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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해방의 횃불 전태일 실록』 I·II, 최재영 저, 도서출판 동연
분신 의거 50년을 맞아 전태일을 조명하려는 열기가 뜨겁다. 그는 오늘날 열사로 호칭된다.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를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것은 그의 의거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전태일! 그는 분명히 한국현대사에 굵은 획을 그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의거 반세기가 지났고 그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문헌이 많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이 책 <인간 해방의 횃불 전태일 실록 I, II>의 출판은 전태일 연구와 평가를 위한 진일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13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인간 전태일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이다. 그 근저에는 37년이라는 오랜기간 동안 300인에 달하는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해온 저자의 끈질긴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이 ‘전태일 실록’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때에 따른 생생한 증언들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어쩌면 이 책을 이소선 일대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이소선을 접어두고 전태일을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책은 전태일의 생애를 연대적으로 따라가면서 9부, 50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했고, 2책으로 꾸몄다. 그리고 말미에 ‘못다 한 이야기’들을 덧붙였는데, 사실 이 부분은 전태일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과 논란들에 관해 저자가 추적한 열매들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낙수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는 ‘못다 한 이야기’라는 제목과 달리 각 편이 매우 치열하다. 진실을 밝힌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서술해가는 저자의 견지는 사실이 무엇이냐를 찾아 세세하게 진실을 밝히자는 것인데, 그것은 책의 전편을 통해서 일관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책이 전태일 연구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기를 소망한다.
본문 속으로
어린 태일이 유아기를 보낼 당시에도 할아버지 전암회는 포목상을 했고 아버지 전상수는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미싱 기술자였을 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전영조와 작은아버지 전영관에 이르기까지 집안 어른 모두가 재봉틀과 연관된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전태일은 특히 영아기 시절부터 아버지의 봉제업을 통해 재봉틀로 옷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한 것이다. 동시에 어느 무렵부터 자신도 아버지의 미싱일을 직접 도와주며 어깨너머로 재봉틀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1965년 8월 26일을 기점으로 평화시장 봉제업체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재봉틀과의 인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장 _ 대구 출생과 영아기 시절> 중에서
장남 태일은 막내 순덕을 집에 남겨 두고 태삼과 순옥을 데리고 이태원 근처 미군 부대에 가서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부모가 모두 다 저 지경이 되었으니 문전걸식을 해서라도 어린 동생들과 살아갈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처음 당도할 때는 어머니가 문전걸식을 해서 자신들을 먹여 살렸지만 이번에는 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장남 태일이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들의 끼니를 직접 책임지게 된 것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무엇보다 태일이 견디기 힘든 일은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치료하는 과정이었다. 태일은 미군 부대 식당 개구멍 옆이나 담벼락에 놓여있는 드럼통에 담긴 꿀꿀이죽을 양동이에 퍼 담아 매일 집으로 가져왔다. <4장 _ 서울의 초등학교 소년 시절> 중에서
