뜸한 곳.
지리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해발 1875 m 중봉(中峯)
대원사에서 치밭목 산장 지나 천왕봉 마주보이는 곳이 중봉.
지리산의 10 경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지리산 제 1의 비경이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2km, 북쪽 하봉 능선과 써리봉 능선을 형성.
써리봉 능선은 국수봉에서 구곡산으로 이어지는 일명 '황금 능선'
산세가 험하고 원시림과 울창한 산죽 때문에 등산로 찾기가 어렵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능선을 분기점으로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중봉골
중봉골을 일컬어 '지리산 최후의 비경 또는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른다.
현재 이 계곡에는 지리산에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을 내걸은 곳.
등산로를 찾으려 해도 잘 찾아 내기가 힘들도록 해 놓은 인적드문 곳.
'처녀의 순결'같은 태고의 신비가 자연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처녀림은 인적의 흔적이 없는 원시림을 뜻한다.
잡목과 가시덩굴이 피부를 할퀴며 앞을 막는 숲.
자칫 잘못 들어서면 길 잃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하여, 처녀림이란 곳은 들어서지 않는 것이 상책.
산에서 위험한 곳의 지명은 거의 여성에 비유한다.
중봉의 처녀림은 산신령도 길을 잃는다는 험한 산세.
중봉 남쪽으로 내려서면 미답의 마야계곡.
중봉 북쪽으로 내려서면 죽음의 칠선계곡.
중봉 능선에서는 좌우 어느 쪽 하산도 위험.
중봉 능선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참으로 아름답다.
중봉 일출을 감상하려면 치밭목 산장 일박이 바람직.
새벽 일찍 치밭목산장을 나서면 중봉에서 해가 떠오른다.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된 천왕봉에서의 일출.
그것보다는 차라리 중봉의 일출을 권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어느 곳도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치, 태고의 숨결 속에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듯 한, 곳.
워낙 인적이 드물어 누구인가라도 사람이 그리워지는 외딴 곳.
인간은 홀로 동떨어져 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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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벗 하나 있었으면..- 도 종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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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하봉(1781m).
산청에서 바라보이는 산세에서 비롯된 지명..'하봉.'
지리산을 하봉 중봉 상봉으로 부를 만한 곳은.. 산청.
옛부터 산청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은 지리산이었던 듯.
'상봉, 중봉, 하봉, 그리고 산청 사람들..'
대부분의 산은 상봉을 중심으로 봉우리 군락을 이룬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이 줄 이어 연결.
하봉은 낮다는 뜻의 봉우리 이름이지만 결코 낮지 않다.
천왕봉 아래 중봉(1875m)처럼 명성을 뽐내지 못하는 하봉.
그러나, 하봉은 그 산세와 빼어난 경관은 지리산 중 으뜸.
지리산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험준한 산세라 인적 뜸한 곳.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의 산세를 이어 두류봉으로 연결
산 아래 추성동마을 뒷산인 추성산성터까지 용틀임한다.
하봉 능선의 웅장함이 잘 보이는 남원시 산내면 삼거리
(인월에서 뱀사골로 가다보면 실상사와 마천방면 삼거리)
마치, 지리산 정기가 꿈틀거리는 형세를 느낄 수 있다.
추성동에서 중봉 거쳐 천왕봉을 잇는 능선도 마찬가지.
험한 산세를 오르려면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등반할 수 있는 하봉 능선도 있다.
추성동 - 하봉 - 국골 또는 얼음골 - 추성동 하산
또는 쑥발재, 치밭목산장, 조개골 통해 대원사 하산.
추성동 마을 뒷산 산등성이 따라 오르면 영리봉이다.
추성산성터가 있고 국골과 얼음골 사이에 있는 능선.
추성산성터는 가락국의 역사적인 체취가 서려있는 곳.
해발 1432m의 두류봉 능선은 인적 드문 곳이었지만
요즘은 등산로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그러나, 급경사때문에 초반부터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두류봉 능선은 지리산 주능선과 산줄기가 보이는 전망대.
지리산 1백리 주능선이 하눈에 보이는 위치에 솟은 봉우리.
천왕봉 -중봉 - 하봉의 암릉과 험준한 산세에 탄복할 정도.
여기에 칠선계곡과 국골을 빚은 산세와 원시림은 감동적.
멀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파노라마
그러나, 하봉은 정상이 숲속 터널과 아슬아슬한 바위 벼랑뿐
더 높은 중봉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
하여, 하봉이 하봉 임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봉에서는 천왕봉이 중봉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봉 능선은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특히 하봉 -중봉 구간은 이 코스의 마지막 절정.
