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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의 감성돔식해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떼어내고, 머리를 제거하고 꼬리를 잘라낸다. 내장을 들어내고 깨끗이 씻어 두 쪽으로 가른다. 보통 감성돔 이백 조각을 마련해놓고서, 찧은 멥쌀 한 되로 밥을 지어 식기를 기다렸다가 소금 두 국자를 넣는다. 여기에 누룩과 엿기름을 곱게 갈아 한 국자씩 골고루 섞어 넣는다. 작은 항아리 안에 먼저 밥을 깔고 다음에 감성돔 조각을 깔아 층층이 가득 채운다. 그리고 대나무 잎으로 그 위를 두껍게 덮고 단단히 봉해서 깨끗한 곳에 둔다. 잘 익기를 기다렸다가 꺼내 먹으면 맛이 매우 좋다. 어해(魚醢) 중에서 으뜸이다."1)
이 글은 조선 후기 문인 김려(金鑢, 1766~1821)가 지은 어류학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 나온다. 책이름에서 '우해'는 당시 '진해현(鎭海縣)'의 별칭인데, 조선시대에 진해라 불리던 지역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가 아니라 마산합포구 진동면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우해'는 '우산(牛山)'이라고도 불렸다.2)
앞의 글은 <감송(魽(魚+松)>이란 항목에 나온다. '감송'은 요사이 말로 감성돔이다. 한자 '감송'은 우해 사람들이 '감성'이라고 부르던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김려는 자신이 본 감성돔이 "금빛 붕어와 비슷하지만 작다"3)4)
감성돔은 등 쪽이 높고 타원형이며, 3월에서 7월 사이에 산란을 한다. 가을이 끝날 즈음이 되면 약 10cm 크기의 치어들이 떼를 지어 다닌다. 감성돔은 시력이 좋고 경계심이 강한 물고기지만 저물녘이면 앞을 잘 보지 못한다. 우해 사람들은 감성돔의 이러한 생태를 잘 알고 있어 해가 질 때 고저암(高翥巖) 어귀에서 대나무 낚시를 던져 감성돔을 잡았다.5)
김려는 감성돔을 묘사하기를 "비늘이 온통 흰색이라서 찬란한 은빛과 같고, 눈은 연홍색이다. 입이 매우 좁고 작아서 미끼를 물면 뱉어낼 수 없기 때문에 낚시꾼은 백 번 중 한 번도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출처: 셔터스톡>
어해는 생선으로 만든 식해(食醢)이다. 조선시대 요리책 중에서 '어해' 만드는 방법은 세조(世祖, 1417~1468) 때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 생몰년 미상)가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처음으로 나온다.6)
전순의는 생선살을 조각낸 다음에 소금을 많이 뿌려서 하루 정도 절였다가 소금기를 씻어내라고 했다. 하지만 김려의 글에는 이런 과정이 나오지 않는다. 지역이나 만드는 사람에 따라 식해에 쓰일 생선살을 소금에 절이기도 하고 꾸덕꾸덕 말리기도 하고 아예 날것을 쓰기도 하니 김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7)
생선 식해는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에 생선을 오래 두고 먹기 위해 고안된 음식이다. 곡물밥 속에 든 전분 성분이 분해되면서 유기산이 생성되어 소금과 더불어 생선의 부패를 억제한다. 전순의는 밥에 소금만 넣으라고 했지만, 김려는 누룩과 엿기름도 한 국자씩 넣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항아리 밑바닥에 먼저 감성돔 살을 깔고 그 위에 밥 · 소금 · 누룩 · 엿기름을 섞은 밥을 깔고 다시 감성돔 살을 까는 식으로 층층이 쌓으라고 했다.
