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 / 박미숙
고등 학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토요일 종례 시간이었다. 난데없이 담임선생님이 나를 반장으로 지목하셨다. 모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배치 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해서 입학식 날 선서했거나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맡았던 아이들 등 쟁쟁한 후보가 몇 명이나 있는데,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럴 만한 능력이 없고, 먹고 살기가 바빠서 학교와는 거리가 먼 엄마는 뒷바라지를 할 수 없을 터라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울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빚에 시달리시던 부모님께 차마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큰언니가 이유를 물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반장을 하면 시간 뺏기니까 만만한 날 시킨 것 같다, 도저히 할 수 없으니 학교 안 가고 싶다.”라고 했다. 안쓰럽게 여긴 언니는 선생님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미 한 말을 바꿀 수 없고 돈 드는 일이 아니라며 거절하셨다.
험난한 반장 역할이 시작되었다.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었다. 환경 미화 심사를 준비하는데, 꾸미는 데 서툴고 돕는 친구도 거의 없어서 우리 반이 꼴찌였다. 생활 검열 시간에 인원 보고하는 목소리가 작다고 꾸중을 들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니 모두 내 탓인 것 같아 면목 없었다. 청소 시간에 친구들이 놀고 있어도 청소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앞장서서 열심히 할 뿐이었다. 도와주는 몇몇은 바닥을 쓸거나 책상을 옮겼고, 추운 날에도 혼자 찬물에 손걸레를 빨아 교실을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회 선생님이 수업 시간인데 교실이 시끄럽다며 반장은 대체 뭐 하냐고 크게 혼을 내셨다.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능력도 없는데 반장 하느라 너무 힘들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지만, 너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은 감당하기 어렵다. 제발 좀 협조해 달라.”라고 하소연했다. 애써 참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교실엔 침묵이 흘렀고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이후로 친구들이 많이 달라졌다. 재주 있는 애들이 앞장서서 교실을 꾸며 4월 환경 미화 심사에서는 2등을 했다. 합창 대회에서도 열심히 연습한 끝에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점점 자신감이 붙으니 인원 보고를 아주 큰 소리로 할 수 있었다. 교련 선생님은 “그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의 그 아이가 맞냐?”라며 놀라워하셨다.
그 당시 우리 반은 성적 1, 2등을 다투던 두 명을 중심으로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둘 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으나 경쟁이 심해 항상 서로를 견제했다. 난 반의 화합을 위해 이쪽과 저쪽의 눈치를 보며 중재자 역할 하기에 급급했다. 좋은 말로 해서 중재자이지, 이래도 ‘응’, 저래도 ‘응’하다 보니 ‘내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모두에게 맞추려다 보니 내 생각을 분명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분위기를 좋게 지키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이. 친구가 수학 문제를 물어 오면 할 일 제쳐 두고 가르쳐 주고, 고민을 털어놓으면 얘기 들어 주느라 계획했던 것은 다 뒤로 미루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이런 성향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다.
대학 입학 후 철학 시간에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정체성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자그마한 일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내 태도를 고쳐 나갔다. 진정한 내 목소리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나’가 되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눈물과 두려움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일 속에서 가끔 흔들리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반장을 맡았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눈물이 사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 씨앗이었다. 눈물의 무게를 이겨 낸 덕분에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