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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성재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1/9
[자유라는 말의 남용]
민주주의란 말이 쓰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듯이 자유란 말도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진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윤리·철학·종교 측면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네 분야의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구분하지도 않고 주로 정치 자유에 대해서 논의 과정도 거의 없이 줄기차게 울부짖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다 중시하는 자본주의식 민주주의와 평등을 보다 중시하는 공산주의식 내지 사회주의식 민주주의가 있는데, 시간의 여신이 상그레 웃으며 자본주의식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 주었다. 더불어 이에 대한 논의는 맥이 빠져 버렸다.
이제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자유에 대해 논의할 때가 아닌가 한다.
자유의 의미는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정치·경제·사회·문화 네 분야에 관한 논의로 축소할까 한다.
[정치적 자유로 한정되는 자유]
일반적으로 자유라 하면 정치적 자유를 뜻한다. 이 자유와 버성기는 개념은 독재인데, 이 둘 다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유는 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개인의 자유보다 노동자와 농민의 집단적인 힘과 평등을 중시하는 공산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유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실지로 북한에서는 어떤 개인을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그것은 큰 욕이 된다. 이것은 '이기주의자'와 거의 같은 뜻이다.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가 없었던 해방 노예]
1863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와중에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다시 말해서 흑인들은 그 이후로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실지로 나아진 것은 거의 없었다. 경제적 토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부로 가서 저임 노동자가 되거나 남부에 그대로 남아 전과 다름없이 농장의 일꾼으로 일하거나 '자유롭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어떻게 흑인들이 돈을 모아, 경제적으로 자립을 한 후에도 그들에게는 백인의 자유에 맞서 자기들의 자유를 주장할 수 없었다. '흑인과 개는 출입할 수 없음'이란 백인의 자유에 속절없이 당했던 것이다. 정치적인 자유는 얻었지만, 사회적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 킹이 노예해방 100년 후에 제2의 노예해방을 부르짖은 것은 바로 이 사회적 구속을 철폐하라는 뜻이었다.
노예해방 후 오랫동안 흑인들은 형식적으로 경제적 자유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경제적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전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먹고사는 문제는 책임져 준 백인 주인이 없어져서 오히려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산 사람이 많았다. 경제적 토대가 없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능력의 문제였다. 근육을 이용한 단순한 육체 노동 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교육 기회의 박탈이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좋은 직업을 보고도 언감생심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제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틴 루터 킹은 사회 자유를 깨달은 사람]
노예해방 이후 100년이 흐르면서 흑인들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재력과 능력이 백인을 능가하는 사람이 속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과 근검절약이었다.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을 훌쩍 넘어 대학 나온 사람도 많아지면서 그들은 마침내 능력에 비해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백인이 그런 자리에 흑인을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관행은 이들에게 엄청난 족쇄로 작용했다. 마르틴 루터 킹의 희생 덕분에 다행히 그들은 10%의 지분을 포함하여 마침내 사회적 자유도 상당히 얻게 되었다.
사회적 자유는 크게 개인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평등한 교육 기회의 보장, 직업 선택의 자유, 장소에 관계없이 소비할 자유, 신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여행할 자유 이 넷이 핵심이다. 흑인들에게는 노예해방 이후 평등한 교육 기회는 보장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예 상태에서보다는 교육받을 기회가 현저히 늘어났다. 그러나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직업 선택의 자유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돈이 있어도 백인들이 즐기는 음식과 관광, 운동, 오락을 즐길 수도 없었고 백인들이 쇼핑하는 고급 상점에도 드나들 수 없었다. 같은 돈을 내고도 버스에서 마음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이상은 모두 사회적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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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2/9
[아시아 4룡의 자유]
이제 눈을 동아시아로 옮겨 보자.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아주 큰 수수께끼의 하나가 이른바 아시아의 4룡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다. 서구 기준으로 보면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자유가 이들 네 나라에는 분명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물질적으로 서구 못지 않게 윤택한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서구와 별 차이 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경제적인 면으로 보아 싱가포르, 홍콩은 이미 선진국을 능가하고 있고 대만은 거의 비슷하고 한국은 선진국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선진국과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인 일본은 한사코 정치적 후진성을 내세워 아시아 4룡을 선진국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정치적 성숙이 아니라 자유만을 따지면 한국이 일본에 뒤질 것도 없지만, 이것도 인정을 못 받는다. 아무래도 1인당 GNP가 2만 달러는 되어야 된다고 본다.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가 보장된 아시아 4룡]
아시아 4룡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보장이다. 정치에서는 자유를 억압했지만 경제와 사회에서는 자유를 급격히, 획기적으로 도입했다. 사회적으로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있긴 했으나 이건 미국의 흑백 문제에 대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교육 기회가 평등하게 보장되어 재능 있는 사람은 누구든 노력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었다.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가 상당히 문제였는데, 이광요 수상은 모든 인종에게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를 똑같이 보장했다. 화교 중심 국가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과감하게 미래지향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정치는 미국보다 앞섰다. 형식적 정치 자유보다 이광요는 실질적 경제 자유 및 사회 자유를 소수 인종에게 골고루 나눠줌으로써 개인 생활을 미국의 소수민족보다 오히려 윤택하게 했던 것이다. 미국은 정치 자유만으로 이광요를 독재자로 몰아붙일 자격이 없다고 본다.
[대만은 경제 자유가 한국보다 앞선 나라]
소수의 중국 본토인과 다수의 대만 토박이로 구성된 대만에서도 정치는 본토인이 장악을 했지만, 대신에 토박이에게도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는 거의 완벽하게 보장했다. 대기업은 본토인으로 구성된 국민당이 차지하여 사실상 국유화함으로써 80%를 차지하는 대만의 원래 주인들은 중소기업을 할 수밖에 없게 한 점은 문제의 소지가 많았지만,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한 자유를 준 점에서 그들의 안목과 관용이 돋보인다.