청옥학교는 당시 대구시 교육위원회에 정식인가를 받은 정식 중학교 과정의 야간학교였다. 청옥학교는 전태일의 셋방 앞에 넓은 배추밭을 지나면 바로 학교가 나올 정도로 가까웠다. 집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청옥학교에 다녔는데 지금은 명덕초등학교 학교 체육관인 명덕관이 지어져 있었다. … …
삼총사는 서로 성격이 잘 맞아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이다 보니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사이가 됐다. 특히 원섭은 아버지가 봉덕동에서 사진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낮에는 아버지의 사진관 일을 도와주고 밤에는 청옥학교를 다녔다. 태일과 청옥학교 친구들의 사진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원섭의 아버지가 사진관을 운영한 덕분이었다. 재철은 성격이 워낙 남자답고 껄렁껄렁하고 익살스러워서 별명이 “꽝철”이라고 불려졌고 훗날 서울 전농동으로 이사를 한 재철은 태일의 분신 항거하기 이전까지 수시로 접촉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 군대 간 친구들이나 청옥학교 친구들이 서울로 올라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재철은 태일도 불러내 서로가 어울리며 놀러 다니고 자주 사진도 찍었다. <6장 _ 대구 중등학교 학창 시절> 중에서
교회건축의 임무를 띠고 창현교회에 부임해 온 김동완은 교인들에게 부임 인사를 했다. 마침 담임교역자였던 이종옥 전도사는 교인들에게 “앞으로 김동완 선생을 호칭할 때는 전도사님이라고 부르세요!” 하며 광고까지 했다. 그러나 간혹 교인들 중에는 어쩌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선생님!”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면 이 전도사가 “전도사님”으로 다시 부르라며 야단을 치곤 했다. 이때 전태일과 그의 가족들은 교회당 건축에 모두 자원하여 무보수로 공사를 도왔다. 특별히 전태일은 동생 태삼을 비롯해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근 두 달여 동안 공사에 매달리며 노동을 했다. 전태일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전태일은 시멘트를 모래와 자갈과 함께 버무리는 힘든 일들도 거침없이 했고 그 결과로 건축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어머니 이소선과 동생 전순옥은 늦은 밤을 이용해 교회 몇몇 여성 교인들과 함께 상계동 방면까지 직접 걸어가서 돌을 주워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다. 산에 있는 돌을 나르는 것이 낮에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선은 낮에는 광주리 행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밤에만 주로 노동봉사 일을 했다. <25장 _ 창현교회 건축 공사에 헌신하다> 중에서
어느 날이었다. 전상수는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아들 전태일에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평생 겪으며 형성된 자신의 노동관을 허심탄회하게 꺼내 놓았다. 사실 전상수는 태일이 노동문제를 제기하면 그의 표정이 이내 굳어지면서 “그런 것은 왜 또 자꾸 묻느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태일이 평화시장의 노동문제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아버지에게 자꾸 질문을 하면 “태일이 이놈아. 제발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지금은 네가 그런 일에 나설 때가 아니다. 노동운동은 네가 나이가 더 많아지면 그때 해도 된다. 지금은 절대 나서지 마라.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일인데 하필이면 네가 왜 그 일에 뛰어들려고 하느냐. 절대 못한다. 아버지는 절대 그 일을 허락할 수 없다”하며 아들이 노동운동에 대한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도록 막았던 터였다. 그렇지만 그 후로도 궁금한 것을 가르쳐 달라며 집요하게 보채는 전태일을 보고 전상수는 아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범상한 각오와 태도가 아님을 알고 그때부터는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상수는 결국 자신이 겪은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들려주며 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26장 _ 부친을 통해 근로기준법과 노동운동에 눈을 뜨다> 중에서
