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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정초기도 2일째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 정각에 정초법회를 시작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정토회 회원들은 정초기도를 하기에 앞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초기도 두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기도란 무엇인가를 한번 살펴봅시다.
두 가지 기도
기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기도란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는 반드시 ‘성취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라는 질문이 따라와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도가 성취가 되었다고 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대다수가 생각하는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기도는 아닙니다. 둘째,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도 기도입니다. 한문으로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하죠. 바깥으로 향해 있던 눈을 자기로 돌이켜서 비추어 보는 겁니다.
‘아, 그건 내가 잘못했구나.’
‘아, 그건 내가 욕심을 너무 냈구나.’
‘아,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문제 삼았던 일이 아무 문제가 아닌 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도라고 하기도 하지만 수행이라고도 말합니다. 자기를 돌이켜 움켜쥔 생각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편안해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수행이에요. 힘이나 능력을 갖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통력을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간절하면 꽃이 핍니다
그런데 전법은 수행과 조금 달라요.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으려면 자기를 돌이키는 수행을 하면 됩니다. 수행은 왕이든, 학자든, 똥군이든, 가난한 여인이든 다 할 수 있어요. 누구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법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모두 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전법을 할 때는 탁월하게 차이가 났어요. 전법을 할 때는 일종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을 교화하고 전법할 때는 힘을 사용했습니다. 가령 어린아이를 만나면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법을 하고, 고등학생을 만나면 그에 맞게 과학지식을 예로 들어 설법을 하는 거예요. 해탈한 사람들은 주위에 큰 감동을 주었지만, 해탈한 사람들 모두가 부처님처럼 상황에 맞는 설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이 어린 시절에 왕자로 살았던 경험은 깨달음을 얻는 데는 장애가 되었지만, 깨달은 후에 왕이나 바라문을 교화할 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6년 고행도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시행착오에 해당하지만 나중에 고행주의자들을 교화할 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수행은 움켜쥔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찰나에 내려놓을 수도 있고, 10년이 지나도 못 내려놓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법은 원을 세우는 겁니다. 원을 세운다는 것은 중생의 아픔을 간절하게 생각하는 것을 뜻해요. 중생의 아픔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보다 더 간절해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삶도 그랬어요. 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이 정진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을 때 중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떠올리며 다시 정진하신 모습이 나오거든요. 출가하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걸식해서 얻은 음식을 먹고 토한 후 회의감이 들었을 때도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며 발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6년 고행할 때도 그랬고, 성도 직전에도 그랬어요. 이것은 원을 성취하기 위한 간절함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원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간절히 하면 힘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당장 내 문제가 급한 사람들은 편안한 가운데 꾸준하게 정진해야 해요. 그러나 내 인생의 문제가 작아진 사람들은 ‘1만 전법’이라는 원을 세우고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전법을 할 때 상대방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전화할까 말까, 문자를 보낼까 말까, 이런 고민이 일절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좀 뻔뻔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항의를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넘어갈 뿐이에요. ‘괜히 했다’ 이런 후회는 자기 방어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기도를 할 때는 자신의 괴로움을 없애는 기도이든, 전법을 발원하는 기도이든, 조금 더 간절한 마음을 내서 정진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문이 끝나고 다 함께 300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생중계 화면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유수 스님의 집전으로 서울 공동체 대중의 우렁찬 염불 소리가 랜선을 타고 울려 퍼지자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정토회 회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배 한 배 염주를 돌려가며 절을 했습니다.
스님도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 방석을 펴고 대중과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생중계 화면은 서울 정토회관과 두북 수련원을 번갈아가며 보여 주었습니다.
“사생육도 법계중생 다겁생래 지은 업장 지금 내가 참회하니 모두 소멸하여지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지이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사홍서원으로 2일째 정초법회를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사람은 바로 ‘내일은 국민가수’ 우승자 박창근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스님께서 대구에 강연 오실 때마다 강연 들으러 자주 갔었습니다.”
“맞아요. 2006년도인가 그때 대구 정토법당에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그랬잖아요. 벌써 16년이 흘렀네요. 국민가수가 되었다길래 제가 아는 창근 씨가 맞는지 긴가민가했어요.”