어해 요리법의 마무리에서도 김려와 전순의의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려는 작은 항아리에 가득 채워 넣고 대나무 잎을 두껍게 덮고 단단히 봉한다고 적었다. 이에 비해 전순의는 가득 채우지 말고 상수리 나뭇잎이나 대껍질을 10여 벌 덮고 그 위에 다시 두꺼운 기름종이를 덮은 뒤 주먹만 한 돌로 눌러두라고 했다. 그런 다음 끓여서 식힌 소금물을 가득 부어두라고 했다. 우해 사람들은 현지에서 갓 잡은 감성돔으로 생선 식해를 만들었기 때문에 잘 삭히기 위해 항아리를 꼭 봉했지만, 바다에서 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생선살을 소금에 절이고, 식해를 담은 항아리에 또 다시 소금물을 부어야 발효 과정에서 산패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려는 자신이 먹어본 생선 식해 중에서 이 '감성돔식해'가 으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더욱이 "맛이 매우 좋다"는 뜻의 '감미(甘美)'라는 표현까지 썼다. '쌀밥 · 누룩 · 엿기름'은 숙성되면서 효소로 변한다. 이 효소가 감성돔의 단백질을 분해하여 '감미'를 내는 아미노산을 생성한다. 김려가 말한 '감미'는 바로 생선살의 단백질이 분해된 맛이었을 것이다.
김려는 '볼락'으로 담근 젓갈의 맛도 '감미'라고 했다. 그러나 감성돔식해처럼 만드는 법을 자세하게 적지는 않았다. 김려는 "해마다 거제도 사람들이 볼락을 잡아 젓갈을 담가 수백 항아리씩 배에 싣고 와서 포구에서 판다. 그러고는 생마(生麻)와 바꾸어 간다"8)9)
요사이도 거제도와 통영의 일부 어촌에서는 가을이 되면 볼락젓을 담근다.10) 3~5cm 크기의 작은 볼락이 가을에 많이 잡힌다. 이것을 소금물에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볼락과 소금을 버무려 항아리에 켜켜로 담으면서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리고 맨 위에 소금을 많이 얹어 손으로 꾹꾹 눌러서 돌을 얹고 입구를 비닐로 봉한 다음에 뚜껑을 덮는다. 15일쯤 지난 후에 항아리 속의 젓국물을 밭쳐서 냄비에 넣고 끓여 식힌 후 다시 항아리에 붓고 꾹꾹 눌러서 봉해둔다. 두세 번 정도를 똑같은 방법대로 하고 돌을 얹고 밀봉하여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서 익힌다. 김려는 볼락젓을 먹어보니 맛이 "약간 짜지만 쌀엿처럼 달다"11)
김려는 볼락을 한자로 '보라어(甫魚)'라고 적었다. "모양은 호서(湖西, 지금의 충청남도) 지방에서 나오는 황석어와 비슷하지만 아주 작고, 색은 엷은 자주색이다. 이곳 사람들은 보락(甫鮥) 혹은 볼락어(乶犖魚)라고 부른다"고 했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의 '보라어' 항목.<출처: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김려가 '우해'에서 맛본 젓갈은 또 있다. 바로 '회회()'라는 생선이다. 한자로 '민어 회()' 자를 연이어 쓴 이름을 보고서 '민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회회'는 민어와 다른 어종이다. "모양이 회충과 비슷한데, 흰색이다. 양쪽 끝으로 모두 다니며, 머리가 없다. 눈은 지렁이 같으며, 가늘고 길다"12)13)14)
한자로 '삼차(鰺)'라고 적은 삼치 역시 "젓갈을 담그면 맛이 매우 좋다"15))'이라 적고, "맛은 담백하고도 달아서 젓갈을 담그는 것이 가장 좋다"16)固城,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의 어촌 아낙이 작은 배에 매가리젓을 싣고 와서 성(城)에 있는 시장에서 판다"17)錢)을 부르겠지"18)
김려는 1766년(영조 42) 음력 3월 13일에 서울 삼청동에서 부친 김재칠(金載七)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 선조(宣祖, 1552~1608)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7대손이다. 이런 집안 배경만 보면 김려가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었을 것 같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증조부 김상정(金相汀)이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년 왕통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중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20) 김려의 조부는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했지만, 부친은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여 현감을 지냈는데 능력 있는 지방관으로 유명했다. 이때부터 집안 사정이 좋아져서 어릴 적 김려는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총명하고 문장에도 재능이 있었던 김려는 15세 때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연륜과 학식을 갖춘 선배들이 같은 또래의 예로 교유하였으며 벼슬아치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21)22) 그즈음에 이옥(李鈺, 1760~1815)과 강이천(姜彛天, 1768~1801)도 관학유생으로 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했다. 이때 이들은 규범과 권위에 갇혀 있던 고문(古文)에 대한 반발로 명말 청초에 일어난 짧고 강렬한 실험적인 문체인 소품(小品)에 빠졌다.