이제 전태일은 자신이 오금희에 대한 사랑에 괴로워하면서도 시들어가는 평화시장의 동료들과 어린 여공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그들을 하루빨리 고통에서 구출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었다. 아울러 문학청년으로서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문제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생각들을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기고백 형식으로 연이어 작성했다. 여기에 수록된 4편의 미완성 소설 초안들은 말 그대로 완성되지 않은 초안들이 대부분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약간 난해하거나 조악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전태일로서는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소재로 해서 어떻게 하든 완성하려는 시도가 엿보였고 최선을 다해 소설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시간적인 제약과 소설 창작 경험 부족으로 인해 거의 초안 서두에서 모두 중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 시기에 완성된 소설 초안 1은 ‘가시밭길’이라는 제목인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태일의 소설 초안이다. 완성된 소설 초안 1은 <사랑이라는 차가운 수갑>(1969.11)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 보았다. ‘준오와 정희의 다정한 데이트’, ‘준오와 정희의 이별’, ‘정희에게 보내는 준오의 편지’, ‘준오의 사망 관련 신문기사’ 등 크게 4단원으로 나누어지는 이 소설 초안은 마치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섬뜩할 정도로 자신의 앞날을 내다봤다. 주인공 준오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것과 주인공의 주검이 성모병원으로 옮겨지는 것과 주인공의 사인이 왜곡되는 것 등은 실제로 전태일의 죽음 전후에 발생했던 실화들이었기 때문이다. <33장 _ 소설 형식의 자기고백서를 집필하다> 중에서
1970년 새해 벽두(1월 초)에 작성된 것으로 확인된 이 글은 이미 전태일이 투쟁의 각오, 즉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으려는 굳건한 마음을 품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이 품은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 정화의 선구자가 되려고 하는가를 자책한다. 전태일은 이 사회의 선구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작년(1969년)까지 살아온 그의 여정도 이미 선구자적인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이 어린 청년 선구자는 엄동설한의 혹한도 참아야 했다. 주어진 고난과 역경이 아무리 무겁고 아파도 반드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만 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이 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야 한다는 결단이 보인다. 아울러 주기도문을 묵상하며 기도를 한다. <36장 _ 전태일의 신앙고백과 종교적 신념> 중에서
전태일은 자신이 일하던 한미사(韓美社)와 중앙피복(中央被服)을 연속으로 그만두고 그 후 중앙시장에 있는 형제사(兄弟社)에 취업하였으나 그곳에서 4개월 정도 재단사로 일을 하다가 결국 또 그만두고 쉬게 된다. 이때 전태일은 잠시 쉬는 공백 기간에도 임시직으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돈벌이를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1968년 12월경이었다. 그 무렵에 모범업체 설립에 대한 최초의 착상을 시작한다.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다른 업주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살만한 모범적인 피복 제조업체 운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이 평화시장에서 그런 업체를 직접 설립하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4~5개월 동안 전태일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모범업체 설립에 대한 구상과 연구를 해 오다가 다음 해인 1969년 4월경에 구체적인 계획을 아래와 같이 착수한다. 상상 속의 꿈의 공장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37장 _ 전태일의 신앙고백과 종교적 신념> 중에서
삼동회는 그동안 바보회가 걸어왔던 길에서 조금 발전되고 진보된 성격의 모임으로 조직되었다. 전태일은 친구들과 모이면 수중에 가진 돈들이 별로 없으니까 커피 두 세잔만 시켜놓고 나머지 인원들은 거저 주는 엽차를 마시면서 노동조합이나 근로기준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태일이 말하는 근로기준법에 대한 이야기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기만 하고 헤어질 때도 많았으며 바보회의 실패를 바탕으로 매우 열의를 가지고 이끌어 나가려는 마음을 먹었다. 모임을 마치면 전태일은 매번 자기 혼자 찻값을 모두 지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난번 바보회가 주로 기업주나 노동청 당국자들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실태를 알리며 호소하는 진정단체였다면, 이번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의 참상을 언론과 정부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 폭로하기 위해 그에 따른 전략과 방법을 모색하는 투쟁단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43장 _ 삼동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투쟁하다> 중에서