박창근 씨는 기나긴 무명시절을 보낼 때 정토회에 자주 나와 스님의 법문도 듣고, 법회 전에 노래도 한 곡씩 불러주는 등 스님과는 오래된 인연입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인 ‘내일은 국민가수’에서 1대 국민가수에 등극하며 23년 동안의 긴 무명시절을 청산한 박창근 씨는 옛날 모습 그대로 수줍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근에 유명해지고 나서 제일 좋은 점이 오늘처럼 스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게 된 일 같아요. 정말 영광입니다.” (웃음)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졌나 봐요. 창근 씨 같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네요. 저도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증이라고는 주민등록증밖에 없는데도, 제가 하는 법문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요.”
박창근 씨는 2012년에 스님이 청년들을 위해 마련했던 청춘콘서트 무대에 올랐던 경험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옛날 추억이 오가는 가운데 요즘 고민하고 있는 내용도 털어놓았습니다.
“요즘 광고 출연 제안이 들어오는데, 음료나 치킨을 판매하는 광고에 출연을 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돼요.”
“음식 광고 정도는 출연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치품이라든지, 환경파괴 제품이라든지, 과소비를 조장하는 물품이라든지, 이런 광고 제안은 거절해야죠. 그리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건강에 반하는 제품에는 출연하지 않는 게 좋아요.” (웃음)
스님은 정토회 안에 마음공부를 하는 방송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이 있다고 소개하며 박창근 씨가 앞으로 길벗 모임에 참여하여 더 많은 재능 기부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박창근 씨 일행에게 두북 수련원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매일 생방송이 열리는 방송실, 재활용 물품들이 모여 있는 창고, 화상회의를 하는 컨테이너 등 폐교를 활용하여 살고 있다는 스님의 설명에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스님,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하실 때 저도 한 번 노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조만간에 꼭 초대할게요. 그전에 노트북 사용법을 좀 배우세요. 안 그러면 정토회 활동가를 파견해서 온라인으로 공연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웃음)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은 후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5200여 명이 동시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봄이 시작되길
“오늘은 봄이 시작되는 절기, 입춘(立春)입니다. 입춘인데 많이 춥죠? 입춘이란 봄이 다 왔다는 뜻이 아니라 봄이 ‘시작’된다 뜻이에요. 우리 선조들은 2월이 지나면 더 추워지지는 않으니까 양력 2월 4일경을 봄이 시작되는 절기로 정했습니다. 요즘은 기후가 변해서 2월 중순이나 하순이 일 년 중에 가장 춥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1월 말이 가장 춥고 2월 초가 되면 춥기는 하지만 더 큰 추위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즉문즉설을 듣거나 수행을 시작하면 마음에 입춘이 찾아온 것과 같습니다. 아직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지만 마음작용의 이치를 알게 되면 예전처럼 괴롭지는 않게 됩니다. 마치 입춘을 지나면 날씨가 아직은 춥지만 점점 따뜻해지는 것처럼 마음 역시 지금은 괴롭지만 앞으로 점점 나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대화를 하면서 여러분들도 마음의 입춘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자와 대화를 마친 후 오늘도 초대 손님을 한 분 모셨습니다. 예고 없이 깜짝 등장한 사람은 바로 방송인 김제동 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갑자기 초대해서 미안합니다.” (웃음)
방송 시작 20분 전에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 스님에게 전화를 건 김제동 씨에게 스님이 즉석에서 오늘 방송 출연을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두 분은 격의 없이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스님은 김제동 씨의 근황을 물어보는 가운데, 강성 친박으로 유명한 우리공화당 조원진 대표와 김제동 씨가 서슴없이 대화를 나눈 동영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차이점은 풍요와 재미를 불러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여야, 진보와 보수, 세대 간에 서로 대화가 잘 안 되잖아요. 그런데 김제동 씨와 조원진 대표의 만남은 그런 대화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도 제동 씨가 그런 역할을 더 많이 해주면 좋겠어요.”
