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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의 어만두
"고기를 가장 얇게 저며 소를 석이 · 표고 · 송이 · 생치 · 백자 한데 짓두드려 지렁기름에 볶아 그 고기에 넣어 녹두가루 빚어 잠깐 녹두가루를 묻혀 만두같이 삶아 쓰나니라."1)
이 글은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쓴 한글 요리책 《규곤시의방 · 음식디미방》(이하 '《음식디미방》')의 '어만두' 요리법이다. 제목에 '어(魚)' 자를 쓴 것으로 보아 요리법에 나오는 '고기'는 생선을 뜻한다. 지금도 바닷가 사람들은 생선을 '고기'라고 부르는데, 장계향 때도 그랬던 모양이다. 생선의 종류는 밝혀놓지 않았지만, 그 살을 매우 얇게 저며서 만두의 피(皮)로 삼는다는 말이다. 만두피는 보통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드는데, 생선살로 피를 만든다니 참 생소하다.
만두소에 넣는 고기도 요사이와 달리 '생치(生雉)', 곧 꿩고기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야생에서 잡을 수 있는 꿩을 식재료로 즐겨 사용했다. '백자(柏子)'는 잣이다. '지렁기름'은 참기름에 간장을 넣은 양념을 가리킨다. 그러니 어만두의 소는 꿩고기와 잣, 그리고 버섯 세 가지를 함께 다져서 기름간장에 볶아낸 것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소를 넣지 않고 쪄낸 음식을 '만터우〔饅頭〕'라고 부른다. 고대의 만터우에는 소가 들어 있었다. 북송 때인 12세기 이후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키는 기술이 좋아지면서 소가 들어간 만터우와 소가 들어가지 않은 만터우로 분화되었고, 13세기까지도 두 가지 모두를 만터우라고 불렀다.2) 오늘날을 기준으로 하면, 모양은 만두와 닮았지만 소가 들어간 음식은 '바오쯔(包子)' 혹은 '자오쯔(餃子)'라고 부른다. 보통 바오쯔는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피에 소를 넣고 찌거나 삶은 것이다. 둥근 모양에 피가 두꺼운 편이다. 이에 비해 자오쯔는 재료와 요리법은 바오쯔와 거의 같지만 피가 얇고 모양이 납작한 편이다.
이 음식들은 칭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의 몽골제국 때 중국 북방에서 지금의 한반도(만두)와 일본열도(餃子, 교자), 티베트(མོག་མོག་, 모모) · 러시아(пельме́ни, 펠메니) · 우크라이나(vareniki, 바레니끼) · 폴란드(pierogi, 피에로기) · 이탈리아(ravioli, 라비올리) 등지로 퍼져나갔다. 비록 이름과 모양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피를 사용한다. 그런데 어만두는 생선살을 피로 사용하고 있으니 세계 각지의 만두 계통 음식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음식이다.
조선시대 요리책에서 어만두 요리법이 처음 나온 책은 세조 때 어의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한문 요리책 《산가요록(山家要錄)》(1450년경)이다. "싱싱한 생선을 포를 떠서 베보자기로 눌러 물기를 없애고 칼로 얇게 저민다. 소를 채워 넣고 녹두가루나 찹쌀가루를 묻힌 다음, 물에 삶는다. 다시 (꺼내서 겉에) 녹두가루를 묻혀 깨끗한 물을 끓여 삶는다."3)
전순의는 "여름에는 물을 갈아서 차게 해서 내고, 겨울에는 (어만두를) 삶은 물에 그대로 띄워서 낸다"면서 먹을 때는 "초장을 쓴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은 장계향의 '어만두법'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전순의는 어만두의 소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적어놓지 않아서 실제로 어만두를 만들 때는 장계향의 요리법이 좀 더 따라 하기 쉽다.