경제 자유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시장경제 하에서는 정부의 간섭이 끼어 들 틈이 없을 수밖에 없다. 오로지 경제 논리를 따른다. 그래서 전세계 어디보다 대만에서는 기업의 진입과 퇴출이 용이하다. 회사 설립도 아주 자유롭고 부도내는 것도 아주 자유롭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경제 주체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각종 규제에 얽혀 회사 설립이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부도내기 어려운 것도 그 못지 않게 문제이다.
[경제 자유를 이해 못하는 한국의 붕당]
한국에서는 이 둘 다 몹시 어렵다. 이익이 날 게 뻔한데도 수천 개의 도장과 수백 장의 서류 때문에 회사를 설립 못하여 멋진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가면 갈수록 회사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이것 역시 각종 규제로 인해 부도내질 못한다.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부실한 대기업이 퇴출 제도의 미비로 시장에서 쫓겨나지 않음으로 해서 지금도 한국은 엄청난 출혈이 강요되고 있다.
대우 문제는 아마 현대 문제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두 재벌의 문제는 정치권이 노파심에서 기업에 경제 자유를 가능한 한 제한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생각 않고 정치 논리로 밤낮 서로 도덕성 시비를 하면서 삿대질하기 바쁘다.
'내가 받으면 정치 자금, 네가 받으면 뇌물. 나는 부정한 돈은 한 푼도 안 받았다.'
[교육 기회의 평등이 아시아 4룡 발전의 원동력]
아시아의 4룡에는 경제적으로 도저히 여력이 안 되는 재주 있는 학생이 갈 수 있는 상고나 공고라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있다. 그 결과 교육을 통해 타고난 재주를 개발함으로써 중산층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후에 대학을 나와서 장관이 된 사람도 있다. 개인으로 보아서는 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실지로 수많은 서민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더하여 비록 정치 자유는 제한되어 있었지만, 사회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마음껏 경제 능력에 맞게 소비도 할 수 있었다. 돈만 내면 누구든 차별 받지 않고 얼마든지 고급 음식점, 특급 열차, 일등석 여객기, 골프 클럽, 고급 술집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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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3/9
[정치 민주화]
문제는 정치였는데, 이것도 상당히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중산층이 급속히 늘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정치는 갈수록 코미디가 되었다. 경제개발 30년에 어느 새 일반 사람의 정치 수준이 정치인을 능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 경제와 사회의 자유에 걸맞는 정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정치 성향이 유난히 강해서 늘 여당을 위협하는 거대 야당이 존재했던 한국이 국민소득은 제일 낮았지만, 아시아 4룡 중에 제일 먼저 정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를 민주화 쟁취라고 했다. 그 때가 6·29선언이 나온 1987년이었다. 정치에서 그 이후로 어떤 금기 사항도 없어졌다. 거의 완전한 정치 자유가 보장되었다.
난공불락이던 대만도 2000년에 주민의 80%를 차지하는 대만 토박이를 뿌리로 하는 만년 소수 야당 민진당이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었다.
한편 홍콩은 1997년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정치 자유가 오히려 뒷걸음치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정치 자유가 겉보기에 요원한 듯하다. 야당 집권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치 자유가 정권 주고받기로 전락한 한국]
재미있는 현상은 개인의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경제적 풍요가 이들 4룡에서 정치 자유와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정치 자유가 이미 13년 이상 거의 완벽하게 보장된 한국이 경제적으로 제일 허약하다. 한국보다 형식적으로 정치 자유가 13년 늦게 보장된 대만이 꼴찌에서 두 번째이다. 정치적으로 제일 뒤진 홍콩과 싱가포르는 서구 선진국보다 나은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 교육 수준이나 사회적 자유도 더 높고 많다.
나라 규모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4룡 중에서 한국이 제일 큰 나라, 그 다음이 대만, 홍콩과 싱가포르는 면적이나 인구에서 거의 상대가 안 된다. 아무래도 큰 나라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가 그만큼 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나라가 국토가 두 동강 나면서 말이 동족상잔이지 실지로는 작은 3차 세계대전을 겪은 결과, 그나마 일부 있던 산업시설마저 대부분 파괴되었다. 자본 축적 기간이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발전의 원동력은 사회 자유의 핵심인 교육 평등]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교육의 힘 곧 교육에 의해 개발된 인간의 능력은 대단하다. 한국이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평등한 기회가 보장된 교육의 힘이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생산이 아니라 분배에 더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정치가 힘을 못 쓰게 되면서, 다시 말해서 염불이 아니라 잿밥에 관심을 기울였던 정치가 수면 아래로 갈아 앉으면서, 교육에 의해서 머리에 충만한 에너지와 노력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뜨거운 희망과 불타는 정열이 경제 곧 생산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자, 한국은 불과 20여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낳게 되었다. 약 30년 동안 세계 1위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하게 되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
문제는 정치였다. 중산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정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그러나 막상 정치 자유가 보장되면서 생산보다는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산에 유리한 경제 자유가 한층 확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은 신권력층이 사회의 성숙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시장경제를 오히려 옥죄기 시작했다.
5공의 서슬 퍼런 상황에서 고김재익 수석이 터를 닦아 놓은 경제 자유가 정치 자유가 보장된 6공 이후 오히려 후퇴하였다. 생산에 노심초사하는 기업가들이 분배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노동자들에게 계속 밀렸다. 미국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에게 주는 자유 못지 않게 기업가에게 주는 자유도 더욱 확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업가는 '부도덕한 부자'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경제개발 초기에 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로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부조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봉건주의 시대의 도덕 기준이나 200년 내지 300년 된 서구 선진국의 기업윤리로 한국의 기업가를 평가하면,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흔히 대기업을 원흉으로 걸고 넘어지지만, 실지로는 중소기업이 훨씬 심하다. 중소기업의 회계장부를 보고는 도저히 세금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이다.
