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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일상에 기적과 회복이 있습니다.
스가랴 10:1~12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어제 페이스 북에 다음과 같은 올렸습니다.
“교회 앞 교차로에 늘상 2,3개 이상 다른 교회 현수막이 붙어 있다. 오늘은 같은 교단 현수막도 붙었다. 지금까지 교회 건물 외에는 한 번도 외부에 현수막을 붙여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현수막들을 볼 때마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곤 한다.
“교회들의 무한경쟁!”
“교회를 알리고자 하는 몸부림!”
“나도 붙여야 하나?”
“교회와 인접한 곳에 붙이는 건 예의가 아닌데..”
“안 믿는 분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등등...
그래도... 아직까진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려한다!
이 목사님의 글을 읽고 저도 같은 성결교회가 있는데 그 근처에다가 현수막을 붙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몇 분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현수막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시잖아요. 내가 가서 떼어 줄까요?”
“그래요! 세상 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잘 하는 것처럼 보이고, 마음의 동요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정도를 가는 거야. 너는 너의 일을 계속하라. 나는 오직 주님의 길을 가련다! 이런 마음으로 가는 거야.”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진심어린 위로와 권면이 좋게 보였습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교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 교회도 이제 새롭게 교회를 개척해서 주민들에게 교회를 알리기 위해서 길거리에 현수막을 달았겠지요?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겁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같은 성결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조금만 떨어져서 현수막을 달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 지역을 품고 기도하시는 목사님과 동역하지는 못할지언정, 그것도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들끼리 무한경쟁을 해서야 어떻게 사랑과 화합의 복음을 외치겠습니까? 맞아요. 현수막에 힘이 있는 게 아니에요. 오직 우리의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잘 바라보지 못해요. 때로는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낙심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이 잘 보이질 않아요. 이런 면에서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아요.
그래서 행복은 3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유기성 목사님이 쓴 글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뉴질랜드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뉴질랜드는 이 세상에서 자연 환경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지역입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이 손님을 마중 나가기 위해서 공항에 나갔다가 한국인 관광객 아주머니 한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관광객 아주머니께서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기 사세요?” “행복하시겠어요. 얼마나 좋으세요?”라고 묻더랍니다. 이 목사님이 엉겁결에 “아, 예”하고 대답했는데 뒤돌아서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아, 나도 한 때는 저랬는데!” 무슨 말이지요? 맨 처음에 뉴질랜드에 왔을 때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고 감탄하고, 이곳에 온 게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졌는데, 한참을 살아보니 거기도 별 수 없더라는 거지요. 인생은 원래 그런 겁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머리를 깎으면 반나절이 행복하고, 양복을 사면 일주일이 행복하답니다. 집을 사면 한 달이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일 년이 행복하다고 그래요. 이 세상에 영원한 행복은 없어요.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곳에 행복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만나나요? 물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만나야지요. 그런데 일상적인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날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눈꺼풀이 벗겨지고,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지요.
우리는 큰일을 닥쳐서만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구구절절 필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이라면,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운전대를 붙들기 전에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운전대를 붙들어주셔서 아무런 사건, 사고가 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자녀들에게 친절하고 좋은 모범을 보일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한 번 보십시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이 말씀은 봄비가 올 때에 구름을 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비를 구하라는 겁니다. 얼핏 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봄비가 내려야 할 때에 하나님께 비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봄비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 비를 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때가 되면 내리는 비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내 인생이 풀릴 것인데, 구지 평범한 일에도, 작은 일에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봄비는 과연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봄비는 ‘늦은 비’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는 봄에 씨앗을 뿌려서 가을에 곡식을 추수합니다만, 유대인들은 거꾸로 가을에 곡식을 뿌려서 봄에 추수를 합니다. 추수하기 직전에 봄비가 대지에 흡족히 내려주어야 영근 알곡들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봄비가 내려주지 않으면 일 년 동안 수고한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봄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일 년의 수확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일 년 간 수고하고 애를 써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늘에서 흡족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서너 시간밖에 잠을 못자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름을 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흡족한 소낙비를 내려 주셔서 풍성한 밭의 채소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찾아와도, 조금만 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꼬여가도,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우상을 찾아가고,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2절에 나오는 드라빔과 복술자가 다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찾아가 복을 빌고,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위로는 다 헛것이다.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아실 겁니다.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 분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 아침, 댈러스에서 조찬을 하던 중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기자들은 그 모자를 쓴 대통령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때 케네디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백악관으로 오시면 그 때 멋진 모자를 쓴 제 모습을 찍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월요일에 백악관에 갈 수 없었습니다. 댈러스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선한 길, 복된 길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모두 12번씩이나 반복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라는 단어입니다.