그런데 전순의나 장계향이나 어만두의 피로 사용하는 생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장계향보다 100여 년 뒤의 인물인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 〈치선(治膳)〉에서 치어(鯔魚), 즉 숭어로 어만두의 피를 만든다고 했다.4)
장계향도 어만두뿐 아니라 '수어만두'의 요리법을 같은 책에 적어두었다. 여기에서 수어(秀魚)는 숭어의 한자이다. "신선한 숭어를 얇게 저며 기척〔소금간〕 잠깐 하여 소를 기름지고 연한 고기를 익혀 잘게 두드려 두부 · 생강 · 후추를 섞어 기름지렁에 많이 볶아 저민 고기 싸 단단 말아 허리 굽은 만두 형상으로 만들라. 토장가루를〔녹두가루를〕 온 몸에 두루 묻혀 새우젓국 담〔淡, 싱겁다〕케 타 많이 끓거든 대접에 대엿 낱씩 뜨고 파 조차하여〔넣어〕 잔상〔잔칫상〕에 놓으라." 이 요리법으로 보아 '수어만두' 역시 어만두의 일종이다.
어만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고급 음식이었다. 장계향과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 훗날 효종)이 1629년(인조 7) 음력 6월 21일 사부(師傅) 윤선도(尹善道, 1587~1671)에게 생일 선물로 음식을 보냈던 고문서가 남아 있는데, 그 음식 목록에 어만두가 들어 있다.5)肅宗, 1661~1720)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된 것을 경축하여 열린 잔치에서 숙종에게 올린 찬안상(饌案床)의 음식 목록에도 어만두가 포함되었다.6)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만두 계통의 음식으로 어만두와 수어만두 외에도 '석류탕'이 있다. 생김새가 석류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석류 모양 만둣국'이다. "생치나 닭이나 기름진 고기를 썰어라〔썰어서〕 두드리고〔다지고〕 무나 미나리나 파와 함께 두부 · 표고 · 석이 한데 두드려〔다져〕 기름간장에 후춧가루 넣어 볶아 만두같이 하여 밀가루 정히〔곱게〕 노외여〔쳐서〕 물에 말아 지자되〔반죽하여〕 엷게 만두 빚듯하여 그 고기 볶아 백자가루와 함께 넣어 집기〔빚기〕를 효근〔작은〕 석류 얼굴같이 둥그렇게 집고 맑은 장국을 안쳐 가장 끓거든 〔국〕자로 떠 한 그릇에 서너 낱〔개〕씩 떠 술안주에 쓰라."
장계향이 세상을 떠난 1680년 즈음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록(要錄)》에도 장계향의 석류탕과 비슷한 요리법이 나오는데,7)8) 1856년경에 정일당(貞一堂) 남씨(南氏)가 필사한 책으로 추정되는 《정일당잡지(貞一堂雜識)》에도 석류탕이 나온다.9)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만두 계통 음식은 또 있다. 바로 '상화'이다. 고려 말과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상화(雙花 혹은 霜花)'는 두 종류가 있는데, 소를 넣지 않고 발효시켜 만드는 것과 소를 넣은 것이다.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상화'는 세 번이나 찧어 거른 매우 고운 밀가루와 쌀 한 줌, 누룩 5홉, 밀기울 1되를 가지고 만든다. 먼저 쌀죽을 덩어리가 지지 않게 끓인 뒤 그릇에 담아 식힌다. 여기에 밀기울을 넣는다. 누룩 5홉을 물에 담고 누런 물이 우러나면 물을 따라 버린 뒤 불린 누룩 한 숟가락을 밀기울 넣은 쌀죽에 섞어 넣는다. 서늘하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밀기울로 죽을 쑤어 섞어 넣는다. 3일째 되는 날 새벽이면 쌀죽이 술이 된다.
이 술을 명주자루에 넣어 술지게미를 걸러낸 뒤, 거른 술에다 밀가루를 넣어 말랑말랑하게 반죽한다. 베 위에 가루를 뿌리고 반죽한 것을 알맞은 크기로 떼어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발효시킨 반죽을 시루에 안쳐서 찌기 전에 소를 장만하여 넣는다. 오이나 박을 화채 썰 듯이 썰어 무르게 삶고 석이나 표고나 참버섯을 가늘게 찢어 간장기름에 볶은 다음 잣과 후춧가루로 양념하여 소를 만든다. 여름에 소를 빨리 만들려면 껍질을 벗긴 팥을 쪄서 으깬 다음 꿀과 반죽하여 쓸 수도 있지만 팥이 쉽게 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적혀 있다.
