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원의 행복
(강석진 신부)
제가 새남터 성지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거의 매일 어린 손자를 데리고 오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성전 맨 앞자리에 앉으시는 할머니는 손자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정겨운 장면이었습니다.
순례 미사가 시작되면 할머니와 손자는 겸손하게 그리고 정성껏 미사를 드립니다.
그 모습을 제대 위에서 보고 있으면 저도 더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는 전례 생활을 통해서 기쁘게 성숙하는 모양입니다.
새남터 성지에서는 월요일과 금요일에 순례자들을 위한 안수 예절이 있습니다.
그때 안수를 받으러 나오는 순례자들의 모습은 경건함 그 자체입니다.
안수 예절이 시작되면 할머니와 손자도 안수를 받으러 나옵니다.
그러면 먼저 안수 받은 손자는 할머니의 바지를 꼭 붙잡고 있다가
할머니 안수가 끝나면 같이 손잡고 성전 문밖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안수 예절이 다 끝나고.
제의를 갈아입고 성지 마당으로 가면 할머니와 어린 손자는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제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몇 번씩 인사를 하고
손자도 배꼽 인사를 합니다. 어찌나 마음이 훈훈해지는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할머니만 순례미사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 할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리며 여쭈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어떻게 손자 없이 혼자 오셨어요?
아. 우리 손자 오늘은 뭐 지 아비. 어미가 보는 날이에요
아차. 그리고 신부님 이거. 이것 좀 받아요!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뭔가가 담긴 깨끗한 봉투를 꺼내 제게 내미셨습니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혹시 봉투에 돈이 들었어요?
그럼 저 절대로 안 받을래요.
이런 것 받으면 교황님에게 야단 맞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손자와 똑같이 환한 웃음으로 말했습니다.
이히. 무슨 교황님이 야단을.
이거. 신부님. 안숫값이에요. 안숫값.
우리 손자를 볼 때마다 신부님이 안수해 주시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예뻐해 주시는데 이 할미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거 안숫값으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만약에 안 받는다면. 돈이 적어서 그런 줄 알고 다음에 더 많이 가져오리다.
아니. 할머니...
봉투에 담긴 돈을 살짝 보니 5천원 이었습니다.
순간. 이 정도의 돈을 할머니가 아주 기뻐할 수 있도록.
즐거운 표정으로 받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손자 보느라 하루종일 수고했다고 받은 돈일 텐데.
암튼 할머니 이렇게 큰돈은 오늘만 받을테니.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할머니는 뿌듯한 표정과 기쁘고 환한 얼굴로 성지 밖을 나섰고
저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습니다.
손자의 아빠. 엄마가 어렵게 살다 보니 생활비조차 못 받고 있는 할머니.
그러기에 5천원은 그 할머니의 하루 생활비가 넘는 금액일 수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큰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내 곧 성지 마당에 있는 초 봉헌함으로 가서
그 할머니와 손자를 위한 지향으로 5천원 어치 컵 초를 사서 봉헌했습니다.
주님. 저 할머니와 손자. 그리고 할머니 자녀들에게 당신 은총을 청합니다.
그저.....은총을 청합니다.
그날 너무 큰돈을 받고 가슴 벅찬 하루를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