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1. 명성황후 시해사건 묘사
-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왕비마마의 처소에 있는 궁녀들에게 덤벼들었다. 10 ~ 12명의 궁녀들이 머리채를 잡힌체 난간 아래로 내동댕이 쳐졌다 일본인들은 왕비마마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쳐들어왔다. 왕비마마가 복도를 통해 달아나시자 일본인들이 뒤쫒아 가서 바닥으로 집어던지고 가슴위로 뛰어올라 세번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2. 러시아 외교관의 보고서와 러시아의 신문
러시아 외교관의 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며 그중 러시아 외교관의 숫자 암호에는 "아마 아직까지도 왕비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451 546 325 117 154 871)" 는 말도 적혀져 있었다고 한다
3. 일본인들의 주장
일본인들은 자신이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 보다는 일본인의 말이 더 신임 할 만하다"고 말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그 말에 대답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말 " 이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바로 유럽인이다" ( 이말은 일본인들은 자신이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무관하고 본래 반일 감정이 박혀 있던 조선인들이 일본을 모함하여 퍼뜨린 말이라고 했는데 웨베르는 그의 말에 목격자는 유럽인이라며 세상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린것도 유럽인이고, 또 일본인이 가해자라는 확실한 증인들이 유럽인이라고 말했다.<그당시 경복궁에는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러시아에 보고문으로 진실을 알렸다>)
* 러시아 신문에 실린 웨베르의 말*
" 전쟁도 아닌 평화시대에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례없는 만행이다"
4.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과정
- 새벽 5시에 광화문쪽에서 총성 한발 (신호탄)이 터짐과 동시에 일본인들이 쳐들어오자 조선의 최고의 시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두고 도망갔다.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데 걸린 시간은 단지 45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병사들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알수 있다.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증거를 소멸하기 위해 시신을 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버렸다.
5. 명성황후 시해의 원인
- 일본은 조선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973명의 병사를 훈련시켜 자기들 세력에 이용하려 했다.. 이를 간파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명성황후 시해 하루전 군대의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이를 알게된 일본 군대가 명성황후를 시해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 명성황후는 독서량이 많고 지식이 상당했으며 판단력이 칼같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고종은 명성황후의 지혜를 빌려 정치해 나아갔고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면 고종의 판단력이 흐려져 조선을 식민지화 하기에 편리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일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의 힘을 몰아내고자 했기 때문에 그것이 달갑지 않아 일본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것이 가장큰 명성황후 시해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반일 감정이 강하게 싹터 오히려 일본에게는 더 진출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6.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계
- 명성황후가 시해될 당시 흥선대원군은 궁안에 있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라이벌이자 갈등관계였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큰 몫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은 4년에서 5년에 불과하며 러시아 보고서에서 언급된 내용에는 대원군이 일본인들에게 이용당했으며 신호탄이 터지기 바로전 일본인들이 쇄국 정책을 편 흥선대원군을 잡으러 집에 들어갔다고 언급 되어있다. 그리고 강제로 흥선대원군을 끌어내 경복궁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이는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대원군은 누명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7. 고종과 세자.
일본인들은 고종의 침실로 들어가 고종의 옷을 찢고 고종과 세자를 심하게 폭행했다. 세자는 칼등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고종은 이렇게 언급했다. " 와타나베, 오카모토, 스즈키는 짐의 눈 앞에서 중전을 붙잡았다 "
8.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들 중에서는 매우 유능한 지성을 가진 엘리트들이 많았다.
*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들의 명단 *
미우라(일본공사), 스기무라(일등서기관), 호리구치(영사관보), 하기와라(외무성경찰),
오카모토(조선군사고문), 시부다니(통역관), 시바시로(작가, 하버드 출신), 야마타(기자),
나니와(의약품판매상), 구니모토(무직), 아다치(신문사사장), 사사키(의사),
기구치(신문기자),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초등학교 교사)
그외 경찰, 대사관직원, 군인등 56명이 있다
9. 그후 가담자들은?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깡패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아무런 가해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타국에서 계속 가해자들을 소환하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러자 처음에는 48명을 잡아들였다가 모두 증거 불충분이라는 명목아래 석방시켰다. 일본인들은 이들이 석방되는 날 기차역에서 가해자들을 영웅으로 여기며 박수를 치고 일본 천왕은 이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큰 부와 명성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고 한다.
10. 요즘 일본 천왕의 딸이 태어났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kbs에서 방송까지 되고 있는 "명성황후"와 명성황후의 시해작전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본인들이 이 보고서를 만든 것은 일본을 미워하자는 뜻이 아니라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잊지 말자는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지는 약 100년전인데 지금 100년후 우리들은 그 일을 너무나 쉽게 잊고 있다. 이것이 본인으로써는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