《음식디미방》에는 재료가 특별하거나 모양이 독특한 만두뿐 아니라 일반적인 만두를 만드는 법도 소개되어 있다. '만두법'이라고 이름이 붙었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메밀만두 요리법이다. 조선시대 한글로 쓰인 요리법은 구어체로 기술되어 있어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데, 《음식디미방》의 요리법도 대부분 이러하다. 그런데 유독 '만두법'은 "○○니라"라고 문장을 끝맺고서 내용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어 각 문장을 내용별로 구분해서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장은 메밀가루로 만드는 만두피 요리법이다. "메밀가루 장만하기를 마치 좋은 밀가루같이 가는 모시나 깁〔비단〕에 뇌어〔여러 번 쳐서〕 그 가루를 덜어 풀을 쑤되 의이죽〔율무죽〕같이 쑤어 그 풀을 눅게〔무르게〕 말아〔반죽하여〕 개곰낟〔개암열매〕만큼 떼어 빚어라."
두 번째 문장은 만두소 만들기와 상에 올릴 때의 양념 만들기에 관한 내용이다. "만두소 장만키는 무를 가장 무(르)게 삶아 낟〔덩어리〕 없이 쪼아 생치(生雉, 꿩고기) 무른 살을 다져 간장기름에 볶아 백자〔잣〕와 후추 · 천초가루를 양념하여 넣어 빚어 삶을 때 새용〔沙龍, 무쇠솥〕에 작작〔적당히〕 넣어 한 분이 잡술 만큼씩 삶아 초간장에 생강즙 하여 잡수시라." 즉, 만두소는 무와 꿩고기를 다져서 간장기름에 볶아 만들고, 양념은 간장에 식초를 섞어 만든 초간장에 생강즙을 넣어 만들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메밀만두 요리법이 완성되었다.
세 번째 문장부터는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둔 요리법이다. 꿩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황육(黃肉)', 즉 쇠고기를 쓰라고 했다. 특히 힘줄 없는 살을 간장기름에 익혀 다져서 넣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쇠고기를 익히지 않고서 다지면 한데 엉기어 만두소로 쓰기가 마땅치 않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또 만두를 작게 만들 때는 만두소에 고기를 넣지 않고 무와 함께 표고 · 송이 · 석이를 잘게 다져 기름을 두르고 잣을 두드려 넣은 다음 간장에 볶아 소로 써도 좋다고 했다. 양념장으로는 초간장에 생강즙 넣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만약 생강이 없으면 마늘도 괜찮은데, 마늘 냄새가 나서 생강만 못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만두 요리법에 "밀로도 가루를 정히〔곱게〕 상화가루같이 찧어 메밀 만두소같이 장만하여 초간장 · 생강즙 하면 좋으니라"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밀가루보다 메밀가루를 더 많이 이용했던 당시 곡물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장계향이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까지도 한반도에서는 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메밀가루로 만두피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메밀가루로 풀을 쑤어 만두피를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장계향은 "만두에 녹두가루를 넣으면 좋지 아니하니라"고 했는데, 아마도 메밀가루로 풀을 쒀서 무르게 반죽하기가 어려워 여기에 녹두가루를 넣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만두피에 녹두가루를 넣으면 나중에 만두가 식으면서 딱딱해져 먹기가 힘들다. 그래서 장계향이 녹두가루를 넣으면 좋지 않다고 일러준 듯하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다섯 가지 만두 요리법은 피의 재료에 따라 어만두 · 메밀만두 · 밀만두로 나뉜다. 이 중에서 메밀만두를 가장 자주 만들었고, 한여름 겨울밀 수확기에는 밀만두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밀만두 중에서 석류탕은 가장 모양이 좋고 맛도 있었다. 특히 술안주용으로 좋았던지 석류탕 요리법에는 "한 그릇에 서너 낱〔개〕씩 떠 술안주에 쓰라"는 차림법까지 적혀 있다. 상화는 한여름에 입맛을 살려주는 만두였다. 어만두는 큰 생선을 구했을 때 만들 수 있었다. 만드는 방법이 조금 까다롭지만 석류탕을 뛰어넘는 고급 만두였다.