문제는 김려가 강이천은 물론이고 동생 김선(金, 1772~1833)과 김신국(金信國) · 김건순(金建淳, 1776~1801) 등을 자주 만나 문체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생겼다.23) 1797년 음력 8월 김신국 · 김건순 · 강이천 등이 재동(齋洞)의 김려 집에서 문체를 토론한다고 두 차례나 모였다. 김건순은 이 모임 뒤에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를 만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강이천에게 전했다. 강이천이 다시 이국인(異國人)이 서울에 불을 지른다는 말을 김신국(金信國)에게 퍼뜨렸고, 김신국은 다시 사촌형인 김정국(金正國)에게 전했다. 같은 해 음력 11월 초 김정국이 우의정에게 이 말을 전했으나 정조가 판을 벌이지 말라 해서 사건이 무마되는 듯했다. 그런데 강이천이 자신이 역모로 고발당할까봐 두려워 김신국 · 김건순 · 김선, 그리고 김려도 함께했다고 당시 대호군(大護軍) 이병정(李秉鼎, 1742~1804)에게 알렸다.24)
결국 이 일로 김려는 1797년 음력 11월 12일 조선의 최북단인 함경도 경원부(慶源府, 지금의 함경북도 경원)로 유배를 당했다.25) 그런데 김려가 경원부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행히도 개마고원 입구에 있는 부령(富寧, 지금의 함경북도 부령)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이곳에서 김려는 현지 사람들과 사귀면서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01년 음력 3월 초에 주문모가 체포되면서 김려는 다시 서울로 불려와 추국(推鞫)을 당하는 처지에 몰렸다. 추국 결과 김려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를 고깝게 여긴 조정에서는 음력 4월 20일 이번에는 남쪽 끝 '우해'로 정배(定配)를 보냈다.26)
그 당시 '정배'는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도록 한 형벌이다. 그러니 김려는 우해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려는 우해로 정배되어 와서 율티리에 있는 소금 굽는 사람 이일대(李日大)의 집에 세 들어 살았다.27)28)
그 바다에서 김려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았다. 그리하여 《우해이어보》를 집필하게 되었고, 그는 그 동기를 '서문'에 이렇게 밝혀놓았다. "무릇 어류 가운데 기괴하고도 야릇하여 놀랄 만한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바다가 품고 있는 것이 땅이 품고 있는 것보다 넓고 해양 생물의 다양함이 육상 생물보다 더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29)30)31)
그렇다고 김려는 자신이 본 모든 생선을 《우해이어보》에 기록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황어〔鯪〕 · 잉어〔鯉〕 · 자가사리〔鱨〕 · 상어〔鯊〕 · 방어〔魴〕 · 연어〔鱮〕 · 가물치〔鮦〕 · 오징어〔鰂〕처럼,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 해마(海馬, 바다코끼리) · 해우(海牛, 바다소) · 해구(海狗, 물개) · 해저(海猪, 돌고래) · 해양(海羊, 바다달팽이)처럼 어류와 관계없는 것들, 자잘하고 보잘것없어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비록 현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방언과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빼고 쓰지 않았다"32)異魚)', 즉 '기이한 생선'이란 글자를 넣었던 것이다.
《우해이어보》에는 생선 53종, 갑각류 8종, 패류 11종 등 모두 72종의 어패류가 나온다. 그중에는 요사이의 수산학자들조차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생선도 제법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회회'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우해'에서 본 '기이한 생선'만을 채록한 것은 아니다. 정어리 · 삼치 · 가오리 · 청어 · 뱅어 · 가자미 등은 당시 서울 사람들도 알고 있던 생선이다.
김려는 생선 이름을 적을 때 청어처럼 널리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적었지만, '우해'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한자가 아닌 경우 그 발음대로 한자로 적거나 자신이 한자로 이름을 짓기도 했다. 이름 다음에는 그 생선의 형태와 습성, 잡는 방법을 썼다. 그중 일부 생선에 대해서는 요리법을 상세하게 적고 자신이 맛본 느낌도 적었다.
