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에 非我가 있는가? / 단현
마지막으로 불교에서 我라는 것은 없다(無)는 것과, 我가 아니다(非)라는 것은 너무 다른 것입니다. 니까야 속에 我를 無가 아닌 非로 표현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지요.
근본불교에서 無我가 아닌 非我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 옛날부터 이단취급을 받았던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역시 남방 상좌부에서 이런 비아를 주장한다면 그날로 멸빈되어 쫓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아직도 무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를 말하는 것은 아직 힌두불교적 참나 개념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한 제행비상(諸行非常) 제행개고(諸行非苦) 제행비아(諸行非我) 역시 근본불교 교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가가 아니라 제행비상 제행비고 제행비아라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학자에게도 나오지 않은 말로서 이것은 근본불교가
이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적으로는 비상 비고 비아라는 용어는 유식논사들이 무아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껴, 나라는 것은 완전히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피해 "아트만이 아니다 무아가 아닌 그 어떤 실체가 있다"는 의미로 윤색해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근본불교에서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근본불교 학자이신 마성스님의 신간인 <왕초보?초기불교 박사되다, 민족사> 143페이지에,힌두논사들이 점령한 부파불교 중에서도 초기 유식사상을 주장한 설일체유부가 기록한 잡아함경 제1권 제1경 무상경에["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다하고
범행은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아느니라. 무상하다고 관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空하며,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러나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다 니까야에는 공이나 비아라는 대목은 없다. 오직 무상 고 무아로 되어 있다. 니까야의 무아(anatta)를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공 비아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라문 힌두논사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아함경은 의도적으로 무상 무아를 공이나 비아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마성스님을 만났을 때 비아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여쭈기도 했고, 춘천 흥천사의 혜천스님께도 여쭙기도 했었습니다
[혜천스님, 반야심경 강의 /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너무나 좋은 위대한 강의, 불자라면 무조건 필독 요) 물론 스님들의
답은 대승불교의 역사는 무아를 탈피하고 유아로 회귀하려는 역사라고 이구동성이셨습니다.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참나 아뢰야식 여래장 본래면목 그놈 주인공 주시자 등등의 비아를 만들어 마치 그 어떤 실체가 존속하는 양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비아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저는 범어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마시지요..다 해석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물론 해석이 영잘못되었다면 큰일이겠지만, 저가 보기에는 非我나 假我는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없다는 것(無) 보다는 가짜(假)라는 것이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삼계중생은 업의 현상의 몸을 분명히 느끼고 있으니 없다고는 할수 없겠지요. 다만 진짜가 아닌 것에 '진짜 나'로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짜다. 상대적 업의 현상일뿐이다. 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짜인 '열반의 나'를 일어주시기 위함이겠지요...
본문을 올린 의도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승불교의 역사는 무아를 탈피하고 유아로 회귀하려는 역사]라는 내용에 대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토론이 나오길 바라면서 올린 글인데..
그 전에 본문에 나오는
[그러나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다 니까야에는 공이나 비아라는 대목은 없다. 오직 무상 고 무아로 되어 있다. 니까야의 무아(anatta)를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공 비아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성스님을 포함한 남방불교 학인들은 죄다(99%^^) 아함경전은 <팔리 니까야>를 범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부터가 순 엉터리죠..^^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통의 첫번째 이유는 문자로 옮길 때 사라질 순수 때문입니다.
그런 구전 전통을 무시하고 스리랑카에서는 대륙의 유부 보다 이백년이나 빠른 기원전 백년 전에 문자로 수집정리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그 당시 스리랑카에 승려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잡아함경 등 4 아함경전을 한사람이 모두 외운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경전을 나누어 어떤 부분을 외우게 하여 구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
@효진 스리랑카에 승려 숫자는 구전 전통을 이어갈만한 맨 파워가 충분하지 못했으리라는 겁니다.
해서 이백년이 빨리.. 이백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게 아니죠.. 문자로 정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륙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경전은 각 부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던 아함경전은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전하고 있는 것과 다르듯..
유부에서 범어로 정리한 아함경은 팔리 니까야를 번역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효진 그러니
[그러나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다 니까야에는 공이나 비아라는 대목은 없다. 오직 무상 고 무아로 되어 있다. 니까야의 무아(anatta)를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공 비아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는 게 얼마나 무식한 생각인지.. 얼릉 깨어나야 할 것이건만.. 오히려 남방불교 학인들은 저게 참인양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ㅎㅎㅎ^^
@효진 그러니 폭언에 익숙한 단현이란 자는
근본불교에서 無我가 아닌 非我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 옛날부터 이단취급을 받았던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라고 단언을 하는 게 아닙니까?..^^
완존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고 있는 거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산사님도..
[니까야의 무아(anatta)를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공 비아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
라는 것으로 보았지요?..
남방 학인들은 비아는 물론 공 역시 후대에 삽입했다고 아우성이예요..^^
@효진 그럼 후대에 삽입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와같은 의문이 시작되면 아함경이나 니까야 할 것 없이 원음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에 다 휘말리게 되는
낭비적인 논쟁일 뿐입니다.
