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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의의 동치미
"겨울에 만청(蔓菁) 껍질을 벗겨서 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아주 잘 얼었으면 항아리에 담아 냉수를 붓고, 입구를 봉하여 따뜻한 방안에 두어 익기를 기다린다. 맛을 보아서 먹을 만할 때가 되었으면 그것을 찢어 숟가락에 담아 동치미 국물에 적시고 소금 조금 찍으면 그 맛이 매우 좋다."1)
이 글은 세조(世祖, 1417~1468) 때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 생몰년 미상)가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나온다. 제목은 ‘동침(凍沈)’으로 요리법을 보면 순무로 담근 동치미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동치미’의 한자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얼 동(凍)’ 자와 ‘잠길 침(沈)’ 자를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겨울 동(冬)’ 자와 ‘잠길 침(沈)’ 자를 쓴 것이다. 《산가요록》의 ‘동침’은 전자에 해당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언 상태로 국물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앞의 ‘동침’ 요리법에서는 순무를 소금에 절이지 않고 그냥 얼린다. 꽁꽁 언 순무를 항아리에 넣고 냉수를 붓는데, 이 과정에서도 따로 소금을 넣지 않는다. 단지 항아리 입구를 봉하여 따뜻한 방안에 두고 익힐 뿐이다. 왜 소금에 절이지 않고 언 순무를 따뜻한 방안에서 익힐까?
그 비밀은 바로 이 ‘동침’이란 음식의 주재료인 ‘만청’에 있다. ‘만청’은 ‘순무’의 한자 이름으로 달리 ‘무청(蕪菁)’이라고도 불리며, 한글로는 ‘쉿무’, ‘쉿무수’, ‘숫무’, ‘쉰무’라고 쓰기도 했다. 당시 한자로 ‘나복(蘿蔔)’이라 부르던 오늘날의 ‘무’와 같은 십자화과에 속하지만, 무보다 매운맛이 강한 편이다. 이 매운맛을 줄이기 위해 온도가 높은 곳에 두고 숙성을 시킨 것이다. “맛을 보아서 먹을 만하다”는 말은 곧 매운맛이 거의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익은 순무를 먹을 때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소금 조금 찍어 숟가락에 올려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으면 맛이 매우 좋다는 것이다.
요사이 동치미 담그는 법과 비교하면 이 ‘동침’ 요리법은 무척 생소하다. 특히 순무를 소금에 절이지 않는 점이 그렇다. 순무를 주재료로 하여 소금에 절이는 요리법은 김유(金綏, 1491~1555)의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나온다.2) 요리법의 제목은 ‘청교침채법(靑郊沈菜法)’이다. 청교(靑郊)는 지금의 개성시 덕암동 동쪽의 마을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요리법을 풀어서 말하면 ‘개성 청교의 침채법’인 셈이다. 비록 주재료는 순무지만, 《산가요록》에서처럼 매운맛을 줄이기 위해 실내의 따뜻한 곳에 두고 숙성시키지는 않는다. 대신에 순무를 아주 깨끗이 씻어 발〔簾〕위에 펴놓고 싸락눈 내리듯이 소금을 뿌린다. 잠시 뒤에 소금을 뿌린 순무를 다시 씻어서 전과 같이 소금을 뿌리되 재료가 무르지 않게 한다. 향초를 덮어서 3일 동안 두었다가 3~4치〔寸〕 크기로 썰어서 항아리에 넣는데, 큰 항아리에는 소금 2되, 작은 항아리는 소금 1.5되를 넣는다. 익으면 찬물을 섞어 항아리에 붓고 익기를 기다려 쓴다.
