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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프로축구 ‘승부조작’ 파문
▲프로축구 승부조작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성국이 28일 오후 양복 차림
으로 창원지법 대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1년 5월 25일에 K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 선수 2명에 구속영장이 발부
되면서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본격적인 발단은 2011년 5월
6일에 K리그 구단 인천 유나이티드의 백업
골키퍼로 활약하던 윤기원이 차량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자살
하는 사건부터이다.
이 충격적인 자살 사건으로 한때 루머로
만 돌던 K리그의 승부조작 의혹이 네티즌
들과 언론 사이에서 강하게 일었다.
곪아가던 상처는 5월 25일에 터졌다.
5월 21일에 승부조작 사건을 수사하던
경남 창원지검 특수부가 승부조작을 종
용하던 브로커 2명을 구속하고 현역 축구
선수2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이25
일에 언론에 노출되면서 K리그의 승부
조작이 사실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 대한민국 국가 대표 선수였던
상주 상무의 김동현이 승부조작 사건에
깊게 관련되어 있음이 확인되면서 K리그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검찰에 자진으로 출두한 이들은 더
욱 충격적이었는데, 스타 플레이어 출신
선수가 여럿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대표팀 선수로 24경기를 뛰어
2골을 기록했고 올 시즌 부진과 부상으로
제 실력을 못보여줬지만 제대 후 성남 일화
천마에서 이적하자마자 수원 삼성 블루
윙즈의 주장까지 맡았던 최성국이 2010
년 광주 상무 시절에 김동현의 제의로 승부
조작 사전 모의를 했다고 검찰에 자진 출두
하면서 한국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2011년 8월 25일 프로축구연맹은 이 사건
에 가담했던 최성국을 비롯하여 선수 40명,
브로커 7명 등 총 47명에 대해 영구 제명
처벌을 내렸다. 이들은 6월에 영구
제명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선수 생활은
물론 K리그 관련 직무 종사도 영원히 금지
되었다.
▶2009년 북한, 2차 핵실험 실시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화국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주체98년(2009년) 5월 25일 또 한 차례의 지하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번 시험은 폭발력과 조종기술에 있어서 (2006년 10월 1차 실험에 비해)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안전하게 진행됐다"고 했다.
북한은 또 이날 오후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및 원산 일대에서 세 발의 단거리 미사일(사정거리 160㎞ 이내)을 발사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은 이번에 이례적으로 지대공·지대함·지대지 등 세 종류 미사일을 모두 쏘았다"고 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오전 9시54분 함북 길주군 풍계리를 진앙지로 진도 4.4의 인공지진이 감지됐다"며 북한의 핵실험 발표를 뒷받침했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인공지진파 4.4 규모이면 (폭발위력이) 1㏏(TNT 폭약 1000t) 이상은 분명하며 최대 20㏏까지 되는 실험일 수 있다"면서 "2006년 1차 실험 때는 0.8㏏ 규모였다"고 했다. 한 정부 당국자는 "이는 1차 실험에 비해 폭발력이 적게는 5~6배, 많게는 20배 안팎까지 늘어났다는 뜻"이라고 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의 폭발규모는 각각 15㏏과 22㏏ 정도였다.
북한의 이번 핵실험은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 '핵개발 단계'를 다루는 기존 6자회담 틀을 대미 핵 군축협상 틀로 대체함으로써 더 많은 경제·외교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재를 과시하면서 내부 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력 승계 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한 의도도 엿보인다.
국방부와 합참은 이날 전군(全軍)에 경계태세 강화를 지시해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비무장지대(DMZ) 내 군사분계선(MDL) 등에서의 북한 도발 가능성에 대비토록 했다.
▶2007년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협정문 공개
25일 한·미FTA 협정문이 공개되면서, 그간 협상 과정에서 논란이 됐거나 FTA 반대진영이 ‘독소(毒素) 조항’ 이라 불렀던 쟁점들에 대한 최종 합의 내용이 드러났다.
대부분 정부가 이미 발표한 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쇠고기 등 민감 농산품을 제외한 농산물과 공산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관세 철폐 기간 내 1회만 발동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은 처음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부는 “쇠고기·돼지고기 같은 민감한 농산물은 세이프가드의 횟수 제한이 없고, 공산품은 횟수 제한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고 밝혔다. 또 논란을 일으켰던 투자자·국가소송제(ISD), 개성공단의 한국산 인정, 자동차관세 환원조치(스냅백) 등은 여전히 매듭이 풀리지 않은 상태다.
◆투자자·국가소송제(ISD)=미국 투자기업이 한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피해를 본 경우, 소송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ISD는 그간 한·미 FTA 반대진영이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무력화된다” 며 공격해 온 대표적인 사안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협정문에는 “원칙적으로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공공복리 목적’ 으로 실시되는 것이라 (투자기업에) 피해보상을 해주는 ‘간접수용’ 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 명시됐다.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정부의 부동산 정책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함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정부의 조세정책도 원칙적으로 피해보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개성공단=개성공단 생산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 받으려면, 개성공단이 한국의 역외가공지역(OPZ)으로 지정돼야 한다.
◆자동차=한국 정부는 앞으로 자동차 배기량을 기준으로 하는 세제(稅制)를 새로 도입하지 않기로 미국측에 약속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의 조세주권이 침해당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농산물 세이프가드=쇠고기·돼지고기·사과·마늘·고추·양파·보리·인삼 등 30개 ‘민감 농산물’ 은 횟수 제한 없이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2007년 수필가 피천득씨 별세
아사코와의 세 번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한 수필 ‘인연’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명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97·사진) 선생이 2007년 5월 25일 오후 11시 4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20세기 한국 문단의 산증인이자 최고령 문인이었던 피 선생은 지난주부터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한때 호전돼 퇴원하기도 했으나 25일 오후부터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피 선생은 10세에 모친을 여읜 뒤 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춘원 이광수의 집에서도 잠시 살았던 그는 주요한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후장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경성대학(현 서울대) 예과 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유족으로 부인 임진호(89) 여사와 세영(재미 사업가), 수영(울산의대 소아과 교수),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 등 2남1녀가 있다.
▶2007년 이지스함 진수한 날, 북한 미사일 발사
북한이 25일 동해상 및 서해상으로 사정거리 100~150여㎞의 지대함(地對艦) 및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2~3발을 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꿈의 함정’ 으로 불리는 한국형 이지스 구축함(KDX-III?7600t급) 1번함인 ‘세종대왕함’ 이 25일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종대왕함은 길이 166m, 폭 21m, 높이 49.6m에 최대 30노트(시속 55.5km)의 속도를 낼 수 있으며 항속거리는 1만㎞이다.
군 소식통은 “북한이 25일 오전 함경남도 신상리 해안 포병부대에서 동해안으로 단거리 미사일 1발을, 서해안의 모 기지에서도 서해로 1, 2발을 발사한 징후를 포착해 정밀 분석 중” 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지난해 7월 대포동 2호를 비롯한 노동·스커드 미사일 등 7발을 발사한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미사일은 지난해 발사한 것들에 비해 훨씬 사정거리가 짧았다.
AP통신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지스함을 진수한 데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고 분석했다” 고 전했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일본 와세다대 도시미쓰 시게무라 교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이지스 구축함을 진수한 한국에 대한 경고” 며, “이는 해군력이 약한 북한이 매우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라고 말했다.
앞서 북한 해군사령부는 지난 21일 보도를 통해 남측 함정들이 16일부터 20일까지 황해남도 옹진군 기린도와 강령군 쌍교리 앞 북측 영해를 침범했다고 비난하는 등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2006년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 징역3년 법정구속
현대그룹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부 장관이 25일 뇌물수수에 대해 또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는 유죄가 인정된 알선수재 등 혐의에 대해선 징역 3년의 실형(實刑)을 선고받았고, 보석 취소로 법정구속 됐다.