중국의 만두는 13세기 원나라 때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었다.10)
《음식디미방》은 1960년 1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김사엽(金思燁, 1912~1992) 교수가 논문집에 간략한 해제와 함께 책의 내용을 찍은 사진을 게재하면서 알려졌다. 당시에는 '음식디미방'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표지에 적힌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11)飮食知味方)'으로 보아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고 풀이한다. 권두에 밝혀놓은 이름의 뜻을 새긴다면 이 책의 전체 이름은 《규곤시의방 · 음식디미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음식디미방》의 저자는 '장계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의 어디에도 저자가 '장계향'이라는 단서는 없다. 김사엽 교수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의 재령 이씨 문중 사람들은 이휘일(李徽逸, 1619~1672, 장계향의 둘째 아들)의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진본(珍本)으로, 그의 어머니 장씨(張氏)가 직접 집필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김사엽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논문에 소개했고, 이후 학자들도 이 책의 저자를 '안동 장씨 부인'으로 보았다.12)
조선시대 인물 중 양반이라 하더라도 여성들은 대부분 실명(實名)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신사임당'의 '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의 '난설헌'도 실명이 아니라 호(號)이다. 장계향도 처음부터 실명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장계향 사후에 셋째 아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이조판서를 역임하게 되면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래서 《음식디미방》이 1960년에 학계에 소개된 이래, 오랫동안 저자는 이현일의 어머니 '정부인 안동 장씨'로만 알려졌다. 그러다가 2002년도에 학술연구차 남편 이시명의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조사하다가 정부인 안동 장씨의 실명이 '장계향'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13)
장계향은 1598년 음력 11월 24일에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 춘파(春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이고, 모친은 안동 권씨이다. 외동딸이었던 장계향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한시는 물론이고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지금까지 전하는 《전가보첩(傳家寶帖)》과 《학발첩(鶴髮帖)》 등의 서첩(書帖)을 보면 장계향의 한시와 서예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남편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은 영해부(寧海府) 남면(南面) 인량리(仁良里,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출신으로 이함(李涵, 1554~1632)의 셋째 아들이다. 이시명은 예안현 오천(烏川) 출신 광산 김씨를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런데 김씨 부인이 1남 1녀를 낳고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시명은 25살의 나이에 홀아비가 되었다. 이시명은 거리가 멀지만 안동의 장흥효를 스승으로 삼아 자주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제자 이시명을 눈여겨 본 장흥효가 1616년, 19살의 외동딸 장계향을 그의 계실(繼室)로 출가시켰다. 장계향은 광산 김씨 소생의 1남 1녀와 자신이 낳은 6남 2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특히 셋째 아들 이현일은 이황의 학맥을 이은 숙종 초 남인 최후의 거대 산림(山林)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장계향이 말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음식디미방》은 면병류 · 어육류 · 주국방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병류에는 국수 · 만두 · 떡 · 과자 요리법 18가지, 어육류에는 생선 · 고기 · 채소 요리법과 저장법, 그리고 '맛질방문'의 국수 · 과자 요리법 등 74가지, 주국방문에는 누룩 만드는 법 2가지와 술 제조법 49가지, 그리고 초 담그는 법 3가지가 적혀 있다.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치선(治膳)〉을 집필하면서 유서(類書)의 목차를 설정하여 내용을 구성하였으나 장계향이 그보다 앞선 인물이니 《음식디미방》이야말로 유서 형식으로 목차가 구성된 조선시대 최초의 요리책이라 할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요리법을 읽다 보면 '어육류' 부분에서 '맛질방문'이란 글자가 부기된 '석류탕' 요리법을 만나게 된다. 그 다음에 '수어만두', '수중계'(암탉 찜), '질긴 고기 삶는 법'(쇠고기나 늙은 닭을 산앵두나무나 뽕나무 잎 혹은 껍질 벗긴 살구씨 등으로 삶는 법)에 '맛질방문'이 제목 아래에 적혀 있다. 그리고 다시 '어육류'의 요리법이 나오다가 '청어염해법'에서부터 '맛질방문'이란 글자가 붙은 요리법 13가지가 이어서 나온다. 그것도 어육류만이 아니라, 별착면법(고운 밀가루와 녹두가루를 섞어 반죽하여 안반에서 얇게 밀어서 썬 뒤 면을 삶아서 차가운 깻국이나 오미자국에 넣은 국수)이나 약과법 · 인절미 굽는 법 등 국수 · 과자 · 떡 요리법이 망라되어 있다.