일기장 원본을 입수하는 과정은 이러하다. 이 기자는 분신 사건 다음 날인 14일(토) 오후 3시경에 영안실에 들려 조의금 접수처에서 방명록으로 겸하여 사용하던 일기장 한 권을 손에 쥐고 신속히 병원을 빠져나간 후 곧바로 전태일이 살던 창동 집으로 이동해 전태일의 사진들과 나머지 일기장도 모두 가져간 것이다. 이는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일기장을 입수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전태일의 일기장들은 훼손과 분실 등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 단초가 됐다. 일기장을 입수했다면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일기를 공개하거나 아니면 유가족에게 돌려줬어야 했다. 일기장을 자체적으로 입수한 이후에도 신문사 측에서는 웬일인지 1주일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권에 대한 눈치 보기로, 청와대와 노동청 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임: 못다 한 이야기 _ III. 분신 항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들과 일기장 도난 사건> 중에서
■ 차례
[1 권]
제1부 ╻ 어린 시절
1장 | 부모(전상수, 이소선)의 만남과 결혼
2장 | 대구 출생과 영아기 시절
3장 | 부산 유아기 시절
4장 | 서울의 초등학교 소년 시절
5장 | 서울 용두동 집을 나온 1년의 가출 생활
6장 | 대구 중등학교 학창 시절
7장 | 대구 남산동에서 고학을 위한 가출 결행
제2부 ╻ 서울 생활
8장 | 대구에서 서울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는 식구들
9장 | 참담한 서울 생활과 가족들의 상봉
10장 | 또다시 시작된 1년간의 밑바닥 서울 생활
11장 | 평화시장 첫 취업과 서울 남산동 50번지 이주
12장 |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만나지 못한 만남’의 인연들
제3부 ╻노동 ‧ 연애 ‧ 신앙 생활
13장 | 서울 남산동 50번지 화재 참극과 다락방교회
14장 | 도봉동 천막촌 공동생활과 천막 교회 설립
15장 | 남상사와 통일사에서 본격적인 미싱기술을 익히다
16장 | 쌍문동 화재민 천막촌으로 이주해 정착하다
17장 | 한미사 재단보조 취업을 통해 노동참상을 겪다
18장 | 오금희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19장 | 일기로 사랑을 말하다
20장 | 시로 실연의 아픔을 달래다
21장 | 검정고시로 대학 진학에 도전하다
22장 | 확고한 기독교 신앙 형성과 교회 헌신
23장 | 자기 이름을 다양하게 개명하다
제4부 ╻ 노동운동에 눈을 뜨다
25장 | 창현교회 건축공사에 헌신하다
26장 | 부친을 통해 근로기준법과 노동운동에 눈을 뜨다
27장 | 평화시장 노조 선배들의 실패를 거울삼다
28장 | 바보회를 조직해 진정 단체로 활동하다
29장 | 자신의 생애 같은 ‘맨발의 청춘’을 노래하다
[2 권]
제5부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30장 | 해고, 사표, 면접을 반복하다
31장 | 삼총사 친구들과의 우정과 공사판 막노동 시작
32장 | 평화시장의 젊은 베르테르가 되다
33장 | 소설 형식의 자기고백서를 집필하다
34장 | 박정희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편지 형식의 진정서를 쓰다
35장 | 허리우드 키드 전태일, 충무로의 단역배우가 되다
제6부 ╻ 생존의지
36장 | 전태일의 신앙고백과 종교적 신념
37장 | 모범업체 ‘태일피복’의 설립 착상과 계획
38장 | 348명의 직원을 두는 모범업체 CEO의 꿈과 좌절
39장 | 현실과 소설 사이, 행동하는 소설가의 꿈
40장 | 잦은 철거에 맞춰 오히려 점점 넓어지는 판잣집 주거 공간
제7부 ╻ 죽음의 결단
41장 | 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修道院) 건축공사 헌신과 죽음의 결단
42장 | 임마누엘수도원 하산과 투쟁의 시작
43장 | 삼동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투쟁하다
44장 | 분신 항거 1주일 전의 행적들
제8부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45장 |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40분, 횃불을 들다
46장 | 엿새 동안의 영안실 투쟁: 1970.11.13.(금)~18일(수),
14일(토), 분신 항거 이튿날
제9부 ╻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47장 | 15일, 분신 항거 셋째 날
48장 | 16일, 분신 항거 넷째 날
49장 | 17일, 분신 항거 다섯째 날
50장 | 18일, 분신 항거 여섯째 날
덧붙임 ╻ 못다 한 이야기
I. 장례식 전후의 국내 주요 집회와 시위들
II. 전태일 분신 항거 현장에 대한 이견 논박
III. 분신 항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들과 일기장 도난사건
IV. 전태일 일대기와 신상옥 감독
V. 분신 항거,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다
VI. 전태일의 분신 항거와 북조선(북한)의 반응
VII. 전태일 사진과 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