판결 선고 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 전 장관은 측근에게 “6·15 남북공동선언이 3주년 될 때 들어왔는데(구속됐는데) 6주년을 앞두고 또다시 들어왔다. 참 기막힌 우연의 일치” 라며 착잡한 심경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두 어르신(김대중 대통령 내외)께 죄송하다” 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6월 대북송금 특검에 긴급 체포된 이래 2년 8개월, 햇수로 4년째 법정 싸움을 벌여온 박 전 장관은 이날 다섯 번째 판결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날 판결 선고 전에는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은 다시 왔다” 며 4년째 계속되는 법정공방이 끝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3년 전 구속수감되면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며 조지훈 시인의 ‘낙화’ 를 읊었었다.
법원의 판결 선고가 날 때마다 검찰과 박 전 장관의 희비는 엇갈렸다. 1~2심이 그의 150억원 수수 혐의를 인정해 징역 12년에 추징금 148억원을 선고했으나, 그는 뇌물수수에 대해서만큼은 “결백하다” 고 주장했다. 2004년 11월 대법원 판결로 반전이 이뤄졌다. 대법원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150억원 수수 부분을 무죄 취지로 판단하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측은 “박 전 장관은 이미 1년여 형을 살았고, 지병이 있어서 보석 상태인데 법정구속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측은 또 “대북송금 등 사건의 다른 당사자들이 사면복권이 된 상황” 이라며 “남북관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 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의 다음달 방북과 관련해 법원이 정상을 참작했어야 했다” 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2006년 엔론 회계부정 유죄 평결
▶2005년 톱스타 김승우-김남주
커플 결혼식
▶2005년 제7차 아세안(ASEAN)+
3 NTOs회의 개막식
▶2005년 육군교도소 일반에 처음 공개
▶2005년 기계관련 종합전시회인
2005 부산국제기계대전 개막
▶2005년 리버풀, 21년만에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5년 한국 브라질 확대정상회담
▶2004년 고건 총리 총리직 이임(離任)
▶2002년 대만 여객기 대만해협에 추락.
225명 전원 사망
승객과 승무원 225명이 탑승한 타이완(臺灣)의 중화항공 소속 보잉 747-200 여객기가 25일 대만해협 상공에서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 여객기인 CI611편은 이날 오후 3시 08분 타이베이(臺北) 중정(中正) 공항을 이륙, 기착지인 홍콩으로 향하던 중 오후 3시 33분쯤 대만 본토 서쪽 펑후(澎湖)현 북동쪽 10해리 상공에서 실종됐다.
당시 목격자들은 여객기가 추락 직전 공중폭발했다고 전했으며, 대만 항공안전위원회의 케이 용 위원장도 26일 군 레이더를 통해 사고 여객기가 타이베이를 이륙한 지 20분쯤 만에 고도 3만피트 상공에서 네 동강이 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고 직후 대만은 생존자 구조에 나섰으나,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승객 206명은 국적별로 대만 189명, 홍콩·마카오 14명, 싱가포르 2명, 유럽 1명으로 밝혀졌다.
사고 여객기인 보잉 747-200기는 기령(機齡) 23년의 낡은 기종으로, 태국에 매각이 결정된 상태에서 중화항공에서의 마지막 비행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화항공은 1998년과 1994년에도 여객기 추락사고로 각각 202명과 264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은 바 있다.
▶1999년 1억년전 공룡알화석, 보성서 무더기 발견
전남 보성군 득량면 선소 해안일대에서 초식성 공룡알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1996년 해남군 우항리에서 공룡과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전남도문화관광국이 1998년 10월부터 남해안 일대에 대한 지질조사를 편 결과, 1999년 5월 25일 선소마을 해안의 중생대 백악기말(약 1억년전) 지층에서 공룡알과 알둥지 화석이 대량 발견됐다고 밝혔다.
공룡알들은 약 3㎞에 걸쳐 5개의 층준에 넓게 분포돼 있으며 대부분 알둥지를 형성하고 있고, 하나의 둥지엔 6∼30개의 공룡알이 들어 있다. 지난 7개월 동안 이 지층에서는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10여개의 공룡알둥지와 100여개의 공룡알, 수백개의 알 파편들이 발견됐으며, 직경 1.5m의 세계 최대급 공룡알 둥지도 산출됐었다.
평균직경 9∼15㎝의 알의 모양은 원반형 타원형 구형 등 다양하며 알 껍데기의 두께는 1.5∼2.5㎜ 정도이며 표면은 울퉁불퉁한 돌기에 부분적으로 심한 굴곡이 있는 경우도 있다. 공룡알은 경남 고성과 하동지역 등에서 껍데기가 발견된 적은 있으나 원형 상태의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1995년 한국-우크라이나
정보통신부문협력협정 체결
▶1994년 고려 과거시험 합격자
101명 명단 발견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
임시 핵사찰단 방북
▶1991년 성균관대 김귀정양
시위 도중 사망
▶1989년 남산1호 쌍둥이터널 착공
▶1986년 아프리카 난민돕기
`스포츠에이드`가 세계75개국서 동시 개막
▶1984년 제3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84년 페르시아만서 선박 6척 피격
▶1983년 문교부 과외단속기준지침 마련
▶1982년 오리엔트특급,
런던-베네치아간 부활
오리엔트 특급 열차 (런던~파리~이스탄불) 1889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차’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에 내려진 이 작위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내가 거기에, ‘레일 위의 특급호텔’ ‘달리는 살롱’ ‘귀족과 예술가와 스파이를 뒤섞는 국제열차’와 같은 몇 개의 이름을 덧붙인다고 해서 시비를 당할 염려도 없을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은 유럽 13개 나라를 넘나드는 가장 국제적인 열차이자 동서를 꿰뚫는 대륙횡단 열차의 대표로 한 세기가 넘게 명성을 이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Express)’에 묘사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기차 여행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먼저 유럽의 지도를 펼쳐보자. 서쪽의 런던에서부터 동쪽의 이스탄불까지 수십 개의 나라들이 퀼트 이불처럼 꿰매져 있다. 이 사이를 관통하는 ‘대륙 횡단’의 교통수단을 가지는 것은 근대인의 꿈이었고, 1864년 조지 모티머 풀맨이 영국에서 기차를 발명하면서 그 꿈은 첫 기적을 울린다. 머지않아 영국과 프랑스를 페리로 연결하는 노선이 개발되고, 유럽 각국이 앞다투어 레일을 깔면서 넓기만 했던 대륙이 섬세한 핏줄로 팽팽하게 당겨진다.
벨기에 출신의 엔지니어 조르주 니켈마커스는 그 기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 ‘여행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린다. 1872년 미국을 여행한 니켈마커스는 광활한 미 대륙을 연결하는 안락한 철도 노선에 매료되었고, 유럽 각국을 누빌 호화로운 침대 열차를 만들고자 마음먹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883년 10월4일, 최고급의 설비와 시설을 갖춘 오리엔트 특급이 파리를 출발하면서 그 꿈은 첫발을 내딛게 된다. 특급의 최초 여정은 다뉴브 강과 흑해를 배로 건너야 했으나, 1889년에는 베오그라드를 거쳐 이스탄불까지 레일만을 달려가는 직행노선이 가능해졌다.
20세기는 오리엔트 특급에 영광과 시련을 함께 전해주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특급은 유럽 사교계의 사람들이 좌석 예약에 열을 올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두번의 세계 전쟁은 특급의 레일을 빼앗아 탱크와 시체들을 실어 날랐고, 달라진 국경선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특급은 이름과는 달리 먼 길을 돌아가야만 하는 일도 많았다. 비행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불과 4시간 만에 이스탄불에 갈 수 있게 된 상황에 오리엔트 특급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1977년 5월20일의 기념운전을 끝으로 낱낱이 나뉘어 전세계 수집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1889년 런던~파리~이스탄불 구간을 운행하기 시작한 오리엔트 특급의 광고포스터(왼쪽)와 동명의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포스터.