김제동 씨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하다가 지금 방송을 아예 못하고 있습니다. (웃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은 사실 스님께 배운 거예요. 톡투유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재미를 불러오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김제동 씨는 스님의 험담을 좀 이야기해야겠다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무료 강연을 많이 하는 이유
“무료 강연을 50회 정도 진행했을 즈음에 스님께서 무료 강연을 더 하자고 하셔서 저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럼 돈을 내고 하세요’라고 대답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 되물었더니 스님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동 씨,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 있죠? 상담받을 때 돈 냈죠? 정신과 의사가 제동 씨한테 뭘 해주던가요?’
‘제 이야기를 들어줬죠.’
‘한 사람이 제동 씨 이야기 들어줘도 돈을 내야 하는데, 나는 제동 씨 이야기 들어주려고 천명 넘게 사람을 모아놨어요. 당신이 돈을 내야 되겠어요, 돈을 받아야 되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맞는 말이라도 그대로 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도 스님 따라다니면서 배운 게 많았기 때문인지 강연장에서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니 돈을 내고서라도 할 만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진짜 재미있는 일은 돈 내고 하잖아요? 스님 덕분에 잘 놀았습니다.”
“맞아요. 김제동 씨가 청년들을 위한 무료 강연을 함께 해주어서 그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김제동 씨가 강연료 많이 받았다고 비난을 받았을 때 무료 강연도 많이 했다고 해명을 한 마디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저도 함께 욕을 많이 먹었죠. (웃음)
사무실을 유지하고 직원들에게 월급도 주려면 최소한의 유료 강연은 해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제동 씨가 무료 강연을 많이 했는데 구설수에 휘말리니까 벗어나기 어렵더라고요. 그때 제동 씨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요즘 아침 기도는 하고 있습니까?”
“매일 아침에 109배를 한 후 명상을 합니다. 109배를 하는 이유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저희 어머님이 108배하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109배를 하겠다고 했더니 그건 괜찮다고 하셔서 109배를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과 잘 지내기 위한 방법이에요. 저에게는 매우 좋은 시간인데 가끔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하기 싫은 마음이 들어도 툭 엎드립니다. 오늘은 스님이 하시는 정초법회도 듣고 300배도 했습니다.”
“어머님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여서 스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하시는데, 그건 어머님의 사정이고 저와 제동 씨는 이렇게 가끔 만나면서 잘 지냅니다.”
“요즘에는 어머님도 스님과 만나는 걸 좋아하십니다.”
“정말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스님을 전도하겠다고 했거든요.” (웃음)
“저도 한 달에 한 번씩 목사님을 만납니다. 식사 기도를 해주시면 함께 ‘아멘’ 해요.”
김제동 씨가 시간을 내준 덕분에 시청자들 모두가 웃으며 쉬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계속했습니다. 사전에 세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서른다섯 살 아들을 결혼시키고 싶은데 여성을 만날 기회가 없다며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35살 된 아들을 결혼시키고 싶어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나요?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저에게 고개 숙이고 사는 법을 일깨워주려고 이런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때부터 8개월 정도 108배를 하고 나니 아들이 시험을 포기하고 택배 물류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와 남편은 너무 놀랐지만, 아들이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게 처음이라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일 년 견뎌내면 도와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들은 그 약속을 지켰고 지금은 택배 사업을 한 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즐겁게 잘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남편도 아들 사업을 도와주고 저희도 새로운 인생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아들 나이가 서른다섯 살입니다. 결혼을 시키고 싶은데 여성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다시 108배를 시작했습니다. 아들 결혼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재밌는 질문이네요. 그런데 질문을 들으면서 질문자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왜 입만 딱 벌리고 있어요? 너무너무 이기주의자예요. 왜 반응이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셔서요.”
“저는 칠십 평생 혼자 살았어요. 아무리 자기 아들이 귀하더라도 서른다섯 살 먹은 총각이 결혼 안 한 걸 걱정해야 하겠어요? 서른다섯이면 칠십의 딱 절반이잖아요. 그 소리를 저희 어머니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나!’ 하지 않을까요? 조금 전에 출연한 김제동 씨도 올해 오십이에요. 그렇게 자기 아들만 걱정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래요. 죄송해야 해요. 미안한 줄 알면 사실은 이것은 질문거리가 안 돼요. (웃음) 양심이 있어야죠. 제가 가만히 질문자 말을 듣다 보니까 무슨 저런 분이 다 있나 싶었어요. 아무리 자기 가족을 우선 챙겨야 한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잖아요. 이곳 두북 수련원 주위에 저의 초등학교 동창이 살아요. 그 동창이 하루는 저를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장가가니까 주례 좀 서달라는 거예요.