그런데 이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요리책에는 순무로 동치미를 담그는 요리법이 나오지 않는다. 영조 때 의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의 〈치선(治膳)〉에서 순무를 얇게 썰어서 담근 ‘만청저(蔓菁菹)’를 언급하면서 “금방 먹어야 하며 겨울을 넘길 반찬으로 삼을 수는 없다”3)4)
순무의 이런 특성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요리책에 나오는 동치미의 주재료는 모두 ‘무’이다. 19세기 중반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 · 음식방문(飮食方文)》에는 한자로 ‘동침이(冬沈伊)’, 한글로 ‘동침이’라는 요리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크기가) 잘고 모양 좋은 무를 정히〔깨끗이〕 껍질 벗겨 (간을) 맞추어 절여 하루 지나거든 (무를) 정히 씻어 독에 묻”는다. 여기에 절인 어린 오이와 껍질을 벗긴 배와 유자를 썰지 않고 통째로 넣고, 파 · 생강 · 고추 썬 것을 위에 많이 얹는다. 그런 뒤 “좋은 물에 함담(鹹淡, 짜고 싱겁고) 맞추어 가는 체에 밭쳐 (항아리에) 가득히 붓고 두껍게 봉하여 익은 후 먹되 배 · 유자는 먹을 때 썰고 국물에 백청(白淸, 꿀) 타 석류 · 백자(柏子, 잣) 흩어 써라”고 했다.
전순의가 살았던 조선 전기만 해도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순무는 무를 능가할 정도로 동치미의 재료로 널리 쓰였던 듯하다. 김유의 ‘청교침채법’을 통해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순무의 재배지가 한정되어 있었던 반면, 무는 한반도 전역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에 점차 순무 대신 무를 사용한 동치미 요리법이 늘어났던 것은 아닐까? 조선 후기가 되면 요리책에 나오는 동치미의 주재료는 모두 무이다. 따라서 《산가요록》의 ‘동침’은 조선 전기까지 개성에서 전승된 고려의 순무 동치미 요리법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
《산가요록》에는 ‘토읍침채(土邑沈菜)’라는 요리법이 나온다. 그런데 요리명에서 ‘토읍’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표현을 보통명사로 볼 경우, ‘본고장’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토읍침채’의 주재료는 ‘진청근(真菁根)’이다. ‘청근’이 ‘무’의 한자식 표현이므로, ‘진청근’이라 함은 ‘참무’를 칭하는 듯하다. 그 요리법은 “음력 1월이나 2월에 참무를 깨끗이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그 크기에 따라 3~6쪽으로 잘라 물에 3일 동안 담가 두되 물을 자주 갈아준 다음 물을 버리고 항아리에 담는다. 깨끗한 물이나 묽은 쌀뜨물을 팔팔 끓여서 식혀 붓고 온돌에 놓아 두텁게 싸서 익기를 기다려 쓴다”5)
이 방법에 이어 소금을 사용하는 또 다른 ‘토읍침채’ 요리법이 같은 항에 소개되어 있다. “2월에 참무를 깨끗이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큰 것은 3~4조각으로 잘라서 항아리에 담는다.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을 끓여 식혀 참무 1동이에 물 3동이를 부어서 시원한 곳에 둔다. 어떤 이는 약간 마른 것이면 (참무) 1동이와 소금 1줌, 물 1동이를 더 넣어도 된다고 한다.”6)
소금을 사용하는 이 ‘토읍침채’ 요리법은 김유의 《수운잡방》에도 나온다. 즉, “깨끗한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팔팔 끓여서 차게 식힌다. 무 1동이에 (소금)물 3동이씩을 부어두었다가 익은 뒤에 쓴다.”7)
이처럼 《산가요록》에는 앞에서 소개한 청침채 · 동침 · 나박 · 토읍침채 외에도 여러 종류의 침채가 소개되어 있다. 우침채(芋沈菜, 토란대+소금) · 동과침채(冬瓜沈菜, 동과+순무+소금) · 침백채(沈白菜, 배추+소금) · 선용침채(旋用沈菜, 중탕하여 급히 만드는 침채) · 생총침채(生葱沈菜, 생파+소금)를 비롯해 심지어 소금 없이 물만 사용해서 무침채를 담그는 방법인 ‘무염침채법(無鹽沈菜法)’도 나온다. 이로 미루어 《산가요록》이 편찬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소금이나 소금물이 들어가지 않아도 ‘침채’라고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가요록》에는 ‘침채’뿐 아니라 ‘저(菹)’라는 이름이 붙은 채소 절임음식도 나온다. 즙저(汁菹) · 하일즙저(夏日汁菹) · 하일장저(夏日醬菹)·하일가즙저(夏日假汁菹)와 같이 오이나 가지를 각종 장(醬)에 절인 음식을 ‘저’라고 불렀다. 또 한여름에 나는 푸른 오이를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든 ‘과저(瓜菹)’와 가지를 간장에 절여 만드는 ‘가자저(茄子菹)’도 《산가요록》에 나온다.
