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 동아시아의 언어문화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번역해서 쓸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이때 서양 말을 번역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서양 말을 대부분 그들의 고유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자어로 번역했습니다. 한자어는 일본인들에게 이미 익숙했던 데다가 조어력이 뛰어나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한자어는 서양 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낯설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도 쉽게 퍼질 수 있었습니다. '철학哲學, 귀납歸納, 극광極光' 등 여러 분야의 전문용어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일본인들이 '도이치'로 읽는 한자 '獨逸'을 한국어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문용어뿐만 아니라 일본어에서 쓰이던 일상용어들도 우리말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매점買占, 사양서仕樣書, 시건施鍵' 등이 그 예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사재기, 설명서, 잠금'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임시적인 것을 뜻하는 '가假-', 빈 것을 뜻하는 '공空-' 등 일본어식 접두사와 수량, 금액 따위를 뜻하는 '-고高', 일부 명사 뒤에 붙어서 그 일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선先' 등 일본어식 접미사가 우리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처분假處分', '공병空甁', '수확고收穫高', '수입선輸入先' 등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한자어의 뜻이 일본어식으로 달라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예컨대 '낙서落書'는 본래 우리말에서 '글을 베낄 때 잘못하여 글자를 빠뜨리고 쓴 것'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1920년대 이후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 쓴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낙서'의 뜻이 일본어 '라쿠가키落書き'와 같은 뜻으로 바뀐 것입니다.
'벤토, 와리바시' 등과 같이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차용한 외래어들 중 대부분은 광복 이후 국어 순화 사업을 통하여 우리말로 다듬을 수 있었지만, 일본어에서 들어온 한자어들 중에는 미처 다듬지 못한 말들이 적지 않습니다. '철학, 귀납'과 같은 일부 전문용어들은 이미 우리말 어휘로 굳어진 표현이고 바꾸어 쓸 말도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사실상 어렵겠지만, 일본어에서 들어오지 않은 말로 다듬을 수 있는 말들은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예컨대 '가처분'은 '임시 처분'으로, '공병'은 '빈 병'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어 투 한자어 가운데 쓰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을 잘 가려내서 다른 말로 바꾸어 쓴다면 우리말이 더욱 주체적이면서 서로 이해하기도 쉬운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에 다듬어 쓰면 좋을 만한 일본어 투 한자어 몇 가지를 보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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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