‘네가 내 친구라니까 우리 아들이 너무너무 좋아하더라. 주례를 꼭 부탁해 달래.’
그래서 제가 그 동창에게 말했어요.
‘너는 네 아들만 생각하나? 지금 내가 칠십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거기다 네 아들 장가가가는 데까지 오라고? 네가 내 친구가 맞나?’
그랬더니 친구가 ‘내가 뭐 잘못했나?’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결혼은 결혼한 사람이 가서 주례를 서야지. 자기도 결혼 못 한 게 무엇 때문에 남의 결혼식에 참가하겠니. 나는 참가도 안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도 없다.’
그랬더니 친구가 다시 되물었어요.
‘우리 아들이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이 아주 유명하다고 하던데 주례를 안 섰단 말이야?’
‘옛날에 주례를 딱 한 번 선 적이 있는데 그 주례사가 책으로 나와서 인기가 있긴 했지. 그런데 내가 내 결혼도 못 했는데 뭣 때문에 남의 결혼식에 가겠느냐?’
이렇게 얘기하고 같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것처럼 결혼을 못 한 사람한테 자기 아들 결혼시키는 비법을 묻는 건 아귀가 안 맞지 않나요? 또 부처님께서는 부모나 아내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인생을 찾기 위해서 출가하셨잖아요. 그 길을 따라서 사는 스님한테 지금 결혼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건 어불성설 아닐까요? 만약 ‘어떻게 하면 제 아들이 이혼하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제가 금방 길을 열어줄 수 있어요. 그런데 혼자 잘 사는 아들을 왜 결혼을 시키려고 그래요?”
“아들이 혼자 사는 걸 보면서 아들도 자기 자식이 있으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존재해야 할까요, 부모를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자식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할까요?”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질문자가 보기에 남의 집 자식들이 결혼하고 손자 생긴 게 보기 좋다고 내 아들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건 자기만족을 위해서잖아요. 자식이 결혼하기 싶어하는지 어쩐지도 모르면서 엄마를 위해서 결혼을 하고 손자를 안겨주라고 바라는 게 부모로서 할 행동이에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첫째, 나한테 물은 게 잘못이에요. 둘째, 부모로서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됐어요. 다 큰 자식이 자기 인생을 살도록 놔둬야지 왜 자식한테 필요한 걸 해내 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자식이나 손자가 필요하면 질문자가 아이를 하나 더 낳던지 입양을 하든지 해서 키우면 되잖아요. 자식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길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부모라면 언제나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식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관점은 아니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부모 자격이 없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네가 결혼을 하든 결혼을 하지 않든, 아기를 낳든 아기를 낳지 않든, 공무원이 되든 택배 일을 하든 나는 널 믿는다. 네가 만족하면 됐다, 세상 사람이 다 너에게 뭐라고 해도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다.’
이게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집 아들은 장가 못 갔다.’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아들한테 장가를 가라고 하든지, ‘저 집 아들은 취직도 못 했다.’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자식한테 취직하라는 것은 부모로서 할 일이 아니에요. 이웃집 아줌마들이 하는 말입니다. 아이가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고 말도 잘 들으면 누구나 예뻐하잖아요. 그런 아이는 이웃집 아줌마도 좋아해요. 그런데 부모라면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말도 안 듣고 이웃 사람들이 ‘아이고, 저런 애는 문제다.’라면서 싫어해도 이렇게 말해줘야 해요.