《우해이어보》의 또 다른 특징은 "나는 <우산잡곡>을 지었다(余牛山雜曲曰)"라며 39수의 칠언절구를 특정 어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실었다는 점이다. < 우산잡곡>의 한시에는 어로 작업의 현장, 어촌의 풍광과 생활, 수산물의 유통 모습, 그리고 아낙은 물론이고 노파 · 처녀 · 기생 등 '우해'와 인근 어촌에 살던 여인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33)
어촌 아낙들이 새벽녘 포구에서 광주리와 항아리에 게 · 새우 · 소금 등을 그득 채워 행상을 떠나고 있다. 김홍도, <어물 장수> 부분, 《행려풍속도병》, 1778년, 견본담채, 42.7x90.9cm.<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우산잡곡> 중에는 이런 한시도 있다. "진해〔우해〕 남문 밖 두 갈래 거리, 거리 입구 초가집 처마에 술집 표지 꽂혔네. 새로 온 붉은 연지의 기생 가냘프고 여린 손 희기만 한데, 옻칠 소반에 큰 게살 포(脯)34)35) 당시 '우해'는 현감이 머문 읍치(邑治)였다. 관아를 둘러싼 성곽이 있고, 남문 밖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이 근처에 술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술꾼이 오자 새로 온 기생은 미리 만들어둔 '큰 게살 포'를 안주로 내왔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진동면 일대에 있었던 진해현의 지도. 읍치의 남문 밖 삼거리 근처에 술집이 있었을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 중 진해현 부분.<출처: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한시는 《우해이어보》의 부록에 실려 있다. 김려는 책의 제목에 '어보'를 붙였기 때문에 게 · 조개 · 소라 · 전복 따위의 패류(貝類)를 책의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오는 '자해(紫蟹)' 항목에 앞의 한시가 들어 있다. 김려는 '자해'를 두고 "온몸이 붉은색이고 크기는 장독만 하다. 뱃속에 창자는 없고, 온통 물고기 · 새우 · 소라 · 고동 · 모래뿐이다. 껍질 속에는 7~8말이나 들어갈 수 있고, 넓적다리와 집게다리는 살이 꽉 찼고 맛도 달다"36)
'자해'는 그 이름으로만 보면 '홍게'다. 그런데 다리에 살이 꽉 찼다고 했으니 '대게'일 가능성이 많다. 대게는 큰 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리가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매우 큰 대게는 김려의 표현처럼 장독 뚜껑만 한 것도 있다. 김려보다 거의 200년 앞서 살았던 허균(許筠, 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게는 삼척에서 나는 것이 강아지만 하여 그 다리가 큰 대[竹]만 하다. 맛이 달고 포로 만들어 먹어도 역시 좋다"37)
요사이 사람들은 대게를 통째로 찜통에 넣고 쪄서 먹는 데 비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포로 만들어 먹었던 모양이다. 김려 역시 "이곳 사람들은 포를 만드는데, 색깔이 선홍빛이라 보기 좋고, 맛도 달콤하고 부드러운데, 정말로 진귀한 음식이다"38)魚脯)'라고 불렀다. '어포'는 민어 · 농어 · 숭어처럼 주로 큰 생선으로 만들었다.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뒤 살을 양쪽으로 펼친 다음 술이나 식초 혹은 양념에 절였다가 말리거나,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말리면 된다. 그렇다면 대게 어포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김려가 게살 포 만드는 방법을 채록해놓지 않아서 그 지역에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문헌에서 요리법을 찾아볼 수 있다. 1854년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책 《윤씨음식법》에 대게 어포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다.39) 이 책의 저자는 이 요리법의 제목을 당시의 한글로 포'라고 적고, 옆에 다시 한글로 '게포육'이라고 썼다. '게포육'은 게의 살로 만든 포육(脯肉)이다. 따라서 '포'는 게의 포라는 의미의 '해포(蟹脯)'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해포는 서울에서 만들 것이 못 되어 해변 마을에서 하나니, 한 쪽〔片〕은 주홍 같고 한 쪽은 백설 같으니 두드려 반듯하게 베서〔잘라〕 넣되 선〔살〕이 부푸는 일 없이 부서지기 쉬우니 (물에) 축여 두드리거라"고 했다. 이 요리법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갓 잡은 싱싱한 대게의 다리를 두드려 깨서 조심스럽게 살을 통째로 꺼낸다. 혹시 잘못하여 통째로 꺼낸 살이 부서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게살에 물을 약간 축여서 두드리면 부서지지 않는다. 이렇게 두드린 다음에 "반건(半乾, 반쯤 말림)이 좋고"라고 적었다. 반쯤 말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윤씨음식법》의 저자는 "맛이 극히 아름다고 빛이 주황색 같아 황홀하니라"고 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김려 역시 "색깔이 선홍빛이라 보기 좋고, 맛도 달콤하고 부드러운데, 정말로 진귀한 음식이다"라고 했으니, 마치 두 사람이 함께 '해포'를 먹고 그 느낌을 적은 듯 비슷하다. 게의 다리 살은 반쯤 말려도 여전히 바닷물이 약간 배어 있어 짭짤하다. 여기에 달면서도 부드러우니 그 맛이 황홀하여 진품이라고 할 만하지 않았을까?
