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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그가 감옥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감옥을 자신의 선교지로 주셨다고 믿었다. 그는 그 안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를 찾아보았다. 이 감옥은 정치범과 일반 도둑들인 다른 죄수들과 함께 수용한다. 그가 기도하면서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살인자였는데 그 사람은 너무나 잔인해서 그 감옥의 간수들조차 두려워했다. 감옥에서는 하루 12시간씩 노동하는 것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데. 그 목사님은 . 금식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겠구나. 생각하고. 계속해서 중노동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교도소 음식을 거절했다. 다른 사람들이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그 목사님은 침대에서 내려와 마룻바닥에 엎드려 그 살인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곧 그 살인자는 그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그의 변화가 너무나 엄청났기에 그 소문은 교도소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교도소 소장이 도대체 그 살인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묻기 위해 그를 불렀다.
[행 16:25-26] (26)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개혁은 기도에서 출발한다. 성경: 느헤미야 1: 1-11
저변확대 새로운 대통령이 세워지면 주로 내세우는 모토가 "개혁 , 혁신, 변화"였습니다. '개혁을 하겠다 개혁을 하겠다' , 참 좋은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이라는 것은 대통령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참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개혁이 나오는데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대표적인 개혁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요시야 왕 때의 개혁이고(왕하 22장 이하 참조) 다른 하나는 느헤미야서에 나와 있는 느헤미야의 개혁입니다. 요시야 개혁이나 느헤미야 개혁은 둘 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병든 사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 이었습니다. 이 두 개혁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개혁은 실패했고 느헤미야 개혁은 성공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요시야 개혁은 똑같이 말씀과 회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반면에 느헤미야의 개혁은 성공했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저변 확대를 이루지 못한 반면 느헤미야의 개혁은 저변 확대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즉, 백성들까지도 이 개혁에 동참했기 때문에 느헤미야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우리 한국 교회의 침체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교회를 10개 더 세운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대형 스타 같은 교회가 몇 개 나온다고 거대 교회가 나온다고 변화되는 게 아니라, 지금 무너져 있고 탈진되어 있고 또 부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많은 교회들이 함께 부흥의 불씨를 나누어 가질 때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다시금 살아나는 역사가 벌어질 때 비로소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저변 확대가 있어야만 개혁이 진정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각 가정마다 있는 VTR을 예로 들면 이 저변 확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VTR에는 본래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VHS방식이 있고 또 베타(P)방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될 때는 이 베타(P)방식이 훨씬 더 우수합니다. 이 베타 방식은 일본 쏘니사(쳐)에서 개발한 것인데 화질도 훨씬 더 깨끗하고 재생 효과도 더 뛰어납니다 그런데도 이 베타 방식은 저변 확대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쏘니는 처음에 자신들의 기술력만 믿고 나갔다가 시장에서 밀리고 밀리게 되자 결국에는 방식을 베타에서 VHS로 전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픈 경험을 한번 겪고 난 쏘니는 그 후 고화질TV가 나올 무렵에는 그것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예 미국에 있는 영화사를 사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계가 좋아도 그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결국은 실패한다는 것을 비싼 값을 지불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문제는 저변 확대입니다. 아무리 좋고 뛰어난 것이라도 그것을 널리 펼치지 아니하면,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고 박수 쳐 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살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말씀 교육"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가슴속에 있는 뜨거움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뜨거움을 전달해 주고 열심히 펼치고 힘써 널리 알릴 때 비로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가 늘었다거나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더라 ,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백성에게 왕성하게 울려 퍼지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가슴속에 심겨지더라" 등의 말로 부흥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홀로 출세한 자의 사명 남쪽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후 지금의 이라크 지방인 바벨론 정권에서 지금의 이란 지방인 바사(페르시아)정권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사의 고레스 왕 때 (BC 537년)에는 고레스의 은총으로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1차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귀환은 BC 458년에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의 인도하에 이루어집니다. 그로부터 약 14년이 흐른 BC 444년에는 역시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느헤미야의 인도로 세번째 포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벨론의 포로 중에서 태어난 포로민의 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민족적 절망기에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게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독 느헤미야만은 출세를 했습니다 굉장히 크게 출세를 했습니다.
본문 11절에는 느헤미야의 직업이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술관원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생각하면 술관원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술관원은 대단히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요즘 과거 역사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니까 우리도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한번 되새겨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는 차지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장관들도 호출해 낼 수 있는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실장은 누구였습니까? 장세동 씨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열심히 충성했고 또한 그에게는 모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경호실장은 누구였습니까? 이현우 씨였습니다. 이 사람 역시 노태우 대통령의 충복이었습니다. 경호실장은 함부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의 경호실장이 누구였느냐? 그게 느헤미야였다는 겁니다. 굉장히 높은 직책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냐? 민족적 절망기에 흘로 출세했던 군계일학 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출세했다 해서 자만할 수 없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마음자세였습니다. 느헤미야에게 무슨 사명이 있습니까? 그 백성들을 이끌고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의 비보 느혜미야서는 제일 먼저 하나니의 전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형제였습니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회가 내게 이르러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췌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느헤미야가 하나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예루살렘에 다녀왔다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니? 그랬더니 하나니가 좋은 소식은 전해 주지 못하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다 무너져 버렸고 성문은 다 불에 타 버렸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루살렘 성이 어떤 곳입니까? 예배의 중심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이 다 파괴 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느헤미야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해서 먼저 귀환했던 사람이 에스라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마음에는 예루살렘 성이 웬만큼은 재건되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2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에스라는 귀환 후 즉시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르훔과 심새라는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스 4:8). 에스라가 이끄는 무리에게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즉각 중단되었습니다. 르훔과 심새는 공사만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성 안에 있던 물건들까지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1차 파괴였습니다. 결국 성벽 재건의 사명이 주변의 방해로 좌절된 것입니다. 에스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지금 느헤미야가 들은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믿을 만한 학사 에스라가 갔는데도 안 되는구나. 그러면 어찌합니까, 주님?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지금 얼마나 많은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성들이 지금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은사집회, 신유집회에는 많이 모임, 그러나 성경연구 모임에는 사람이 없음 안모입니다.