《음식디미방》에 '맛질방문'이란 부제가 붙은 요리법은 모두 17가지이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학자들 사이에서는 '맛질방문'의 '맛질'을 지명으로 생각해 '맛질이란 마을의 요리법'이라고 풀이했다. 경상도 말로 '길〔道〕'을 '질'로 읽기 때문에 '맛질'은 한자로 '미도(味道)'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다른 주장은 '맛질'이 한자 '미곡(味谷)'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과 봉화군 법전면에 '맛질'이란 동네가 있고, 한자로 '미곡'이라고도 쓴다. 더욱이 이들 두 동네는 안동 권씨의 세거지가 있던 곳이다. 장계향의 친정어머니가 안동 권씨라는 점을 근거로 2010년까지도 예천군 용문면의 안동 권씨 세거지가 있는 '맛질'을 '맛질방문'의 발원지로 여겨왔다. 그러나 2011년 그곳의 안동 권씨가 장계향의 친정어머니와 족보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봉화군 법전면의 '맛질'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설은 없다.
'맛질방문'이 부기된 음식과 요리법을 장계향 식으로 종류별로 분류하면 면병류에 석류탕 · 수어만두 · 별착면법 · 차면법 · 세면법 · 약과법 · 중박계 · 빙사과 · 강정법, 그리고 인절미 굽는 법이, 어육류에 수증계, 질긴 고기 삶는 법, 청어염해법, 닭 굽는 법, 양 볶는 법, 그리고 계란탕법 · 난면법이 들어갈 것이다. 이 중에서 숭어와 청어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이라 내륙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다. 다만 숭어는 겨울에 동해에서 하천을 따라 내륙으로 올라온다. 그러니 동해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는 곳에서는 숭어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계향이 살았던 곳 중에서 동해안의 청어 산지와 가까운 곳을 찾는다면 '맛질'이 어디인지를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장계향은 1680년 83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 살았다. 태어나서부터 혼인 전까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춘파에서 살았다. 이시명과 혼인한 1616년부터는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의 재령 이씨 종택에서 살았다. 인량리 종택에서 동해안까지는 지금 거리로 7킬로미터 남짓이다. 장계향은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으로 잠시 분가한 적도 있지만, 거의 2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더욱이 장계향은 셋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시명의 두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종부(宗婦) 역할을 했다.
1636년(인조 14) 음력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편 이시명은 자신의 고장에도 전쟁이 몰아닥칠 것을 염려하여 모친 진성 이씨와 식구들을 데리고 영해부 한밭골(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로 이사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몇 해 겨울을 난 뒤 1640년에 다시 거처를 옮겼다. 일가가 새로 자리 잡은 곳은 이미 1631년에 분가하여 산 적이 있는 영해부의 석보(石保, 현재의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로, 오늘날 이시명 후손들의 종택이 있는 두들마을이다.
이후에도 장계향은 남편을 따라 몇 차례 더 이사를 했다. 1652년 영양현(英陽縣)의 수비(首比,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1672년 안동부의 도솔원(兜率院,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명리)으로 이사를 했다가 1674년에 안동부 대명동(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으로 옮겼다. 이 해에 남편 이시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랐던 장계향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상을 끝낸 뒤에 셋째 아들 이현일이 사는 석보 두들마을에서 살았다.
《음식디미방》에는 '청어염해법'이 이렇게 적혀 있다. "청어를 물에 씻으면 버리나니 가져온 재자연〔그대로〕 쓰서 버리고 백 마리에 소금 두 되씩 넣되 날물기는 절금하고〔물기가 들어가지 않도로 절대 주의하고〕 독을 조강(燥强, 땅바닥에 축축한 기운이 없어 보송보송함)한 데 묻으면 제철이 오도록 쓰나니라."
