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생긴 일
- 달아난 입맛이 돌아오기까지 / 송덕희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교직에는 퇴직 전 별도의 준비 기간이 없다. 그나마 작년부터 20년 이상 근무하면 장기 재직 휴가 7일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이집트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의견이 맞지 않은 데다, 예기치 않는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일어나 결국 포기했다. 대신 찾은 곳이 베트남 남쪽의 나트랑과 달랏이다. 경기도 다낭시, 하노이시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간다지만 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접근성이 좋은 여행지는 더 나이 들어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미뤄 둔 터다.
친구와 인천까지 네 시간을 달려 가서, 수속 밟고 비행기 타고 나트랑 깜란 공항에 도착하니 닷새 중에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다행히 첫날은 5성급 호텔(Best Western Premier Marvella Nha Trang)에서 묵게 되었다. 다음날 일정이 느긋하여 수영하고 조식을 즐길 생각이었다. 31층 수영장은 레스토랑 바로 앞에 있었다. 멀리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가 깔린 쩐푸 해변, 줄 지어선 야자수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막 떠오르는 햇살이 눈부셨다. 공직에 몸담아 온 38년 세월을 한번에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전날의 피로를 씻어내듯 물로 뛰어들었다. 이른 시각이라 수영장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친구는 연신 포즈를 바꾸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배경이 워낙 멋지다 보니 모델도 한층 돋보였다. 떠오르는 햇살을 함께 담으려고 옆모습을 찍는데, 자기 폰으로 레스토랑 쪽으로 가서 더 멀리 잡아 달라고 했다. 서너 걸음을 옮겼을까? 젖은 발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쭉 미끄러졌다. 동시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공중으로 떴다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아니면 대자로 누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순간 머릿속에는 ‘빨리 꺼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몸만 붕 떴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사력을 다해 잠수했다. 두 번째 만에 가까스로 휴대폰을 건져 올렸다. 친구는 재빨리 물기를 닦아내고 전원을 껐다. 알고 있는 상식을 동원해서 대처했다.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 드라이기로 말리자고 내가 제안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물기를 빼려고 흔들거나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쐬는 건 오히려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휴대폰은 올해 새로 산 것이었다.
친구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혼비백산이 된 나를 먼저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넘어졌는데 아픈 곳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넘어진 기억이 없고 다치지도 않았다. “그때는 빠진 전화기만 보이더라.”고 말했다. 햇볕이 잘 드는 쪽에 세워 두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단 밥을 먹자고 했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흥분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보다 휴대폰이 고장 나면 어쩌나? 보상은 차치하더라도 사진 찍고 검색하고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불편할 걸 생각하면 미안하고 막막했다.
수영복 물기를 대충 닦고 가운을 걸친 채 식당으로 갔다. 이런 행색으로 아침을 먹으려니 참 난감했다. 원래 계획은 달랐다. 물개처럼 멋지게 수영하고, 우아하게 조식을 즐기는 아침이어야 했다. 물이 조금씩 떨어지는지라, 수영장 바로 옆 나무 테크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접시에 조금 담아 온 음식을 먹으려는데, 직원이 왔다. 세팅되지 않은 그곳은 앉지 말란다. 또 옷을 갈아입으면 좋겠다는 눈치다. 그 순간 어찌나 민망하던지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탈의실에서 챙겨 온 원피스를 입고서야 새로운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베트남 요리는 채소가 없으면 밥 먹은 것 같지 않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채식 중심이다. 해안가에 접한 길쭉한 지형의 영향으로 육류보다 수산물의 비중이 높다 보니 세계에서 비만율이 가장 낮은 편이라고 들었다. 호텔 조식은 베트남 음식으로 즐비하게 차려졌다. 쌀국수에 들어갈 라임, 고수 등 재료만 수 십 가지다. 오색 쌀로 쪄낸 밥과 노란 볶음밥, 독특한 향신료 냄새 밴 면 요리들이 길게 놓여 있었다. 용과와 수박, 애플망고 등 동남아 열대 과일도 풍성했다. 하지만 아무 음식도 긴장한 내 입맛을 깨우지 못했다. 따끈한 미역국이 그나마 언 마음을 조금 녹여 주었다. 새콤한 사과 주스 한 잔으로 입가심하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새벽에 눈을 뜬 뒤 아침을 먹기까지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여행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일행들의 관심은 휴대폰이 제대로 켜질 것인가에 있었다. 24시간은 지나야 안전하다, 요즘은 생활 방수가 되니 언제든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완벽하게 되는지 한국 대리점에 문의해 보자 등 의견이 분분했다. 우리는 정확히 정오에 전원을 켜기로 했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괜히 숨이 막혔다. 드디어 열 두시,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모든 기능이 멀쩡하게 작동했다. 그 순간 물에 빠졌던 휴대폰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내 세포가 덩달아 꿈틀댔다.
달아난 입맛도 돌아왔다. 점심은 채소와 쌀국수, 돼지고기를 소스에 적셔 먹는 분짜와 숙주, 고기, 새우를 넣어 부쳐 낸 반쎄오를 맛있게 먹었다.
시름이 걷히자 비로소 나트랑의 바다와 달랏의 바람이 온전히 느껴졌다.
첫댓글 하하! 입맛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뻔했네요.
그러게요. 입맛 좋아져 큰일입니다. 하하하.
글을 읽는 내내 제가 다 가슴 졸였습니다.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천만다행입니다.
다치신 데는 없나요?
네, 다친 데는 없습니다. 액땜하고 출발해야 여행이 오래 기억되나 봅니다. 재미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