“빛과 소금” 기독교 잡지에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 실렸습니다. 그 특집 기사가 "점 바람"이었는데 점 집을 드나드는 사람의 30%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점쟁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10명 중에 3명 정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오염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70%정도가 결혼하기 전에 궁합을 본답니다. 또 작년 8월에는 윤달이 끼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8월을 피해 결혼식 날짜를 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들도 점쟁이를 찾아온다고 합니다 교회를 어디에 개척하면 잘 될까 해서 땅 잡아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나라 꼴입니까? 한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해서 발전한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이 나라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복으로 성장하고 부흥한 이 나라가 다시 무속으로 돌아가고 점술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나 있는 일입니까? 영적인 간음을 범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떻습니까? 참 민망한 일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믿는 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과거 정권의 이야기를 다룬 「코리아게이트」나 '4공화국」을 보면서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10,26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있었던 술판에 모 교단 장로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각하가 주시는 술이라면 받아 마셔야지요"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민망합니다.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또한 전두환 대통령의 심복이라고 하는 장세동씨는 모 교회의 집사입니다. 아주 예수 잘 믿는 분이라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또 우리 각 가정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혼하는 가정들이 늘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도 심방을 해보면 참 어려운 가정들이 많았습니다. 부부간에 불화가 있습니다. 자식들의 가출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믿는 가정과 믿지 않는 가정이 다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그 사회가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이제 성도의 간증을 간직하고 빛을 회복하고 소금의 사명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는 개혁의 시작 하나니가 전해 준 비보를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본문 4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 느헤미야는 울었습니다. 그는 찢어지는 마음을 부등켜안고 절규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그냥 웁시다. 많이 웁시다. 우리 각 가정들을 바라 볼 때 이 사회를 바라볼 때 오늘날의 교회들을 바라볼 때 기도가 도대체 나오지 않습니다. 답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어찌해야 됩니까? 이 사회가 지금 질서를 잃어 가고 모든 기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이러한 제목을 놓고 기도할 때 웁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 통곡입니다. 통곡이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입니다, 우리가 신학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 통곡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무너지는 한국 교회의 상황들을 놓고 눈물로써 기도 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합니다. 울고 난 후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습니까? 금식했습니다.
여러분 ! 혹시 나라를 위해서 금식해 본 적이 있습니까 무너지는 교회를 위해서, 무너지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 소화 안 돼서 밥 굶는 것 말고 정말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금식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첫 번째 사명입니다,
우리 죄를 바라보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우리 형편들을 바라보고 또 우리 신학교의 상황들을 바라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인간의 모든 힘을 다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는 고백이 바로 눈물입니다. 느헤미야의 눈물은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울기만 한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까?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본주의자들도 많이 웁니다.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해외로 입양된 한국 아이들의 얘기를 들을 때도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조국에게 버림 받아 해외로까지 밀려났건만 그 곳에 가서까지도 양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하고 결국에는 술집을 전전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우리 가슴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사회 운동하는 사람치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사회에 모순이 많은지 압니까?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많이 울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울었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 지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삶의 위대한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울고 난 다음 기도했습니다.
울고 난 다음에 기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가 역사를 바꾼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대역사가 이 느헤미야 한 사람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입을 열어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거기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_ 우리가 기도할 때에 무너졌던 모든 성벽들이 재건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우리 주변의 무너져 가는 것들을 놓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회복이 됩니다. 기도하면 무너졌던 것들이 수축이 됩니다. 기도하면 사단의 세력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혹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매우 미약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작은,기도의 외침이 나중에는 커다란 실체가 되어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처음에는 바램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실상이 되어 기도자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 화) 찬양콘서트때 2번이나 비를 멈추어 주신 하나님
얼마전 청년회 찬양단원들과 울산 쥬리온백화점 앞에서 찬양 전도를 하러 갔다왔습니다. 작년에는 한마음회관에 가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찬양전도 날짜가 장마철이라서 늘 걱정하는 것이 날씨였습니다. 작년에는 토요일에 날짜를 잡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찬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주일로 연기를 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오전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참담한 마음이었지만 옥상에서 하늘을 처다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하나님 우리에게 좋은 일기를 주셔서 이 어두움의 먹구름이 걷치고 햇빛속에서 찬양을 하게해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왠지 나의 눈의 시야에 아주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춰 눈을 부시게 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좋은 일기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찬양을 하러 나가는데 하늘은 검은 먹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나가서 악기를 전부 셋팅을 하고 난후 찬양을 시작하는 때에는 먹구름이 흰구름으로 바꾸어져 있었고 우리가 찬양을 시작하자 그 구름사이로 밝은 햇빛이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햇빛속에서 찬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이번에도 찬양을 나가는 날 오전에도 검은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했습니다. 역시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옥상에 올라 하늘을 처다보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좋은 일기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후에 찬양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청년회 예배를 드리러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하늘은 검게 굳어 있었습니다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왔을 때 하늘에는 태양이 비취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역사를 책임 져야 할 자들로서, 각 가정과 교회의 부흥과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 민족에게 우리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가 바로 개혁의 시작입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이 바로 기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깨닫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