김려는 1801년 음력 4월에 '우해'로 유배 와서 처음 한동안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하였다. 특히 바닷가에 살면서 습한 기후와 물이 맞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계량(季良) 김선신(金善臣, 1775~1855?)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려는 그 사정을 이렇게 밝혀놓았다.
"내가 처음 이곳 영남의 변방에 왔을 때 율티리 촌민 중 소금 굽는 집을 빌려 살았네. 바닷가에 가까이 있다 보니 땅이 낮고 습하며 샘물이 흐려 반년도 채 되기 전에 사지를 잘 놀리지 못하고 다리가 무거운 병에 걸려 밤낮으로 신음소리를 냈네. 본래부터 피를 토하는 병을 앓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져 언제나 목구멍에서는 비린내가 치밀어 오르고, 나는 새가 날개를 치는 것처럼 휘휘 소리를 내곤 하다가 걸핏하면 간에서인지 허파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새빨간 핏덩이를 십여 번이나 뱉곤 했네. 이대로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성안으로 거처를 옮겼네. 비록 바닷바람에서 오는 독기가 좀 줄었지만 저자거리가 가까워서 분주스럽고 비좁기만 하네."40)
좀 더 상세한 김려의 질병은 《우해이어보》의 '문절어(文魚)' 항목에 나온다. "내가 우환(1801년부터 시작된 유배)을 만난 이후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드디어 조질(燥疾)이 생겼다"41)五臟)의 체액이 모두 고갈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몸의 진액이 부족하여 열이 나고 입 안이 마르고 갈증이 나며 피부가 거칠어지고 살과 근육이 위축되며 몸이 말라가는 증세가 '조질'이다. 특히 수면 부족이 이런 증세를 악화시킨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절어를 많이 먹으면 잠을 잘 잔다."42)
여기에서 말하는 '문절어'는 지금 말로 하면 '문절망둑'이다. 문절망둑은 농어목 망둑엇과의 물고기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무리를 지어서 산다. 김려 역시 문절망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생김새는 쏘가리와 비슷하나 조금 작다. 양쪽 아가미에 살집이 있고, 아가미 옆 지느러미가 개의 젖 같다. 몸체는 겉과 속이 훤하게 보이고 투명하여 마치 긴 회색 수염 같다. 주둥이 주위와 광대뼈는 약간 붉은 황색이다. 등에는 검은 점이 있는데, 먹을 입으로 뿜은 것처럼 아주 작아서 마치 겨자를 뿌려놓은 것 같다."43)
문절망둑의 생태에 대해서도 김려는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해변의 수심이 얕고 모래가 많은 곳에 있다. 밤에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는데, 겹겹이 있는 모습이 마치 구슬을 꿴 것 같다. 머리는 물 밖으로 내고, 몸은 물속에 넣은 채 잠을 잔다. 습성이 잠자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잠이 깊이 들면 사람이 손으로 잡아도 알지 못한다."44)
'우해' 사람들은 이런 습성을 이용하여 대나무로 만든 통발〔大桶〕로 문절망둑을 잡았다. 통발의 모양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으며 뚜껑이 없고 중간쯤에 긴 자루의 손잡이가 연결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솔가지 횃불을 들고 문절망둑이 모인 곳으로 가서 반쯤 물에 잠기도록 통발을 덮어둔다. 그러면 문절망둑이 통발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통발 위의 구멍으로 손을 넣어서 문절망둑을 잡았다.45)
김려는 "세 들어 사는 주인에게 부탁해서 매일 문절어를 사오게 해서 어떤 때는 죽으로 먹고 어떤 때는 회로 먹으니 매우 효험이 있었다. 이 생선의 성질이 차서 마음의 화를 누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폐를 윤기 있게 해 준다"46)47)