도둑맞은 부자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 도둑은 대로를 버젓이 다니면서 유지 행세를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자를 보고 고소해 하다가 나중에는 그 도둑에게 더욱 화를 내게 된다. 한국의 정경유착에서 사실 경제인은 부자이고 정치인이 도둑 내지 어깨였다. 그런데 정치인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멀쩡하고 기업가는 어느 정권에서든 난도질되었다. 경제 자유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끝없이 불거질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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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4/9
[홍콩, 싱가포르, 대만의 놀라운 경제 자유]
홍콩, 싱가포르, 대만은 정치 자유는 한국보다 훨씬 못하지만, 경제 자유는 월등하게 잘 보장되어 있다. 헤리티지 재단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경제자유지수에서 항상 세계 1위, 2위를 다툰다. 1999년 기준으로 19위인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 대만은 11위, 한국은 1998년 28위에서 1999년 33위로 오히려 뒷걸음쳤다.
아시아 4룡 중에서 한국만이 1997년의 아시아 경제위기에서 당당히(?) 외환위기를 겪은 것이 이 경제자유지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민주화가 되면 절로 경제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다. 민주화가 경제 선진화를 보장한다면, 아시아에서 한국은 쏙 빠지고 오히려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 외환 위기를 겪어야 했다. 독재라는 비난이 그렇게 빗발쳤던 말레이시아마저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다. 4룡 중에서 민주화 10년의 한국만이 수모를 당했다.
[경제 자유도가 확대되면 기업도 도덕적으로 바뀐다]
한국이 과거의 비리를 들추는 것으로 광란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동안, 나머지 3룡은 미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히려 '부도덕한' 기업가들에게 경제 자유를 더욱 보장함으로써, 정치에서 간섭을 않고 국제 시장에 가차없이 내몰아, 기업가들이 정치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경제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이익을 남기기 위해, '정직한 경영, 믿음직한 경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기준에 맞추어 투명한 경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부도덕한 기업가는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고,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주관이 아니라 법이라는 잣대의 객관이 힘을 얻는 사회가 되어 기업가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정치 자유라는 명분이 아니라 경제 자유라는 실리가 중화민족의 3룡을 오히려 배달족의 한국보다 내용면에서 훨씬 선진화된 나라로 만들었다. 한국은 부정부패가 4룡 중에서 가장 심한 나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까지 구속하면서까지 정치를 잘했는데, 독재 국가 싱가포르나 대만보다 훨씬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경제 자유라고 본다.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경제 자유를 더욱 신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치 자유를 이용하여, 분배(정치인이 뜯어먹는 것이 사실은 제일 큰 관심사임)에 유리한 규제를 경제에 겹겹이 얽어 넣음으로써, 철폐한다면서 더 교묘한 규제를 집어넣음으로써, 겉보기에는 국제 기준에 맞는 시장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실지로 경제 주체들에게는 속옷 안에 투명한 철갑을 두르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격이 되었다. 자연히 불법과 편법이 더욱더 교묘하게 광범위하게 번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손해나는 짓만 골라하게 된 것이다.
[민주화를 내세우는 한국 정치인의 한계]
정권을 잡은 정치인도 결국 경제 살리기에 관심을 제일 많이 기울였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가면서 개혁한다고 크게 홍보하다가, 경제를 더욱 속으로 곪게 만들어 정권 말기에는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손가락 짓을 받게 된다. 경제에 자유를 대폭 이양함으로 도와 줄 생각을 않고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치 자유를 내세워 마침내 쟁취한 무소불위의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경제에 기기묘묘한 통제와 규제를 가함으로써 정치민주화와 경제선진화를 함께 달성하려는 당찬 '의욕'과는 정반대로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 그렇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민주화는 사실상 정당 패거리의 권력 휘두르기요, 경제선진화는 정권의 말 잘 듣는 기업 만들기와 표 잘 찍어 주는 노동자에게 구미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상대적 가치가 만발하는 혼돈이요, 선진화는 일은 가능한 한 적게 하고 놀이는 가능한 한 많이 하면서 부자를 부도덕한 자로 매도하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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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5/9
[경제 개발 과정에서는 경제 자유의 핵심은 상공업의 해방]
한국에서 1961년 이후의 경제 개발의 의미를 자유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 이전과는 판이한 새 물결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 자유를 획기적으로 신장시킨 것인데,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상업과 공업의 해방이었다. 일제 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한국인은 체면이나 예절이 생존의 위협 앞에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처절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의식은, 특히 배운 자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배운 자로서 상업과 공업을 직접 하겠다고 하는 일은 여전히 희귀한 일이었다.
상공업에 대한 천시 사상이 아주 약했던 대만, 싱가포르, 홍콩과 달리 한국은 경제개발 이전까지는 모름지기 배운 자는 다 양반 의식을 갖게 되어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하려고 했지, 종들이나 할 짓거리 곧 물건을 만들고 만든 물건을 팔고 사고 하는 따위의 상업과 공업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군인이 집권하면서 아예 대놓고 '잘 살아 보세.'라고 외쳤다.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아는 자들의 열정은 뜨겁기만 했다.
나날이 공장이 우뚝우뚝 솟아오르고 시장에 상품이 넘치고 세계를 대상으로 조악한 물건을 팔면서 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하자, 서민의 살림이 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의식이 서서히, 아니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나중에 돈 벌어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려고 열심히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공돌이, 공순이, 장돌뱅이, 농민은 그야말로 죽자 사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상공업을 해방시키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돈 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옛날 양반도 따지고 보면 토지를 매개로 하여 돈이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기도 했다. 옛날에는 설령 돈이 있어도 신분에 얽매어 다시 말해서 사회 자유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인간 행세를 못했던 것이다. 자연히 양반들은 상공업 발달을 극도로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온갖 이론을 끌어 들여 이를 사악한 것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상공업의 발달은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600여년 만에 환골탈태시킴]
마침내 시골의 권력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동네 노인의 호통 한 마디면 모든 게 잠잠해지던 미풍양속이 어느새 사라졌다. 조선의 멸망과 일제의 통치에도 끄떡없던 양반 문화가 경제개발과 더불어, 경제 자유와 더불어, 상공업의 해방과 더불어, 상놈의 직업이 신사의 사업으로 바뀜과 더불어, 거짓말같이 와르르 무너졌던 것이다. 노인들은 뒷자리에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으면 다행인 세상으로 바뀌는 데 불과 한 세대도 걸리지 않았다. 개항 후 100년 만에 일어난 의식 혁명이었다.
