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이라는 말 때문에 겨울을 계절의 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계절의 마무리는 가을이다. 겨울은 묵언(默言)의 시간이고, 봄은 겨울이 낳은 생명이다. 그래서 계절의 마지막은 가을이다. 모든 것이 침잠하고 내려앉는 시간, 그것이 가을이다. 때문에 가을은 정리의 시간이다. 계절을 정리하는 시간이고,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몸과 마음을 정리하기 좋은 곳을 소개한다. 멀리까지 갈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가까운 은해사나 시안미술관으로, 여유가 있다면 주산지가 있는 주왕산까지도 좋다. 그곳에서 절정을 치닫는 가을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호젓한 가을-은해사 은해사의 장점은 가깝다는 것과 조용하다는 점이다. 팔공산 뒤편이라 대구서 30여 분만 달리면 된다. 입장료 2천 원이 있긴 하지만, 무료주차장도 있다. 은해사에 간다면 절 바로 앞의 유료주차장까지 가는 것보다 10분 남짓 떨어진 무료주차장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 1천 원을 절약할 수도 있고 그보다 무료주차장에서 은해사까지의 색다른 골목길을 걸을 수 있다. 새로 지은 번쩍번쩍한 식당들이 손님들을 맞이하는 유명한 여느 절들의 입구와는 전혀 풍경이 색다르다.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자그마한 집들은 유리문에 새파란 혹은 뻘건 페인트로 적어둔 '파전', '동동주' 따위의 글씨들로 자신들이 식당임을 말한다. 곳곳에 주인 떠난 빈집들이 깨어진 창문과 찢어진 벽지의 누런 속을 드러내고 스산하게 떨고 있다. 길가 평상에 나와 앉은 이들도 모두 할머니뿐이다. 하지만, 파전 굽는 냄새는 정겹다. 인적 드문 이 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1970년대로 추억여행 떠나온 느낌일 것이다.
짧은 순간의 과거 여행을 끝내고 은해사에 들어서면 고요함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나지막한 나무들에선 단풍이 절정이고, 새소리는 청명하다. 호젓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대웅전'과 '보화루' 현판은 주의 깊게 보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은해사에서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면 자동차로 2분 거리에 있는 갓방못에서 눈의 피로를 풀어도 좋다. 주산지 같은 이름 있는 호수나 저수지와 비견해도 손색없는 풍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붐비지 않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색깔 있는 가을-시안미술관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이미 자녀와의 소풍 장소로 유명해진 시안미술관. 널찍한 잔디밭이 일품인 곳이다. 지금쯤 가면 봄이나 초가을보다 사람이 적다. 물론 날씨가 다소 쌀쌀하긴 하다. 두꺼운 옷을 챙겨입고 미술이 있는 가을을 둘러보자. 지금부터 12월 30일까지는 '민화의 확장' 특별전시가 마련돼 있다. 꼭 봐야할 전시는 최근 문을 연 문화예술교육센터의 개관전인 '이목을 작품전'이다. 개관 전시회답게 유명작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화가의 작품이다. 전시회는 12월 2일까지 열린다. 미술 관람이 끝나면 푸른 잔디밭이 반갑게 맞는다. 상전벽해까지는 아니지만, 잔디밭이 되어버린 폐교 운동장의 느낌이 새롭다.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운동장을 한 바퀴 걸으면 낙엽이 '빠스락 빠스락' 말을 걸어온다.
◆사진이 남는 가을-주산지·주왕산 해마다 가을이면 마음을 정리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생각, 서른이 넘으면서 하게 됐다. 사람들이 땀을 비 오듯 흘려가며 산 정상에 도착해서 왜 그렇게 사진부터 찍었는지 이 나이쯤 되면 이해된다. 지나고 보면, 무언가에 눈물 흘리고, 무언가를 정리했던 그 시간마저 추억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아름답게 남는 곳, 바로 주산지다. 마음을 정리하러 기왕 가는 길, 예쁜 모습으로 오늘을 카메라에 담자. 내일 돌아보면 오늘의 단풍이 그리움이 된다.
주산지에서는 누구나 모델이 된다. '숏다리'도 고독해보이고, '삐져나온 뱃살'도 심오해 보인다. 새벽 안개 속에서라면 더 좋겠지만, 낮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사람이 많아 사진도 차례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주산지 물에 던져 버렸다면, 주왕산을 걸으며 한 번 더 땅속에 묻어주자. 주왕산은 잘 정비된 길 덕분에 산을 겁내는 아이나 여성이라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계곡물이 얼마나 맑은지 보다 보면 눈까지 청명해지는 기분이다. 돌들이 험난한 곳이면 어김없이 산책로를 조성해두었다. 다만 너무 깔끔하게 정비된 길 덕분에, 걸터앉을 바위가 적은 것이 단점이다. 그리고 단풍철에는 사람이 낙엽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유명세만큼 경치만은 절경이다.
자하교에서 제3폭포까지 3시간 남짓한 등산 코스는 동행자와 대화를 열어주는 이름난 길이다. 흙길을 밟고 서서 주위에 흐드러진 단풍들과 쏟아지는 낙엽비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다.
청송·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영천·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이번 주 여행코스:영천 은해사-시안미술관-사일온천-청송 달기약수탕-주산지 단풍관광-주왕산국립공원-사과 따기 체험 *'어서오이소' 다음 주(17, 18일) 코스는 '과거와 현대의 아름다운 조화 천년고도-경주·포항' 편입니다.
♠ 주머니 Tip 첫날 점심 산채비빔밥 5,000원 은해사 입장료 2,000원 시안미술관 입장료 2,000원 사일온천 5,000원 저녁 달기약백숙 18,000원(2인분) 숙박 모텔 50,000원(성수기 기준) 둘째 날 아침 올갱이국 5,000원 주왕산 주차비 5,000원 입장료 2,000원 점심 된장국 6,000원 사과 따기 체험 5,000원
♠ 경험자 Talk 서울에서 온 관광객들은 영천과 청송의 때묻지 않은 자연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가을 단풍철을 맞은 성수기여서인지 음식과 숙박 사정은 신통치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강미숙(29·여·서울 성북1동)=경북에 이렇게 좋은 명소가 있었는지 그동안 몰랐다. 영천과 청송의 아름다운 자연을 계속해서 가꾸었으면 좋겠다. ▷조성연(37·서울 강동구 성내2동)=주산지를 무척 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만 주산지와 주왕산국립공원에 화장실 숫자가 너무 적어 불편했다. 그리고 냄새가 너무 심하고 지저분해 좋았던 기분을 고스란히 가지고 떠나지 못해 아쉽다. ▷홍은희(34·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초등학교 폐교를 활용해 만든 시안미술관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서울의 수많은 미술관과는 비교되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이경주(28·서울 성북구 길음동)=음식이 대부분 짜고 맛이 부족했다. 서울에서 오는 여정이 너무 길어 피곤한데다 음식까지 입에 맞지 않아 짜증이 많이 났다. 먹을거리 개발에도 신경 써야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