1806년 음력 10월, 김려는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났다. 김려의 아들 김유악(金維岳)이 아버지 김려와 숙부 김선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마침내 조정에서는 같은 해 음력 8월 21일에 김려를 방면하였다.48)
집과 밭뿐이 아니었다. 그가 그동안 지은 글들도 그랬다. "부령에서 지은 것은 의금부 관원들에게 빼앗겨 남아 있지 않고, 진해에서 지은 것은 내가 게을러서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들이 모두 지혜롭지 못해서 잃어버린 것이 열편 중에 여덟아홉이나 되었다"49)譜)를 찾게 되어 조카인 학연(鶴淵)에게 깨끗한 종이에 잘 베껴 쓰게"50)
《우해이어보》는 해양 생물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긴 하지만 백과사전식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한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해' 앞바다의 신기한 생선과 어촌 사람들의 삶, 그리고 생선 요리의 맛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놓은 조선 최초의 바닷물고기 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그만큼 그의 글에 담긴 생선은 싱싱하고, 음식은 맛있다.
김려(金鑢), 《담정유고(藫庭遺藁)》 제8권,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감송(魽〔魚+松〕) : 刮鱗揃鬣, 去頭截尾. 瀉下膓膟瀞洗, 剖兩片, 凡魽(魚+松)二百片. 炊秔米白(殹+金)一升, 候冷入塩二勺, 法麴麥芽細硏各一勺拌均. 用小缸內, 先舖飯, 次舖魚片, 層層塡滿. 以竹葉厚盖堅封, 放凈處. 待極熟出食甘美, 爲魚醢第一. 이후의 번역문은 김려 지음, 박준원 옮김, 《우해이어보: 한국 최초의 어보》, 다운샘, 2004; 최헌섭 · 박태성 역), 《최초의 물고기 이야기: 신우해이어보》, 경상대학교출판부, 2017을 참조하였다.
당시 지명에 근거하여 '진해'라고 적어야 하지만 지금의 진해와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이하의 글에서는 '우해'라고 한다.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감송 : 似金鯽而小.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감송 : 秋後土人捕魽(魚+松).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감송 : 余牛山雜曲曰, 靑楓葉赤露華濃, 高翥巖頭水正舂, 斜日照波魚善食, 彩竿飛上稬魽(魚+松).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어해(魚醢)' : 凢魚大則作片, 多着塩, 熱時, 則經宿出之, 洗去塩. 板上間草排置, 又以板盖之, 上鎮大石去水. 白米作飯, 令熟滑, 待冷和塩, 醎淡適中. 瓮内先布飯, 置魚相間, 以手堅壓. 令瓮内未滿一斗許. 以乹櫟葉或竹皮, 上布十餘件, 以厚油紙布之, 上以拳石鎮之. 其上, 塩水沸湯, 待冷滿注, 置陰處. 用時, 勿使水入醢. 先去水, 盡出後, 出用. 若欲速用, 則飯米二升, 真末一合, 和用為可. 終始勿干生水氣.
가자미식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생선살을 15% 정도의 염도에 절였을 때 유리아미노산이 가장 많이 검출되어 맛이 좋았다는 보고가 있다(정해숙 · 이수학 · 우강융, <함경도 지방의 전통 가자미식해의 소금 첨가 수준에 따른 숙성 중 맛 성분의 변화에 관한 연구>, 《한국식품과학회지》 제24권 제1호, 1992, 3쪽).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보라어(甫魚) : 每歲, 巨濟府人, 捕甫爲鮓, 船運數百罋, 來海口販賣, 易生麻而去.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보라어 : 鎭海人, 往往網得, 然不甚多. (중략) 盖巨濟多此魚.