토지개혁으로 이제 기껏해야 백석꾼이면 부농인 상황에서, 아주 평등한 사회에서 도회지로 나가서 사장이 되면, 도매상이 되면 불과 10년도 안 되어 만석꾼 살림을 능가하는 재산을 갖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생겨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의식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무의식이 변해 버렸다.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 양반·상놈 문화가 소리 소문 없이 마구 허물어졌다.
그러나 후에 먹고사는 문제는 거의 해결한 중산층이 많이 늘어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이 되자 경제 자유에 대한 욕구는 정치 자유에 대한 욕구로, '나도 양반이다'라는 선언으로, 민주주의란 신유교의 부활로 노도의 물결처럼 전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한국의 사회 자유는 선진국에 조금도 뒤지지 않음]
한국에서는 경제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 자유도 충분히 보장되었다. 이미 말했듯이 사회 자유는 바로 교육 기회의 확대, 직업선택의 자유, 소비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여행의 자유이다. 경찰의 힘이 강화되어 사회적으로 거의 완벽한 치안이 확보되면서 선량한 사람은 누구나 신체적 위협을 받지 않고 전국을 누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러시아가 치안이 확보되지 않아 마피아의 나라가 되어 사회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아시아의 다른 3룡도 마찬가지였다. 치안 확보는 사회 자유를 실지로 보장하는 것이다. 홍콩과 대만은 삼합회, 청련방, 홍련방 등 '흑도'의 세력이 만만찮았지만, 전체적으로 선량한 시민들이 사회 자유를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큼 치안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른 동남아나 중남미, 아프리카와도 크게 대조된다.
정치 자유는 제한되었지만, 이렇게 경제와 사회에서 자유를 충분히 보장받았기 때문에 아시아 4룡에서는 일반 서민들이 살기에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이해 못하는 서구 선진국은 아시아 4룡이 경제만 윤택할 뿐 민주화가 되지 않아 참으로 가련한 생활을 하는 줄로 착각을 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놀랍게도 한국 안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서구의 이론에 보편타당성을 헌사하는 분이 상당히 많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해방 이후 '문민' 정부 또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한국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정말이지 태어나지 말았어야만 했던 나라이다. 원죄를 갖고 태어난 나라이다.
정치 자유와 경제 자유가 서로 돕게 만들어야 한다. 정치 자유가 정치 방종으로 전락한 상황이 한국에서 계속되는 한, 틀림없이 1997년의 위기를 몇 배 능가하는 파국이 올 것이다. 아마 이 비극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은 그 후에야 비로소 정치 방종이 정치 자유로 제 자리를 잡고 10년 안에 경제 자유지수가 세계 5위 안에 들면서 참 아름다운 나라로 변할 것이다.
--계속--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6/9
[아시아 4룡의 정치가 후진적인 이유는 문화 때문]
그러면 왜 아시아의 4룡이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를 통해서 민중이 살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후진성을 면치 못할까,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건 바로 정치는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는 발전 속도가 가장 더디기 때문이다. 정치 후진국에서 정치 자유 덕분에 정권을 잡으면 새 권력층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언론과 방송을 동원하여 자화자찬하는 작업이다. 문화를 장악하는 것이다. 문화 자유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그 자유를 '권력'의 방패막음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정치가 문화의 딸이라면 문화는 정치의 시녀]
문화 자유는 크게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예술의 자유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자유에 대한 통제는 공산주의나 독재정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기 사상을 모든 분야에서 인류 최후의 이론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상 이외의 사상은 있을 수 없고 종교도 아편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가 곧 종교였던 것이다. 언론은 공산주의를 무조건 100% 찬양하기만 해야 했고 예술도 노동자 농민의 질박한 삶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것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발전) 외엔 모조리 타락한 부르주아의 미친 짓거리로밖에 안 보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당의 자유로운 경쟁이 없는 나라의 정치에서는 자기 정당만이 진리와 정의를 나타내기 때문에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 자유를 용납할 수 없다. 사상, 종교, 언론, 예술을 모두 통제하고 규제한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는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설령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가 서구 못지 않게 보장되었음에도 정치가 서구 기준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문화 때문에 그러하다. 어떤 면에서 꼭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문화가 확립되기 전에는 이런 양태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도기이다. 일본이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선진국 대접을 받지만,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거의 흠 없는 민주정치를 구현하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계파 정치를 하는 것을 보면, 정치가 문화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나, 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를 거의 이해 못한 한국의 민주화 세력]
대한민국에는 국내 뿐 아니라 서구 선진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 8톤 트럭으로 수십 대 실어도 남을 만큼 많지만, 세계에 내세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같이 바로 이 정치와 문화에 대한 관계를 모르고 오로지 서구의 정치 이론에 맞추어 열심히 흉내내는 이쁜 짓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무수한 지식이 지혜를 얻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정치에 뛰어든 사람은 8천톤 배에 수십 척 실어도 남을 만큼 많은데도, 자기들이 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정치를 한 이유도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에 의해 심어진 집단 무의식이 서양 문화로 개화한 논리적 의식을 오히려 지배했기 때문이다.
문화는 절대 일조일석에 생겨나지 않는다. 몇 천 년 몇 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빚어진다. 이 문화가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는 분야는 그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패러다임)이다. 사고방식은 아무리 잘 살게 되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경제 자유). 아무런 구속이 없는 자유를 손안에 넣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정치 자유).
--계속--
한국의 효와 그 정치 문화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7/9
[한중일의 정치와 문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를 비교해 보면 쉽게 난맥상을 보이는 그 정치가, 수수께끼 투성인 그 희극적 정치가 쉽게 이해된다.
나는 여기서 이 세 나라 문화 특징 가운데 각각 대표적인 것 하나씩만 얘기할까 한다. 세 나라가 유교 문화권이라고 하지만, 자연환경이 다르고 역사 경험이 다름으로써 두드러진 특징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그 원인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따로 기술할까 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효(孝), 중국의 의(義), 일본의 충(忠)이다.