오리엔트 특급이 단순히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달리는 기차’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깊은 향수를 설명하지 못한다. 20세기 초반의 오리엔트 특급은 그야말로 그 시대 최고의 장식 예술이 최첨단의 기술과 만나는 공간이었다. 2001년 런던의 대영박물관은 ‘아가사 크리스티와 고고학’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을 가지며 오리엔트 특급의 객차를 전시하였고, 나는 그 기차에 올라탈 행운을 얻었다.
당시의 특급은 오늘날의 특급호텔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려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완전히 독립적인 침실의 벽에는 아르데코의 장인이었던 르네 프로(Renet Prou)의 장식 문양이 새겨져 있고, 좁은 공간이지만 최상의 것을 갖추어놓은 욕실은 만지는 하나하나 세련된 품위가 넘쳐났다. 사흘간의 여행 기간 동안 최고의 요리가 펼쳐지는 식당차에서는 유럽은 물론 미국과 전세계에서 온 사교계 인사들이 술과 연회로 여행의 기쁨을 만끽했다. 루마니아의 캐롤 왕은 침대차 3425의 단골 고객이었고, 기차 애호가였던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 3세는 직접 기관차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리엔트 특급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1928년 첫번째 남편과 이혼한 후 지독한 실의에 빠진 크리스티는 서인도 여행을 계획하다 중동에서 바로 돌아온 해군 부부를 만난 뒤 바그다드로 진로를 바꾼다. ‘심플론 오리엔트 특급’을 타고 이스탄불로 간 뒤 ‘타우루스 특급’으로 바그다드로 향한 이 여행은 그녀에게 동양과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이후의 숱한 여행은 ‘메소포타미아 살인 사건’ ‘나일 살인 사건’ 등 여러 걸작들을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었다. 젊은 고고학자 맥스 맬로완과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개인사의 결실까지 얻었으니, 오리엔트 특급은 그녀에겐 행운을 다발로 엮어준 열차였다.
과연 전성기의 오리엔트 특급은 어떠했을까?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의 승객 중 하나로 변장하는 것만큼 확실한 체험은 없을 것이다.
출발은 이스탄불. 우리는 눈부신 제국의 수도를 충분히 즐긴 뒤, 열차 회사인 웨이건스-리츠(Wagons-Lits)에서 운영하는 페라 팔라스(Pera Palas)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출발 시간인 저녁 9시에 맞춰 기차역으로 향하면 된다. 오리엔트 특급의 출발역은 마르마라 해, 보스포러스 해, 골든 혼이 만나는 환상의 삼각지인 시르케지(Sirkeci) 부두에 있다. 드디어 역에 도착하니, 침침한 조명 아래 금빛과 푸른빛이 섞인 오리엔트 특급 특유의 차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 명탐정 엘큘 포와르는 시리아에서 있었던 영국군 내부 사건을 해결한 뒤 런던으로 가기 위해 우리의 동승자가 된다. 그는 침대차 회사의 중역인 부크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1등칸에 타지 못한다. 갈색 제복의 차장이 말한다. “오늘밤엔 세상 전체가 여행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다음날 저녁 베오그라드에 도착해 부크가 아테네~파리 구간의 침대차로 옮겨 타고나서야 포와르는 비로소 1등석 침대차로 들어선다. 아가사는 소설의 무대가 될 화려한 살롱 객차를 한템포 뜸을 들여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차 안은 국적과 인종과 계급과 직업의 전시장이라도 되는 양 다채로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인 사업가, 스웨덴인 간호사, 프랑스계의 오스트리아 공작부인, 헝가리 백작 부부, 영국인 대령 등 이들은 서로 출발한 곳도 다르고 목적지도 다르다. 그러나 폭설로 인해 기차가 유고슬라비아의 알 수 없는 곳에 멈춰선 뒤 놀라운 살인 사건이 발견되고, 포와르는 서서히 그들 모두를 엮고 있는 끈을 찾아낸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오리엔트 특급을 타고 있다는 사실. 살인이 일어나도, 조난을 당해도 식사와 연회는 계속된다. 국제 열차는 전 시대에는 귀족 남성이나 모험가들의 독점물이었던 장거리 여행의 관문을 상상력 가득한 예술가, 독립 여행자, 여성들에게 활짝 열었다. 1931년 아시리아에 머물고 있던 아가사 크리스티는 크리스마스를 딸과 함께 영국에서 보내기 위해 돌아가던 중, 기차로 그리스를 지나다 홍수로 인해 이틀 동안 꼼짝도 못하게 된다. 식량과 물은 떨어져 가고 히터도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 노부인, 헝가리의 관료 부부, 덴마크 선교사, 철도 회사 중역과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그녀는 뒤섞인 인종과 개성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협주곡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때의 체험에 터키 근처에서 있었던 오리엔트 특급의 폭설 조난 사건과 린드버그 유괴 사건이라는 실화가 결합되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오리엔트 특급은 영화로운 한때의 꿈에 불과한가? 그 화려한 자태는 영화와 소설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까? 미국의 사업가인 제임스 셔우드는 오리엔트 특급의 공식적인 운행이 끝난 해인 1977년 10월 소더비 경매에서 1920년대에 제작된 침대 차량 두 대를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오리엔트 특급의 복원에 모든 힘을 기울였고, 1982년 런던~밀라노~베니스 구간의 ‘베니스-심플론 오리엔트 특급(Venice-Simplon Orient Express)’의 운행을 시작했다. 1998년에는 이스탄불까지 노선을 연장해 전성기의 구간을 복구하고 있는 이 특급은 20세기 초반 최고급 기차의 자태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2량의 식당차와 1량의 주류차(Bar Car)에서 매일 저녁 그랜드 피아노 연주와 만찬을 펼친다. 런던~베니스 구간만 250만원을 호가하는 이 기차는 ‘현대의 오리엔트 특급’임에 분명하지만, ‘기차판 럭셔리 크루즈 여행’이라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더 이상 그 기차에서 모험심에 가득 찬 여행자를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어느 해인가 파리 오스테를리츠 역에서 출발하는 바르셀로나행 침대차를 놓친 나는, 급히 노선을 바꾸어 파리 동역에서 출발하는 빈행 야간 기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차의 이름이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이었다. ‘진짜 오리엔트 특급’은 아가사 크리스티와 명탐정 포와르가 탔던 ‘심플론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약간의 상상력만 지니고 있다면, 유레일패스를 지닌 당신도 칼레에서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오리엔트 특급의 체험을 재현할 수 있다. ‘비포 선라이즈’의 두 사람이 만나는 곳도 부다페스트에서 파리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 노선의 기차 안에서였다.
▶1982년 낙동강 하구 쥐섬 남쪽 앞바다서
쾌속여객선 에어페리호와 피닉스호 충돌,
49명 부상
▶1979년 시카고 공항서 아메리카항공
소속 DC10기 추락으로 274명 사망
▶1973년 부산항만관리청 발족
▶1973년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에서
우주실험
▶1971년 일본 잡지 `논노` 창간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1968년 공화당 김용태의원등 2명
한국복지회 사건으로 제명
▶1966년 3분(粉)폭리 정치문제화
▶1966년 중국 문화혁명기
최초의 대자보 북경대학에 등장
1966년 5월 25일 중국 북경대학 학생식당에 `송석, 육평, 등패운은 문화혁명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대자보의 첫 출현이었다. 송석은 북경시 당위원회 대학부 부장이었고 육평은 북경대학장 겸 북경대 당서기, 등패운은 북경대 당부서기였다.