험준한 벼랑과 비탈, 원시림을 맛 볼 수 있는 곳.
이 구간 중간에서 등산로는 치발목산장으로도 연결.
하봉능선 등반은 대개 하봉 정상을 목표로 산행한다.
중봉을 거칠 경우는 넉넉한 일정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
하봉까지 등반하고 국골 또는 얼음골 하산은 당일에 가능.
대략 6∼7시간이면 등반할 수 있는 짜릿한 암릉 등반코스.
추성리.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성을 쌓았다는 곳.
성의 이름 '추성'에서 유래된 마을의 이름, 추성리.
길조의 별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 추성리라고도 한다.
<추성>은 추성리 산 93번지에 위치한 연대 미상의 성.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고 높이 10 여m 망석도 있다
지리산 하봉 아래에 있는 <고성>은 일명 박회성(朴回城)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
<고성>은 현재 사라졌고 흔적 만 일부 남아있다
추성동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가 득도하기 전
십년간 광주리(사투리 : 강어리)를 만들었다는 곳.
하여, 벽송사가 있는 마을의 지명은 '강어리점'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 함양분소 관할.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인 지리산 최고의 계곡.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칠선계곡은 7개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있는 선경
마천면 의탄에서 천왕봉까지 16km 거리 '죽음의 계곡.'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해 계곡과 동떨어진 등산로
추성- 용소 -두지터 - 추성 망바위 - 선녀탕 - 옥녀탕
- 비선담 - 칠선폭포 - 대륙폭포 - 삼층폭포 - 마폭포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최후 항전처로 알려진 국골
지리산에서 제일 험하다는 칠선계곡 하류와 만나는 국골
추성리 주민들은 이곳 가야국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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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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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철선계곡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벽송사사적기〉에 의하면 1520년(중종 15)에 창건
1950. 6·25 전쟁 때 불탄 후 중건한 것이 현재 모습.
천왕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독특한 능선길.
이곳 얼음터 오른쪽엔 엄천강의 용류담, 왼쪽 광점동마을.
광주리점이 있었다는 마을과 벽송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칠선계곡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
보광전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리고 그 앞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절이고 창건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50m 후방 옛 절터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
높이 3.5m이고 보물 474호인탑이 사찰의 창건 시기를 말한다.
1520년(이조 중종 15 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해 <벽송사>
'덕유산과 지리산을 잇는 위치에 있는.. 벽송사.'
1950,6.25 사변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타 소실된 후 중건된 사찰엔 다양한 표정의 나무장승들
순천 선암사 앞에 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지하에 1m 묻혀 있고, 둑을 쌓은 높이가 1m.
왼쪽 장승은 '금호장군'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한다.
두 장승은 사천왕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여자장승은 꼭 다문 합죽이 입, 옴폭한 보조개, 불에탄 머리
남자장승은 짱구, 왕방울 눈알, 얼굴 절반 크기의 우뚝한 코
참나무 조각 얼굴은 소박하면서도 질퍽하고 위압적인 표정.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타령)
그 주무대가 벽송사 일대 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장승 뽑아 불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난 변강쇠.
함양 장승신은 한양 노량진의 우두머리 장승을 찾아간다.
우두머리 장승은 팔도의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이게 한다.
결국, 변강쇠는 8백 가지 병을 얻고 함양 땅에서 죽고야 만다.
'<가루지기>의 변강쇠가 죽은 곳이 벽송사 장승 터.'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은 옹녀와 변강쇠의 상징이다.
사람들의 도에 넘치는 애욕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장승.
예전에 그곳에 수많은 장승이 있었던 터 였음을 알려준다.
.............벽송사의 창건 설화.................................
460년 전,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태어난 송지암.
10세 전에 사서삼경을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
장군의 칭호를 받고 변방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격전지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쟁에 염증
인생 무상을 실감하고 계룡산에 들어가 불교수행에 정진.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쌓던 중
법계 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대사는 이조 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싸리나무 광주리를 만들어 내다 팔고 있던 터였다.
허구헌날 송지암에게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자 3년간 잡일 후 떠난다.
"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라"
송지암은 하산하다가 그 말을 되새기며 돌아온다.
법계대사 앞에 무릎 꿇고 경솔함을 사죄하며 득도.
물욕과 욕망이 사라지자 만물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벽송대사가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 정심대사는 운명.