이 문화는 수천 년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하든, 자본주의를 하든, 군인이 통치하든, 문민이 통치하든, 독재를 하든, 민주주의를 하든 정치의 내용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 정치의 핵심은 효(孝)]
한국과 북한은 극단적으로 다른 정치 체제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정치 형태가 놀랍도록 유사하다. 중국과 대만도 전혀 다른 정치 체제 같지만, 그 정치 형태는 마찬가지로 놀랍도록 유사하다. 심지어 싱가포르와 영국 통치하의 홍콩도 중화민족이 정치를 하는 한 중국이나 대만과 거의 같다. 일본도 제국주의 시대와 패전 후의 평화헌법 시대는 전혀 별개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와 한국의 정당 정치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정치는 문화다!
한국은 효가 중심이라고 했거니와, 효는 가부장이 중심이다. 가부장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중요하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다. 그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자식들은 언제든지 모인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꾸면 자식들도 일제히 마음을 바꾼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가 당을 그렇게 쉽게 많이 만드냐고 의아해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효 사상 때문이다. 아버지에 거역하는 것은 곧 불효이기 때문에 아버지에 해당하는 3김씨가 새 당을 만들면 당연히 그 쪽으로 우르르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지 않은 소수는 결국 도태되거나 인간 구실하려면 나중에 용서를 빌고 아버지 슬하에 들어와야 한다.
북한의 김정일이 효자동이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조선) 문화에서 아버지를 무조건 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발전하다가 정지된 북한에서는 남한보다 유교 사상이 훨씬 짙다. 효 사상이 훨씬 강하다. 단 그것이 자기 부모에 대한 것보다는 '어머니 당, 아버지 수령'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 내지 주체사상을 완벽히 구현하는 걸로 되어 있는 공산당과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효'로 바뀌었다. 김일성 동상을 찾는 끝없는 행렬은 조선시대에 부모의 빈소에서 조석으로 음식을 바치고 곡하는 것과 흡사하다.
효의 특징은 절대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요 기준이요 법이다. 설령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얼굴에 가득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조심조심 여쭈어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아버지는 남한에서는 수 차례 바뀌었지만, 그 아래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반면에 반드시 자식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자식들은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다소곳이 따르지만, 속으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만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보통 때는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선거 때는 실탄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뒤에서 쑤군거리게 마련이다. 심지어 집을 나가는 불효 막심한 놈도 생긴다. 한국에서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역대 대통령 누구도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의 전통이 어떤 측면에서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북한에서는 유일한 아버지로 자리매김된 김일성 부자 외에는 누구도 선물이란 걸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걸 아버지가 베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세계 누구도 김일성 부자보다 많은 돈을 주무를 수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설령 전재산을 어떻게 쓰든 자식으로서는 감히 따질 수 없다. 아버지는 이에 대해 전혀 죄의식이 없다. 지극히 당연한 권리 행사요 자애의 실천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역할 중에서 으뜸이 자식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했거니와 문제는 한 당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가 문제이다. 이젠 전 나라의 국민이 모두 자식이 되었다. 국부(國父)로서 그는 나눠줄 쌀과 옷과 집을 계속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이나 북한이나 이것이 문제였다. 향리에서부터 따르던 친자식들이 핍박을 받을 때는 기꺼이 참고 오히려 몸을 던져 아버지를 보호하고 온갖 정성을 다해 봉양했지만, 나라의 아버지가 되면서부터 일제히 손을 벌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이전의 다른 아버지를 매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에게 갖가지 죄목을 씌워 파렴치범으로 만든 다음 그가 차지한 '돈'될 자리를 가로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금방 들통이 난다. 아무리 '도덕'을 내세워도 새로 들어온 무수히 많은 양자들은 믿지를 않는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이제 생산을 해야 한다. 야당의 아버지는 군색한 소리를 하면서, 후일을 기약하며 이 쪽 저 쪽에서 임시로 돈을 꾸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해도 크게 욕을 얻어 먹지도 않았지만, 나라의 아버지는 그렇게 친자식만 이뻐하면 오히려 무수히 많은 새로운 자식들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에 서서히 경원시된다. 처음에는 '나쁜 놈' 잡아가는 데서 희열을 느끼지만, 시간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게 없으면 하나씩 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한국인들이 무서운 훈장 박정희 친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일 많은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집안 살림을 나날이 늘려서 골고루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장군 전두환 양아버지도 은근히 좋아하는 이유도 간단하다. 물가를 잡아 실질 구매력을 높였고 그 바탕에서 살림을 계속 늘렸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곰 노태우 새아버지부터 평가는 오히려 내려간다. 비록 기업가에게 꿀밤을 주어 노동자에게 임금은 대폭 올려 주게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살림이 펴지기는커녕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성장은 만만찮았지만, 성장잠재력이 계속 줄어들어서 앞날이 점점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다.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 자란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바른 소리도 하고 쓴 소리도 막하는 맛은 있었지만, 우선은 괜찮지만 살림이 점점 줄어 들 것이 뻔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희망이 없어졌다. 국민소득 100달러에서도 희망이 넘치던 시절, 겉으로 무섭고 속으로 자애롭던 박정희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외고집 김영삼 감(感) 아버지는 처음과 끝이 극과 극이었다. 다 자란 자식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분가할 생각에 부풀어서 열렬히 박수를 쳤건만, 분풀이 화풀이로 일관하다가 자식들이 분가는커녕 결혼도 간신히 하거나 아예 결혼도 못하거나 결혼한 자식은 쪽박을 차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지 않고 있는 재산만 축냈던 것이다.
사모하는 똑똑이 김대중 논리 아버지는 김영삼 아버지의 추락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도 살림이 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일만 되풀이한다. 기업과 은행의 빚이 정부의 빚으로 바뀌었을 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생산체제를 갖출 줄 모른다. 아는 것은 많은데, 이해하고 응용하고 창조할 줄을 모른다. 비판은 절대 용납 못한다.