북경대학의 여성 강사인 섭원재 등이 붙인 당간부 비판 대자보(大字報).
학생들과 교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간부에 대한 비판은 독재권력을 장악한 `반당행위`여서 자살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자보 작성자는 좌파인 북경대 여성강사 섭원재였다. 섭원재는 2001년 8월 조선일보 박승준 특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모택동의 비서 강생의 직접 지시에 의해 대자보를 썼다고 실토했다.
대자보에 의해 매도당한 육평 등은 곧 반격에 나서 그날중에 1천매가 넘는 대자보를 대학구내에 빽빽하게 붙였다. 섭원재는 당의 배신자 등으로 공격받아 위기에 처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6월1일 섭원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대자보가 중앙인민방송국과 인민일보에서 `전국 첫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자보`로 칭찬받고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육평과 팽패운이 대학에서 추방됐다. 이 모든 배후에는 모택동이 있었다. 모택동은 북경대의 당위원회를 다스리는데 섭원재의 대자보를 활용했던 것이다.
섭원재는 2년뒤인 1968년 모택동에 의해 `반혁명` 죄목으로 8년간, 등소평 등장후인 1980년 `마오의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다시 8년간을 복역하는 불운을 겪었다.
▶1965년 중공군의 계급제 폐지
▶1963년 이디오피아서 열린 아프리카
독립국 수뇌회의서 30개국 참가하는
OAN헌장에 조인
▶1961년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 공포
▶1959년 필리핀 문화-경제사절단 내한
▶1957년 야당주최 시국강연회 방해 사건
야당인사들로 구성된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주최 시국강연회가 1957년 5월 25일 오후3시 장충단공원에서 열렸다.
20여만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광장을 메운 가운데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조병옥이 지난 9년간의 이승만 정권 독재와 실정을 신랄하게 비난하자 청중 속 곳곳에서 파나마 모자에 검은 안경을 쓴 청년들이 "죽여라"하고 외치면서 연단을 향하여 돌과 유리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몽둥이를 든 괴한 10여명이 연단 위로 뛰어올라와 책상을 뒤엎고 식순을 찢어버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때 괴한중 1명은 연단옆 마이크 조정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연사로 나선 조병옥, 장택상, 전진한씨 등은 연단아래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경호를 맡은 김두한 의원 만이 괴한들과 몸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경찰은 괴한들이 연단을 완전히 파괴하고 도망친지 한참 뒤에 나타났다.
이날 난동의 배후에는 이정재가 있었고, 현장 책임자는 유지광이었다. 그러나 국민여론이 급격이 악화되자 검찰은 다시 수사에 착수, 유지광과 명동파 두목 이화룡, 종로파 두목 심종현 등을 구속했다.
▶1955년 재일 조총련 결성
친북한계 재일 교포단체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1955년 5월 25일 결성됐다. 1945년 10월 15일 결성된 재일조선인연맹이 1951년 1월 9일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해체되어 이날 조총련으로 출범했다.
조총련은 일본을 거점으로 북한의 해외 공작기지로서 각종 활동을 벌여왔다. 주요활동은 북송사업, 북한 자유왕래 실현운동 등 이른바 민족권리 옹호 투쟁 등이다.
1955년 5월 25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결성됐다.
산하단체로는 조총련의 자금원인 재일조선인상공연합회, 조일수출입상사, 동해상사 등이 있다. 이로써 재일교포 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거류민단과 조총련으로 양분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가 결성됐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직선 대통령선거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회는 이 개헌안을 부결하고 1952년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 이대통령과 대립했다.
그러자 내각책임제 개헌반대 관제데모가 잇따라 벌어졌고 끝내는 정체불명의 폭력단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 이대통령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2개 대대병력의 계엄군을 부산에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5월 25일 자정을 기해 부산과 영·호남 20개 시·군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6일 헌병대가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연행하는 폭거를 자행하는가 하면 야당소속 국회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했다. 6월 30일 이대통령은 발췌개헌안의 국회통과를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하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 결국 7월 4일 야간국회를 열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50년 유네스코, 한국 가입을 의결
▶1949년 중공군 상해 점령
▶1947년 대한민국 1호 비누
'무궁화 세탁비누' 탄생
▶1947년 현대토건사
(현대건설 전신) 설립
▶1946년 김규식,
여운형 등 좌우합작 접촉
▶1946년 요르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2년 `메밀꽃 필 무렵`의 저자 이효석 사망
소설가 이효석이 1942년 5월 25일 뇌막염으로 요절했다. 35세였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경성 제1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함으로써 동반자 작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반적 퇴조와 함께 순수문학쪽으로 돌아섰다.
1933년 8월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무영 등과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구인회`를 결성했다. 구인회는 그 뒤 이효석과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가 들어가는 등 구성원들은 바뀌지만 회원수는 늘 아홉이었다.
1934년 숭실전문 교수가 된 그는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라 불리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다. 평창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성과 자연을 시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형상화한 걸작으로 꼽힌다.
장르 단편소설
발표연도 1936년
줄거리
허생원은 장돌뱅이로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떠돌아다닌다. 어느 날 묵고 있던 충주댁네로 돌아온 그는 우연히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댁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그를 나무라고 손찌검까지 한다. 그러나 자신의 당나귀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달려와 알려주는 동이의 마음씀에 화는 누그러들고 대화 장까지 칠십 리 밤길을 동행한다. 그 유명한 달밤 봉평 메밀꽃밭의 풍경 속에서 허생원은 젊었을 적 봉평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 인연만이 그에게는 평생을 간직한 그리움이요 살아갈 힘이었다. 이어 동이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던 중 허생원은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동이의 등에 업힌다. 등에 업힌 채, 그는 동이 모친의 친정이 바로 봉평이라는 것,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이가 어쩌면 허생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소설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시적인 문체로 그려낸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달밤 칠십 리
김동리는 언젠가 이효석을 두고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이효석에 대한 악담이 아니다. 이효석이라면 이 말에 틀림없이 동의하고 기뻐했을 텐데, 실제로 이효석의 후기 작품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에 가깝다. 흔히 소설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구성이나 서사에 의존하기보다 잘 익힌 우리말 어휘들과 암시, 상징, 복선 등으로 신비스럽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그의 솜씨는 시인들의 언어 운용에 비견할 만하다. 특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칠십 리 길에 대한 묘사는 두고두고 한국 문학사 상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기에 모자람이 없어서 지금도 매년 그곳에서는 문학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정도다. 그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은 이렇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김동리의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란 말의 참의미는 바로 저런 문장들을 염두에 둔 칭찬이었을 것이다. 향토적인 어휘들(특히 식물들과 자연에 대한)과 서정적인 문체의 구사, 동이와 허생원의 관계를 복선과 암시를 통해 전달하는 기교, 당나귀나 달 같은 자연 대상이 인간과 맺고 있는 신비로운 조응 관계에 대한 탐구, 작가가 단정 짓지 않고 독자에게 그 결말을 상상하게 하는 열린 결말의 마무리 등, 이효석 문학의 주요한 특징들은 이후 김동리와 황순원 같은 순수문학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한국 서정소설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현실 비판에서 자연과 향토성 탐구로
이효석은 초기에는 소위 ‘동반자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동반자 작가란 1920년대 한국 문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의 작가들이 유진오나 백신애 같은 작가들에게 붙여준 명칭인데, 카프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 작품 성향이 식민지 민중의 비참상을 고발한다거나 일제의 폭압을 비판하는 등 자신들의 지향과 일치하는 작가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실제로 이효석이 초창기에 발표한 [도시와 유령], [행진곡], [기우] 같은 작품들은 모두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또 첫 창작집인 [노령근해]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그의 작품 세계가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33년 ‘구인회’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구인회는 1930년대를 풍미한 가장 우수한 작가들이 대거 모여 있던 일종의 동인인데, 이상, 박태원, 유치진, 정지용, 김기림, 김유정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모두 구인회 출신이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비판적 주제를 접고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자연과 향토성에 대한 탐구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의 그와 같은 탐구가 절정에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한국소설의 백미라는 이름에 값 할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인물이나 서사보다도 자연 묘사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라는 이효석의 세계관이다. 그 좋은 예가 허생원과 나귀를 동일시하는 장면들인데, 나이 들고, 유랑하고, 우연히 사랑을 나눠 후손을 보았으나 만나지 못하는 둘의 신세에 대한 서술은 그 둘 간의 유사성을 반복해서 각인시킨다. 이효석에게 자연은 인간과 하나다. 아니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후기로 갈수록 자연친화적이고 향토성 짙은 서정적 소설을 쓴 작가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은 그의 문학 세계를 대변하는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이효석(李孝石 : 1907~1942)
호는 가산(可山)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이 실제 그의 고향이다.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5년 <매일신보>에 시 ‘봄’을, 그리고 경성제대 예과 시절, 시 ‘가을의 정서’와 ‘하오’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온다. 그러나 1927년 영문학과에 진학 후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시를 접고 소설가의 길을 걷는다. [행진곡], [기우] 등 초기 그의 작품들은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카프(KAPF) 진영 작가들은 그를 유진오와 함께 ‘동반자 작가’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1931년에 첫 창작집 [노령 근해]를 펴냈으며 이후 그의 작품 경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1933년 ‘구인회’ 가담 즈음해서이다. 이때부터 그는 [돈], [수탉] 등을 <조선문단>에 발표하는 등 프로 문학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이고 향토성 짙은 서정적 소설들을 쓴다. 1931년에 결혼을 하고 나서는 함경북도로 건너가 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한다. 이후 얼마간 작품 발표가 뜸하다가 1935년 8월 <조선문단>에 [성수부]를 발표하고 10월과 11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성화(聖畵)]를 연재한다. 1936년은 그의 작품 활동에 있어 전성기였다. [분녀], [산], [들] 같은 작품들을 연달아 발표했고, 특히 10월 <조광>에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작가 이효석의 문학 세계를 대변하는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아내와 자식마저 잃은 후, 그 역시 병을 얻어 1942년에 작고한다.
▶1942년 조선인 군속모집 시작,
미-영포로 수용소에 배치
▶1935년 베이브 루스, 714홈런 기록
