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의 초대
샤를 보들레르
내 아이, 내 누이여
그곳에 가서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떠올려 보렴
한가로이 사랑하고
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
사랑하고 죽을 것을
내 흐릿한 날의
젖은 태양들은
내 마음에 정말 매혹적이다
그렁그렁한 눈물 속에서 반짝이며
쉴새없이 변하는 네 눈빛처럼
신비한 매혹
그롯에서 모든 것은 정연한 아름다움
화사함과 고요, 그리고 관능
세월에 반지르르 윤기 나는 가구들이
우리 방을 장식하리라.
정말 귀한 꽃들이
어렴풋한 용연향에
그 향기를 섞어 넣으리라
화려한 천장들과
그윽한 서울들
동방의 찬란함
그곳에서 모든 것은
영혼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이리라
그 나라의 모국어로
그곳에서 모든 것은 정연한 아름다움
화사함과 고요, 그리고 관능
저 운하들 위에서 잠들어 있는 베들을 바라보렴. 원래부터 방
랑자의 기질을 가진 배들을, 그 배들이 세계의 끝으로부터 온
것은 너의 아주 작은 욕망까지도 채워주기 위한 것, - 자는
해들이 벌판을, 운하를, 도시 전체를 수선화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이도 있다. - 세계는 뜨거운 햇살 안에서 잠들어 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정연한 아름다움.
화사함과 고요, 그리고 관능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 중 015
북오션 출판
[작가소개]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
-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출생-사망 : 1821.4.9 ~ 1867.8.31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프랑스 파리
주요저서 :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세의 원로원(元老院) 사무국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후처로 28세였는데, 이러한 부모의 연령 불균형이 이상신경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6세 때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와 재혼하였다. 의붓아버지가 대령으로 승진하여 리옹에 부임하자, 11세 된 그는 리옹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리옹 왕립중학교의 기숙생이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루이르그랑중학교로 전학한 뒤 최고학년이 된 18세 때 품행 문제로 퇴학처분을 당하였으나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그뒤 문학지망을 표명하여 양친을 실망시키고, 카르테 라탱을 방랑하며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보다 못해 내려진 친족회의의 결의로 인도 콜카타행 기선을 탔으나, 인도양의 모리스섬(모리셔스 本島)과 부르봉섬(프랑스령 레위니옹섬)에서만 머물다가 9개월 뒤에 파리로 되돌아갔다.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상속한 뒤에는 센강의 생루이섬에 거처를 두고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하며 호화로운 탐미적 생활에 빠졌다. 흑백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를 알게 된 뒤 관능적 시흥(詩興)의 원천으로 삼았고, 이후 20여 년간 애증의 악연(惡緣)이 시작되었다. 2년 동안에 유산을 거의 다 낭비해 버리자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가 되었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여 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하였으며, 문예비평·시·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하였다. 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소개하였고, 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 5권의 뛰어난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배우 마리 도브륀과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또 사바티에 부인의 살롱 단골이 되어 그녀를 성모처럼 받들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수록된 시 6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의붓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센강 어귀의 옹푸루르 별장으로 옮겨 살았다. 1860년에 《인공낙원(人工樂園)》을 출판하고, 1861년에 《악의 꽃》의 재판을 간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가서 궁색한 생활을 면하기 위하여 강연여행을 하였으나 이미 건강이 악화된 뒤였다. 1866년 나뮈르시(市)의 생루 교회를 구경하던 중 졸도하여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로 브뤼셀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돌아와서 입원하였다. 그러나 성병으로 피폐해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오피크가(家)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사후 1868~1869년에 간행된 전집 속에는 고티에가 서문을 쓴 《악의 꽃》(제3판) 《소산문시 Petits poèmes en prose》, 만년의 작품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 수록되었으며, 들라크루아·바그너·고티에 등에 관한 평론은 《심미섭렵(審美涉獵) Curiosités esthétiques》(1869),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1868)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었다. 이밖에 만년의 수기인 《화전(火箭)》《벌거벗은 마음》은 《내심(內心)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랭보·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프랑스의 비평가 폴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지적 세계에 감동하여 낭만파·고답파의 구폐(舊弊)에서 벗어났으며 명석한 분석력과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한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출처] [공유] 넝마주이의 술 / C. 보들레르|작성자 옥토끼
첫댓글 그곳에서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개천절, 조상과 나라를
생각하는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