위대한 김일성 왕 아버지와 친애하는 김정일 왕자 아버지에 이르면 집안이 파산 날짜만 받아놓았다. 농지개혁을 했을 때 '30대의 김일성이 아버지처럼 보였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북한의 자식들이 김일성 아버지를 열렬히 사모했다. 전후 복구에서 민심을 많이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70년대 접어들면서 군사력 강화로 가부장의 권력만 커졌을 뿐,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아버지한테 감히 말은 못하고 아버지 말씀대로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로 밥해 먹고 옷 해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고 힘만 막강하여 생사여탈권을 쥐었던 조선시대의 무능력한 아버지와 너무도 흡사하다.
북한의 자식들은 정치 자유뿐만 아니라 문화 자유, 특히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자식들이 일도 못하게 집안에 가둬 놓고 매일 반성하고 효를 다짐하고 조상의 은덕을 되새기고 훌륭하신 아버지를 따라 배우려고 불철주야 노력해야 했다. 때가 되면 멀건 죽을 사이좋게 한 그릇씩만 감사에 감사를 거듭하면서 받아먹어야 했다.
--계속--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8/9
[중국인의 의의 문화와 정치]
중국은 의(義)의 나라이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낸 문학 작품이 바로 나관중의 삼국지와 시내암의 수호지다. 도원결의와 백팔 형제의 의리는 중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는 지도자가 무소불위의 아버지 역할을 못한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황제가 신하 위에서 위세를 부리듯이 군림하지 못한다. 송강은 백팔 도적의 수령으로서 형제들에게는 제멋대로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모택동이 장개석에게 이긴 이유는 중국의 전통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하다. 모택동은 대장정의 고난을 통해서 송강이 백팔 형제의 신임을 얻듯이 동지들의 마음을 얻는다. 그 마음은 그러나 일본의 충도 아니요 한국의 효도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의(義)다. 장개석은 이 의를 얻지 못했다. 의를 얻지 못한 자, 중국에서는 그 세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거꾸러지게 되어 있다. 장개석은 오히려 대륙에서 쫓겨나고 나서 비로소 대만에 함께 간 사람들로부터 의(義)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후로는 그가 잘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 지위가 엄연하지만 최초에 맺은 혈맹은 평등한 의(義)에 기반을 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맏형이 아버지나 우두머리를 자처할 때, 중국은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이란 명분으로 바로 이런 대실책을 저질렀다. 진시황이나 수양제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재미있는 현상은 따꺼(大哥, 맏형)가 의리를 배반했더라도 형제들은 그가 돌아오길 끝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죽거나 아무 일도 않고 칩거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맏형은 그러나 넘지 못할 선을 절대 넘지 못한다. 의리로 맺은 나머지 형제들에게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은 주지만, 죽일 수는 없다. 등소평이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유가 바로 대장정에서 맺어진 이 의리 때문이었다. 이 의리마저 저버릴 때 중국에서는 천하대란이 일어난다.
중국인의 이 의리가 넓혀지면 중화사상이 된다. 세계 어디 가든 중국인은 중국인끼리 서로 돕는다. 아버지가 다르면 같은 동네 사람끼리도 그야말로 피 터지게 싸우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해외에서 경쟁할 때 이 경향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외국에서 수입할 때, 함께 뭉쳐서 상대방 나라에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낸다. 같은 형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인은 영화 수입이나 박찬호 중계 방송권 확보에서 보듯이 우리끼리 싸워서 상대방 좋은 일만 해 준다. 서로 아버지가 다른 가문이기 때문이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우리 집안만 잘 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중국인과 무슨 일을 하든 이 중국인의 의(義)를 모르면, 평생을 사귀어도 겉돌게 된다.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우는 것이 중국인들에게는 큰 자랑으로 통한다. 국가적으로 아예 외국인과 내국인은 물건값이나 서비스료가 다르다. 그러나 외국인도 어떻게 하여 중국인의 의(義)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 의가 통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딜 가든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이 의의 세계에 들면, 계약서가 필요 없다. 말이 곧 신용이다. 아무리 큰 거래도 중국인의 의의 세계 안에서는 전화 한 통화면 끝난다. 생명보다, 마누라보다, 부모보다, 자식보다 이 의로 맺은 형제를 더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암흑가에도 이것이 그대로 통한다는 것이다. 조직폭력배를 방(幇)이라고 하는데, 이 세계도 철저히 의리로 뭉쳐 있다. 이들은 버젓이 기업도 운영하고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도 된다. 유방과 주원장은 바로 이 암흑가에서 일어나서 가장 중국적인 나라, 한과 명을 건국했다. 당의 이세민도 아버지 이세연이 일부러 돈을 주어 장안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사귀게 하였다. 선비, 학자, 관리뿐만 아니라 깡패, 도적, 거지, 중, 도사를 사귄 것은 불문가지다. 이들은 하나같이 나중에 당의 건국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무협소설에 보면 거의 언제나 개방파라고 거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개 좋은 사람들이고 그 중에 꼭 이인(異人)이 숨어 있다. 중국인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황제가 된 유비나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 송강이나 중국인은 똑같이 존경하고 사랑한다. 황제라고 더 존경하지 않고 도적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실은 황제인 유비보다 중국인들은 의로 맺어진 관우와 제갈량을 훨씬 존경하고 사랑한다. 삼국지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이 두 사람이 각기 전후반의 주인공이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관우의 죽음과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고 울지 않는 중국인은 단언컨데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의(義)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암흑가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대만 시내 한복판을 거대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운구 행렬이 지나가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조문객으로 연도에 늘어서는 것을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의 의의 세계를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회 현상이다.