1935년 5월 25일 피츠버그의 포브스 구장. 이곳에 원정온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선수 겸 부단장 베이브 루스는 홈런 3개를 때렸다. 세번째 아치는 그때까지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큰 183m 장외 홈런. 그것이 41세된 루스의 마지막(714호) 홈런이었다. 몸이 불어 한물 간 선수로 치부돼 이해 초 뉴욕 양키스 에서 방출된 루스는 이 마지막 불꽃 1주일 후 은퇴했다.
루스의 홈런기록은 1974년 행크 아론(755개)이 깰 때까지 39년동안 대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14년 투수로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 루스는 1919년 타자로 전향, 그해 29개 홈런을 날려 단번에 이 부문 기록을 경신하더니 이듬해 54개, 1927년에 60개를 쳐 홈런 타자로 명성을 굳혔다. 사이 영 같은 투수가 인기를 점령하던 미국 야구는 루스의 등장으로 타격전으로 바뀌었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1920년대 타격 모습.
▶1923년 독일의 화학자
한스 골트슈미트 사망
▶1922년 이탈리아의 공산당 서기장
베를링구에르 출생
▶1919년 안창호 상해도착 임시정부 강화 착수
민족의 지도자, 안창호 선생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동아일보>에 실린 선생의 글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1925.1.25)-
민족에 눈을 뜬 청년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興國)과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필명은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이며 이명으로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등을 사용하였다. 1885년에 강서에서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1년에 평남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노남리댁 셋째라고 불리었으며 이때부터 서당에서 김현진에게 한문 수학을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세상 구경에 나선 선생은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된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선생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서당 선배인 필대은과 함께 고향 강서로 가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질풍과 같이 몰아치는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선생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냉철히 구하였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 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고향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선생은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선생 부부는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한인공동체의 지도자, 공립협회 창립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선생을 사로잡은 일은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었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며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선생은 한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천시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1904년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취업해 있으면서 부인을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된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청소해주었다. 각 집에 커튼을 치게 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아 꽃씨를 심어 주는 등 주변 환경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며 경계하던 한인들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인들은 매사 모든 일을 선생과 의론하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선생은 한인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도산의 모습.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선생에게 한인들은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때 고국에서는 일제가 우리 땅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중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잡아 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선생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국내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선생을 당혹케 하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늑결하고 광무황제가 인준하지 않은 조약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어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노골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조국의 소식을 들으며 크게 낙담하던 차, 동지들은 선생의 귀국을 종용하며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 하며 거절했지만 동지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노동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공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겠다며 강권하며,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뿐임을 설득하였다.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2월 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우치다(內田良平)가 선생이 4월경 서울, 대구, 원산 등지로 유세하고 다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한국통감부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신민회 조직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시도 끝에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선택
선생은 서북학회 등의 표면활동과 함께 평양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해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고 가옥 개량과 모범농장 건설, 여성교육의 필요성 제창, 국가(國歌) 보급운동 등 다양한 국민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지만 열강 사이에서 한국이 처한 정세는 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한편 한국을 식민통치하기로 예정한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산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반격에 나서 도망하는 해산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 때 선생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복무 중이었던 김필순의 집인 세브란스 건너편 김형제상회 2층에 머물고 있다가 시가전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생은 현장에 뛰어들어 거리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거두고 중상 입은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연 이틀 밤을 꼬박 새며 구호하였다. 이 경험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주겠다며 한국의 정치를 장악한 일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후일 선생이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 그 해 11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선생과의 회견을 요청, 만남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선생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선생은 단호히 이토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전히 선생은 미주 공립협회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을 원격 지도하고 있었다.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공립협회와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해 항일투쟁할 것을 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공립협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미주 한인들이 투자한 주금으로 북만주 밀산지역 봉밀산의 토지를 사들이고 이미 개척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 한편 1908년 8월,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창립한 선생은 이 땅의 건전한 청년들을 교육계와 경제계, 그리고 정치계 등 각 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자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신민회의 해체와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13년 미주에서 결성된 흥사단이 그 역사를 계승하였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의사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제는 블라디보스톡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모의한 증거를 포착하고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을 포함한 공립협회 파견 원동위원들이 관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선생을 안중근의거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선생은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해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구국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 항쟁한다는 전략이다.
대성학교 모습. 도산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고 하여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1910년 4월 7일 행주를 출발해 인천을 경유하여 황해도 장연에 도착한 선생은 그곳에서 중국인 소금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중국의 위해위로 탈출하였다. 망명 전에 지은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1910. 5. 12일자)에 소개된 후 국외 동포사회로 급속히 퍼져 만주 및 미주 등지에서 발간된 [애국창가집]에 실려 국내외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거국가’가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에 반항을 장려한다고 지목해 이를 부르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뛰어난 조직력과 리더십으로 수많은 단체들과 학교를 설립하다
각자의 경로를 통해 국내를 탈출한 신민회 동지들은 중국 청도에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선생은 길림지방이나 러시아, 만주국경 지역에 토지를 사서 우선 농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문, 잡지를 경영해 우선 선전활동에 치중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청도회담에서 논의된 최종안은 이종호가 3천 달러를 대기로 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해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결의였다. 청도회담이 끝난 후 선생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재러 한인사회에는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러시아에서 선생은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하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였으며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본 후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그 해 9월 2일에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온 선생은 분주히 한인사회를 돌아보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현시점에서 한인사회를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1912년 7월에 둘째 아들 필선(必鮮)을 얻었으며 도산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도 활기를 띠고 발전해 나갔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중앙총회 아래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다. 멕시코와 쿠바지역과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흥사단은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 출범해 오늘날까지 조직을 이어가는 역사 깊은 단체이다. 선생은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조직의 명수이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본 선생은 인적, 물적 실력양성의 기반을 다져가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선생은 직업적 혁명가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기여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운동이라 보고,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 될 것을 권유하였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많은 결사들이 조직되었다가 사라졌지만 선생이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은 민주적 운영과 민족전도 대계를 목표로 했기에 그 생명력이 길었다.
