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이 천하를 놓고 다투었던 초한 전쟁은 5년간 지속되다가 유방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건곤일척홍구위계사면초가
치열한 전투 끝에 오강(烏江)에 이른 사람은 고작 26명.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놓고 말했다. “강동이 작다고는 하지만 아직 천 리 땅이 있고 몇 십만 백성이 있으니 왕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빨리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 신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한나라 군대가 와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항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강을 건너겠는가. 또한 내가 강동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동정하여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정장에게 자기가 타던 말을 선물했다.
항우의 부하 26명도 모두 말에서 내려 한군과 또 한바탕 치열한 접전을 벌여 항우 혼자서만도 100여 명의 한군을 사살했다. 치열한 접전 중에 항우는 옛 부하였던 한의 장군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천금의 상과 1만 호의 봉읍이 걸린 자신의 수급(首級)을 바쳐 공을 세우라고 소리쳐 말하고 자결하고 만다. 이로써 일세영웅 항우는 장렬하고도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항우의 나이 31세 때였다. 왕예(王翳)라는 인물이 항우의 목을 베어 가졌고, 여마동 등 4인은 항우의 사지를 갈라 가져갔다. 이들은 같은 날 후(侯)에 봉해졌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온다.
항우의 초나라는 모두 9개의 군(郡)을 관할했는데, 항우가 패전을 하고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5개의 군은 여전히 항우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하여 후인들 중에는 항우가 오강을 건너 재기를 노렸어야 했다며 안타까워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강을 건넜어도 별 희망이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전자에 해당하는데, 그는 오강을 유람하다가 〈오강정(烏江亭)〉이란 시를 지어 일세의 영웅 항우가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가지 않고 자결한 것을 아쉬워하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수치를 끌어안고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이 대장부지
강동의 자제들 뛰어난 이 많았으니
땅을 말아 다시 올 수 있었을지 어찌 알겠소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耻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두목의 이 시에서 ‘권토중래’가 유래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으로는 송나라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을 들 수 있다. 그 역시 〈오강정〉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는데, 두목과는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싸움에 지친 장사들의 슬픔이여
중원의 싸움에서 패하고 나니 세를 회복하기 어려워라
지금 강동의 자제들이 살아 있다고 해도
대왕과 더불어 땅을 말아 오려고 하겠소?
百戰疲勞壯士哀
中原一敗勢難回
江東子弟今雖在
肯與君王捲土來
오강정은 안휘성 화현(和縣) 동북의 오강포(烏江浦)로, 바로 항우가 자결한 장소이다. ‘정(亭)’이란 진한(秦漢) 시대의 말단 행정 구역으로, 10리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이의 장을 정장이라 했다. 한고조 유방도 정장 출신이었다.
강동은 장강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장강은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큰 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의 ‘대강동거(大江東去)’라고 하며, 일반적으로는 강남, 강북이란 명칭을 쓴다. 그런데 강소성(江蘇省)의 남경(南京)에서 무호(蕪湖) 사이에서는 물길이 북동으로 방향을 틀어 흐른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강의 동쪽이라는 뜻의 ‘강동’, 서쪽이라는 뜻의 ‘강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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