'청어염해법'의 '염해'는 소금에 절여서 젓갈을 만드는 '염해(鹽醢)'를 뜻한다. 그런데 이 조리법에서 놀라운 점은 청어 100마리당 소금을 두 되씩 넣는다고 하니 아마도 청어를 100마리 이상 구해서 젓갈을 담갔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의 청어는 산지와 가까운 곳에 살아야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계향이 혼인한 뒤 20년 이상 살았던 인량리의 재령 이씨 종택에서 동해안까지 가는 데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두 시간도 안 걸린다. 그만큼 거리가 가깝다. 적어도 '청어염해법'만 본다면 '맛질'은 인량리 재령 이씨 종택 동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지도(輿地圖)》의 영해부 부분. 장계향은 시집가서 처음에 영해부 남면 인량리(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재령 이씨 종택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1640년 영해부의 서쪽 석보(石保, 지금의 두들마을)로 이사를 가서 13년, 그리고 다시 이사를 갔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석보로 돌아와 약 5년 정도를 살았다.〈출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음식디미방》에는 술 제조법이 50여 가지나 소개되어 있다. 이것을 두고 요사이 학자들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중요한 일인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에 반드시 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남성이 저자인 《산가요록》과 《수운잡방》에도 술 제조법이 많이 나오지만, 그들은 제일 앞부분에 그것을 배치했다. 그러나 《음식디미방》에는 '주국방문', 즉 '술과 누룩 만드는 법'이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 이와 같은 분류법은 《산림경제》 · 《증보산림경제》 같은 유서류 요리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국방문'이란 제목 다음에 바로 나오는 내용은 제목이 따로 없지만, 내용으로 보면 '누룩 빚는 법'에 해당한다. 곡물 밥을 지어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있어야 한다. 과일이나 맥주보리는 자체에 당이 함유되어 있어 알코올 생성을 위한 당화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비해 곡물로 지은 밥에는 당화를 촉진하는 성분이 없기 때문에 당화효소인 누룩을 넣어야 술을 빚을 수 있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누룩을 유월 디디면〔빚으면〕 좋고 칠월 초순도 좋으니라"고 했다. 장계향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김령(金玲, 1577~1641)의 《수운잡방》에서도 누룩 만들기 좋은 때로 음력 6월 첫 번째 인일(寅日)을 꼽았다.14)
《음식디미방》에서는 "기울 닷 되에 물 한 되씩 섞어 가장 많이 디디되〔잘 반죽하여 덩어리를 만들되〕 비 오거든 물을 데워 디디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기울은 밀기울을 가리킨다. 《음식디미방》보다 앞선 시기에 나온 요리책에서는 밀기울과 녹두가루를 함께 반죽하여 누룩을 만든다고 했다.15) 그러나 《음식디미방》을 비롯해 이보다 더 뒤에 집필된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속법(俗法)'이라고 하면서 밀기울만을 사용하여 누룩 만드는 방법을 적어놓았다.16)
누룩을 빚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룩을 잘 띄워야 곡물을 당화시킬 수 있는 술누룩이 된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더운 때거든 말방〔마루방〕에 두 두레〔덩어리〕씩 포개어놓고 자주 서로 뒤집어서놓으며 썩은 가시〔구더기〕 보거든 한 두레씩 바람벽에 세우라"고 했다. 또 "날이 서늘커든 배병〔짚방석〕을 깔고 서너 두레씩 가혀놓고〔포개어놓고〕 위에 배병으로 덮어두고 자주 뒤집어 썩지 아니케 고로〔골고루〕 띄우라"고 했다.