1917년 멕시코 한인사회를 돌아보기 위해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사진
하지만 전 세계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네트워크로 구축하고자 했던 선생의 희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이 승전국의 하나가 됨으로써 만주 및 러시아지역의 대한인국민회의 항일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국제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며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1916년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을 때, 분쟁해결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던 차, 하와이 각 섬의 교민사회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1917년 1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한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키우고자 힘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는 멕시코 순방길에 올라 10개월 간의 짧은 방문기간 동안 농장주들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자치를 위한 경찰서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많은 일을 주선해 멕시코 한인사회를 크게 변화시키고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발발 소식이 3월 9일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선생은 신속히 3.1운동의 소식을 북미,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전 세계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과 전 동포사회가 독립전쟁 준비에 단결해 줄 것, 특히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5국 대사에게 한국민의 절대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출석권을 안정해 줄 것을 간절히 청원하였다. 특히 선생은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책임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각지에 산재한 여성단체들의 통합을 권유해 1919년 8월 북미의 5개 여성단체가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는 선생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선출하고 상해파견을 결의하였다. 선생의 상해 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중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선생은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 발표되었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통합에 성공해 통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음은 선생의 정력적인 통합운동의 결실이다. 초기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이처럼 선생의 방침과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 때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통일정부에서 선생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노동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기호파 내각의 견제를 받게 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선생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행보를 늦출 수 없었던 선생은 1920년 교민단 사무소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어느 한 부분이 아닌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의 6대사업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과 구체적 진행방법과 실행을 주창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국민개병, 국민개납, 국민개업의 방침을 통해 국내외 모든 한인은 독립전쟁 시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인두세를 내어 조세의무를 지며, 직업을 갖고 생산에 종사함으로써 정부를 유지해야 할 책임감 있는 의무를 가진 국민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선생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 러시아, 만주 등 각각의 운동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선생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 3일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여기서 선생은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외교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정부유지파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창한 창조파, 그리고 정부개조를 주창한 개조파로 나뉘어 그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선생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재미한인들과 의논하고자 1924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동안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이상촌 건설의 지원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 줄 것을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였다.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1926년 4월 22일 선생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서 오로지 민족 우선의 신념을 지켜가다
도산이 미국에 있는 동안인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이상룡은 급히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선생이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선생을 국무령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취임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은 좌, 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을 주창한 바, 미국내의 일부 분자들은 선생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분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7월 8일에 선생의 상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이 때의 연설의 요지는 ‘대혁명당을 조직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자’ 였다.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본 연설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은 빈민이며, 자신 또한 무산자라고 하며 자본주의가 미발달된 채 국망을 당한 민족이 프롤레타리아, 부르조아의 계급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힘의 낭비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국가 건설 시에 우리의 경제 방책은 일제 및 일본자본가, 그리고 친일 매판자본가들이 장악한 대생산기구를 독립 달성 후에 국가소유로 한다고 공언하여 사회주의자들을 포용한 노선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4년 뒤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에서 다시 천명되었다.
한편 이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홍진은 취임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정강 중 “전민족을 망라한 공고한 당체(黨體)를 조직할 일”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선생이 주창한 독립당 내지 유일당 결성운동을 현실화하기 위한 도정에서 임시정부가 정강으로서 방향과 보조를 맞춰준 것이다. 유일당 운동은 반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한편 1926년 12월에 새로이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와 그 내각은 1927년 2월, 3차 임시약헌 개정에 착수해, 3월 5일에 ‘이당치국(以黨治國)’체제로의 헌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유일당 결성의 추세를 임시정부 헌법에 반영하였다. 선생이 유일당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9월 26일,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1927년 1월에 길림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유일당 결성의 당위성을 주지시키고 1월 27일에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이 때 들이닥친 중국경찰에 피체되어 20여일 만에 풀려난 이른바 ‘길림사건’을 겪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단결을 호소하였고 4월 1일에는 길림의 교민들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결성하였다. 한편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3부 대표들이 모인 이른바 ‘신안돈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정력으로 민족통합과 대동단결을 주선해 나간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경에 이어 상해,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 차례로 한국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구축 당하는 비참한 한인들의 실정을 돌아본 선생은 1928년에 들어와 중국인들과 항일협력전선을 결성해 공동투쟁 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의 대공주의(大公主義)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선생이 자녀에게 보낸 엽서(1930).유일당 결성의 바쁜 와중에도 도산은 자녀들에게 “언제든지 스마일”이라고 쓴 엽서를 보내 용기를 주었다.
이해 12월 20일에 연희전문축구단이 원정 경기를 위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요지의 훈화을 하였는데, 이는 대공주의의 요지를 표현한 것이다. 선생의 대공주의는 사회전반의 공익을 제일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수립의 전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대일본에 대해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내부에서는 민족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 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 뿐"
유일당 운동으로 민족 내부의 전선통일을 꾀하며 분주했던 선생은 점차 중국을 노골적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일제에 대항해 한, 중공동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일제 침략의 첨병으로 오해되어 무자비하게 구축 당하는 재만한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할 수 있는 방도이기도 하다. 1928년 5월 선생은 중국신문인 <세계신문>과 <중앙일보>에 ‘중국혁명동지에게 고한다’라는 논설을 게재해 한, 중 양 민족의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중국계 신문에 한국의 혁명방략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행동을 파괴해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극단의 수단까지 써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중국과 연합해 대일항전의 역량을 배가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전환되고 있었다. 1928년 7월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유기적 관계 유지 방향에서 좌파 중심의 협동전선론으로 혁명 전략을 전환하였다. 좌파가 중심이 된 협동전선체 결성 움직임과 헤게모니 전취론이라는 전술의 등장은 좌우익 통합이라는 민족적 명분을 압도해 버리면서 그간 어렵게 좌우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로 접근해 갔던 독립운동계는 혼돈에 빠졌다. 그 결과 민족적 입장에서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탈이 시작되었으며 1929년 10월 26일 좌파세력들에 의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요시찰인명부’(1925.2.17)로 도산 선생에 관한 인적사항과 활동사항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929년 3월에 남경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선생이 파견되었다. 정부 요인이 아니면서도 정부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음은 그간 정부 외곽에서 대중국과의 공동전선구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당사자가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본 대회에서 임시정부는 한, 중 양국이 항일동맹군을 조직하면 동삼성에서 분투할 혁명군 10만을 확보할 수 있다며 중국과의 군사동맹체결을 제안하는 요구서를 국민당 측에 제출했다. 이러한 제안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군사동맹을 꾀함과 동시에 분립된 독립운동계의 기선을 잡아 계속적으로 민족 내부의 유일대당운동을 추진하고자 한두 가지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좌익을 배제하고는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민족통일로의 길로 결코 나갈 수 없다고 본 선생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를 통합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하고자 고심하였다. 