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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이 뽑은 올해의 좋은 시조, 좋은 시조집 총평-2018>
애증(愛憎)도 눅어지는 무명차의 향기
정용국(시인)
1. 찻잔을 고르며
시를 감상하는 일은 차를 우려서 맛보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성장과정과 이력의 일단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작품을 읽으며 독자들이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듯이 차를 우려내 음미하며 마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감정의 향연을 느끼기 때문이다. 시집을 고르듯이 우선 차를 골라야 한다. 녹차인 작설(雀舌)은 우전차(雨前茶)로 불릴 만큼 곡우를 전후해 그 맛의 절정이 바뀌며 우롱차의 종류인 철관음(鐵觀音)은 늘 무게감을 견지하고 숙차(熟茶)인 보이(普洱)는 초보자들이 마시기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으니 함께 마실 상대방을 배려해서 골라야 하고 그 날의 감정에 따라 구미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다. 차박사 박남식 선생의 화륜선차 향과 화개동천 벽사(碧沙) 김필곤 시인의 달빛초당차의 향을 저울질해 보는 것은 차인의 심성과 이미지를 맛보는 일인지라 가히 카타르시스의 경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다기를 고르는 일은 더 재미있다. 영남요 백산(白山) 김정옥의 것과 문경요 도천(陶泉) 천한봉의 다기가 유사해 보여도 무게감과 날렵함이 다르며 현대적 감각의 미를 담뿍 지니고 있어도 구천요 구진인의 감칠맛과 통가마 무유도자기를 굽는 김대웅의 손맛은 각기 다르다. 전라도 무안 월선리의 흙을 사랑하는 승광요 김문호의 중량감과 수레질의 명장 박순관의 무늬를 골라야 하는 것은 행복한 고민이며 즐거움이다. 여름이라면 얇고 활짝 펼쳐진 잔이 좋겠고 그리운 연인에게는 진사가 엷게 박힌 잔이 어떨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차받침은 투박한 마무로 할까 그녀에게는 도톰하고 굽 높은 자기 받침으로 할까 손님을 기다리며 마음이 바빠진다. 첫물과 다시 우린 맛의 묘미가 정겹고 다완(茶盌)에 타서 내는 말차(抹茶)는 팽주(烹主)의 이쁜 손과 정성을 느끼는 재미를 더하게 되니 금상첨화라고 해야겠다. 설렘을 누르면서 다양한 차와 다기를 고르는 마음으로 오늘은 계간 『다층』이 선정한 2018년에 발표된 시조 10편과 두 권의 시집 앞에 가만히 앉아 본다. 올해의 선정작은 다소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80년대 등단자들의 작품은 아예 보이지 않고 90년대 이후에서부터 2017년 등단자까지 다양하고도 감각적인 작품들에 우선 놀랐다. 이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려니 마음을 다잡아 앉히고 모양과 맛이 특별한 올해의 시조를 우려보기로 한다.
2. 다관 안의 고행도 향연인지라
시의 주인공은 ‘나’일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모든 주변과 상황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변하며 작용한다. 그래서 시에는 또 다른 ‘나의 분신’이 오롯하게 깃들어있다. 나의 분신은 내 희망사항을 담고 있거나 나의 슬픔과 처지를 하소연하고 있을 수도 있다. 먼저 슬픔을 정화하여 내 가슴에 앉히고 고단한 나를 위무하는 따듯한 두 편의 시조를 만나본다.
