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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 : 7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 - 고전 3 : 9 하나님의 동역자들
고전 3 : 7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 -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
본 절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앞 절에 이어 5절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이나, 교회의 설립과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1]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다. 그렇다고 사역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사역자는 자신의 무능하고 무익함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니로되'의 헬라어 '티 우테'(*)는 심고 물주는 사역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구원 사역에 무엇을 대단히 기여한 것처럼 생각할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을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익한 종들에 불과함을 항상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 눅 17: 10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다가 어느 날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고 이헌영 장로님은 고백하기를,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2]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반면에 '오직 ... 뿐이니라'의 헬라어 '알'(*)은 근본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7절에서 심고 물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말이 사역자들의 노고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어 전도하고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보통 인간과 다른 특별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 중에서 누구라도 선택되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뜻에서 한 말일 뿐이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는 말씀은 사역자들이 비록 전도하고 양육한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과 실제로 성도가 자라게 되는 생명력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사역자들 때문에 성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기 때문에 성도가 구원받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바울 사도와 같이 큰 사역자가 되고 또 심고 물을 주는 것은 특별히 택함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으므로 귀한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주님밖에는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문단에서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한 것은 사역자들이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데, 교인들은 자신들이 볼 때 위대해 보이는 사역자들을 무조건 맹종함으로써 결국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의 일부분이 그들에게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고전 3 :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 -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본 절에서는 심는 이와 물주는 이를 접속사 '카이'(*, '그리고', '...도')로 연결시켜 바울이 언급하려는 것을 둘 모두에게 같게 적용한다.
이들이 일반이라고 할 때 <헨 에이신>은 하나(be one)라는 뜻이다.
이는 사역자는 받은 은사와 하는 일은 달라도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일군들로서 결국은 같은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 사역은 나뉘어서 질 수 없다는 것이다.
1]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한가지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헨 에이신'(*)은 '하나이다.'라는 의미로 둘 다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즉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역자들이 각기 하는 일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동일한 교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2]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라는 표현은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대해 개별적인 책임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재능이나 은사조차도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재능이나 은사와 관계없이 수고에 대한 대가로 상급이 주어진다. (Hodge).
복음 사역자들에게 상급이 따를 것이다.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성경은 상에 대해 종종 말한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을 두고 그것을 말한다. 상급은 구원과 다르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죄에서 검진받는 것을 말한다.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해결되었다.
그 해결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법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의롭다고 하심이다.
또 의롭다고 하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될 것이다.
* 롬 8: 30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빌 3: 21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것이 구원의 완성과 목표인 영화(榮化)이다.
그러나 상급은 다르다. 상급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급에는 차등이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마지막 날에 모든 성도는 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 롬 8: 30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상급은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므로 거기에는 분명히 차등이 있을 것이다.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라고 할 때 일(코포스)이란 '때리다, 가슴을 치다'에서 유래한 말로 고되며 수고로운 인간의 노력을 뜻한다.
사역자들의 일이란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성도로 믿게 하고 또 성도의 신앙을 성장을 시키는 것이다. 곧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를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살아가도록 목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상이라고 할 때 상은 헬라어 <미스도스>를 번역하였는데, 이는 상벌이라고 할 때의 상(Prize)이라는 뜻이 아니고 삯(Reward)을 말한다.
삯이란 일한 것에 상응하여 받는 대가(代價)인데 상(賞)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 대부분이 그 개념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믿음으로 잘 인도하거나 그렇지 못한 데 대하여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고전 3 : 9 하나님의 동역자들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며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건축에 비유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터를 닦은 자요 그의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은 건물을 세우는 자들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목회는 집을 세우는 일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본 절에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가 각 구절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줄곧 하나님을 모든 행위의 주체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역자들'의 헬라어 '쉰에르고이'(*)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혹자의 견해를 따르면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Meyer, Alford, Robertson).
Ⓑ 혹자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Bengel, Morris, Vincent).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본 절이 앞 구절에 대한 설명적인 표현이므로 문맥을 떠나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역한다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책임은 사람이 져야 한다. 농사를 지을 때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씨를 뿌릴 때에는 씨를 뿌리고, 김을 맬 때는 김을 매고, 거름을 줄 때는 거름을 주고 추수 때에는 추수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곡식을 심어주고 길러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책임, 인간으로서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한다.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할 것이 아니다. 자연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한다. 따뜻한 지역에서 결실하는 과일나무를 추운 지역에 심어놓고 결실을 바라면 안 된다.