누룩을 띄우는 방법은 요리책마다 약간씩 다르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대청의 바람기 없는 건조한 곳에 제비쑥을 깔고 그 위에 누룩을 올려놓고 다시 쑥으로 덮고, 또 그 위에 빈 대나무 그릇을 덮어두라고 했다. 각각의 비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음식디미방》에서는 '띄운다'는 한글로 적어놓았다. 곧 누런 곰팡이가 누룩에 붙는 과정을 '띄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어서 "띄운 후에 하루 볕 뵈여〔쬐여〕 들여 가혀두면 다시 많이 뜨거든 밤낮 이슬 맞히기를 여러 날 하되 비 올까 싶거든 들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봉상시는 유월에 두 두레씩 한데 매여 달아 띄우다가 또 두 두레씩 달아 말리나니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여기에서 '봉상시(奉常寺)'는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했던 부서이다. 《음식디미방》의 요리법 대부분은 오로지 음식을 만드는 방법만을 서술했다. 비록 '맛질방문'도 있지만, 요리법 중에 '봉상시' 같은 용어가 나오는 경우는 이것이 유일하다. 더욱이 서울에서 장계향이 살던 곳까지는 거리만 해도 300킬로미터가 넘는데, 그 먼 곳의 왕실 '봉상시'에서의 누룩 띄우는 방법을 적어놓았으니 그녀의 요리법 정보력에 놀랄 따름이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50여 가지 술 제조법을 모두 장계향이 혼자서 익히거나 고안해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유(金綏, 1491~1555)의 《수운잡방》을 소개하면서 '진맥소주(眞麥燒酒)'와 《음식디미방》의 '밀소주' 제조법이 재료의 분량과 배합 비율, 그리고 과정이 똑같다고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 이시명의 첫 번째 부인인 광산 김씨의 친정은 김유의 마을인 예안현(禮安縣) 오천(烏川)이다. 김씨 부인의 부친 김해(金垓, 1555~1593)는 김유의 조카이다. 그러니 김씨 부인은 김유의 종손녀(從孫女)인 셈이다. 광산 김씨 부인이 친정에서 배워온 《수운잡방》 식 '밀소주' 제조법이 재령 이씨 집안에서 쓰이다가 계실로 들어온 장계향에게 전수된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전근대 사회에서의 가족 요리법이 '친정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요리법이 이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같은 당파나 혼반(婚班) 관계인 문중 사이에서 요리법이 공유되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봉상시의 술누룩 띄우는 방법이나, '맛질방문'이란 별도의 표시가 붙은 요리법을 통해서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의 모든 요리법이 본인만의 비법이 아님을 알려준다.
2014년 10월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개최된 '경북 종가 조리서' 심포지엄 때 전시된 《음식디미방》 원본. 관리가 잘 되어서 책장 모서리 부분조차 마모나 구김이 심하지 않은 편이다.〈출처: ⓒ 주영하〉
《음식디미방》의 제일 마지막 쪽에는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생심〔내지〕 말며 부디 상치〔상하지〕 말게 간수하여 수이〔쉽게〕 떠러〔떨어져〕 버리다〔버리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전하는 《음식디미방》 원본은 찢어지거나 떨어져나간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책장이 닳은 자국도 심하지 않다. 아마도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온 모양이다. 그 덕분에 17세기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살았던 영민한 한 부인의 요리 지식이 온전하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것도 한글로 말이다.
《음식디미방》의 원본과 한글 번역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였다. 경북대학교출판부편집부, 《음식디미방(고전총서 10)》, 경북대학교출판부, 2003.
曾维华, 〈馒头、包子与蒸饼〉, 《文史知识》 2016(1), 2016, 65쪽.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어만두(魚饅頭)' : 新鮮生魚作片, 以布紋去水氣, 以刀又薄片. 納塑, 傳以彔豆末粘米末後, 烹水. 更以彔豆末傳之, 正湯潔水烹之. 夏則改水令冷, 冬則於其烹水. 泛進, 醋醬用之.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치선(治膳)〉 하(下), 치어(鯔魚), 魚饅頭法 : 勿論牛猪雉鷄肉, 烹熟爛剥, 薑椒蔥菌蕈石茸等物料搗細和合. 量宜加油醬炒出. 取大鯔魚切作薄片如水掌大. 以前物料團如栗子, 用魚片包之成松餠樣, 衣以菉末, 謹手下滚湯中. 待熟取出, 候冷澆以醋醬, 散完栢子仁供之. 他魚亦用之, 而終不如此魚之美也.
1629년 음력 6월 21일 봉림대군이 윤선도의 생일에 보낸 음식을 적은 고문서는 현재 해남 윤씨 녹우당(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 《고문서집성3-해남 윤씨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기해(己亥)]진연의궤(進宴儀軌)》(1719) : 어만두에 들어간 재료는 큰 생선 두 마리, 생강 3전(戔), 꿩고기 한 마리, 녹두가루 5합(合), 어린 닭고기 한 마리, 참기름 3합, 표고버섯 2양(兩), 송이버섯 3개(介), 후춧가루 5석(夕)이다. 꿩고기 · 어린 닭고기 · 표고버섯 · 송이버섯 · 생강 · 후춧가루 등은 어만두의 소에 들어가는 재료이고, 소를 섞어서 볶는 데는 참기름을 사용했다. 다만, 무슨 생선으로 어만두의 피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절로 보아 봄에 주로 잡히는 숭어가 아니라, 늦가을에 잡히는 민어(民魚)일 가능성이 많다.
