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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 : 3 시기와 분쟁 - 고전 3 : 6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 : 3 시기와 분쟁 -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 분쟁, 분열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이다.
성도는 그런 죄들을 다 버리고 씻음을 받아야 한다.
1]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육신에 속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코이'(*)는 1절에서 언급한 '사르키노이스'(*)보다 강한 표현으로 '사르키노이스'는 육신 자체를 가리키는 반면 '사르키코이'는 육신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이 말이 신앙생활을 적게 한 사람에게는 비난이 되지 않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 사용되면 비난하는 투가 된다(Morris).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바울은 본 절에서 육신에 속한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스'(*)는 근본적으로 '뜨거움', '열심' 등을 의미하여 헬라의 전통 작가들의 문헌과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덕목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질투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그릇된 경쟁의식에서 나온 감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대개 '젤로스'를 육에 속한 사람이 가진 정서로 본다.
* 갈 5: 19-20 -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시기'가 외적으로 표출되면 분쟁이 유발되는데,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스'(*)가 어떤 헬라어 사본들(P, D, F, G, TR)에서는 '분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코스타시아이'(*)로 되어 있다.
'분열'은 '분쟁'의 결과로서 필사자가 좀 더 과격하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상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 파로 나누어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각기 독자적인 태도와 노선을 취하였음을 시사한다.
3]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람을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안드로폰'(*)은 통상적인 죄인의 삶의 방식인 이기심, 교만, 시기 따위의 정서를 정당하게 여기고 수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요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린 칭의인(稱義人)으로 살아가야 한다.
* 갈 2: 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 5: 24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본 절에서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인들의 오류를 스스로 시인할 수밖에 없도록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것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런 죄들을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하고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이것을 절제할 줄 알기 때문이다. 본능대로만 산다면 짐승이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다.
* 잠 23: 6-7 – 6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악한 목적을 가진 자를 말한다. 악한 목적을 가진 자가 베푸는 음식은 순수한 친교의 음식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런 음식을 먹는 자는 악한 자의 계교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분들은 좋은 생각을 깊게 한 분들이다.
악한 생각도 그러하다. 세상에서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나쁜 것을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흉악한 사람이 되고 죄를 범하게 된다.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육에 속한 생각과 영에 속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대해 생각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생각을 한다.
믿는 사람은 비록 육신은 땅에서 살지만, 하늘나라에 속하였으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고전 3 : 4 나는 바울에게라 -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했고 아볼로는 그 후에 성경 말씀을 가르친 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었다.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는 본 절이 앞 절의 진술에 대한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고린도 교인들이 '시기'와 '분쟁'에 가득한 어린 신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바울'파와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있는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당파를 짓고 있는 분열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바울이 본 절에서 제시하는 바울파, 아볼로파 외에도 몇몇 분파들이 더 있었다(1: 12).
그런데 바울이 본 절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바울파와 견주어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던 '아볼로'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특별한 사역이나 어떤 특정한 인물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고린도 교회의 내적 분열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한 자이었고 아볼로는 바울 후에 그 교회에 와서 성경 말씀을 가르친 목회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교회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 불과하다.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나아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실망하고 실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와 오직 주님만을 믿고 섬기고 순종하고 바라보고 주님 중심, 하나님의 진리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2]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① 육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② 영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③ 육신적인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본성의 죄악성의 지배를 받는 자이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과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사람이 되자.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바라며 섬기고, 오직 성경 말씀만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생활하고 교회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고전 3 : 5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바울과 아볼로는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5절은 사역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하고 있다. 사역자는 <디아코노스>로 하인이나 집에서 봉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보통은 집사로 많이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고 하는 말씀은 사역자란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을 믿음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역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사역자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각각의 능력과 은사를 받았다. 그들은 각각 부름을 받은 모습은 다르지만, 사명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사람들을 믿게 하는 일이다.
1]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무엇이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P, C, D, TR)에서는 인칭형인 '티스'(*, '누구냐')로 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들(A, B)에서는 중성형인 '티'(*, '무엇이냐')라고 되어 있어 바울 자신과 아볼로를 매우 경시하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음 절에서 언급하려는 하나님의 권위의 절대성과 그분의 사역의 완전성을 두각(頭角)시키고 인간 지도자 권위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대조적으로 약화하려는 의도이다.
2]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을 취하여,'주'와 '사역자(使役者)'를 대조함으로써 '주'의 우위성을 나타낸다.
'사역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이'(*)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봉사자를 가리키는 말로 ‘섬기는 자, 일꾼, 봉사자’라는 뜻이다.
이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되어 '집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 롬 16: 1 -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 빌 1: 1 -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본 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들의 직무가 낮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함이다(Morris).
모든 행위의 주체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사역자인 바울과 아볼로는 도구에 불과하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 그들이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에서 자라게 한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들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시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인,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또 교회는 일꾼들 중심으로 분열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 주님 중심, 복음 진리 중심으로 일치 단합해야 한다.
고전 3 : 6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바울은 앞 절의 논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물 재배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는 복음 사역을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에 비유하였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뿌리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그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이다.
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복음 사역은 씨를 심는 것과 물을 주는 것에 비유되었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을 양육하는 것 곧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전도하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양육하는 것이다.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본 절에 나타나는 동사들 가운데 바울과 아볼로를 주체자로 삼는 '심었고'의 헬라어 '에퓌튜사(*)와 '물을 주었으되'의 헬라어 '에포티센'(*)은 부정 과거인데 반해, 하나님을 주체자로 갖는 동사 '자라나게 하셨나니'의 헬라어 '육사넨'(*)은 미완료과거이다.
이는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시간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영속적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바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행 18: 1-11 -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아울러 바울의 동반자 아볼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자세하게 해석하여 가르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 행 18: 24-25 -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 행 19: 1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항상 있었고 절대적인 역할을 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농사에서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심는다는 말은 <테오>인데, 복음 전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물을 준다는 <포티조>는 전도한 그들을 양육한다는 뜻이다.
2]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이나, 교회의 설립과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지만,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도, 교회의 설립과 성장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심고, 물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자라게 하는 어떤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역자들은 전도하고 양육하였지만, 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 뿐이다. 그들은 결코 성도를 자라게 할 수 없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
성도가 자랄 수 있도록 그 안에 생명력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아욱사노) 것은 바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생을 얻었지만 우리의 생애 동안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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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