그후 벽송이 많은 제자들 마음 밭에 법비를 내린 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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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가는길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가홍교 앞에서 1084번 지방도로
유림, 함양 방면으로 2.7km 가면 오른쪽 아치형 의탄교
의탄교를 건너 시멘트길로 1.8km 가면 추성동 칠선산장
삼거리 왼쪽의 비포장길을 따라 1.2km 가면 벽송사이다.
승용차는 벽송사까지, 대형버스는 칠선산장 주변에 주차.
인월에서 의탄리 의탄교 앞까지는 하루 5회 버스가 다닌다.
(인월 -> 의탄리 7:00, 9:40, 15:00, 15:50, 19:30)
마천에서 함양 까지는 1시간 간격으로 군내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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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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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 순찰차와 택시가 지프형 자동차인 함양군 마천면
88고속도로 지리산 IC 나와 60번 지방도 타고 칠선계곡 행.
변강쇠 타령의 발상지인 백장공원(변강쇠 옹녀공원)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개울 건너 논 가운데 느티나무와 실상사.
실상사는 수경스님이 주석해 계시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전북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먼길을 삼보일배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무려 800리 길에서의 고행.
골수와 같은 땀을 퍼붓다가 결국 실신까지 하였던 수경스님이다.
실상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한다.
60번 지방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함양군 마천
마천면은 지리산의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들머리이다.
마천 면소재지를 지나 아치형 다리를 건너 오른쪽 계곡
평평한 바위들이 물에 발 담구고 앉아 쉬라고 유혹한다.
산비탈 밭두렁 가지런한 벌통에 지리산 토종꿀의 달콤함
흘끔흘끔 눈맛을 보며 계곡따라 올라가면 벽송사 안내판.
지리산 IC부터 이곳까지는 약 18Km 거리가 되는 듯 하다.
서암정사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
돌기둥 뒤쪽 사천왕이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다
절에 다니다 보면 늘 보는 험상궂고 무시무시한 사천왕.
칼이나 창을 든 사천왕 조각
큰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부터 서암정사의 색다른 경이로움이 눈길을 끈다.
비탈길을 힘겹게 승용차로 오르면 넓은 주차장이 반긴다.
주차장에서 200 m 비탈을 올라 좌측에 <同歸大海一味水>
우측에 <百年江河萬溪流>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기둥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가면 다시 두 개의 돌기둥이 나타난다.
왼쪽 기둥엔 <調御三千界>, 오른쪽 돌기둥엔 <摩詞大法王>
이 돌기둥들이 일주문이며 해탈문이나 불이문에 해당되는 듯.
참배객 가는 길이란 안내판 따라 오른쪽 절벽에 사천왕 조각.
키가 5m도 훨씬 넘는 우람한 사천왕상들이 우측 절벽에 도열.
보통 절의 사천왕은 나란히 둘씩 마주보고 선 형상과 다르다.
이곳 사천왕은 큰 자연바위 위에 나란히 조각.
무지개처럼 생긴 대방광문으로 들어서면 한옥 같은 미타전.
대방광문이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협곡 같은 입구 따라 몇 걸음 걸으면 화엄의 세계로 들어선다.
주변이 온통 큼직한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 보이는 한옥 건물.
여염집 사랑채 같은 그런 한옥건물 벽에 '방하제연'이란 팻말
아직 버리지 못한 세속, 근심, 미련과 시기심을 떨구라는 의미.
미타전 편액이 붙은 한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극락전
봉긋한 봉우리 형태의 언덕에 굴법당으로 들어가면 굴극락전
안양문(安養門)을 열고 굴법당으로 들어서면 굴속에 있는 법당.
자연 동굴 바위벽과 천장 사방에 온통 부처님과 불보살 조각
굴법당 극락전은 환희심이 넘칠 정도로 굴 전체가 섬세한 조각
아미타 부처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그리고 8대 보살
10대 제자, 나한, 사천왕 등
용, 연꽃 가릉빈가(迦陵頻伽)
굴법당 벽과 천장바위에도 조각.
빈틈없이 조각으로 메운 바위굴.
20 세기와 21세기 양 세기에 걸친 조각들은 걸작 중의 걸작.
장엄함, 정교함과 섬세함이 석굴암보다 더 빼어난 듯 보인다.
지장보살의 지팡이만 보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섬세한 조각.
지장보살님의 손에 들려있는 구슬은 유난히 검은 색 광채.
그 옥구슬은 다른 돌로 가공한 것이 아닌 동굴의 원석이다.