작자 미상, 《요록(要錄)》, '소방(所方)' : 膏肉细切, 一鉢艮醬二合真油末膠各一合, 調椒一戋交合. 真末和水褁之, 上如石榴觜, 体似雞卵, 烹食.
작자 미상, 《술 만드는 법》, '셩뉴탕법' : 치나 닭이나 죳코 기름진 거슬 두다려 난도를
고 무나 미나리나 두 가지 즁에
가지를 알마츄 넛코 표고 셕이 호쵸 각
양념을 만나게
야 기름과 지령에 쇼를 만드러 진말이나 모밀가로나 가늘게 쳐셔 눅으시 말아
을 얏게 얏게 비져 셕뉴 모양으로
를 셔넛식 너허 불이를 단단히 잡아
물에 데쳐
여 쵸장에 양념
야 먹
니라.
정일당 남씨(貞一堂南氏, 추정), 《정일당잡지(貞一堂雜識)》, '셕뉴탕' ; 치나
이나
두
리고 무우 미
리 니믈 죠곰
고 파도 너코 두부 표고 셕이
두
려 맛나게 복가 후초
로 잣
하 만두소
치
그라 진말 졍히
여 반쥭
여 국슈 미닷 홍독개로 미러 네모지게 방정이 산슴 너뷔만치
흐라 소
괌마
여 소 너허
셩뉴 모양으로 비저
라
치 데친 믈의 국
여 오래
히고 비
거
너코
닉게
히고
로 가만가만 상치 아니케
아 안쥬도
고 반찬도
니라
센 동화
흰 션쳐로 지져
강 마
파 약념 두
려 격지 두어 항의 단단이 너코 됴흔 초
부어 두엇다가 이
봄의 만난 장 쳐 술안쥬의 일미니라.
苏东民, 〈馒头的起源与历史发展探析〉, 《河南工业大学学报 · 社会科学版》 5(2), 2009, 16쪽.
김사엽,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과 전가팔곡(田家八曲)〉(자료), 《영서 고병간 박사(瀛西高秉幹博士) 송수기념논총(頌壽紀念論叢): 인문사회 편》, 경북대학교, 1960, 671~705쪽.
'안동 장씨 부인'이 집필자라는 전제에서 이 책을 연구한 국어학자들은 17세기 말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쓰인 한글 단어가 다수를 이룬다는 분석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했다. 다만, 《음식디미방》에 쓰인 한글 서체가 특정인의 필체라고 단정하기에는 고르지 않기 때문에 오롯이 장계향이 집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사람들은 《음식디미방》의 제일 마지막 쪽에 나오는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라는 글을 근거로 장계향이 직접 쓰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장계향의 구술을 정리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배영동 교수는 2002년 4월 1일 장씨 부인의 남편인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의 종택에서 불천위 신위의 함중을 조사하다가 장계향의 실명을 확인했다(배영동, 〈『음식디미방』 저자 실명 '장계향(張桂香)'의 고증과 의의〉, 《실천민속학연구》 19호, 2012).
김령, 《수운잡방》, 〈계암선조유묵〉, '조국법(造麯法)' : 六月上寅日, 菉豆去皮細末, 羅汁如薄粥, 和麥麩掬成曲塊. 各褁楮葉厚紙, 褁分堅縛, 各懸椽頭, 待薰蒸曬乾用之, 菉豆三斗, 則麥麩四斗为例.
전순의, 《산가요록》, 조국법(造麴法) : 其火與录豆, 合其水, 熟擣上槽, 作圓. 其火一石, 录豆一斗, 為率, 以堅為貴.
유중림, 《증보산림경제》, 〈치선〉 하, 속법(俗法) : 麯機內布袱, 袱內布萆麻葉, 始下搜麩, 其上布葉即掩袱, 堅踏.
발행일 : 2018. 07. 06.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잠깐 녹두가루 묻혀 만두같이 삶아 쓰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