건강에 대한 것도 같은 이치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잘 알아서 그대로 지켜야 유지라고 할 수 있다. 경제나 권력도 같은 이치다. 사람 사이의 도덕 법칙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정해 주셨다. 내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악법 내지 불법한 일이 된다.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즉시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가정이 되려면 남편은 남편의 책임을 다하고 아내는 아내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2]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밭'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오르기온'(*)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교회를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역자들을 경작자로 간주하고 고린도 교회를 밭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집'의 헬라어 '오이코도메'(*) 역시 교회를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런 표현을 신약 성경에서 자주 사용했다.
* 롬 15: 20 -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엡 2: 20-22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벧전 2: 5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바울은 교회를 '밭'으로 비유하다가 갑자기 '집'으로 비유의 소재를 전환하면서 자신의 논증을 다음 절에서도 계속 끌어나간다.
9절에서 사도를 포함한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하였다.
동역자는 <쉬네르고스>를 번역하였는데, 함께<쉰> 일하는 자들<에르곤>이라는 뜻이다. 사역자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인 인간의 구원을 위해 직접 일하시지 않고 일꾼들인 사역자들을 시켜서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곧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일꾼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밭은 <게오르기온>이라는 말인데, 땅<게>에서 일한다<에르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곧, 경작(Cultivation)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집이라는 <오이코도메>는 집<오이코스>을 짓는다<데모>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지어지는 집으로서의 건축물을 가리킨다.
9절의 의미는 성도란 하나님의 일군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밭으로 경작되며,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지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밭이 잘 경작되고, 집이 잘 세워지도록 일꾼들을 사용하신다. 그렇다면 사역자들은 일종의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역자들보다는 경작되는 밭이나 세워지는 집으로서의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사도는 이후부터는 밭에 대한 비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집에 대한 비유만을 말한다. 성도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한 것은 16절에서 다시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반복된다.
3] 하나님과 함께 일합시다.: 박 조준 목사
사람에게는 식욕이라는 본능이 있어서 먹는 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 마귀란 존재는 우리 인간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제할 때 먹으면서 합니다. 사람이 먹을 때는 그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 열리는 틈을 타서 죄가 들어오기 쉽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는데 먹는 것을 통해서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식욕과 함께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부자가 되기에 애쓰지 말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돈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돈을 쓰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사실 내 것은 없습니다.
또 사람에게는 성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5장을 생각할 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능을 주셨습니다. 본능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에 죄가 됩니다. 먹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먹을 때, 안 먹을 것을 먹을 때 죄가 됩니다. 물질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쓸 때, 그리고 지나치게 탐할 때 그것으로 인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성욕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이것을 제어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본능대로만 살면 짐승이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잠언 23장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더 말씀 드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시편 39편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할 때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을 깊이 오래 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납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공헌한 분들은 다 좋은 생각을 깊이 한 분들입니다. 위대한 종교가,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사업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반면에 악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큰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을 오래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런 흉악한 사람이 되고 흉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생각을 잘 살펴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생각은 알과 같습니다. 비둘기가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귀여운 비둘기를 깔 것입니다. 그리고 뱀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그 속에서 뱀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에 속한 생각과 영에 속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생각을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생각을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비록 이 몸은 땅에서 살지만 하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위엣 것을 생각하되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성경은 권면했습니다. 그러면 땅에 속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분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은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을 때 분하지요. 그러나 이 분한 생각을 오래 품으면 결국 나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하는 생각, 이것도 육에 속한 생각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옛날부터 이것을 ‘승기자염’이라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그런 감정입니다. 이것은 실상 나 자신의 교만, 이기주의, 열등감 같은 데서부터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 나 자신이 타락합니다. 전에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해서 결국 인격적으로 타락하고 그 종말이 비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 한 가지는 불결한 생각입니다. 정욕의 생각입니다. 인간에게는 성적인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적인 충동 또는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불결한 생각을 오래 품으면 타락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옛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적극적인 길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병 속에 들어 있는 공기를 내보내려면 맑은 물을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불가입성의 원리’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면 땅엣 것은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는 하지만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인 이상 육신적인 면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육신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육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육신은 단지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간성, 죄의 교두보가 되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부분, 죄에 대해 일할 기회를 주며 죄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 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한 인간성의 저열한 부분에 그들의 인생관과 행동의 모든 것을 지배되는 대로 