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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이나 사회적인 법은 기준을 제시하고 올바름과 해로움을 알게 함으로써 죄를 억제시키는 효과는 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법을 지킴으로 얻게 되는 유익보다는 법을 어겼을 때 받게 될 처벌이 사람을 두렵게 하여 행동을 억제하게 하지만 삶을 변화 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사회적인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영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종교적인 절기를 지키고 의식을 행하여 의와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은혜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선물과 의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따라 행하고 절기를 지켜야만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다른 복음을 듣고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후에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 종노릇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고 성령으로 시작했을 때 그토록 기뻐했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지 종교적인 의식을 따르거나 절기를 지키는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교도로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신이 아닌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를 신이라 칭하는 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것들은 제우스나 아데미 여신처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신화적인 존재나 형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금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런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의 노예가 되어 두려워하며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은혜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종교와 신들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신으로 숭배하며 그 아래서 종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와 신들을 찾아 숭배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부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종교와 신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풍조와 문화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만 실상은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둠의 영의 지배를 받으며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라는 말과 이제는 하나님을 알뿐더러 라는 말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지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앎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을 지적으로 안다는 것은 호주의 수상이 말콤 턴불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호주의 수상인 턴불과 나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나 소통이 없는 것이지요.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안다는 것은 내가 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나를 아는 것과 같이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아시고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은혜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시고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길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하시는 손길을 경험하면서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신뢰가 깊어진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망설이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불가능 할 때 약속을 따라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통하여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용기와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행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갔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로 도피하여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간구하고 찬송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를 찾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도피하여 가드라는 지역을 통치하는 아기스 왕에게 일시적으로 망명을 하여 생활할 때가 있었습니다.
일 년 사 개월을 가드에 머물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기스의 방백들이 다윗을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면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침을 흘리고 미친체하다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며 찬양했습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선포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로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어 주님을 알아가며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주님이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그물에 가득차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시몬이 다른 어부들을 불러 고기든 그물을 끌어올리니 두 배에 가득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예언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후에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고 배우면서 큰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고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식에 매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미 이방의 종교적인 의식과 예식 그리고 헛된 노력 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유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미 성취된 율법주의의 계명과 레위적인 의식과 제도에 종살이하러 다시 들어갈 수 있단 말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 하반절로 11절에 이렇게 질책하며 질문하고 있습니다.
9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란 무력하고 빈곤하여서 인간을 구원하거나 속량할 능력이 없는 율법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는 말은 외식적인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의 규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성취하셨기 때문에 폐지된 것들이 많습니다.
1) 날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식일과 안식일을 뜻합니다.
2) 달은 초하루에 지키는 월삭과 달의 반복적 운행과 관련된 절기들이 있습니다.
3) 절기는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칠대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 초실절과 나팔절 그리고 속죄일과 초막절 등이 있습니다.
4) 해는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레위기의 율법 절기들은 예수님의 순종과 속량의 은혜로 이미 성취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얻은 자유와 아들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당한 고난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들었을 때 율법을 정성껏 지키게 된 의도와 동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복을 받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 무엇인가 불행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듣고 배운 율법의 행위라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했다면 한국 사람들의 초등학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금기신앙(Taboo)과 무속신앙(Shamanism)과 귀신신앙(Animism)의 토양 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와 문화일 것입니다.
금기 신앙은 어떤 금기사항을 지키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신앙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문지방을 밟지 말라든지 하는 금기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무속신앙은 무당이 복과 재앙을 내리는 신을 통제한다는 신앙입니다.
무당이 복을 내리게 할 수도 있고 화를 내리게 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귀신신앙은 모든 물질에 있는 영적 존재들이 복과 재앙을 주관한다는 신앙입니다.
산에 있는 큰 바위나 절벽에 있는 신에게 복을 빌기도 하고 오래 된 나무나 바다의 신에게 재앙을 피하고 복을 달라고 정성을 다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서 나오는 종교입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의 17대 왕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즉 서기 372년이라 합니다. 이해 6월에 중국의 북부에 있던 나라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보내옴으로써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원하여 네팔과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를 거쳐 태국과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동북아시아까지 전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천 육백 년이 넘는 오랜 기간 한국민족의 종교로써 문화와 생활과 의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교는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시대의 정치와 사회와 가정과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과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갑골학 박사인 김경일 교수는 IMF 직후인 1999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통렬한 한국 문화 비판서인 그 책에서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는 근세에 우리가 겪은 3대 위기인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위기의 근원에는 우리 문화와 의식을 지배한 유교가 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죽은 자를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의식,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죽은 자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김 교수는 유교를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 남성, 어른, 기득권자, 죽은 자를 위한 도덕으로 평가하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사회와 문화에 퍼져있는 신앙은 토속적인 무속신앙과 함께 유교와 불교 등 전통적 종교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초등학문과 기복신앙은 이런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내가 무엇인가 지키고 행함으로 복을 받고 화를 면하겠다는 신앙을 말합니다.
율법적 신앙이란 바로 이런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의식으로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종교와 세상 문화를 따라 종노릇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친근한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나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될 때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복을 더 받으려고 무엇을 지켜 행하거나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이 나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