한국인으로 중국인의 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이장수 축구감독이 아닐까 한다. 그는 중경에서 천만 명이 넘는 열렬한 팬이 있다고 한다. 그가 단지 중경의 프로 축구팀을 최강으로 만든 것만으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의의 세계로 들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구단에서 제공한 개인 아파트를 떠나 선수들과 같은 숙소를 쓴 것이다. 거기서 그는 선수들의 문란한 사생활을 뜯어 고쳤다. 밤늦게까지 술을 못 마시게 했다. 프로 정신을 제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고동락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장수 감독을 큰 형님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맺은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설령 이장수 감독이 성적이 안 좋아서 중경 시민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는 최소한 선수들의 의의 세계에는 이미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통해 얻지 못할 소중한 자산을 얻었던 것이다.
[일본의 충(忠) 문화와 정치]
일본은 충(忠)의 나라이다. 집단을 중시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성(城)을 중심으로 하는 영주인 대명(大名 다이묘)에게 절대 충성했던 것과 똑같은 구조가 현대에도 어디에나 있다. 정치에서 이것이 두드러짐은 말할 것도 없다. 계파 정치의 오야봉은 기본적으로 하나하나가 옛날의 영주이다. 그런데 효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와는 달리 그는 단지 집단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가 사라지더라도 집단은 다른 사람에 의해 언제든지 다시 이어진다. 혈연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기본적으로 혈연 중심이되, 그보다 집단을 중시하기 때문에 설령 혈연과 관계없더라도 대가 끊어지면 유능한 사람이 대신 그 집단을 이끌어간다.
100년, 200년 어떤 집단이 이어지는 것이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다. 집단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계파가 있지만, 한국과 달리 정당이 수시로 명멸하지 않는 것은 한 계파의 수장은 더 큰 집단의 한 구성 분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 집단에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게 되면 그는 더 큰 집단에게 불충한 것이 되어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본인들은 이런 자는 아무리 똑똑하고 힘있고 돈이 많고 깨끗해도 배척 당한다.
일본에서는 대기업에 근무했던 사람이 동일 직종의 일을 못하는 것도 바로 이 집단에 대한 충성 때문이다. 반면에 효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에서는 회사에서 나오면 자기가 새로운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바로 직전에 자기가 하던 그 일을 그대로 하는 것이 원칙처럼 되었다. 거래처마저 다 빼앗아간다. 만약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그 대기업에서 이를 못하게 하면, 이제까지 쓸개까지 빼주면서 효도를 다하던 그 회사를 중상모략하는 데 일생을 건다.
일본의 재벌이란 집단이 말만 계열(게이레츠)로 바뀌었을 뿐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창업자니 소유자니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재벌이란 집단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설령 맥아더에 의해 창업주가 다 쫓겨났더라도 관계없다. 집단 자체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흔히 일본의 재벌이 2차 대전 후 해체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단지 소유주가 물러났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소유주가 능력이 없으면 시간의 문제일 뿐 물러나게 되어 있다. 미쯔비시, 미쓰이 등은 여전히 웬만한 나라보다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로 보면 일본주식회사, 부분으로 보면 몇 개의 거대 재벌, 그 아래 밤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중소기업--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 관계는 하나같이 충(忠)의 관계이다. 따라서 외국 기업은 일본 시장에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정당은 거대 정당 자민당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 군소 정당일 따름이다. 산업화가 고도화되고 일본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사회당이 한 때 잠시 득세한 적도 있지만, 일본의 당은 누가 뭐래도 자민당이다. 그 당 안의 큰 계파가 군소 정당보다 크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 야구에서 자민당에 해당하는 팀이 바로 요미우리 거인 팀이다. 압도적으로 팬이 많다. 일본인은 옛날 막부에 해당하는 거대한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은 충을 매개로 한 집단 중심의 나라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바뀐다고 해도 거의 변하는 게 없다. 이것도 효를 매개로 하여 '아버지'를 태양으로 모시는 나라인 한국과 전혀 다르다. 일본의 수상이 수시로 바뀌어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나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반면에 '아버지' 중심인 한국에서는 대통령 한 번 바뀌면 모든 게 뒤집어진다. 이렇게 두 나라가 판이한 것은 의사결정 과정에 있다.
일본에서는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충의 세계이므로 집단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 지혜를 모으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의사결정은 철저히 상향식이다. 우리가 하향식인 것과 정반대이다. 상향식으로 충분히 논의되어 결정이 되면 이건 반드시 지킨다. 결정된 것을 철두철미 지키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결정되기 전에 충분히 논의하여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게 만드는 것을 화(和)라 한다. 그래서 일본은 스스로의 정신을 화혼(和魂)이라 한다.
일본의 의사결정 과정은 자기들 문화로서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다. 의회보다 다도 모임이나 요정의 술자리가 더 중요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본의 이런 문화를 잘 알았기 때문에 한일 수교시에 일본 원로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그 덕분인지 모르지만 일제의 35년 지배를 받았던 한민족으로서는 당시의 3억 달러니 5억 달러니 하는 것이 도대체 성이 차지 않았지만, 짠돌이 일본으로서는 크게 선심(?)을 쓴 셈이다.
일본의 계파 관리에 돈이 들어가는 것은 옛날 영주가 무사를 먹여 살리는 것과 동일하다. 자연히 계파의 보스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한국 못지 않게 검은 돈 얘기가 많이 오갈 수밖에 없다.
[시대에 뒤떨어진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의 정치가 머잖아 크게 변할 것]
한중일 정치는 경제 자유를 확대하고 사회 자유를 보장하고 문화 자유를 해방시켜 생산을 계속 늘리고 비판을 허용하여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야 할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이제는 새로운 문화가 용트림하고 있다. 아니 이미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이 문화의 주역은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에 이은 문화 자유로 커질 대로 커진 중산층과 일반 대중이다. 이들의 수준이 이미 지도자연하는 정치인들을 능가한다.
중국은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정치가 전통적인 형태를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별 탈없이 지속하겠지만, 한국과 일본, 대만, 싱가포르는 정치인들은 거의 블랙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었다. 각기 효와 충, 의의 전통에 서구 민주주의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나타나긴 나타날 것이다.