특히 과저에는 무려 여섯 가지나 되는 각기 다른 요리법이 적혀 있다. 그만큼 오이를 이용한 과저가 널리 식탁에 올랐던 모양이다. 그중 한 가지는 음력 5~6월에 딴 오이로 가을이나 겨울에 먹는 요리법이다. “오이를 씻어서 물기를 없애고 볕에 말린다. 할미꽃 뿌리와 줄기를 무르게 쪄서 (오이) 사이사이에 넣어서 항아리에 담는다. 끓인 소금물을 뜨거운 채로 가득 붓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가을이나 겨울에 먹는다.”8)
《산가요록》의 이 과저는 18세기 이후의 요리책에 나오는 각종 양념이 들어간 과저와 달리 할미꽃 뿌리와 줄기가 마치 양념처럼 쓰였다. 게다가 산패(酸敗)를 방지하기 위해 담그자마자 항아리 입구를 진흙으로 봉해 공기 접촉을 차단했다가 가을과 겨울에 먹었다고 하니 대단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전순의는 간장이나 소금 혹은 각종 향신료를 넣어서 담근 채소 절임음식을 ‘저’라고 하고, 채소가 잠기도록 소금물이나 끓인 물 혹은 그것을 식힌 물을 넣어 담근 것은 ‘침채’로 분류했다. 오늘날 말로 하면 ‘저’는 국물이 적은 김치이고, ‘침채’는 국물이 많은 물김치인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나온 요리책에서는 한자로 ‘저’와 ‘침채’는 물론이고 ‘지(漬)’까지 김치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다. 따라서 《산가요록》은 ‘저’와 ‘침채’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던 조선 초의 사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산가요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1세기 들어서이다. ‘전통음식’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한 개인이 1990년대 중반 서울의 청계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가 2001년에 관련 학자들에게 공개했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연말에 농촌진흥청의 ‘고농서국역총서’ 여덟 번째 책으로 번역 · 출판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에 편찬되어 50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산가요록》은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겉표지는 물론이고 앞부분의 상당 면(面)이 떨어져나갔다. 그런 탓에 책의 제목은 물론 지은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다행히도 이 책의 끝에서 두 번째 면에 ‘전순의 찬 산가요록 종(全循義 撰 山家要錄 終)’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를 통해서 책의 제목이 《산가요록》이며, 지은이가 전순의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산가요록》의 지은이인 전순의의 생몰연도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9) 1455년(단종 3) 음력 1월 25일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가 단종에게 “세종께서 백성을 생각하시어 삼사(三司) 이외에 따로 의서(醫書)를 공부하는 방안을 세워 방서(方書) 읽기를 널리 권장하였습니다. 그때 이효신(李孝信) · 전순의 · 김지(金智) 같은 이들이 방술을 약간 배워 익혔습니다”10)라고 아뢴 내용을 통해서 전순의가 의원(醫員)이 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의서 편찬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동년배로 추정되는 김예몽(金禮蒙, 1406~1469) 등과 함께 1445년(세종 27)에 365권에 이르는 방대한 의서(醫書)인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세종 29)에 김의손(金義孫)과 함께 《침구택일편집(鍼灸擇日編集)》 1권을 편찬했다. 특히 전순의는 1447년 음력 5월에 조선을 방문한 다카야스(崇泰)라는 쓰시마(對馬島)의 승려에게 의술을 배웠다.11)
하지만 문종(文宗, 1414~1452)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책임을 추궁당하여 직급이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세조 즉위년인 1455년 음력 12월 27일에 전순의는 의원으로 유일하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12)
