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원래 남이 취재해 쓴 것을 베끼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취재 기간이 부족하니 취재 내용이 빈약한 수 밖에 없다. 꽃동네의 찾시자 최귀동(본명 생략 90년 1월 3일 작고) 할아버지의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말은 국민학생들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 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들만 소개하려고 한다. 현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의 모친의 산소는 꽃동네에 있다. 정 대주교의 모친 이복순(본명:루시아)여사는 스물 둘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외동 아들인 정 대주교를 낳았다. 이 여사의 남편은 이 여사가 스물 다섯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수절하면서 정 대주교의 뒷바라지만 했다. 이 여사는 노년인 93년부터 96년까지 2년 반 동안 음성 꽃동네의 인곡자애병원에 5번이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청주교구청 주교관에서 96년 6월 6일 오전 89세가 된 이 여사는 정 대주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선종했다. 선종후 이 여사의 소원대로 각막 기증이 이루어 졌고 산소는 꽃동네 성모 마리아 상 왼쪽에 있다.
이번 취재 중 박 마태오 수사에게 들은 얘기가 하나 생각이 난다. 과거 대한민국 장성 출신 한 분이 행려자 신세가 되어 꽃동네에 들어왔다가 몇년 후 편안히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과거 사회의 고위층에 있던 분들이 행려자 신세가 되어 꽃동네가 들어와 세상을 뜬 경우가 몇 분 더 있다고 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정말 사람의 앞 일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유비무환해야겠다.
지금 꽃동네회의 회장은 신순근 신부이다. 꽃동네회의 신부는 모두 5명이다. 꽃동네 수도회의 정식 명칭은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이다. 여기 수도회의 수녀는 약 1백 50명이고 수사는 약 5십명이다. 꽃동네는 얼마전부터 경남 거창에도 꼿동네를 세우려 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여 지금 100만명이 돌파했다고 한다. 지역 이기주의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주교회의 자유게시판에 얼마전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꽃동네와 오 신부를 반대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 왔다. 그러나 평화신문 2001년 9월 2일자 19면의 꽃동네 기사에 의해서 그것이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거기에는 꽃동네 오 신부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장 주교가 주례를 했다고 쓰여져 있다. 필자는 보충 취재를 위해서 꽃동네 홍보담당 박 마태오 수사의 휴대폰으로 지난 며칠 동안 여러 번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도저히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몇 일 전부터 박 마태오 수사는 꽃동네의 일 때문에 독일 출장 중인데 며칠 후에 돌아 온다고 그곳 관계자가 말해 주었다.
꽃동네에는 상주하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꽃동네 인곡자애병원 부원장 신상현(본명:야고보. 현 48세) 수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 신 수사는 꽃동네가 있는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음성 꽃동네는 충북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산 1-45에 있다. 신 수사는 가톨릭 의대 의과 4년과 본과 2년을 마쳤다. 84년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신 수사는 88년 3월 무보수로 꽃동네에 들어 왔다. 의사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신 수사는 89년 7월 꽃동네 수도회에 입회했다. 신 수사는 지금 수사 겸 의사이다.
꽃동네에는 지금 10대째 천주교 집안 신자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 9대째 신자인 방극남(본명:요셉. 72세)씨 부부이다. 방씨 부부는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방정혁 수사는 88년 꽃동네 수도회에 들어왔고 딸 방선례 수녀는 90년에 들어왔다. 방 수사는 지금 꽃동네의 모든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맡고 있고 방 수녀는 지금 가평 꽃동네 정신병동에서 정신질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방 씨 부부는 92년 12월 오웅진 신부의 권유로 꽃동네에 들어 왔다. 방 씨 부부는 지금 꽃동네에서 양봉과 농장일을 돌보고 있다.
꽃동네에는 현재 전 대학총장 한 분이 봉사를 하고 있다. 전 경희대 총장 안치열(본명:토마스 아퀴나스. 80세) 씨이다. 현 가평 꽃동네 노체자애병원 의무원장이다. 안 씨는 예비역 중령이다. 안 씨는 경희대에서 정년퇴임한 직후인 88년 3월 꽃동네에 들어왔다. 안 씨는 한국 방사선학과의 거두이다. 이화여전 피아노학과 출신의 박순양(77세)씨가 안 씨의 부인이다.
정진석 대주교가 이사장으로 있는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387)는 99년 3월에 개교했다. 이 대학은 오웅진 신부가 97년 7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냈다. 이 대학에는 현재 중견 연극인 이주실(58세) 씨, 서울대 국문학과 심재기 교수(64세), 숙명여대 이인복 교수(65세) 부부, 전 충북 교육감 유성종(69세) 씨 등이 학생으로 있다. 꽃동네를 소개하는 책이 98년 4월 5일 동양일보 출판국에서 '꽃동네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동양일보는 충북 청주시에 있는 지역신문이다. 꽃동네의 전화번호는 서울 사무실이 02-2272-0101 이고 음성 사무실이 043-879-0100이다.