--계속--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9/9
[밥 잘 먹고 숭늉 마시기]
자유는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를 먼저 주고 정치 자유와 문화 자유는 민중들이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주는 게 올바른 순서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서구도 거의 이런 순서를 밟았다. 정치 자유도 선거권에 대해서만 얘기해도 그것이 전국민에게 확대되는 것은 서구에서도 20세기였다. 언론, 종교, 예술의 자유도 정치 자유가 확대되는 것과 더불어 서서히 확대되었다. 그네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달성하여 옛날부터 멋진 신세계를 이룬 듯이 다른 나라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자기와 똑같이 하라는 것은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그보다 자기 나라와 국민은 무시하고 이들 논리를 맹종하는 후진국(?)의 사람은 더욱 가소롭다.
후발 산업국인 독일과 일본이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정치가 독재로 흘렀다가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제 정신이 든 것도 무슨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문화에 바탕을 둔 의식 변화와 그에 따른 정치의 성숙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전혀 수수께끼가 아니다.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중국의 성공과 러시아의 실패 원인]
1980년대 들어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두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인데, 세계 최빈국에 독재 국가였던 중국이 오히려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러시아를 압도하게 되었다. 중국이 앞으로 20년만 지나면 세계 2위, 3위의 경제강국이 되고 50년만 지나면 세계 1위의 경제초강대국이 될 것을 현재로서는 의심할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제안한 경제·사회 자유와 정치·문화 자유의 이론에 따르면 쉽게 설명된다.
[경제·사회 자유를 먼저 준 중국]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하면서 공산당 일당 지배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정치와 문화의 자유를 억제하여 정치 안정을 가져오고 대신 경제와 사회 분야의 자유를 서서히 풀어 주었다. 10여년 후 경제·사회 자유로 자유의 맛을 알게 된 세력이 마침내 정치·문화 자유까지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공산당 일당 독재과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이 저 유명한 1989년의 천안문 사태다. 결과는 일반의 예상과는 반대로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이 때 전세계의 민주화 지지 세력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중국은 이제 끝장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지도자였다. 피를 흘림으로써 정치 안정을 이룩한 다음에 경제·사회의 자유는 한층 더 넓혀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자 중국은 당당히 GDP 기준으로 세계7위의 강국으로 발돋음했다. 구매력으로 따지면 일본을 제치고 이미 세계 2위로 올라섰다.
러시아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구소련의 대통령이 되면서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서구가 원하는 바를 거의 그대로 실천했다.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라는 러시아 말이 세계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그는 경제·사회 자유만이 아니라 정치·문화 자유도 한꺼번에 다 허용했다. 그 자유의 물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스스로도 익사해 버렸다.
[정치·문화 자유와 경제·사회 자유를 한꺼번에 다 준 러시아]
천연자원 세계1위, 기초과학기술 세계 2위, 국토면적 세계 1위--이 모든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극도의 혼란이 동토를 휩쓸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를 쫓아낸 옐친은 알코올 중독자로, 만인의 지탄을 받던 KGB마저 전격적으로 해체했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다. 사회 자유는 무엇보다 치안이 확보되어야 민중들이 누릴 수 있는 건데, 경찰의 힘이 무력한 상태에서 비밀경찰마저 해체해 버리자, 회사 하나를 설립해도 기관총부터 사서 스스로를 방위해야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마피아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KGB 요원이 마피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자유는 자유를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경제·사회 자유는 사람들이 쉽게 감당하지만 정치·문화 자유는 감당하기가 아주 어렵다. 전자는 물질적, 기술적, 자연적인 자유인 반면에 후자는 정신적, 이론적, 인간적 자유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누릴 수가 없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기적도 없다.
자연계의 변화가 수만년, 수십만년, 수백만년, 수천만 년의 시간을 단위로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이루어지듯이, 인간계의 변화는 최소 30년, 보통 100년, 200년, 500년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한다. 중국인은 5천년 역사를 통해 이를 어떤 나라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사 외에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다. 등소평이 중국의 유원한 지혜를 터득한 대표주자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최소한 100년 앞을 내다보고 추진했다.
한국도 중국 못지 않게 오랜 역사가 있는 나라지만, 조선 중기 이후 모든 기준을 중국의 '과거(주나라와 송나라)'에 맞춤으로써 고유 사상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사상적으로 중국을 흉내내는 모화사상이란 황사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온통 뒤덮었다. 그 결과 현실에 맞는 정책을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죽으나 사나 정통성 시비로 날을 지샜다. 그것이 현재까지 계속된다.
조선이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일제 시대를 거치고, 개혁·개방할 절호의 시기였던 대원군(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당시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 나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바다에 아무리 돌을 집어넣어도 물이 줄어들지 않듯이 사막에선 구멍을 아무리 파도 땀방울 만한 물방울도 나오기 힘든 법이다.) 이후 무려 100년 만에 비로소 박정희란 지도자가 한국 실정에 맞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중국 사상이란 무의식의 갑옷을 입고 미국 사상이란 의식의 총칼을 든 '배운 분'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허용한 경제 자유와 사회 자유 덕분에 한국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민중이 마침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정치 자유와 문화 자유도 자유에 따른 책임을 다하면서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배운 분'들이 중국과 미국의 잣대를 참고로 우리의 잣대를 만들어야 할 시대적 소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지도자의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 긴 흐름으로 볼 때 이런 모순은 짧으면 10년, 길어야 20년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한민족이 떨치고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전혀 두려워할 게 없다. 모순의 극점에 있는 북한도 긴 흐름으로 볼 때 그 생명이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냥' 사라지진 않겠지만.
극도의 혼란 끝에 마침내 러시아에서 2000년에 푸틴이 등장했다. 그가 하는 일을 보면, 경제·사회 자유는 인정하되 정치·문화 자유는 제한한다. 박정희, 이광요, 장개석, 등소평의 뒤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전세계는 이런 그의 행보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고르바초프가 했어야만 했던 일을 15년의 시행착오 끝에 그가 비로소 하게 되었다고 본다. 만약 푸틴이 지금 하는 일을 고르바초프가 했다면, 지금쯤 러시아는 중국을 능가하는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지혜를 얻기 어려운 이유는 기존의 학설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
끝.
(2001.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