세조와 그의 측근들은 전순의를 명의라고 여겼다.13)1459년(세조 5)의 실록 기록을 보면 당시 전순의는 병들고 쇠로(衰老)한 상태였다. 14)그러나 다음 해인 1460년(세조 6) 음력 11월에 중국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45가지의 질병에 알맞은 식치(食治) 처방을 정리한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완성하고 서문을 썼다. 당시 세조가 이 책의 제목을 하사했다. 1461년(세조 7) 음력 7월 19일 전순의는 정3품의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15)다음 해인 1462년 음력 4월 11일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16)
《산가요록》은 농서이자 요리책이다. 농업 부분은 작물·원예·축산·양잠·식품 등의 내용을 총망라하였고, 요리 부분에서는 230여 가지의 요리법이 정리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산림경제》나 《증보산림경제》에 비해 분류 방식이 단순하긴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종합 농서라 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산가요록》은 전반부가 훼손된 채 양잠 · 재상(栽桑, 뽕나무 재배법) · 과수 · 죽목(竹木) · 채소 · 염료작물 · 가축(물고기와 꿀벌 포함) 등 28면, 요리법 47면, 염색 2면 등 모두 77면이다.17)
이 중 요리법 부분은 ‘주방(酒方)’이란 분류 제목 아래 술 제조법이 맨 먼저 소개되어 있다. 술 빚는 데 쓰이는 도량과 술 빚기 좋은 날을 일러준 뒤 바로 이어서 소주 2가지를 비롯해 청주 · 탁주 · 감주(甘酒) 등 50가지에 이르는 술 제조법을 정리해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술을 단속하는 법과 누룩 제조법 2가지도 함께 실었다. ‘주방’에 나오는 술 이름 가운데는 《산가요록》보다 뒤에 집필된 《수운잡방》이나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것도 여럿 있다. 그러나 제조법은 차이가 있다.
따로 분류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주방’ 다음에 장류 제조법이 나온다. 장류의 시작은 ‘전시(全豉)’, 즉 메주 만드는 법이다. 그런데 메주의 주재료는 흑태(黑太, 검은 콩)로, 만드는 시기도 음력 7월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장훈조(末醬薰造)’에서는 음력 1~2월에 메주를 빚어 띄운다고 했다. 이어서 합장법(合醬法)과 장류 제조법 12가지, 그리고 장맛 고치는 법 4가지가 나온다. 또한 식초 17가지, ‘저’와 ‘침채’ 등의 채소 절임음식 38가지를 비롯해 과일과 채소 저장법 17가지, 어육(魚肉) 저장법 10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그 밖의 요리법으로 죽 · 떡 · 국수 · 만두 · 수제비 · 과자 · 좌반 · 식해 · 두부 · 탕과 계란 · 닭 · 소머리 삶는 법 등이 50여 가지나 적혀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산가요록》의 농업 부분은 1273년 중국 원나라의 대사농(大司農)에서 편찬한《농상집요(農桑輯要)》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 많다.18) 또 작물별 길일(吉日)에 관해서도 원나라 때 편찬된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의 내용을 활용하여 집필했다.19)
그런데 《산가요록》의 요리법 부분은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문헌을 옮겨 온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산가요록》보다 늦게 집필된 김유의 《수운잡방》과 장계향의《음식디미방》에도 자구(字句)는 다르지만, 비슷한 종류의 술과 제조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비전(祕傳)되어오던 ‘주방’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본디 술 제조법은 어깨너머로 배우기 힘든 기술로, 제조법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제대로 된 술맛을 구현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술에 사용하는 재료의 분량과 제조 순서를 기록으로 남겨 전했을 것이다.
