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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유 게 시 판 ┃ 스크랩 *?업(業)의 올바른 이해
태일(太一) 추천 0 조회 170 16.10.02 14:2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업의 올바른 이해

 

업 (산스끄리뜨어로는 'karma', 빨-리어로는 'kamma').
karma란 '하다' '만들다' '행하다'를 뜻하는 어원 kar에서 나왔으므로 '행위'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karma란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에 붙이는 이름이며, 

그것과 관련지어 행동, 말 또는 정신 활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의식과 정신적 요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까르마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cetana)이다.
의도를 통해서 사람은 신체, 말, 뜻을 수단으로 한 업을 짓게 된다"라고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업은 의도적인 행위일 뿐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1.업이란 용어는 '행위의 결과'를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지학(神知學) 註3 의 논문들을 읽은 많은 서양인들은 업이란 말이 

행위의 결과를 포함한다고 이해합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즉 업은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만을 말하며, 업의 과보(kamma-vipaaka)를 행위의 '결과'라고 합니다.
2.모든 일, 심지어는 우리의 새로운 선업과 악업까지도 전생 업의 결과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결과가 또한 새로운 결과의 원인이 되며 이같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를 숙명론으로 낙인찍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운명은 결코 영향을 받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해탈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3.업이란 용어를 잘못 쓰고 있는 세 번째 경우는 첫번째 견해를 확대한 것으로서, 

업이란 용어에 행위의 결과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대중의 업, 집단의 업, 혹은 국가의 업과 같은 소위 공동의 업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단의 사람들, 즉 어떤 국민들은 

전생에 바로 그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금생의 국민들은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그 개인들의 업의 상속자는 아닌 것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신체의 고통을 당하는 자는 전생이나 금생의 악행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을 겪는 국가에 태어난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로 신체적인 고통을 당한다면, 

금생에서나 혹은 지금까지 거쳐 온 수많은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악행을 저질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국민이 행한 악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가 지은 악업에 의해 그에게 어울리는 불행한 환경으로 이끌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업이란 용어는 각각의 경우에 단지 한 개인의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은 원인 혹은 씨앗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개인에게는 금생에서나 미래생에 결과가 생겨날 것입니다.

업의 과보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희미하게나마 본능적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일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건 삶은 계속된다는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계속되는지는 분명히 모르고들 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버마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전생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아이들에 대해 믿을만한 보고서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겨우 네 살 나이에 라틴어와 희랍어를 읽고 쓸 수 있었던 벤담이나, 

세 살에 희랍어를 읽고 여섯 살에 로마사를 집필했던 스튜어트 밀, 

여섯 살에 세계사 개론을 저술한 바빙턴 머콜리나, 일곱 살에 공개 연주회를 연 베토벤, 

채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작곡을 했던 모짜르트, 세 살에 퐁텐느 우화를 읽은 볼테르와 같은

 신동들의 출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받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경우도 많은 이 신동 내지 천재들은 

전생에 이미 그들의 특출한 능력의 기반을 닦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까요?
나아가 정직하고 심신이 건전한 부모와 조상을 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두개골의 형태라든가 얼굴 표정, 심리적인 태도 혹은 행동 양식으로 미루어 

골상학자나 인상학자 또는 심리학자들이 범죄형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특성과 성향을 갖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에 말했듯이 업과 환생에 관한 불교의 교리가 자연계의 변화와 상위점에 대해 

가장 타당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전생에 몸과 말, 마음으로 지은 업(身業, 口業, 意業)이 악하고 저속하면 

자신의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에 나쁜 영향을 미쳐 

금생에서 발현되는 과보 또한 반드시 불만스럽고 나쁜 것이 되고, 

또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 속에 담겨져 있는 악한 영상이나 이미지로부터 나온 

인격과 새로운 행위 또한 불만스럽고 나쁜 것이 된다고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에서 좋은 종자를 뿌린 사람들은 금생에 좋은 결실을 얻게 됩니다.
「중부경(中部經)」 135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인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난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들이 짓는 업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또한 이 경에서는 한 바라문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명이 짧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사는 이도 있습니다.
심히 병약한 이가 있는가 하면 건강한 이도 있습니다.
추악한 외모를 한 이가 있는가 하면 잘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힘없는 이가 있는가 하면 권세 있는 이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집안 출신도 있습니다.
우매한 이가 있는가 하면 총명한 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타마 존자시여, 같은 인간이라도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것입니까?"
세존께서 답하시기를:
"사람은 자기가 지은 업의 소유자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난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업이 사람들을 높거나 낮게 구별짓는다."
「증지부경(增支部經)」 3품 40경에서는
"살생, 도둑질, 사음(간음), 거짓말, 모함하는 말, 거친 말, 공허한 잡담을 습성화하고 갈고 닦아 자주 행하면 

고통의 세계인 축생계, 아귀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이르고 있으며, 

나아가 살생하고 잔인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거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단명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힌 자는 병에 시달릴 것이다.

 남을 미워한 자는 추악한 몰골을 얻게 되고, 남을 시샘하는 자는 신망이 없을 것이며, 

고집센 자는 비천하게 될 것이고, 게으른 자는 무식하게 태어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림(Grimm) 박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새로운 생명의 씨앗으로 옮겨 가는 일에 

친화성의 법칙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려 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이 부족하여 사람이나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마음 저변에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성향을 갖게 된다.
그는 다른 생물의 단명에 만족감이나 심지어 쾌락까지 맛본다. 

