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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태영
언론인 |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바둑대결에서 어렵사리 1승을 거둔 천재기사 이세돌 9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어린 꼬마들을 바둑학원에 등록시키는 부모들도 많아졌고, 학교에서는 바둑 동아리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지상파 TV
방송에서 이세돌 다큐를 제작한다. 이세돌 덕분에 중국의 위세에 눌렸던 한국 바둑이 부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좋은 기분도 든다.
요즘에는 중국 바둑이 인재풀이나 상금 등의 측면에서 한국을 앞서가지만 한국바둑이 세계를 지배한 때도 있었다. 아무래도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이 각종 세계대회를 석권할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즈음에는 일본에서도 교포기사인 조치훈 9단이 일본 기사들을 압도하였다.
가히 한국인들이 세계바둑을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수학한 천재기사 조훈현 9단과 잡초류라고 불리던 순국산인 서봉수 9단이 각종 기전에서 열띤 대결을
벌여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서 9단이 잡초류답게 싸움바둑으로 조 9단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불꽃투혼을 발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 9단이
우세를 보였다. 조 9단은 본인도 잘 했지만 이창호 9단을 제자로 키워냈다. 한 때나마 한국 바둑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은 사람을 꼽자면
단연 조훈현이 아닐까 한다.
조훈현 9단은 일본 세고에 겐사쿠 9단의 제자이다. 그런데 조 9단을 아끼던 일본의 프로기사 중에 후지사와 슈코 9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 9단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술 마시다 갑자기 조 9단이 보고 싶어서 술병을 든 채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찾기도 했던 분이다.
후지사와 9단은 기행으로 유명했지만 바둑과 관련된 재미있는 말을 많이 했다. 그는 일본에서 최고의 상금이 걸렸던 기성(棋聖)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 기성 결승전은 7전 4선승제. 먼저 4판을 이기는 사람이 우승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일 년에 바둑 네 판만 이기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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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바둑대결에서
어렵사리 1승을 거둔 천재기사 이세돌 9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자료사진=구글 간담회
유투브 |
후지사와 9단은 바둑 둘 때 상대방이 오래 생각하는데 지친 적이 있었는지 "하수(下手)의 장고(長考)는 숨쉬기 운동"이라는
말도 했다. 하수들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지만 , 이를 인정하는 전문기사들도 많다. 프로 기사들 가운데에는 바둑을 둘 때 "머릿속에 맨처음
떠오른 수가 장고 끝에 나온 수와 같았다"거나 "처음에 머릿속에 직감적으로 떠올랐던 수가 나중에 장고 끝에 둔 수보다 나았다"고 아쉬움을 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장고 끝에 악수(惡手)'라는 바둑 격언은 그래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프로기사들 가운데 상대방이 바둑돌을 놓고 1초도 안되 돌을 놓던 서능욱 9단이나 강훈 9단 같은 속기파들이 장고파 기사들을 꺽고
우승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9단 같은 대기사들은 속기 대결인 TV기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수읽기를 잘하는
기사들이 직관도 뛰어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번에 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에서도 알파고는 시간을 적게 썼다. 그리고 전문기사들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신수와 묘수들을 많이 두었다. 알파고는 실리를 중시하는 프로기사들과는 달리 과감하게 세력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격이나 수비에도
능했고, 끝내기를 할 때는 대담하지만 정밀한 바꿔치기를 순식간에 구사했다.
마치 일본 기사들과 치수고치기 승부를 이긴 오칭위안 9단과 공수에 능한 조훈현 9단, 끝내기 신산(神算)으로 불렸던 이창호 9단 등의
수읽기와 직감이 하나로 합쳐져서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중국의 일인자 커제 9단이 알파고가 자신보다 수준이 낮다고 했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수읽기에서뿐만이 아니라 직관의 싸움에서도 승리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AI 알파고는 현존 최고의 천재기사 이세돌 9단과의 5번기에서 4승1패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압도했다. 이세돌이 네 번째
판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초반부터 두터움에 밀리는 형세였다. 이세돌이 어려운 국면에서 찾아낸 수 때문에 알파고가 버그를 일으킨 듯 두 차례나
말도 안되는 헛수를 두어서 이긴 것이었다. 이세돌의 묘수가 문제가 아니라 알파고의 버그가 문제였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5번기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이세돌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이세돌이 이긴 제 4국에서 나중에 '신의 한
수'로 불리게 되는 제 78수를 둔 장면이지만, 알파고를 만든 구글 기술진의 입장에서는 알파고가 그 직후 헛수를 두게 한 버그를 일으킨
순간이었을 것이다. 구글 기술진에 던져진 숙제는 알파고 버그의 원인을 찾아내고 수정하는 일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천재기사 이세돌은 구글 기술진이 알파고라는 기계의 퀄리티 콘트롤과 신뢰성평가를 하는 데 동원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AI 알파고의 품질이나 신뢰성은 한 차례의 버그가 발생하긴 했지만 나무랄데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거의 현존 최고의
천재기사를 상대로 (AI알파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알파고가 첫 판에서 승리를 거두자 구글 기술진이
"인류가 달에 착륙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것도 AI알파고의 성능과 신뢰성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한 때문이 아닐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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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이 AI알파고를 상대로 힘겨운
1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물론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를 생각해본다면 AI의 엄청난 발전이 더욱 축하할 일이다. 미디어에서 이세돌
찬양으로 기우는 듯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어딘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아닐까?
/사진=연합뉴스 |
인류의 진보와 과학문명의 발전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알파고의 압승을 인류가 달에 간 사건 만큼 찬양해야 마땅한 일이다. 구글
기술진이나 서구 사람들은 대부분이 알파고의 압승을 축하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인들이 이세돌의 패배를 아쉬워하고 알파고의 버그를 반겼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민족주의. 한국 사람인 이세돌이 인류를 대표하여 최고 성능의 AI와 대결을 벌이는 데 한국사람을 응원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이세돌의 승리는 인류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의 승리라는 생각을 알게모르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둘째는 AI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 가장 뛰어난 사람보다 더 뛰어난 AI가 실존하는 모습을 우리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처음
보았다. 그리고 AI가 장차 인류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데 호감을 갖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전문기사들은 생각지도 못할 묘수와 신수들을 두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의학에 원용하면 AI는 현존하는
최고의 의사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신묘한 암 치료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번에 한국을 찾았던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이를 확신하는
듯 하다. 브린의 어머니는 파킨슨씨병 환자이고, 브린 자신도 관련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브린은 관련 연구를 하는 의학계에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브린은 세계 10대부자이다.) 파킨슨씨병은 "유전자에 발생한 버그이며 의학자들이 이 버그를 발견해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브린의
생각이다.
이번에 이세돌과의 대국 중에 제 4국에서 알파고가 버그를 일으켰다. 구글 기술진은 버그를 찾아내고 수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알파고는 더욱 완벽한 바둑기계로 진화하게 된다. 언젠가는 인류를 상대로 무적이 된다. 인간과 같은 실수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AI...
이를 무인자동차에 탑재해보면, 인간과 같은 전방주시 태만, 과속운전, 보복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 등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사라진다. 테슬라자동차의 앨런 머스크가 "머지않아 인간의 자동차운전은 불법인 시대가 온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알파고를 보고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이세돌이 AI알파고를 상대로 힘겨운 1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물론 대단한 일이다. 온라인에서는 이세돌을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AI를 상대로 싸우는 인류 저항군사령관 존 코너, 역시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 등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를 생각해본다면 AI의 엄청난 발전이 더욱 축하할 일이다. 미디어에서 이세돌 찬양으로 기우는 듯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어딘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