《산가요록》의 술 제조법 중에는 술을 대량으로 빚는 방법도 나와 있다. 가령 이화주(梨花酒)의 경우 《산가요록》에는 멥쌀 15말로 음력 2월 초에 담그는 데 비해, 김유의 《수운잡방》에는 멥쌀 1말로, 《음식디미방》에서는 멥쌀 5말로 담그는 것이 최대치이다. 술을 빚을 때 드는 곡물량을 두고 《산가요록》의 술 제조법이 왕실의 것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20)
《산가요록》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순의 자신이 산중의 집에서 지낼 때 필요한 지식을 모은 책일 가능성이 많다. 농업 부분의 과수나 채소를 키우는 법을 비롯해 요리법 중에도 산가(山家)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알아야 할 내용이 많다. 앞에서 소개했던 ‘저’와 ‘침채’ 요리법은 각종 채소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침송이(沈松耳)’라는 요리법 역시 송이를 “해가 지나도 썩지 않”도록 하는 저장법이다.21)
이외에도 과일과 채소를 소금에 재우거나 소금물에 담가서 저장하는 침강법(沈薑法, 생강) · 침동과(沈冬瓜, 동아) · 침산(沈蒜, 마늘) · 침서과(沈西瓜, 수박) · 침청태(沈靑太, 푸르대콩) · 침도(沈桃, 복숭아), 침궐(沈蕨, 고사리), 소금에 절였다가 꿀에 담그는 침행(沈杏, 살구)과 꿀을 넣어 달여서 보관하는 침도(沈桃, 복숭아) 같은 방법이 나온다. 이들 저장 식품의 이름에 모두 ‘침(沈)’ 자가 붙어 있긴 하지만, 이를 두고 ‘침채’, 즉 채소 절임음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생과일 · 가지 · 고사리 · 오이 · 채소 · 생강 · 토란 · 배 · 밤 등의 저장법은 해당 채소와 과일 이름 앞에 저장할 ‘장(藏)’ 자를 붙였다. 이 저장법은 있는 그대로 말리거나 혹은 익혀서 말리는 방법, 마른 재에 뒤섞어서 말렸다가 재를 씻어 버리고 또 다시 볕에 말려 저장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죽순 · 송이 · 천초 · 순채 같은 채소나 생선을 말리는 법 혹은 여름에 고기 말리는 법, 해를 넘겨 고기 말리는 법 등은 당시 서울이나 산가에서나 어촌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생활 지식이다.
이 중 ‘침계란(浸鷄卵)’은 오늘날에도 시도해볼 만한 흥미로운 요리법이다. “매운 재를 죽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계란을 담가 한 달을 두었다가 꺼내어 깨끗이 닦는다. 다시 소금을 물에 죽처럼 진하게 타서 그것(계란)을 담갔다가 한두 달 지난 다음 꺼내 껍질을 벗겨보고서 삶은 계란처럼 굳어 있으면 먹는다.”22)
《산가요록》에는 이러한 채소 · 과일 · 생선 · 고기 등의 저장법뿐 아니라 겨울에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동절양채(冬節養菜)’, 즉 ‘겨울철 채소 기르기’에 관한 방법까지 적어놓았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겨울철에 채소를 기를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방법’이다. 15세기에 이미 오늘날 비닐하우스와 같은 온실을 구상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더 기발한 점은 난방 장치로 바닥에 ‘온돌 시설’을 설치해 봄나물을 재배했다는 점이다.
전순의가 구상한 온실을 보면, 크기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삼면을 쌓아 가리고 벽에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남쪽 면은 모두 창문 살창을 만들어 종이를 바르고 기름칠을 한다.”23)編飛乃, 둑 같은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대나 갈대를 엮어 둘러친 것)를 두텁게 덮어 창을 가리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치운다”고 했다. 또한 온실 안의 기온이 내려가거나 건조해지지 않도록 가마솥을 벽 안쪽에 걸어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끓여 습기와 온기를 더하고, 작물에 이슬이 내린 것처럼 날마다 물도 뿌려주라고 적어놓았다. 조선 왕실에서도 온실을 갖추어 채소는 물론이고 꽃도 가꾸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처럼 실제 온실을 만드는 과정을 적어놓은 문헌은 지금까지 《산가요록》이 유일하다.
《산가요록》에는 4가지의 ‘좌반(佐飯)’ 요리법이 나온다. 이 좌반은 오늘날 말로 ‘자반’이다. 자반은 나물이나 생선을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서 만든 반찬감 혹은 그것을 굽거나 쪄서 만든 음식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전순의가 소개한 4가지 자반의 재료는 솔방울〔松子〕· 더덕〔山蔘〕· 표고(蔈古) · 참새〔小雀〕이다. 이 중 솔방울자반의 요리법이 좀 복잡하고 나머지 더덕자반 · 표고자반 · 참새자반의 요리법은 간단한 편이다.
