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통일을 가로 막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 한국전쟁 중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사용안했다'는 저명?한 학자넘들 보거라! -
북한 공산군의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한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6.25 전쟁 발발 57주년을 맞이하여 UN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질 수 있엇던 한민족의 통일을 무력화시킨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하여 다시 빝통한 심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우리의 통일을 좌절시킨 그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실체를 여기에 다시 제시하여 우리의 그들에 대한 경각심을 항상 늦추지 말 것을 강조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음.
2004년에 출판된 어떤 명문대학 교수의 저서에서 "한국전쟁 중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는 데 사용했다고 미군은 주장했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그들의 기본전술인 '게릴라 전술'을 "장진호 전투"에서 사용했다"라고 언급했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것은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가라고 그 속에서 어떤 자는 논평했었다. 그러나 흰 것은 아무리 각도를 달리해 봐도 흰 것은 여전히 희고 붉은 것은 여전히 붉다는 사실을 누구든 왜곡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과연 중공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는 지, 정규전을 했는 지 이 blog의 "미 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 전투"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독자는 한번 필독해 보시라.
'압록강'을 도강하여 북한으로 진입하는 중공군
나는 이런 내용을 우연히 보고 아주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명문대학의 교수의 저서 속에서 그렇게 언급했으니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비치게 될것인지 그 영향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무엇이건 어떤 사안이나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되는 표현 등을 일컬어 새로운 각도에서의 조명이라고 기정사실화하려는 어떤 학자나 정치가들의 멋대로의 무책임한 평가 등이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무방비로 정제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이 사회 속에서 유포되는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마치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같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드리지 않는 오늘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어디서 무슨 책에 근거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 지, 또 일개 학자가 군사학을, 전선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연구하고 알고 있기에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었는 지 알 수 없으나 이런 자들을 통해서 멋대로 우리의 전투 실상이 왜곡되고, 해석되여 세상에, 오늘의 세대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 노병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은 사실 그대로 그 당시의 시대상에 의거 그대로 받아드려야지 그것을 오늘의 시각으로 평가하거나 또는 판단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마차를 타고 다닐 때의 시대상을 오늘의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현대의 사회상에 기준하여 비교하는 것같은 미련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1952년 3월부터 10월 30일 사이에 서부전선(경기, 장단 및 사천강지역)에서 내가 일선중대장으로 중공군과 전투하면서 관찰했고 또한 연대 작전보좌관을 하면서 예하부대로부터 보고를 받고 파악한 중공군은 분명히 "인해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피리를 불며 꽹과리를 두들기며 개미떼같이 야간에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죽여도, 죽여도 계속 공격해 오는 중공군을, 달빛 아래에서, 혹은 조명탄 아래에서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이 나는지나 이런 학자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직 40대의 학자이니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무슨 문헌을 읽고 그것에 근거하여 이런 맹낭한 소리를 했겠지만 그것은 학설도, 유식도 아니고 자신의 무지를 세상에 발표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은 전투의 양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 데에서 기인되었거나 또는 고의적인 왜곡으로 국민을 호도하려하는 어떤 불순 기도에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뚜렷한 근거도 없이 학자라하여 전투의 실상을 멋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나는 오늘의 젊은 세대에 대해서 어떤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심지어 '맥아더'는 침략자이니 그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여야 한다"는 오늘의 세태는 우리, 한국전쟁에서 공산침략군에 대항하여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싸웠던 우리도 침략자로 규정짖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아무리 이념에 심취했거나 미쳤기로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인가? 누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놓았단 말인가? 그 많은 희생위에 세워졌음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러면 6.25 참전용사들이 과연 누구를 침략했단 말인가? 이런 자들은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되기를 포기한 자들이니 이들이 누구인가?
이런 학자나 학자출신들이 국가정책이나 국내정치를 논한다면 그 잘못된 표현의 결과의 파장에 대하여 생각할 때 국가적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학자의 말이라해서, 무조건 학문적인 발표라하여 잘못된 표현이나 그 내용 등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막대한 영향, 듣는 자나 읽는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왜곡된 인식을 줘서 국민들을 불안케 하며 또한 국민들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등의 사실 등을 정당화하는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나 이를 옹호하는 자들을 또는 그런 학자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한다. 아니 이 사회에서 아예 영구히 퇴출시켜야 한다.
학자들이 전투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문헌이나 읽고 그것을 연구했다해서 그 속에서 100%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40, 50 명이 방어하고 있는 전초진지에 수백 명의 중공군이 개미떼같이 공격해 올 때 10 명 중 1 명이 장총을 소지하고 기타 인원은 수류탄을 휴대하거나 빈손인 이런 비율의 공격형태는 "인해전술"이 아닌가? 이런 공격형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개월씩 서부전선의 넓은 개활지에서 계속되었다면 이것을 "인해전술"이 아니고 "게릴라 전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해병대 근무시절 "Counter-Guerrilla Operations & Techniqes"에 관한 특수전교육(U.S.Army Special Warfare School(1961.5 -7) & U.S.A.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 1968.7 - 69.6)을 많은 시간 받고 "反게릴라 戰術 및 技術"이라는 교범을 번역, 편찬하여 해병대 사령부에서 발행하게 하였고 또 그 내용에 대하여 해병대 전투부대 장교들에게 순회교육을 실시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는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었는 데 중공군은 한국전쟁 중, 특히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에서 120.000 명의 대병력으로 "인해전술"이 아닌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는 그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가를 읽고 크게 놀랐었다.