6절은 말합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6절에서만 벌써 “내가”라는 단어가 3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고, 요셉 족속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유다 족속은 남 왕국 유다를 가리키고, 요셉 족속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이미 바벨론에 멸망당해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있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도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 왕국 유다 백성이건,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이건, 모두 구원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구절 더 읽어보아야 할 곳은 8절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
하나님은 휘파람을 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을 것입니다. 휘파람을 부시는 하나님. 이것은 목자와 양의 배경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못해서 목자를 눈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양은 목자가 부는 독특한 휘파람 소리에만 반응할 뿐입니다. 싱그러운 목초지에서 수많은 양들이 뒤섞여 풀을 뜯어 먹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목자들은 자신들의 양을 인도하여 들이기 위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휘파람을 불어댑니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도 양들이 뒤섞이지 않고 자기를 인도했던 목자의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간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하고 만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부실 때, 그 음성을 들었던 양들은 기쁨으로 목자 되신 하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휘파람을 불어 열방에 흩어졌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실 것입니다.
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을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심과 다시 모으심의 원리입니다. 흩으심과 다시 모으심의 원리, 이 두 가지 원리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어가십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방 나라들 가운데 흩으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며, 점쟁이들을 찾아가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 위로가 헛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여 곤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 모든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흩으시면서 까지 그들이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길 원하셨을까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너희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은 것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이방 나라들 가운데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휘파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양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출애굽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여정이라면, 두 번째 출애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날 때에 바다 물결을 쳐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두 가지 원리, 흩으심과 다시 모으심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9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을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여러 나라에 흩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먼 곳에서 하나님을 다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휘파람을 불어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흩으시고, 다시 불러 모으시는 일은 전혀 의미 없는 불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비록 고난의 과정이지만, 그런 과정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기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을 다시 의지하도록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에 적었던 저의 영성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설교를 마치고 싶습니다.
“오늘은 큰맘을 먹고 침신대 도서관에 들렀다. 전도와 양육, 설교 준비 등 바쁜 일정으로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는데 모처럼 자유시간을 갖고 있다. 김전도사님과 유리, 은비를 만나 교제하였고, 단톡방으로 우리교회 청년들과 교제하였다.
목사이지만 아직도 개인적인 시간활용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침신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몇 시간 째 나 자신을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도서관에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필요 없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경을 읽으며, 설교의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든 일에 잘 해야 된다는 잘못된 프로의식이 들어온 것 같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어야 하고, 교회도 빨리 안정되어야 하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나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감사의 제목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것들에 대해 더 감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 사이에 참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감사이고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귀히 여기며 사역하고 싶다.
오늘은 늦게까지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놓을 계획이다. 그냥 그 자체가 목적이다. 목적을 낮추니 행복하다. 귀한 시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정말 여러분들이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상황과 처지에 여러분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향해 휘파람을 부실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다시 부르시고, 이제 남은 인생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견고하게 살도록 만들어 가실 겁니다. 과연 누가 여러분을 이렇게 만드실까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겠다.” “내가 직접 하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하시고, 다시 기적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귀하고 복된 삶이 여러분의 인생에 펼쳐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