새벽 풍경 지켜보는 새라 해도 좋겠다 내 몸 안에 흐르는 강물이면 어떤가 산책로 비탈에 놓인 빈 의자도 좋겠다
버리기 전 세간 위에 지문으로 새겨진 눈물 흔적 비춰보는 달빛이면 또 어떤가 그날 밤 술잔 위에 뜬 별이라도 좋겠다
깨알같이 많은 어록 남겨놓은 발자국에 비포장 길 얼룩 같은 달그림자 지는 시간 빈 방을 돌고 나가는 바람이면 더 좋겠다 - 김삼환 「그리움의 동의어」 전문 -
창 밑에 찾아온 국화만 손님인가 콧등에 톡, 톡톡 비꽃만 손님인가 노곤한 신발을 끌고 온 나도 나의 손님이다
쌀쌀한 도시에서 구르고 굴렀으니 식탁을 차리고 국도 데워줘야지
생이 늘 친절하진 않았다 갸륵한 나의 나여 - 강현덕 「손님」 전문 -
슬픔을 거름 삼아 시인의 생각은 야물어졌고 이리저리 몸과 마음을 내둘려 고생시킨 자신에게 시인은 악수를 청하며 등을 두드려 주고 있다. “새, 강물, 빈 의자, 달빛, 별, 달그림자, 바람”등의 무심한 자연과 ‘빈 의자’는 “좋겠다”라는 긍정 마인드에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어떤가”라는 의문형 술어를 만나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또 그에 걸맞는 서술구를 만나서 한층 더 고즈넉하고 유려한 사색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움의 동의어”라고 붙인 시제는 하나씩 병치된 일곱 개의 소재들과 나란히 서로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있다. 김삼환은 자신이 제시한 많은 사물들을 어느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유발한 ‘그리움’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 사물들의 이면에는 ‘그리움’의 주체인 사람과 직결된 사연이 담겼거나 사물을 통하여 회억할 수 있는 단초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소재로 택한 사물들과 그것이 놓여 진 배경이 너무나 소박하고 자연스러워서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더욱 애절하게 묻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렬하다거나 귀하고 만나기 어려운 대상이 아니라서 ‘그리움’은 배가되고 그 뒷모습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소박하고 자연스런 가치를 더욱 도드라지게 비춰주고 있다는 점에 모아진다.
강물도 “내 몸 안에 흐르는 강물”이고 달빛도 “눈물 흔적 비춰보는 달빛”이며 발자국도 “깨알같이 많은 어록 남겨놓은 발자국”이니 이 얼마나 간절한 그리움인가. 그런 간절함이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냥 “빈 방을 돌고 나가는 바람이면 더 좋겠다”라고 에둘러 태평한 것처럼 보여주는 시인의 마음 근저에는 애끓고 날뛰던 마음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달래고 눌러놓는 데 아마 긴 시간이 걸렸고 돌처럼 무겁고 커다란 마음이 까맣게 탔을 것이다. 슬픈 마음을 거름으로 삼아 이렇게 숙성된 시간을 가지게 된 시인에게 큰 박수를 보낼 일이고 그 긴긴 마음의 끝가지에 가만히 손을 대볼 일이다.
강현덕의 작품에는 고맙고 합당한 마음이 자신을 향하여 서있다. 마치 인내천(人乃天)의 마음으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외쳤던 수운(水雲)과 해월(海月)의 마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마테오 리치(Ricci,M)의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통하여 기독교 교리까지 탐독했던 수운은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임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나를 향하여 제단을 차리라고 말했으니 그것이 바로 향아설위의 근거인 것이다. “노곤한 신발을 끌고 온” 것으로 보아 나는 얼마나 길고 먼 시간 동안 위험하고 비루한 일들과 마주했을까. “생이 늘 친절하진 않았”으니 나는 얼마나 “갸륵한 나의 나”인 것일까. 바로 이 마음의 기본 바탕은 천도교의 교리와 상통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우리는 나를 잘 받들지 못하며 사는 것이 대개의 인심이다. 내가 없으면 헌신도 봉사도 사랑도 나눌 수 없는 일이건만 잘나고 위압적인 한국의 대도시 서울에서의 삶이란 “쌀쌀한 도시에서 구르고 굴렀으니”라는 표현이 지나침이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치고 고단해진 나에게 “식탁을 차리고 국도 데워줘야지”라는 말만큼 따듯한 것이 또 있겠는가. ‘나’는 ‘나’의 밥상을 받고 아마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지도 모른다. 아 ‘나’여 고생하셨으니 따듯한 밥상으로 모든 간난(艱難)했던 기억을 지우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차가 제대로 우려지려면 적당한 온도의 물이 다관 안에서 유지되어 찻잎이 잘 펼쳐지게 하여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뜨거운 물에 잘 덖어진 찻잎이 몸을 푸는 과정은 고행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깊은 차 맛을 내기 위한 아름다운 향연이려니 슬픔을 이기는 도정도 나를 받들어 모시는 일도 모두 아름답고 대견한 수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3. 마음이 눅어지면 시는 높아지리