‘세상이 다 싫어해도 나는 네 편이다. 나는 널 믿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요즘은 부모는 없고 전부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만 있어요. 자식보다 자기 필요가 더 중요합니다. 이혼할 때도 아이가 보고 싶으면 죽기 살기로 데려가려고 하고, 힘들면 아이를 서로 안 데리고 가려고 하잖아요. 부부가 헤어지더라도 아이가 분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부모라면 부부가 비록 뜻이 안 맞아서 헤어져서 따로 살더라도 아이한테는 엄마고 아빠잖아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도록 엄마와 아빠가 서로 존중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헤어지면 남남이지만 아이한테는 여전히 엄마고 아빠니까 아이를 위해서는 헌신을 해야 해요. 이런 관점에서 아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질문자처럼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은 보통 부모들이 다 그렇게 본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욕망을 앞세우는 관점이에요. 아들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는데 시험공부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청천벽력처럼 느꼈잖아요. 그런데 아들은 지금 자기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만약 아들이 질문자가 시킨 대로 했으면 공무원 시험에 세 번 네 번 떨어지다가 좌절해서 우울증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 뜻대로 억지로 아들을 결혼시켜서 잠시 좋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결혼해서 살다가 뜻이 안 맞으면 아기를 낳고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아들이 애까지 놓고 이혼을 하면 질문자가 아기를 데려다 키워야 합니다. 그것보다는 아들이 지금처럼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게 낫잖아요. 이런 상황까지 생각해보면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게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미래에도 잘될 일인지 잘못될 일인지를 알 수 없어요. 질문자의 아들도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면 좋고, 그만두면 나쁠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들이 택배 사업을 해서 아들뿐만 아니라 질문자 부부도 노년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도 나쁜 일이 될지, 좋은 일이 될지를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결혼은 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면 해서 좋고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좋은 겁니다. 저는 칠십이 되도록 결혼 안 하고 혼자 살아도 잘 살잖아요. 저희 부모님도 저에게 결혼을 안 한다고 문제 제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실 때는 ‘네가 제일 잘한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아들이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잖아요? 아들의 인생은 아들 몫으로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람이 만나려면 길가다가도 만나고 넘어지다가도 만나요.
‘아들아, 네가 혼자 살아도 좋고, 결혼해도 좋다. 아기를 안 낳아도 좋고 아기를 낳아도 좋다. 엄마는 네가 좋다면 언제나 오케이다.’
이렇게 아들을 믿어주면 일은 저절로 풀립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결혼하게 해 주세요’, ‘잘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건 잘못됐어요. 질문자가 그냥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느님의 뜻인지 부처님의 가피인지 저절로 생긴 일인지 몰라도 아들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게 결과적으로 잘 됐잖아요. 그러니 질문자는 그냥 바라는 마음 없이 기도하면 됩니다. 아들에게 혼자 사는 삶이 더 좋으면 혼자 사는 길로 갈 거예요. 기독교 신자라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렇게 바라는 기도는 진정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뭐든지 다 아시고 다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한 치 앞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분께 맡기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 주님이 멀리 내다보시고 아들이 혼자 사는 게 좋으면 혼자 살게 해 주시고, 둘이 사는 게 좋으면 둘이 살게 해 주소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오늘날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하느님을 믿는다. 부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도 하느님, 부처님에게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내라고 합니다. 있는 가정도 버리고 출가한 부처님께 ‘신붓감을 구해 달라, 남편감을 구해 달라, 자식 낳게 해 달라’라고 해요.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건 안 맞잖아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근심이 없어집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믿는 거예요. 마음공부 차원에서는 집착을 탁 놓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이 어떻게 되든지 나는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넓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들이 행여 택배회사를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그래, 그럴 수도 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아들이 결혼하게 되면 여자가 마음에 드니 안 드니 이렇게 따지지 말아야 해요. 아들보다 나이가 열 살이 많든, 애가 하나 딸렸든 ‘그래, 네가 좋다면 됐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난리 피우던 부모는 결혼한다고 하면 여자의 조건을 요모조모 따져가면서 반대합니다. 아들이 알아서 잘하는데 질문자는 자꾸 간섭하고 싶어서 안달이잖아요. 늘 자기가 중심인 거예요. 오늘 이렇게 물은 김에 엄마로 돌아가서 아들을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점을 그렇게 가지면 근심 걱정이 없어집니다. 기도는 자기 정진이나 한다고 생각하고 하시면 됩니다.
‘제 고집을 버리겠습니다. 제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질문자가 고개 숙이는 기도를 한다고 했으니까 기도문은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네. 그런데 아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사는 게 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빨리 결혼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막 일어났나 봅니다.”