마천 석재는 옥이라 곱게 갈아주면 옥 특유의 광택이 난다
굴법당이 우리나라에서 서암정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서암정사의 굴법당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서암정사의 모든 불상과 조각품들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벽.
돌을 붙이거나 덧댄 흔적이 없는 암굴.
바위벽 제일 위쪽에 비로자나 부처님,
그리고 아래 세 개의 바위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및 선재동자가 조각되어 있다.
극락전을 나와 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비로전이 있다.
맞추기 블록을 쌓아 놓은 듯 놓여진 엄청난 규모의 바위들,
그리고 그 바위에 새겨진 제불 보살들의 섬세한 미소와 표정!
산신령이 거느린 호랑이의 콧수염이 살아 움직이는 듯.
독성님 옆 꽃사슴의 숨결소리가 들릴 듯 섬세한 조각들.
서암정사를 만들기 위해 원력을 모은 원웅(元應)스님
10년간 서암정사 바위벽 조각에 몰두한 석공 홍덕희씨.
1991년 33세에 서암에 들어와 44세에 햇볕을 구경한 석공.
현재 서암정사 남쪽 사천방면에서 또 다른 사찰에서 조각 중.
서암정사는 1960년 초 벽송사 주지 원웅스님의 40년 결정체.
화엄도량 서암에서 소중한 성보는 80권의 화엄경 금니사경전
원웅스님이 85년에 시작해 12년만인 1997년에 완성한 경전이다.
스님이 참선 중 감지(紺紙)에 금분으로 옮겨 쓴 화엄경 60만 자
서암정사 돌탑 저 아래로 추성리와 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서암정사에 깃 든 불심과 신도들의 숨은 정성이 놀라웁다.
......
동굴.
......
지하수 또는 화산폭팔에 의해 생성된 동굴.
종유석 석순 돌기둥 용암굴 또는 해양 석굴.
동굴은 크게 1차와 2차의 두가지 형으로 구분.
1차 동굴은 모암(母岩)이 고화(固化)되며 형성
2차 동굴은 모암이 침적하거나 고화된 후 형성
[1차 동굴]
원통형 용암굴은 용암이 흘러간 길을 따라 동굴.
이런 동굴은 대부분 가지를 치지 않은 하나의 굴
일부는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 암석폭포에서 끝난다.
용암 표면이 냉각되어 고화될 때 생긴 동굴.
용암이 빠져나가며 뚜렷한 원통 모양의 공동.
1차 동굴의 다른 중요한 유형으로는 산호동굴.
이는 천해(淺海)의 산호 군체들이 확장되고 결합될 때
해저공동 주변에 구상 또는 레이스 상의 바위벽을 형성
해안선이 상승하거나 해수면이 하강하게 되면,
산호동굴은 파도작용과 풍화작용을 받게 되므로
기존 공동은 확장되거나 완전히 파괴되기도 한다.
[2차 동굴]
2차 동굴은 기계적 또는 화학적 작용으로 형성된다.
기계적 기원의 2차 동굴로 흔한 것은 해양석굴이다.
이것은 파도에 노출되어 있는 해안 절벽에 발달한다.
파도의 압력에 틈이 생겨 절벽을 갈라놓는다.
파도에 의해 약한 암석 물질들은 깍여나간다.
이와 유사한 동굴은 하천이나 강둑에도 형성.
2차 동굴은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형성된다.
지하수면 아래 용해동굴은 벌집 모양 통로.
지하수면이 내려가 공동의 물이 빠지면
종유석 석순 같은 동굴 침전물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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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신선계곡 환선굴
석회동굴 용암동굴 해식동굴은 한반도의 90%
문경 단양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삼척 강릉 등.
그밖에 옥천계 창리층의 석회동굴
경북 울진의 성류굴이 대표적이다.
남한 200 개의 석회동굴 중 40% 이상이 강원도 지역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제178호)·영월 고씨굴(제219호)
삼척 초당굴(제226호) 평창 백룡동굴(제260호)을 비롯해
용담굴·연하굴·대야굴·비룡굴·동대굴·서대굴·옥계굴·
비선굴 용연굴 저승굴 활기굴 그밖에 충청북도 단양고수동굴
온달동굴(제261호)·노동굴(제262호),
울진 성류굴(제155호), 익산 천호동굴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동굴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의 상초동굴 백령대굴
함경남도 운포동굴(북한 천연기념물 제282호)
용문대굴은 묘향산과 함께 종합관광지로 조성.
용암동굴은 제주도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곳은 세계적 화산동굴지대를 이룬다.