시작(詩作)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심사가 뒤틀리거나 격노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시가 나오기 어렵고 절제와 균형감각을 지키지 못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은 시를 쓰려면 아픔도 기쁨도 잘 삭여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끔 시인들은 자신의 시작에 대해 깊은 토로를 하기도 하고 시의 한계점에서 갈등하거나 주저앉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한 올을 내비치는 작품을 시인들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한다. 시집 『앵통하다, 봄』에서 자신의 시에게 지나칠 정도로 회초리를 들었던 바 있는 임성구 시인이 이제는 마음을 눅이고 자신의 시를 다독이고 있다. 서희정의 시에는 신인으로서 창작 과정에서 느낀 어려움을 진솔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나는, 정형의 맛을 내는 요리사다 ‘주제’라는 재료를 도마에 올려놓고
여러 겹 칼집을 내며 네게 닿을 말 손질한다
200자 원고지에 차려놓은 요리가 어느 날은 심심하다고 어느 날은 짜다고들,
매서운 각주 다는 그 사이 꽃 떠나고 눈이 나린다 - 임성구 「맛의 방주(傍註)」 전문 -
시를 생각하고 시를 불러 오는 일
포기한 낱말들이 불신의 눈초리가
타협할 기미가 없다 잔상들만 날아간다
꽃은, 꽃으로도 충분히 정직한데
알맹이가 빠져버린 한 줄 시의 배고픔이여
비겁한 시차적응에 밤눈이 어지럽다 - 서희정 「결정적 오류」 전문 -
시인을 요리사에 비유하고 있다. 음식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원천이려니 어쩌면 시인보다도 귀한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람의 정신을 보듬는 사람이니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족속이다. “칼집을 내며/ 네게 닿을 말 손질한다”에는 식재료를 손질하는 것과 같은 현장감이 깃들어 있다. ‘정형의 맛을 내는 요리사’는 시조시인이니 복어 요리사가 특수 자격증을 소지해야만 가능하듯이 우리말의 격조와 보법에 능통한 사람이어야 하리라. 시조는 자유시와는 달리 정형의 특장을 살려내며 서정이나 비유의 유리 결을 내야하니 “어느 날은 심심하다고 어느 날은 짜다고들,” 투덜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매서운/ 각주 다는” 독자와 평론가들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니 칼을 잘 놀려서 조심스럽게 ‘손질’하여야만 한다. 주(註)에 휩쓸려 다니며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는 방(傍)이 허물어지고 자신만의 맛을 낼 줄 모르는 요리사나 시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세월을 허비하고 “꽃 떠나고 눈이 나린다”면 시인의 인생도 덧없이 가고 말 것이니 시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게 늘 갈아야 할 것이며 칼질을 잘 하기 위한 손놀림과 세기(細技)를 다듬는 일에도 게을러서는 안 될 일이다. 두 수의 작품을 설렁 읽으면 그냥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행간에는 무섭고도 엄중하게 시인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등단하여 아직 신인인 서희정에게 시조는 더더욱 무섭고 버거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포기, 불신, 타협”도 제대로 되지 않고 “알맹이, 배고픔, 시차적응”은 언감생심 감촉으로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를 생각하고/ 시를 불러오는 일”이 시마(詩魔)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형편이니 “밤눈이 어지럽다”고 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이여 이렇게 시작의 오묘한 과정을 더듬어 낼 수 있는 것마저도 장한 일이다. 그것을 아직은 “결정적 오류”라고 까지는 말하지 말자. 그렇게 지옥 같았던 시마도 철이 들고 순해지면 친구처럼 다감해져서 꿈결에서도 내려오고 사물의 눈에서도 빛날 것이니 그대의 마음이 눅어지고 시심이 깊어지면 시는 더 높이 깃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4. 생살을 뚫고 봄은 오시네
함안 깡촌에서 태어난 이남순과 부여가 고향이고 지금은 경주 변방에서 오물조물 살고 있는 백점례는 연치에 비해 늦은 등단이었지만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과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각각 거머쥐더니 작년에는 나란히 중앙이보시조대상 본심에 올라왔다. 그리고 백점례는 올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에 선정되었다. 말수도 적고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백시인의 수상은 오로지 작품으로 일궈낸 수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둘은 아직도 직장에서 청년처럼 일하면서도 그들의 작품은 시퍼렇게 다층의 10선에 올라와 필자의 서탁에 다시 나란히 앉아있다. 이런 모습들은 보는 것은 반갑고 듬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은 이제 무명의 껍질을 멋지게 깨고 비로소 자신의 차향을 주위에 뿜어내리라 믿는다. 무명차의 향기는 가없이 아름답지만 조금 서럽고 아직 소소하지만 자신의 검박한 이름을 붙여서 밖에 내는 차는 간난 아기의 기지개와도 같이 무구(無垢)한 맛이 일품이다. 이제 두 시인은 무명의 껍질을 깨고 풀코스 천리행군의 출발선에서 각자의 향을 담은 작품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니 그들의 전도에 박수를 보낼 일이다.