“그러면 아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요구하지 말고 ‘엄마 아버지처럼 살고 싶으면 결혼해야 하지 않니?’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일이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면 돈과 결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아들이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좋다 저게 좋다 간섭하면 아이에게는 무거운 부담이 됩니다. 명절 때 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이유도 자꾸 간섭하기 때문이에요. 부모들이 ‘왜 결혼을 안 했니? 왜 취직을 안 했니?’ 이러니까 갈등이 생기고 자식들이 다시는 고향에 안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라도 서로 존중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구 집 자식은 결혼해서 벌써 손자를 봤더라. 우리 친구 아들은 어쨌더라’ 이렇게 자꾸 비교하면 자식들이 제일 싫어하고 힘들어합니다. 제가 젊을 때는 친구들이 부모에게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늘 ‘뉘 집 딸은 엄마 반지 사줬다더라, 뉘 집 딸은 엄마한테 뭐 해다 사줬다더라’였어요. 요즘은 그런 얘기보다는 ‘뉘 집 자식은 시험에 합격해서 뭐가 됐더라, 어떻게 잘됐더라.’라는 말을 더 싫어한대요. 그런 말들이 자기 자식한테 할 얘기가 아니잖아요. 절대 자식을 남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항상 자식이 뭘 하든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결혼도 엄마가 나서서 아들에게 하라고 하면 안 돼요. 억지로 결혼했다가 잘못되면 엄마가 다 책임져야 해요. ‘봐라, 내가 그렇게 안 한다고 했는데 엄마가 하라고 해서 이렇게 됐잖아!’ 이런 소리 들어요. 늙어가면서 가능하면 있는 짐도 다 내려놔야 하는데 괜히 자식에게 간섭해서 인생에 책임을 자꾸 더 질 필요가 없습니다. 간섭했다가 나중에 손자까지 키워야 하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할 수도 있어요. 나중에 도와줄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도와주더라도 내가 미리 자청해서 짐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들은 자기 인생 잘 사니까 엄마도 이제는 어린애처럼 생각하지 말고 본인 인생을 잘 사는 게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기 인생을 잘 사는 게 자식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이 어릴 때는 도움이 되지만 성인이 되면 항상 무거운 짐이에요. 즉문즉설에도 싸우는 부모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자주 있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은 부부가 자기들끼리 건강하게 잘 살아서 자식들에게 짐이 안 되는 겁니다. 자식들 인생에 간섭하면 안 돼요.
요즘은 결혼 안 하고 사는 사람도 많아요. 사회적으로도 혼자 살아도 또 문제가 없는 분위기잖아요? 자식 세대와 소통하려면 ‘우리는 그런 걸 못 해봤지만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래도 결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역시 같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정도 의견 개진은 해도 좋아요. 그런데 질문자가 아들 문제로 기도까지 한다는 걸 보니 자기 요구가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인데 부처님께 그냥 기도하는 걸로 끝나겠어요?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는데 아들한테 간섭을 안 할 수 있을까요?”
“아들 때문에 기도하려고 마음을 딱 먹고 백팔 배를 해보니 저도 모르게 자꾸 친정아버지하고 시어머니께 ‘고맙습니다’ 이런 마음이 났어요. 살아가면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분이 친정아버지하고 시어머니 두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스님께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게 좋은 기도예요. 자기는 부모한테 불효하면서 자기 자식은 나한테 잘하기를 바라면 이치에 안 맞잖아요? 내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면 자식은 놔놓고 우선 부모님께 잘해야 해요. 모든 걸 잘하진 못하더라도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서 불효자는 안 돼야 합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를 풀어내는 방법은 감사한 마음을 갖는 거예요. 따져보면 부모님께 고마운 게 엄청 많잖아요. 시어머니가 이런 남편을 낳아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또 부모님도 내가 어릴 때 여러 가지 잔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내가 이 정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여겨야 해요. 나이가 들면 고마운 일만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섭섭한 일을 자꾸 생각하면 인생이 불행해져요. 그러니 기도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네. 가볍게 살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재미와 감동이 함께 어우러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오전에 정초기도 3일째 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수련과 정토경전대학 졸업수련을 연이어 생방송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