물론 "인해전술"이라는 용어는 중공군이 붙인 명칭이 아니고 우리와 미군들이 붙인 명칭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면 개미떼 같이 새까맣게 죽여도, 죽어도 계속 밀려오는 중공군을 "개미떼 전술"을 사용한다고나 할까? 과연 이 대학교수는 "게릴라 전술"의 기본개념이나 알고 이런 소리를 했는 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한국전쟁을 남침이 아니라 통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학술적인 학설?로 해석하는 거나 또는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통일전쟁이며 이는 이미 8.15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등과 같은 일부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황당한 논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얼마 전 해병대 전우회 계시판에 흔이들 이야기하는, 한국전쟁 중의 해병대의 애칭(Nickname)이었던 '개병대'라는 어휘의 유래에 대해서 오늘의 해병들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하여 설명을 했었는 데 어떤 독자(해병)는 그렇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유래되었다는 엉뚱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어떤 예비역 장군까지도 그 우리가 50년 대에 듣던 애칭을 엉뚱하게도 개병대를 凱兵隊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대학교수의 소리나 이 해병대 출신의 소리나 똑 같은 근거에 의하지 않은 자기위주의 독단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호도하려하는 어떤 기도를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나이로 봐서 한국전에 대한 경험은 있을 리는 없고 또 50년대의 사회상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후자는 한국전 당시 사관 후보생이었으니 그 당시의 해병대의 실상에 대해서 알 수 없을터인데 어떡하다 선배의 근거에 의한 이야기를, 이런 엄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믿지 않는 사회풍조가 이 사회 속에, 이들 속에 만연해 있는지 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또한 서글프기도 했다. 누가 과연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 글 올린이 주) 개병대 부분에 있어서 올드마린 해병님의 말은 분명히 맞고, '凱兵隊' 부분도 이승만대통령이 한 말이라는것도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개병대'란 말이 있었기에 이승만대통령이 개병대란 말을 좋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같은 해병대 선배의 말을 믿을려하지 않은 오늘의 이 사회풍조 속에서 그런 대학 교수를 나무란들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노병으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현역시절에는, 특히 한국전쟁 중에는 상관이 콩을 팥이라해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고 또한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은 어떤가? 과연 오늘의 해병들은 상관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나는 선배해병으로서 묻고 싶다.
또한 오늘의 지휘관들은 자기부하들에게 선배들이 주고 있던 것같은 그런 절대적인 믿음을 주고 있는가? 그런 믿음을 부하들에게 주지못하면서 자기의 말을 믿으라고, 들으라고 강요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만일 주고 있다면 어떻게?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말은 행동으로 입증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할 때, 말이 말로서 끝일 때 거기에는 불신과 분열 그리고 대립이 생겨 오늘의 사회상과 같은 혼돈 속으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상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또는 그런 믿음을 부하들에게 줄 수 없다면 그런 조직은 필시 와해될 것이며, 특히 그런 군대는 평시에는 각종 행사 등에서 형식에 매여 잘 훈련된 부대로 평가되거나 또는 보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유사 시, 전투 시 필연적으로 패하기 마련이다.
아래 내용(영문)은 중공군이 기술한 그들의 전술 표현인데 그들은 전투지대 내에서의 전투지휘관들의 도살적인 독전내용(한국전쟁 중의 "장단, 사천강 전투" 및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 중에 중공군이 사용한 '인해 전술', 특히 미 해병 제1사단 제7연대 제2대대 소속인 "F 중대의 전투")은 전혀 모르고 있거나 이 내용이 대외선전 목적으로 작성된 내용으로서 그것을 미화하여 마치 그렇지 않은 듯 기술하고 있으나 전투 중 현장에서 그들의 '인해 전술'의 수법을 확인한 우리, 老兵으로서는 그들의 거짓 선전 내용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오히려 서부전선에서 이것도 모르고 전투 중 희생된 중공군 전사들이 가엽게 생각된다.
한국전쟁 중 우리가 관찰한 중공군은 그들의 수법을 봐서 항상 경계의 대상임을 우리는 그때나 오늘이나 항상 잊지 않고 있다.국민들도 이런 면을 잘 알고 항상, 국 내외에서 그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에게 화를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이때 필자는 "장단, 사천강 전투" 당시 제2대대 제5중대장 및 연대작전보좌관(상황실장)으로 근무했었다. - oldmarine -
What is"Human Wave" Tactics?Often they greatly exaggerated the number of attacking CCF, such as taking a CCF regiment as a CCF division.
The CCF mostly attacked at night, blowing bugles and wistles, shouting thrills, even playing "sweet music" to cause psychological stress. these CCF tactics made western forces feel that the enemy was everywhere coming from every direction. Moreover, PVAs were masters of infiltration, they often sneaked in and attacked directly on command posts, generating shock and chaos.
Western combat history often referred to CCF attacks as "swarms of Chinese", "human waves", "Chinese hordes", as if the CCF simply threw its men into the fire and let itself be slaughtered. Such a description indicated a great misunderstanding of the CCF tactics.
As some military analysts pointed out, the CCF rarely used dense formations in their attacks, it sought to inflict maximum damage with mnimum casualties.
During the Korean war, CCF never had a commanding numerical superioty against UN forces, in fact, during the 4th campaign, it was greatly outnumbered by UN (it was always outgunned), yet it could still outmaneuver UN forces and even managed to counter attack at X Corps.
CCF could achieve all these with inferior firepower because it had smarter tactics and strategy. During battles, western forces were usually incapable of correctly estimating the strength of CCF for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