더덕자반은 더덕을 삶아 익혀 껍질을 벗기고 나무방망이로 두드려 납작하게 만들어 간장에 하룻밤 재웠다가 꺼내어 말려 쓴다. 표고자반 역시 더덕자반처럼 간장에 하룻밤을 재웠다가 꺼내는데, 말릴 때 천초가루〔椒末〕를 바르고 가지런히 늘어놓고서 종이를 덮어 잠시 두었다가 다시 꺼내 그늘에 말려서 쓴다. 참새자반은 뼈가 없도록 잘 다진 참새고기에 감장(甘醬, 된장)을 넣고 치대서 엽전 크기로 얇게 빚어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지져 먹는다.
이에 비해 솔방울자반의 요리법은 조금 복잡하다. “4~5월 사이에 솔방울을 따서 푸른 껍질을 벗기고 한 개를 두 세 조각으로 갈라서 찐다. 송진〔脂液〕이 다 빠져 쓴맛이 없어질 때까지 여러 번 씻은 후 가지런히 펼쳐놓고 잘 말린다. (솔방울을) 간장에 담가서 윤기가 나고 색이 붉어지면 다시 꺼내서 말린다. 쓸 때는 기름에 지지는 것이 좋다.”24)
조선시대에는 기근이 들면 솔방울마저도 아주 유용한 식재료였다. 1830년대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편찬한 종합 농서인 《농정회요(農政會要)》에도 솔방울을 구황 음식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즉, 막 영근 솔방울을 가지 채로 꺾어 볕에 말린 다음 찌거나 볶아서 가루를 낸 뒤 꿀을 섞어 환(丸)을 만들거나, 가루를 그대로 건조시켜 산(散)을 만들어 물에 타서 먹으면 굶어서 기운이 없을 때 좋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25)
실제로 《농정회요》뿐 아니라 《산가요록》보다 뒤에 나온 요리책이나 농서 중에서 《산가요록》의 요리법을 그대로 인용한 사례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솔방울자반 요리법은 조선시대 ‘구황서(救荒書)’ 같은 문헌에 인용될 법도 한데, 그런 사례도 찾을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산가요록》은 전순의가 편찬한 것을 ‘최유빈(崔有矉)’이라는 인물이 초(抄, ‘베끼다’는 뜻)했다는 기록이 책의 끝부분에 적혀 있다.26)
고려시대에 쓰인 요리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산가요록》의 요리법 부분은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요리책 중에서 그 편찬 시기가 가장 앞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의 식생활과 관련된 기록이 매우 적다. 《동문선(東文選)》(1478)이나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1525)에는 매우 단편적인 식생활 관련 자료가 실려 있을 뿐이다. 비록 《산가요록》은 온전한 내용이 다 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요리법 부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15세기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그것도 세종 때부터 세조 때까지 왕실에서 활동했던 의원 전순의의 기록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동침(凍沈)’ : 冬月, 蔓菁削皮, 置器中, 極凍盛瓮, 冷水注之, 封口置溫房, 待熟. 嘗味可食, 用時, 裂之盛匙, 貼沈水貼鹽小許. 其味甚好. 《산가요록》의 원문과 번역문은 전순의(찬), 《산가요록》, 농촌진흥청, 2004; 전순의(찬), 한복려(엮음), 《다시 보고 배우는 산가요록》, 궁중음식연구원, 2007을 참고했다.
김유(金綏), 《수운잡방(需雲雜方)》,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 ‘청교침채법(靑郊沈菜法)’ : 蔓菁極洗, 簾上鋪置, 下鹽如微雪. 須臾更洗, 如前下鹽, 勿令殘菜, 香草盖之. 經三日, 切三四寸許纳甕, 大瓮則鹽二升, 小瓮則鹽一升, 半熟冷水和注, 待熟用.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제8권, 〈치선(治膳)〉, ‘만청저(蔓菁菹)’ : 取根只可飛削, 作淡葅. 一時食之, 不可作經冬之饌品.
황혜성 외,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음식 편)》,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7, 270~271쪽.
전순의,《산가요록》, ‘토읍침채(土邑沈菜)’ : 正二月時, 真菁根, 洗浄削皮, 随其大小, 或截三四五六片, 沈水三日, 数数改水後, 去水盛缸. 浄水或淡米泔沸湯, 待冷注之. 置温突, 厚褁待熟, 用之.