그러므로 단명하는 생명의 씨앗이 그에게 친화력을 갖게 되고 

그 친화력은 사후에 다른 생명의 씨앗으로 옮겨 갈 때 그에게 해롭게 작용한다. 

또한 기형의 신체로 자라나는 힘을 지닌 생명의 씨앗은 남을 학대하고 손상시키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이에게 친화력을 갖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분노의 독특한 표식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그 내면 속에 

흉한 신체와의 친화력을 가지며 그에 상응하는 생명의 씨앗과도 친화력을 가진다."
"질투하는 자, 인색한 자, 교만한 자는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고 남들을 경멸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따라서 가난한 환경으로 이끄는 생명의 씨앗이 그에게 친화력을 갖게 된다."

업과 환생 그리고 무아(無我)
따라서 업과 환생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존재 현상이 무아(無我)이고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하는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청정도론」 19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태어나는 어느 거주처에서나 부처님의 제자는 

단지 정신과 물질 현상이 인과 관계의 연쇄를 통해 계속 유전됨을 본다.
그는 업을 짓는 자와 그 업이 별개라고 보지 않으며,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그 과보와 별개라고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업과 관련하여 '업을 짓는 자'를 말하거나 업의 과보와 관련하여

'과보를 받는 자'를 말할 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단지 관습에 의하여 

그러한 말을 사용할 뿐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업을 짓는 자를 발견할 수 없고 과보를 받는 자도 볼 수 없다.
실체 없는 현상만이 유전할 뿐.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어라.
업과 그 과보가 계속 유전하며 모든 것을 조건 지우는 동안 거기에서는 처음 시작을 발견할 수 없다.
마치 종자와 나무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신이나 범천(梵天)도 이 윤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으리.
실체 없는 현상이 모든 조건에 의존하여 유전할 뿐."
「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는 다음과 같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스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무엇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왕이여, 그것은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의 집합(名色) 입니다."
"그래요? 스님, 그것은 현재의 명색과 동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현재의 명색이 선업과 악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새로운 명색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 의미로 보아 실재하는 자아라고 할 실체 혹은 개별적 자아란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실 그런 것들이 환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명색의 과정이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만 

그 후 즉시 다른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그 인연에 따라 계속 이이어질 뿐입니다.
「밀린다왕문경」 3장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스님,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왕이여,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엇인가가 옮겨 가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왕이여, 다른 등불의 도움을 얻어 등에 불을 켤 때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로 옮겨 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스님."
"왕이여, 바로 그것처럼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정도론」 17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죽음이란 오온(五蘊; 色, 受, 想, 行, 識) 의 소멸임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사후에 새로운 몸 등으로 이전하는 것이 한 개인이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환생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환생이 오온의 생겨남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환생한 것이 어떤 개인이나 존재이며 그 사람이 새로운 몸으로 재현한다고 생각한다.
환생의 반복인 윤회(Samsaara)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정말 어떤 개인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의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그 현상이 

그의 자아(自我)나 자아에 속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뭔가 변함없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 현상이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는 것, 

또한 무명(無明)에 인연하여 업이 생겨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는,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자, 행위를 하거나 행동하게끔 하는 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모두 자아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원자들이나 창조주 등이  태아 형성과정을 통해서 

신체를 형성하고 그 신체에 여러 가지 기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즉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여 느끼고 욕망을 일으켜서 집착하게 되며

 또 다시 다른 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존재들이 운명이나 우연으로 말미암아 생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다."
"다음 생(生)에 생겨나는 것은 다만 인연으로 형성된 현상일 뿐,

 전생으로부터 이전해 온 것이 아니나 또한 전생의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네."
"이 인연따라 생겨난 명색(名色;태아)이 태어날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전생에서 온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존재(satta)나 생명(jiiva)도 전생으로부터 이전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이 태아는 전생의 원인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나 사람의 목소리로

 메아리를 일으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영상이나 메아리가 얼굴이나 목소리로부터 야기된 것이기는 하나 

얼굴이나 목소리가 옮겨 간 것은 아닌 것처럼,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생과 다음 생이 완벽하게 같은 것이라면 우유가 버터로 변할 수는 없는 경우가 될 것이며, 

전생과 다음 생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버터는 결코 우유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여러 단계가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인 것도 아니란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육체이건 정신이건 혹은 잠재의식이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며 끊임없는 생성 과정이고 변화이며 변모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개체나 사물도 없으며 창조주나 피조물도 없습니다.
다만 이 물질적-정신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삶의 능동적인, 즉 원인이 되는 측면이 선업이나 악업이라는 업의 과정에서 찾아진다면, 

수동적인, 즉 결과가 되는 측면은 태어나서 자라고 썩어서 

사라져 가는 단순한 존재 현상인 환생 혹은 삶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윤회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실질적인 개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이처럼 업(業)과 과보라는 두 측면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만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른바 금생은 전생의 반영이고 내생은 금생의 반영입니다.
금생은 과거 업의 결과이고 내생은 금생에 지은 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디에서도 업을 짓거나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할만한 자아라는 실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어떤 실질적인 개체가 다음 생으로 옮겨 간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자아 같은 것을 있다고 보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그런 존재가 다음 생으로 옮겨 간다고 가르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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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0.02 16:19

    첫댓글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스티커
  • 16.10.02 20:0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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