하여 근본 경전으로 인정하는 아함경이나 니까야는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는대로 일단 원음으로 받아들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니까야는 원음이지만 아함경은 아니다 라고 하면.. 남좋은 일시키는 민주당 꼴나는 논쟁이 되고 맙니다.
@효진 그러기에 마성스님의 저런 표현은 비난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바른 학자라면 잘못된 서술에 대한 사과가 따라야 할 것인데..
[대승불교의 역사는 무아를 탈피하고 유아로 회귀하려는 역사]//
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군요..^^
대승불교를 간단히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 하는데.. 저는 이것보다 대승불교를 잘 표현한 말은 찾지를 못했습니다..^^
구보리와 화중생은 한번에 두마리 토끼를 잡자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대승불교는 당시 구보리에만 전념하면서 다른 부파와 논쟁을 일삼는 상좌부를 비판하면서 나왔습니다.
상좌부는 구보리라는 한마리 토끼만을 잡자는 불교가 됩니다.
여기서 한 마리 토끼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두 마리를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어떨까요?..
해서 대승불교 안에서 일단 구보리를 먼저하는 불자가 나오고.. 화중생을 중요시하는 불자가 나오게 되는 거지요.
구보리 부파는 당연히 무아를 목표로 수행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화중생 부파는 중생과 중생을 구하는 자(=보살)가 뚜렷하게 분별이 되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화중생 부파는 유아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것의 균형을 잡아주는 가르침이 [색즉시공]입니다.
보살들이 중생을 대할 때 실재존재하는 것으로 대하지만 실은 그럴 뿐. 실재가 없는 공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진흙 못에 핀 연꽃처럼..
@효진 지금 이곳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한 님들이 토론에 참석하면서..
참나(진아)를 말하는 데.. 중생을 상대할 때 참나는 실재하는 것으로 설명해야할 겁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오면 스스로 참나는 공으로 알고 있듯이 무아로 알면서 글을 올려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마치 중생을 대하듯 실체가 있는 참나를 주장하면.. 상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효진 강병균 교수나 마성스님, 단현 등.. 그들은 참나 하면 공이 아닌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반론을 재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는 의사가 시력검사할 때 노인에게 젊은이에게 보여주는 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잡탕 식의 논쟁이라면 차라리 재미있는 비데오 한편 보는 게 나을 겁니다..^^
@새벽산사 뜻이 있는곳에 길이있다고...
효진님께서 두마리를 잡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씁니다. ^^()//
하하하^^..
저는 두마리 커녕 한마리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곳 토론방에서는 구보리에 열중하자는 거구요..^^ 상좌부이든 대승이든..
그리고 이곳을 나가 어떤 것을 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죠..^^
비아와 무아의 해석은
수행과정과 수행 결과의 문제가 아닐까요?
수행 도중에는 분명히
'그 무상한 것을 너라고 할 수 있겠느냐?'하고 질문을 하시는데
이는 오온이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즉 비아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면
결국 개념이 붙을 수 없는 자리에 도달하며 그것을 지켜나가게 됩니다.
이 상태를 무아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즉 anatta란 두가지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혼란이 나타나는 이유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맛보지도 않고
무아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비아의 문제점은
그럼 내가 오온이 아니라면 (삶을 경험한 자가 나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여지가 남아있어서
결국 그것을 다시 정의 내리고 찾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수행과정의 문제이겠지요.
그러나 무아라는 개념도 만만치 않은 문제점을 내포합니다.
당장 내가 없다고 하니까
이를 들은 중생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희론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雨庵 문자란
어떤 상태를 이해한 개념을
언어를 통해서 지칭하는 도구입니다.
다른 상태가 같은 문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문자가 같은 상태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아가 수행의 목적이라고 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개념이 붙을 수 없는 자리'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겠죠.
이렇게 '무아'라는 문자로 표현하다보니
부처님의 원래 뜻과는 다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세존께선 중생이란 존재의 불을 끄라고 알려 주셨는데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그 내용을 개념화해서 다시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雨庵 M138 대강에 대한 분석 경 (Uddesavibha?gasutta)
§13 어떻게 마음이 안으로 집착합니까?
선정에 들지만 의식이 선정의 느낌을 추구하는 한, 그것의 유혹에 계박되고 속박되고 결박에 묶입니다.
선정의 느낌
초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
이선: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
삼선: 평정과 행복
사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14 어떻게 마음이 안으로 집착하지 않습니까?
선정에 들지만 의식이 선정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는 한, 그것의 유혹에 계박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결박에 묶이지 않습니다.
노랑님이 저 글을 올리게 된 의도를 저는 바르지 않은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잡아함경>을 비판하는 것은 착각에서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그로 인해 정당하지 못한 주장들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았기에 올린 것으로 봅니다..^^()..
불자가 불자를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