1930년 1월 비록 대다수의 인물들이 우익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공주의 정신을 삼균주의로 정립하여 강령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한, 중 혁명의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대중국과의 항일통일전선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대일항쟁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대일전선통일통맹 결성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1930년 12월 27일 고향 고일리에서는 어머니 제안 황씨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931년에 상해 한인들의 경제적 처지는 매우 불안하였다. 경제 부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선생은 상해 한인의 소비조합을 만들고 장차 생산합작의 단계로까지 발전을 염두에 둔 경제적 혁명단체로서 공평사를 창립해 경제적 위기를 타파해 나가고자 하였다. 1932년 1월 16일자로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어려움에서도 최후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도산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도산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개최된 흥사단 제18회 원동대회에서 선생은 단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적대시하지 말 것과 전적으로 탈이념주의, 민족해방운동 지상주의에 입각해 민족통합을 이루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독립운동계의 각 계파가 역량을 축척하고 발전해 나가지 못하고 원시적 힘겨루기만으로 역량을 소모하는 현실에서 선생은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는 민족의 가치를 호소하고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약화된 투쟁성에 대해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을 유화시키고 상대의 사상과 노선을 상호 포용하는 제3의 노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은 1920년 내내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으며 그가 피체된 후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지속되었다. 선생의 통일운동은 당대에는 극우, 극좌주의자들 모두에게 비판 받는 처지였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사상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 단결운동을 간단없이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성한 도산의 수형자 기록카드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여 7명의 일본군과 정부 수뇌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던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민단장이라 오인된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했지만 일경의 감시와 방해가 심하자 중단하고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손수 지어 그곳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일체의 민족운동을 허용하지 않은 일제는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동우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선생은 생명위독 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서둘러 선생을 병보석으로 출옥시켜 경성제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다. 당시 최고 권위로 인정받던 이와이(巖井) 내과 병동에서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던 김용필 박사는 선생의 병명을 장결핵, 늑막염과 복막염 등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로 폐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으로 진단하였다. 선생을 수 차례 문병한 백기천 박사는 여러 가지 증세로 보아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의 증세를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선생의 서거로 인해 민중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제한해 소수의 인척들만 참석하게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후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온 부인 이혜련의 유해를 이 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15년 중국-일본 신조약 조인
▶1913년 영국 BBC 방송 최초의
종군특파원 딤블비 출생
▶1913년 한용운 `불교유신론`간행
3.1 독립선언을 이끈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선생의 [님의 침묵]중에서(1926)
1905년 백담사에서 불교에 귀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충남 홍성에 소재한 선생의 생가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여 불교계의 혁신을 주장하다
1910년 선생은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아울러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자,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1914년 4월에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그럼으로써 선생이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던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 일본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선생이 1909년 집필을 시작하여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한 후 1913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 하였고,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선생은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학교인 중앙학림 학생인 정병헌, 오택언, 전규현, 신상환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될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 가운데는 불안과 절망에 빠져 소란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그들에게 호통을 쳐서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의 수형기록표
민립대학건립운동 등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나아가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한 뒤, 총독부에 대하여 당당히 정교(政敎)의 분립을 주장하면서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또한 중앙의 불교 행정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케 하고,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전력을 기울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1927년 2월에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된 뒤에는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 최범술, 김상호 등 20여 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만당은 경상남도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일원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자주독립이었으나, 1938년 말 일경에게 발각되어 서울, 사천, 진주, 해남,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속간하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근대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시인으로 활동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 [후회], [철혈미인(鐵血美人)], [박명(薄命)] 등이 있다.
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선생의 시에 있어서 ‘님’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의 문학은 삶과 행적을 살펴보건대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간에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과도 같은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44년 꿈에 그리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
1933년 55세 되던 해 선생은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은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였을 때에는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무안해진 최린이 선생의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그 길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선생은 민족적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요 독립투사인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장례는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유해는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13 [조선불교유신론] 간행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1927 신간회 발기인, 경성지회장
[님의 침묵] 등 300여 편의 시 발표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11년 멕시코 독재자
디아스 대통령 축출
▶1911년 아동문학가 윤석중 출생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이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 선생이 시를 짓고 윤극영 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로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보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기가 태어나 처음 배우는 ‘짝짜꿍’도 윤석중이 지은 노래이다. 윤석중은 이 외에도 수많은 동요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해준 동요의 아버지이다.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상실의 환경에서 자라다
윤석중(尹石重, 1911.5.25 ~ 2003.12.9)은 국권피탈 이듬해인 1911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수표정(동) 13번지 초가집에서 윤덕병과 조덕희 사이에서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시대부터 세도가로 알려졌고 아버지 윤덕병(1885-1950)은 무신론자로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지식인이었으며 어머니 조덕희는 천석지기 집안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다.
윤석중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서 자란다. 많은 형제들도 모두 일찍 죽어 그는 외톨이가 된다. 석중(石重)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마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라’의 시대였다고 윤석중은 회상한다. “밖에 나가 놀지 마라.”를 비롯하며 “많이 먹지 마라, 배탈 날라. 뛰어놀지 마라, 넘어질라. 남의 집에 가지 마라, 병 옮아올라.” 등등. 일찍 혼자가 되어 딸 하나만 키웠던 외조모는 외톨박이 외손자 윤석중 때문에 늘 걱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윤덕병은 무신론자로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운동, 사회운동에 헌신한 분인데 석중이 아홉 살 때 재혼한다. 그와 더불어 석중은 수은동 외가에서 아버지를 만나러 수표교를 건너 본가를 왕래하게 된다.
출생부터 그를 둘러싼 상실의 환경은 “어머니는 왜 나만 남기고 돌아가셨을까, 언니랑 누나랑 많았다는데 왜들 오래 못 살고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고 이러한 의문은 그에게 생각하는 버릇을 갖게 했다. 실제로 그 의문은 어린아이로서는 풀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어린이들을 위한 문화운동, 문학운동에 일생을 다하는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생의 여러 의문들을 안고 수은동 외가에서 수표동 본가를 오가던 윤석중은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성찰이 문학으로 물길을 내게 된 것이다.
윤석중 동요 첫 발표 노래 잔치 모임에서(1933년, 평양 백선행 기념관)
열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윤석중은 열 살(1921년)이 되어서야 교동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일본말을 배우는데 일본노래 ‘봄이 왔네(春が来た)’에서 모티브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쓰게 된다. ‘봄이 왔네’라는 이 노래는 우리말로 하면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 왔나, 산에 왔네, 마을에 왔네, 들에도 왔네.”이다. 윤석중은 학교에서 야단을 맞으며 “봄이 왔네”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 노래를 못 부른다고 선생님께 혼나면서 ‘우리나라에도 버젓이 봄이 있는데 하루(봄春의 일본말)가 다 뭐람’ 하는 생각이 들어 배울 때마다 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따뜻한 봄이 오니 울긋불긋 꽃봉오리, 파릇파릇 풀잎사귀”로 시작되는 ‘봄’을 쓰게 되고 이 시가 <신소년>에 뽑힌다. <신소년>에서 일찍 문학성을 인정받은 어린이 윤석중은 1923년 [상록수]를 지은 심훈의 조카 심재영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만든다.