전순의,《산가요록》, ‘토읍침채’ : 又法, 二月時, 真菁根浄洗削皮, 大則剖作三四片, 盛缸. 鹽小許沸湯待冷, 菁一盆水三盆, 置之凉處. 或云稍乹一盆, 塩一掬水一盆, 為可.
김유,《수운잡방》,〈탁청공유묵〉, ‘토읍침채’ : 正二月, 真菁根, 浄洗削皮, 大則剖作片纳瓮. 浄水盐小許沸湯待冷. 菁一盆則水三盆注之, 待熟用之.
전순의, 《산가요록》, ‘과저(瓜菹)’ : 又法, 五六月間, 瓜洗之, 无水氣晒之. 白頭翁根莖爛蒸, 相間盛瓮. 湯鹽水乘熱滿注, 盖口塗泥, 置潔處, 待秋冬用之.
이종봉, 〈전순의의 생애와 저술〉, 《지역과 역사》 28호, 2011, 5쪽.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1월 25일 3번째 기사.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1447) 5월 6일 1번째 기사.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12월 27일 3번째 기사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8월 16일 1번째 기사.
《세조실록》 18권, 세조 5년(1459) 11월 12일 6번째 기사.
《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1461) 7월 19일 3번째 기사.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1462) 4월 11일 1번째 기사. 이즈음 40세 초반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전중추(全中樞)’, 즉 전순의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노쇠한 전순의는 뜸질할 자리만 표시해놓고 여의(女醫) 접상(接常)을 보내서 뜸질을 하도록 시켰다(서거정, 《사가시집(四佳詩集)》 제12권, 〈全中樞(循義). 來點灸穴而去, 遣女醫接常灸之, 爲賦一絶誌之.〉)
김영진,〈해제〉, 전순의(찬),《산가요록》, 농촌진흥청, 2004, 5쪽.
김영진, 〈해제〉, 전순의(찬), 《산가요록》, 농촌진흥청, 2004, 9~12쪽.
염정섭, 〈『산가요록』 농서 부문의 편찬과정과 서술방식〉, 《지역과 역사》 28호, 2011.
김영진, 〈해제〉, 전순의(찬), 《산가요록》, 농촌진흥청, 2004, 14쪽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침송이(沈松耳)’ : 擇肥好不老者, 以冬瓜蒂或楮葉, 和水磨洗, 洗白為度, 烹之. 經宿後, 并烹水納津瓮待冷, 以茅着耳上, 以石輕鎮之. 經十日, 漉出耳, 去其舊水, 新水更沉之. 十五二十日, 頻改其水, 則其色浄白, 經年不腐. 臨時隨宜用之, 無異生耳.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침계란(浸鷄卵)’ : 猛灰濃如粥, 浸卵經一朔, 還出浄拭. 又鹽和水如粥, 浸之經一二朔, 出去壳, 凝如烹卵, 用之.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동절양채(冬節養菜)’ : 造家大小任意, 三面築蔽, 塗紙油之, 南面皆作箭窓, 塗紙油之. 造突, 勿令煙生, 突上積土一尺半許, 春菜皆可栽植. 朝夕令溫勿使入風, 氣天極寒, 則厚編飛介掩窓, 日瑗時, 則撤去. 日日酒水, 如露房內, 常令溫和有潤氣, 勿令土白乾. 又云作因於築外, 掛釜於壁內朝夕使釜中水氣, 薰扁房內.
전순의, 《산가요록》, ‘송자좌반(松子佐飯)’ : 四五月間, 松子摘取, 刮去青皮, 一介分二三片切之, 蒸之. 脂液盡出, 無苦味, 為度洗之, 布列乹正. 沉艮醬, 令潤色赤, 又出乹. 用時, 煎油為可.
최한기(崔漢綺), 《농정회요(農政會要)》 권19, 구황(救荒), ‘송자(松子)’ : 待纔熟未落之時, 連枝折下, 取窠晒乹, 収子或蒸或炒, 作末. 或蜜丸, 或作散, 水調服, 可以療饥氣断穀.
행을 달리하여 ‘최유빈 초(崔有矉 抄)’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즉, 지은이는 전순의이지만, 이 책을 필사한 사람은 ‘최유빈’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최유빈’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