동서 해안 저지대 표선리 용암동굴
제주도에서 80%인 56개 동굴이 밀집
총길이 1만 1,749m 세계 제일 화산동굴
빌레못동굴(천연기념물 제342호)을 비롯
구좌읍의 만장굴·김녕사굴, 한림읍 협재굴
만장굴과 협재굴 일대는 세계적인 동굴
제주도의 중요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특히 만장굴은 종유석 석순이 자라는 동굴.
제주도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
여수의 오동도굴, 제주도의 정방굴·산방사굴
함경남도 홍원군의 청도해식굴, 강원도 금란굴
동해안 지각 융기작용으로 형성된 해식동굴이다.
남해안에는 소규모의 침강 해식동이 형성.
동굴은 원시인들의 주거지로 이용되었으며,
그후로 피신처, 심신 수양의 도장, 기도처.
농작물의 저장소, 군사기지 등 생활에 유용
우리나라 동굴은 내부환경이 화려하고
하천 연안이나 산간지역에 발달되어 있어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종합적인 관광지로 각광
오늘날 동굴은 풍부한 지하수를 이용한 양어장,
각종 연구소, 저장소 등 이용범위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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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승리산 동굴과 대현동 동굴의 사람 화석
앞의 것은 '덕천사람' 그리고 뒤의 것은 '역포사람'
용곡 동굴유적의 '용곡사람',
승리산 동굴유적 '승리산사람',
만달리 동굴 유적의 '만달사람',
금천 동굴 유적의 '금천사람'
두루봉 흥수굴 유적의 '흥수사람'
동굴은 구석기시대부터 선사인들의 살림터
몸돌·망치돌·모룻돌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
짐승 화석이 많이 발굴된 점말동굴 구석기문화층
간단한 잔손질을 베풀어 만든 뼈도구가 발견되고,
집터·사람화석·짐승화석·석기·뼈연모·예술품 등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긁개·톱날·밀개·새기개
한반도 구석기인 먹거리는 코뿔이·하이에나·늑대·
곰 멧돼지 노루 사슴 말 소 오소리 너구리 토끼 등
중석기시대 한반도 민족은 어떻게 살았을까?
구석기인들은 원숭이까지 잡아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시대인 사냥감은 사슴 노루같은 초식성 짐승들.
강원도 홍천군 하화계리에서 중석기시대 유적이 발굴
'연구성과에 많은 기대를 거는 하화계리 동굴.'
동굴은 선사시대 이전 인류에게는 삶의 터전.
구석기시대 인간의 역사는 동굴에서 시작된듯.
하여, 우리나라 사찰은 동굴을 중요시 여긴다.
신라 진덕왕 647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법흥사.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보궁 중의 한 사찰.
법흥사 사리탑 옆에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이 있다.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
신라의 고승 우번조사가 혼자 수도 정진하기를 9년째
어느 봄날, 절세미인이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한다.
수도승 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 따라간 우번.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이 사라지고 나타난 관음보살
우번은 그 자리에 엎드려 참회하니 큰 바위만 우뚝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
훗날 우번은 도승이 되었다 한다.
그 토굴이 10대 기도처인 우번대.
용유담.
1558년 남명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
쌍계사 청학동 신흥사 칠불암 등을 다녀갔던 기록.
덕산동, 청학동 신응동, 용유동 각각 세 번
백운동 한 번, 장항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용이 놀던 곳이라는 뜻의 ‘용유동(龍遊洞)’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명이 3번 찾았던 곳.
지리산 북쪽의 백무동 계곡, 삼정계곡과
전북 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해 엄천강
이 일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 용유동
그 중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 지점
기암괴석이 일대 장관을 이루는 곳이 용유담
조선조 김일손이 이곳에 들러 절경을 감탄
그의 기행문 속두류록에 용유담에 관한 기록.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에 이르렀다.
용유담은 남북으로 뻗은 못인데,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속세와 천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남명을 본받고자 했던 함양 선비들은
남명이 다녀간 흔적을 찾고 싶어했다.
용유담가 바위에 ‘남명선생이 다녀간 곳’
'文貞公南冥曺先生 장구소'라 새겨진 글귀.
김일손, 정여창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용유담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
영남학파 거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란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보내면 그 나귀가 엄천사로 가서
식료품과 생활 필수품을 싣고 왔다는.,구전.
그 나귀가 용유담 가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 둘때 용 아홉 마리가 싸움을 시작
장기에 몰두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는 곳이 용유담가
그곳에 나귀 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남명이 다녀갔다고 새긴 바위 옆에 龍游潭’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