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 데이
‘맥(脈)도 모르는 터수에 침통(針筒) 흔드는 꼴’이라는 진정한 뜻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렷다. 어떤 의미를 지닌 날인지 모르는 주제에 친구들에게 골고루 선물하겠다며 빼빼로가 담긴 쇼핑백을 야무지게 거머쥐고 학교로 향하는 유진이의 앙증스러운 뒤태가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났다.
어제 저녁 무렵의 얘기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햇귀가 부쩍 짧아지고 노루 꼬리를 닮은 때문에 어둑어둑할 무렵에 유진이가 태권도장에서 돌아왔다. 현관 문턱을 넘어서며 숨 넘어 갈 듯 다짜고짜 빼빼로를 읊어댔다. 뚱딴지 같이 웬 빼빼로 타령일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라서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에둘러 말해도 좋으련만 내일 ‘빼빼로 데이’를 모르느냐며 야멸치게 톡 쏴붙였다. 전광석화 같은 주먹으로 급소를 강타 당한 양 어안이 벙벙해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일이 아이들에게 그 유명한 날이었다.
진정 함축적인 뜻을 이해하고 저렇게 나대는 걸까?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 원론적인 문제는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슈퍼에 갔다. 동네 슈퍼인데도 빼빼로가 산더미처럼 싸여 있어 주눅이 들 정도였다. 오지랖 넓게 ‘저걸 과연 모두 팔 수 있을까?’ 하는 쓰 잘 머리 없는 걱정이 앞섰다.
다양한 종류와 천차만별의 가격으로 출시되어 눈에 익히며 비교해 보기도 버거웠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맞춤한 제품을 고르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학교 친구들에게 선물할 것으로 ‘엿가락처럼 큰 빼빼로를 10개씩 넣어 곱게 포장한 4박스’를 골랐다. 그리고 당장 집에 돌아가는 즉시 먹을 작은 양의 1박스도 끼워 구입했다. 아마도 21,000원을 지불했지 싶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꺼번에 이처럼 많이 샀던 기억은 도통 없다.
무턱대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확실한 계산이 서 있었다. 1박스는 선생님께 드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3박스에 들어 있는 서른 개는 스물여덟의 반 친구들에게 한 개씩 선물할 계획이라는 얘기였다. 친구들에게 줄 선물이 지나치게 약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에서 유진이의 판단에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그 의미를 꼼꼼하게 훑어봤다.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거개가 단편적인 언급이었다. 그래도 종합적으로 정리된 쪽은 워키백과였다. 이 날은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토종의 독특한 날로 11월 11일에 초콜릿 과자인 빼빼로를 주고받는다고 정의하고 있었다. 하여튼 11월 11일은 숫자 ‘1’이 네 개가 겹쳐지기 때문에 이 과자를 세워 놓은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일부에서는 정체불명의 날이라고 몰아붙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층이나 연인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빼빼로를 주고받는 날로 굳건히 자리 매김하고 있다.
유래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있었다. 첫째는 1995년 대입수학능력시험과 연관이 있다는 얘기이다. 1995년 11월 11일은 수능 11일 전으로 이날 빼빼로를 먹으면 수능을 잘 본다는 속설로 극히 일부의 학교에서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선물하면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1994년 부산을 비롯한 영남지방의 여자중학생들이 재미로 주고받으면서 연유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 학생들은 “빼빼로처럼 날씬해져라”는 뜻으로 주고받았다고 했다.
섣부른 단언일지 몰라도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후자가 사실에 더 근접하지 싶다. 이런 조용한 조짐이 1996년 이 지역 신문의 취재진 안테나에 포착되어 기사화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이를 인지한 생산업체인 L제과가 1997년 11월에 들어서 자사 제품인 ‘빼빼로 시식회’라는 마케팅 활동을 펼치면서 일반에게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특정한 제과업체의 마케팅에서 비롯된 날인데 최근에는 연인의 기념일로 변해가고 있는 모양새라고 볼멘소리가 불뚝대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자 친구에게 막대과자를 받으면 남자는 백배의 선물로 되돌려 줘야 한다는 뜻의 ‘백배로 데이’라고 인식되어 가는 추세란다. 이같이 성격이 애매한 ‘빼빼로 데이’에 비해서 11월 11일은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취지에서 1996년 법으로 ‘농업인의 날’로 정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얘기로는 농업이 자연인 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자(漢字)의 '흑 토(土)자'가 겹치는 날인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 '흑 토(土)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된다. 그러므로 11월 11일은 '흑 토(土)자'가 겹치는 날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런 맥락에서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이날을 홍보하기 위해서 쌀로 만든 가래떡을 나눠먹는 ‘가래떡의 날’ 행사를 열며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자평이다.
특정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언가 이벤트를 꾀하려는 심리는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중국에서 11월 11일은 광군제(光棍節)이다. 이날은 독신자의 날, 솔로 데이, 솔로의 날 등으로도 불리는 중국 최대의 할인 행사 날이다. 지난 1990년대 중국의 난징(南京)의 대학 기숙사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남학생 4명이 여자 친구나 돈이 없는 자신들의 모양새와 숫자 ‘1’ 네 개가 연속되는 11월 11일의 이미지가 흡사하다는 맥락에서 광군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광(光)은 ‘아무것도 없음’, 군(棍)은 ‘몽둥이’를 뜻하기 때문에 ‘나무의 가지나 잎사귀가 없는 몽둥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나 잎사귀는 자식이나 애인’을 뜻하는 관계로 결국은 ‘자식이나 애인이 없는 독신자’를 지칭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이 광군제는 젊은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펴졌으며, 사람들은 이날 솔로들을 챙기고 소개팅이나 파티를 하며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유진이가 아침에 들고 갔던 쇼핑백에 친구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빼빼로와 과자류를 그들먹하게 담아 가지고 돌아와 신바람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너무도 여러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아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분별할 수 없었다. 그를 두고 함량 미달이라고 험구한다거나 꼴사납게 나무랄 계제가 못 되었다.
왜냐하면 여러 친구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같은 회사 제품 중에 엇비슷한 가격대의 제품을 구입했던 때문에 동일한 모양과 색깔의 제품을 일시에 여러 명으로부터 받았던 관계로 식별할 재간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포장 박스 겉에 선물한 친구가 이름을 적바림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유래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일지라도 친구들과 널리 선물을 주고받는 자체만으로도 한껏 행복해 방방 뛰는 해맑고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가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첫댓글 ㅎㅎㅎ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교수님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