올곧고 풍류 좋던 조선 선비 아니신가 푸른 꿈, 칼바람에 동강동강 잘린 채로 한 뼘 땅 위리안치에 저렇듯 꼼짝없다
꺾이고 옭아매어 굽틀어진 가지 사이 암흑기 헤쳐 나갈 횃불지핀 불씨인 양 몇 송이 붉은 결기를 점점이 피우셨다
생살 뚫고 나온 관절 가차 없이 묶인 채로 성긴 눈발 다녀가는 역사관 뜰 귀퉁이 선채로 열반에 드셨나, 오체투지 끝내셨다 - 이남순 「매화 앉히다」 전문 -
비 그치고, 밟는 흙이 밥처럼 부드럽다
속 환히 보이는 가난한 터전으로
저만큼 햇살은 벌써
밭고랑을 치고 있다
지난날 엉킨 덤불도 풀씨의 울이 되고
바람과 살얼음도 깍지 풀어 넘는 길에
떡잎이 기지개를 켜나
발바닥이 간지럽다 - 백점례 「경칩 무렵」 전문 -
봄이 왔다. 매화 피고 개구리도 놀라 잠이 깬다는 경칩이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 담긴 봄은 마냥 상쾌하고 촐랑거리지는 못한다. 그들은 봄이 오기까지 잎을 버려가며 엄동을 견뎌낸 뿌리와 가지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설레는 화창한 봄날에 시인은 궁상맞게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뜰 귀퉁이”가 궁금하고 안쓰러웠던 것이다. 이쁘게 붉은 꽃을 피워낸 매화였지만 “푸른 꿈, 칼바람에 동강동강 잘린 채로/ 한 뼘 땅 위리안치에 저렇듯 꼼짝없다”며 안달방아를 찧는다. “꺾이고 옭아매어 굽틀어진 가지”가 마냥 서럽고 “생살 뚫고 나온 관절 가차 없이 묶인 채로” “성긴 눈발” 맞은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니 그는 천생 시인이다. 시인이 애처로워하는 모진 상황들이 매화의 기개와 고상(高尙)의 함의를 확장하고 받들어주는 것이려니 작자는 이미 그러한 중의를 한 수 내다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 선비, 암흑기, 붉은 결기, 오체투지”등의 이미지들도 매화를 고운 자리에 앉히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팔자 좋은 매화가 멋진 몸으로 따듯한 온실 안에서 화려하게 만발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서대문 형무소 ‘뜰 귀퉁이’에서 “몇 송이 붉은 결기 점점이 피우”신 모습에 대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선채로 열반에 드”신 매화의 향이 천지를 진동한다.
경칩이라는 말만 들어도 묵직하던 몸이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고 혹한이 몰아치며 폭설로 뒤덮이지 않고 겨울이 지나간다면 화려한 봄은 오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그 참뜻을 알고 있어서 봄이 더 반갑고 웅숭깊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밥이 부족했던 시절이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이 땅 어느 곳에서도 밥이 부족했다. 입에 들어가면 녹았던 흰 쌀로만 지은 것이 ‘이밥’이었는데 “밟는 흙이 밥처럼 부드럽다”니 엄청난 환상의 비유다. “속 환히 보이는 가난한 터전”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에게는 당연하고 외려 반가운 모습이 아니랴. 농부가 소를 몰고 쟁기를 치기도 전에 “햇살은 먼저/ 밭고랑을 치고 있다”니 이는 또 얼마나 명랑한 발상인가. “엉킨 덤불도” “바람과 살얼음도” 지나고 나면 고마움이요 가난한 삶의 울타리였다니 ‘봄’은 메시아였고 “깍지”같은 보푸라기를 풀어내는 살풀이 춤이었을 것이다. 백점례의 시는 늘 부드러움 속에 결기를 감추고 서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깊은 곳의 혈맥을 짚어내는 명의의 촉각과 아스라한 서정의 온기가 잘 버무려진 모습에 독자의 “발바닥이 간지”러운 것이다.