1925년에는 초등학교(학제 5년)를 1년 월반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양정고보에 들어간다. 그해 <어린이>(1925년 4월호)에 ‘오뚝이’가 입선으로 뽑힌다.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고나야/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비틀비틀 하는꼴 우습고나야”로 불리는 ‘오뚝이’는 거드름이나 술기운을 빌린 으스댐, 떨어져도 안 아픈 척 체면 차리는 당대 어른들의 모습을 오뚝이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같은 해 8월 15일에 윤석중은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일 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보게 된다. 회람잡지<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잡지 굴렁쇠”라고 쓰고 각자가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일을 작은 편지에 곁들여서 원고를 묶었다. 이 원고를 서울의 윤석중이 진주의 소용수에게 보내면 소용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 마산의 이원수에게 보내고, 이원수가 읽은 뒤 자기 글을 실어서 언양의 신고송에게, 신고송이 울산의 서덕출에게, 서덕출이 수원의 최순애에게……이렇게 한 바퀴 돌아가면 다시 윤석중에게 오는 것이다. 그때 동인으로는 진주의 소용수, 마산의 이원수, 언양의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 수원의 최순애, 그리고 원산, 북청, 김천, 안주, 신천에도 동인들이 있어서 글을 실은<굴렁쇠>는 우리나라 남북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또한 같은 해 11월부터 윤석중은 <어린이>지 부록이었던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리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고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일하게 된다.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가’ 부분
위의 시는 1926년 양정고보 2학년 때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된 ‘조선물산장려가’이다. 이 시가 당선되면서 윤석중은 천재적 어린이 예술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윤석중은 이후 왕성하게 시창작 활동을 한다. 1927년 여름방학에는 ‘봄편지’를 쓴 ‘굴렁쇠’의 동인인 울산의 서덕출을 만나러 떠난다. 서덕출은 척추장애가 있는 소년이었다. 서울에서 윤석중이 내려온 것을 안 ‘굴렁쇠’ 동인 언양의 신고송, 대구의 윤복진이 합류하여 네 사람은 굴렁쇠처럼 돌아가며 한 소절씩 시를 쓰게 되는데 이 시가 “오동나무 비바람에/잎떠는 이 밤/그립던 네 동무가/모였습니다.//이 비가 개이고/날이 밝으면/네 동무도 흩어져/떠나갑니다.(중략)” 하는 ‘슬픈 밤’이다.
양정고보 시절 춘원 이광수가 편집국장으로 있는 신문에 윤석중의 시가 연달아 발표된다. 어느 날 윤석중(尹石重)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윤석동(尹石童)으로 잘못 인쇄된다. 중(重)자가 동(童)자와 비슷해서 생긴 일인데 이를 보고 “석동(石童)이라는 아호가 좋소, 누가 지었지?” 하는 춘원의 칭찬에 석동(石童)은 그의 아호가 된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 운동이 발발하면서 윤석중은 그들과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보를 졸업 며칠 앞두고 자퇴한다. 1930년 가을에는 19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한다.
1932년 7월 20일 첫 창작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신구서림, 1932)을 출간하고 1933년에는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하며 방정환이 맡았던 잡지 <어린이>의 주간이 된다. 1935년 9월 10일에는 독립 운동가이며 조선건국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던 여운형의 주례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결혼한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의 발행과 글짓기 운동을 전개하다
1944년에 찍은 사진
윤석중은 1923년 심재영, 설정식과 함께 만든 등사판 잡지 <꽃밭>을 시작으로 회람잡지 <굴렁쇠>를 만들어 동인들의 집을 굴러다니게 하였고 1931년에 방정환 선생이 타계하자 <어린이>지의 편집을 맡아 본다. 이후 <어린이>가 폐간된 후 조선중앙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잡지 소년중앙>을 창간하는데 1년을 못 채우고 개벽사에서 최영주와 함께 잡지 <중앙>을 맡게 된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어린이 잡지<소년>을 맡는다. 이때 강소천의 ‘닭’이 <소년>에 발표된다. 그해 가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의 양해를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잡지 <유년>을 출간한다.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 ‘기러기’ 1연
창간호가 종간호가 된 <유년>에 실린 ‘기러기’는 원제가 ‘벤조를 뜯어라(Massa’s in the Cold, Cold Ground’)인 포스터의 곡에 붙여 동요로 불리게 되었다. 1939년 윤석중은 <소년>지 편집을 맡아 본 지 2년 만에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의 계초장학금을 받아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 유학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벨기에 ‘고라르’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빛>을 발간한다.
해방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 해방가 삼아 ‘어린이날 노래’를 짓는다. 또한 문교부에서 졸업식 노래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를 짓고 ‘짝짜꿍’에 곡을 붙인 정순철을 만나 노래로 만든다. 그때 윤석중은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고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꽃다발이 그렇게 많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윤석중은 부친과 새어머니를 비롯한 이복동생을 모두 잃는다. 이듬해인 1951년 11월 11일에 윤석중은 ‘윤석중 아동 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들에게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집하여 뽑힌 글들을 책으로 엮어낸다. 동족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어린이들의 글을 통해 알리려는 윤석중 방법의 반전운동이었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바꿔 <새싹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새싹회> 산하에 어린이합창단, 어린이 합주단, 글짓기 교실, 애기회 등을 두었다. 소파상을 제정하고(1957), 장한 어머니상도 제정하였으며(1961) 해송동화상(1955), 새싹문학상(1973)도 제정한다. 그리고 계간지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2011년 봄치로 115호) 열세 살에 발간한 잡지 <꽃밭>에서부터 오늘날의 <새싹문학>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를 위한 잡지의 발간은 윤석중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이들을 향해 달리면서 굴리던 굴렁쇠였다.
아시아의 노벨상,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다
윤석중은 1978년 동양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받는다. 이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동심은 국경이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며 “나의 직책은 문학가이지만 길이길이 어린이를 돌보는 작은 시중꾼이 되겠노라”고 말한다.
새신을 신고/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 ‘새신’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 ‘똑같아요’
나란히/나란히/나란히/밥상위에 젓가락이/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 ‘나란히’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장대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달 따러 가자’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우산 셋’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잘다 - ‘기찻길 옆’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 ‘집보는 아기’
그는 일생동안 1,300여 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 그리고 800여 편이 동요로 불렸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부천의 창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강원도, 제주도 등 30여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교가를 지어주었다. 그가 남긴 동요를 살펴보면 그의 문학인생은 아기들의 생활모습은 물론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정을 나누며 동심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상실의 환경에서 자란 그는 스스로 “노래 나그네”로 어린이의 시중꾼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2003년 12월 9일 생을 마감하였고, 2003년 12월 9일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발파라이소간 안데스 횡단철도 개통
남미 최초의 횡단철도
▶ 1895년 대만도민, 대만민주국 선언. 대만순무(巡撫) 당경송을 총통으로
▶ 1865년 가톨릭대 신학부 개교
▶ 1865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제만 출생 - 제만효과 발견으로 190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 1864년 나폴레옹3세, 노동자의 파업권 승인
▶ 1803년 미국 철학자 에머슨 출생
▶ 1669년 시칠리아 에트나산에서 화산 분출로 2만명 사망
▶ 1571년 이슬람 세력에 대항할 신성동맹 결성
1571년 5월 25일 베네치아와 교황 피우스 5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사이에 신성동맹이 결성됐다. 1570년 베네치아를 동부 지중해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술탄 셀림 2세의 군대가 키프로스에 침입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 결성배경이었다. 10세기 이후로 투르크인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티움 그리스도교 제국의 세력을 꾸준히 잠식해 들어갔다.
초기에는 십자군에 견제를 당했지만 1300년경에는 소아시아에 거점을 확보했다. 이후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건너 유럽으로 진입, 인접한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453년에 모하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문명권은 최악의 굴욕을 당했다. 투르크인은 서쪽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도 진출했다. 1517년에 이집트는 투르크의 셀림1세에 점령당했다. 그의 후계자이며 `대 술탄`이라고 불리던 술레이만 1세(1520-1566)는 치세동안 바그다드, 로도스, 벨그라드, 부다페스트를 거쳐 당시 서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던 신성로마 황제의 수도인 빈 부근까지 지배권을 확장했다.
그리스도교는 투르크 침략의 파도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필적할 단결과 헌신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교황을 중심으로 단결한 그리스도교 군사들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신성동맹 함대로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킴으로 다시는 이슬람 군대가 지중해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전투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가톨릭 국가 거의 전부가 참여했다.
출처 네이버지식배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