필자가 1월 27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자유게시판에 꽃동네 취재에 관한 협조의 글을 올린 이후부터 최근까지 꽃동네에 관한 찬반논쟁이 있어 왔다. 처음부터 필자를 공격하고 야유하고 욕하는 글들이 적지 않게 올라 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꽃동네에 뭔가 비리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켜보니 그것이 아니였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꽃동네를 무조건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혹시 금광개발을 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의 소행인지 아니면 꽃동네가 새로 생기게 됨으로써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하는 자들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첫번째 꽃동네가 비대해진 게 문제인가 이고 두번째 꽃동네 가족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으면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나다의 어떤 천주교 신자분은 이런 제안을 했다. 꽃동네 해체해 버리고 꽃동네 가족들을 천주교 신자들이 각각 한명씩 맡자고 그랬더니 이번에도 답변이 없었다.
그런데 필자는 우연히 이상한 글을 하나 발견 했다. 꽃동네를 반대하는 안수현(27세)이라는 여자의 글 속에서 대한민국이 미제의 식민지라는 언급을 발견했다. 어떤 여자는 자기가 쓴 글을 필자의 이름으로 글을 올려 도배하여 필자를 망신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자유게시판 관리자가 직접 글을 올려 계속 그러면 고발 조치한다고 경고를 하기까지 했다. 또한 그 여자를 비난하는 글도 여럿 올라 왔다. 그러자 그 여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관리자에게는 사과하는 글을 쓰면서도 필자를 인간쓰레기 운운 하면서 매도하는 글을 계속 써댔다. 어떤 사람은 시골 신부를 사칭하면서 오웅진 신부를 맹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도시 신부라는 사람이 시골 신부의 글 속에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틀리는 것이 있으므로 가짜 신부임이 틀림없다는 글을 올렸다. 그래서 필자는 '정진석 대주교님 모친 산소 꽃동네 계심'이라는 제하의 글을 올렸다. 그래도 계속해서 필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때 필자는 그들이 김정일이 추종세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2월 7일 안수현이라는 여자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질의를 두번 했다.
“묻습니다
1. 김일성과 김정일을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습니까?
2.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3. 가장 좋은 통일방안이 연방제라고 생각하시지요?
4. 주한미군의 철수를 바라시지요?
5. 대한민국이 미제의 식민지라고 생각하시지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정직하게 답해주십시오.”
그러나 안수현이라는 여자는 위의 공개질의에 대하여 아직까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 즉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간단히 글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사이 김정일의 추종세력들이 대담해진 것이다. 이들은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를 혁명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물론 많은 모순, 부조리, 빈부격차, 사회악 등이 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보면 많이 개선되어진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혁명으로 해결해 보려는 사고는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잘못된 것들은 사회구조나 정치체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원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복음을 전파해야한다. 마태오복음 26: 6-13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분개하여 ‘이렇게 낭비를 하다니! 이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텐데’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 하셨다”
자유게시판 논쟁 중 아래 안수현이라는 여자가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를 찬양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미미라는 필명을 쓰는 분이 그것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그 일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마더 데레사와 오웅진 신부 이 극명한 대조로 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보시지요. 님이 그렇게 우러러 보는 마더 데레사도 사실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점에 그러했을까요? 마더 데레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성녀의 삶을 사신 이 분이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낳는 사회구조에는 무척 둔감했으며 오히려 이를 묵인했다고 말합니다. 좀 더 야하게 말해보죠. 마더 데레사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왕족이나 부호를 친구로 둔 분이셨습니다. 과연 마더 데레사가 적극적으로 가난을 낳는 사회구조와 거기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면 과연 그가 자신의 거점이었던 인도 사회에서 그리고 전 세계의 갑부들로부터 그런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나아가 서방의 정략적 산물인 노벨상을 탈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마더 데레사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실 것입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작년 9월 8일자 9면에 ‘테레사 수녀 선종전 악령 쫓는 의식 받아. 인 대주교 밝혀’ 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즉 마더 데레사 수녀가 임종하기 전 악령에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신부로부터 엑소시즘(Exorcism)을 받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80년대 초 한국의 "사랑의 선교회"에서 약 일주일간 견습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많이 실망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곳에서는 신앙이나 회개보다 행위나 선행을 더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바울. 바오로)는 철저한 회개(성령)의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는 비록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죄악이라고 주장하였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행려자들을 돌볼 때 가장 많아봐야 약1천 5백명이고 적을 때는 약 5백명이라고 한다. 지금 오웅진 신부는 약 3천6백명을 돌보고 있다. 노벨 평화상이 아무래도 잘못 돌아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