5. 누렇게 빛은 바래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약한 생명에게는 보통의 환경도 커다란 고난이 된다. 그러나 약한 사물이 오히려 강한 외부의 충격이나 압력을 잘 이겨내는 경우도 많다. 사막에서 살아야 하는 선인장의 경우에 최소한의 수분으로 견뎌내기 위하여 잎은 퇴화하여 가시로 변했고 몸피도 두껍고 거친 각막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한지는 얇고 부드럽지만 혹한의 겨울 날씨에도 바람을 잘 막아주고 빛을 투과시키며 습기를 조절하는 등의 과학적인 비밀을 지니고 있다. 자연의 모든 생명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버텨내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한지는 사계절이 뚜렷한 입지에서 집안과 밖의 온도와 바람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오랜 세월을 거치며 창조된 발명품이다.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 그것을 삶고 우리고 풀어내어 겹겹이 떠서 만드는 제조과정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넌 이미 나무이면서 포근한 집이었다 온몸을 짓찧어서 한 겹씩 떠낸 살로 빗살문 팽팽히 당겨 시린 별빛 우려냈다
오래도록 젖어들던 처연한 흐느낌을 문양으로 새겨 두고 누렇게 빛이 바랜 벙어리 일대기 담은 가슴 아린 노래였다
깊은 밤 갈기 세운 드센 물결 거슬러 암흑기 헤엄쳐온 빗살무늬 속에는 칼보다 푸른 목숨이 숨죽이고 있었다 - 김강호 「한지 문을 읽다」 전문 -
한옥에서는 한지로 바른 문이 “포근한 집이었다”는 말은 당연한 말인데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기 쉽지 않다. 혹한이 긴 겨울을 살며 사람이 드나드는 큰 문을 약한 종이로 마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한지의 비밀을 알고 나면 그 의구심은 단번에 풀리고 만다. “온몸을 짓찧어서 한 겹씩 떠낸 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반투명의 한지를 문에 바르기 위해 반드시 “빗살문”이 있어야 했고 그 반투명의 종이는 “시린 별빛 우려”내는 환상의 장면을 연출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해 좋은 날을 잡아 초겨울 볕 아래서 문에 새로 창호지를 바른다. “팽팽히 당겨” 발라놓은 창호에서는 탱탱한 소리가 화살처럼 튀어 올랐다. 할머니는 창호지 사이에 곱게 물든 단풍잎 하나를 재미로 넣어두시곤 했는데 그 단풍잎은 겨울이 지나서 “누렇게 빛이 바랜” 상태가 될 때까지 정다운 정경을 가족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문에 바른 한지는 방안에서 일어난 식구들의 모든 정담과 투정과 다툼까지 들어준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어서 “벙어리 일대기 담은 가슴 아린 노래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당한 말이었다. 팍팍하기만 했던 강점기를 버텨내고 동족끼리 전쟁을 치루는 동안 가족 중 어느 어른이 징용과 전쟁터로 끌려갔다는 소식도 험한 세상을 지나오며 병마와 사고로 다치고 죽은 이의 소식도 창호지는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암흑기 헤엄쳐온 빗살무늬 속에는/ 칼보다 푸른 목숨이 숨죽이고 있었다”로 끝난 김강호의 작품을 읽고 나면 마치 다큐멘타리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것 같이 숙연해진다.
"무공해 전속 모델유, 야가 !" 좌판 아줌니 넉살은 백 단
- 선안영 『거듭 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 임채성 『왼바라기』
하루에 수없이 죽다 사는 바람에게, 연애에게 죄 없이 엎드려 기도하는 풀 모가지 같이 자꾸만 끄덕 끄덕이며 또 불면을 앓는다
징그러운 내 속은 말 할 수 없고 잠 들 수 없고 거듭 같이 죽자 재촉하는 눈보라 날리면 나를 쥔 세계의 손 밖으로 나, 날아갈 태세이다
속창아리 없는 유정한 나와, 근심 많은 늙은 내가 헐떡이는 숨 스미듯, 흰 눈꽃을 뭉치듯 시인의 지문이 우거지는 여자가 탄생할 것이다
- 선안영 「묵음(黙音) 2 - 최저임금 알바」 부분 -
- 임채성 「바람의 기사-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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