내맡기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러한 책망을 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당파심, 분쟁, 분파, 분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불화하며, 싸움을 잘하고, 말이 많고, 양보할 줄 모르고, 늘 말썽만 일으킨다면 아무리 교회에 출석을 잘하고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을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옳은 말씀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하며 사랑과 일치의 정신으로 사귐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도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불행하게도 이 교회에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파로, 어떤 이는 아볼로파로 나뉘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당파심을 버리고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이런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바울은 누구며 아볼로는 누구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자라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좀 도와서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단순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방하고 가르치는 것은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하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것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실상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혼자서 도모하는 일이란 실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편 127편 1절 말씀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싸움은 사람이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6장 1절에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만 성공할 수 있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영역과 차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농사도 하나님과 함께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데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재판을 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도,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하나님과 동역해야만 합니다. 무엇이나 하나님과 동역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돌아가는 말 중에 ‘그저 정치가는 권모술수에 능해야지 저렇게 단순한 사람이 어떻게 정치가가 될 수 있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더구나 그동안 군인들이 정치를 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치는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왜요? 한 민족 국가의 운명이 정치를 바로 하고 바로 못하는 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계에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고, 덕과 신의와 의리와 도덕적 성품을 가지고, 사리사욕이 없고, 선공후사의 정신을 가진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옛날 사울 왕은 젊어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는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마음이 교만하여지고 시기의 마음이 그 총명한 마음을 가리게 되었을 때에 그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도 젊었을 때는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할 때에는 실수가 없더니 그 후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위대한 정치가는 하나님과 동역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글래드스톤이나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일하고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축복받는 민족이 되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정치인들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동역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책임은 인간이 감당해야 합니다. 농사지을 때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씨 뿌릴 때 씨를 뿌리고, 김맬 때 김매고, 거름 줄 때 거름을 주고, 추수 때 추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곡식을 심어 주고 길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맹장에 염증이 생겼으면 의사가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먼저 내가 해야 할 책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법을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법대로, 내 고집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연계를 지으시고 자연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연 법칙을 깨달아서 그대로 행할 때에 과학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지방에서 결실하는 과일 나무를 추운 지방에 심어놓고 결실을 바라면 안 됩니다. 추운 지방에서 결실하려면 그 나무에 맞는 온도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흔히 비닐 하우스를 이용합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건강에 대한 법칙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건강의 법칙을 바로 배워서 그대로 지켜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에 운영되는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서 그대로 해야 국가 경제가 바로 서 나갈 것입니다. 국가의 권력으로 하면 무엇이든 될 줄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도덕의 법칙을 우리에게 제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도덕의 법칙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공의와 진실과 의뢰와 청결과 겸허와 인내의 법칙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입니다. 국회에서 마음대로 법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어떤 법을 제정한다면 그것은 악법 내지 불법을 제정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아서 하나님의 법에 맞도록 나라의 법도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유리하도록 법을 정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때 그때 할 일을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가령,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은 남편의 책임을 다하고 아내는 아내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남편 있는 부인이 남편 없는 여자처럼 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법을 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성경이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한 몸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피차에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부부가 싸웁니까? 남편은 남편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인은 부인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싸움이 생깁니다. 남편 뜻대로 하려고 하지도 말고 부인의 뜻대로 하려고 하지도 말고, 주님 뜻대로 하려고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역해야 가정도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에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하면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의 뭇별들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의 하는 일에 협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어기면 산천 초목, 금수들이라도 우리에게 대항합니다. 옛말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기억하시지요. 일시적인 권모술수로 큰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로 말미암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망치고 일족이 멸망당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이 일에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여 하나님이 동역할 수 없는 일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천의 길이요, 반란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아니하실 일은, 동역 안 하실 일은 아무리 황금이 들어와도, 세력이 높아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국가의 일이나 무슨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 손으로 수고한 대로 얻을 것이요 복되고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역해서 허락하신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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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