농촌진흥청(편), 《전통지식 모음집: 생활문화 편》, 농촌진흥청, 1997, 426쪽.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보라어 : 鮓味微而甘如米餳.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회회() : 形似蟲色白. 兩端皆行無頭. 眼如蚯細長.
2011년 6월 경상남도 수산자원연구소에서는 '회회'를 붕장어의 새끼라고 발표했다(https://blog.naver.com/telopere/120163086173). 충청남도 서해안에서 많이 나는 '실치'가 '회회'라는 주장도 있다.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회회 : 島人以爲鮓葅甘美.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삼치(鰺) : 爲鮓甚美.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매갈() : 味澹甘, 最宜爲鮓.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매갈 : 每歲, 固城漁村女子, 乘小船, 載鮓來, 賣城市間.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매갈 : 余牛山雜曲曰, 固城漁婦慣撑船, 柁開頭燕子翩, 梅渴酸葅三十, 親當呼價二千錢.
강명관, <담정 김려 연구(1): 생애와 문체 문제를 중심>, 《사대 논문집》 제9집, 1984, 331쪽.
김려, 《담정유고》 제12권, 《보유집(補遺集)》, <답이익지서(答李益之書)> : 洎于王考, 甫及髫齔. 又遭外氏辛壬之變, 禍延三族, 靡有孑遺. (중략) 流落鄕土.
김기수(金綺秀), <담정유고발(藫庭遺藁跋)> : 十五游杏庭, 長年老宿, 皆折輩行友之, 名聲藉藉衿紳間.
《숭정3임자식년사마방목(崇禎三壬子式年司馬榜目)》, <생원시(生員試)> : 2등(二等) 25인(二十五人).
강경훈, <중암(重菴) 강이천(姜彛天) 문학 연구: 18세기 근기(近畿) 남인(南人), 소북문단(小北文壇) 전개와 관련하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1. 42~44쪽.
《정조실록》 정조 21년(1797) 11월 11일 3번째 기사.
《정조실록》 정조 21년(1797) 11월 12일 2번째 기사.
《순조실록》 순조 1년(1801년) 4월 20일 4번째 기사.
김려, 《담정유고》 제6권, 《사유악부(思牖樂府) 하(下)》, <문여하소사(問汝何所思)> : (주석) 鎭海僦居主人塩戶李日大, 家前有小塘, 每夏蓮花盛開. (진해의 셋집 주인은 소금 굽는 사람 이일대로, 그 집 앞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하였다.)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서문(序文) : 僦居主人家, 有小漁艇. 童子年纔十一二, 頗識幾字. 每朝荷短笭箵, 持一釣竿, 令童子奉烟茶爐具, 掉艇而出.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서문 : 夫魚之詭奇靈恠可驚可愕者, 不可彈數. 始知海之所包, 廣於陸之所包, 而海蟲之多, 過於陸蟲也.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서문 : 遂於暇日, 漫筆布寫. 其形色性味之可記者, 並加採錄.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서문 : 癸亥季秋小晦, 寒臯纍子書于僦舍之雨篠軒.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서문 : 若夫鯪鯉鱨鯊魴鱮鮦鰂人所共知者, 與海馬海牛海狗猪羊之與魚族不干者, 及其細瑣鄙猥不可名狀, 且雖有方名而無意義可解, 侏難曉者, 皆闕而不書.
박준원, <『우해이어보』 소재 「우산잡곡(牛山雜曲)」 연구>, 《동양한문학연구》 제16집, 2002; 한정호, <김려의 <우산잡곡> 연구>, 《영주어문》 제35집, 2017.
김려의 한시 원문에는 기생이 내온 음식의 이름을 '거오해(巨膎)'라고 적어놓았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의하면, 오()는 게의 큰 다리, 해(膎)는 말린 고기〔乾肉〕를 가리킨다고 했다. 따라서 '거오해'는 대게의 다리 살로 만든 포이다.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자하(紫蠏) : 鎭南門外兩丫街, 街口茅簷揷酒牌, 新紅娥纖手白, 髹盤托出巨膎.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부(附) 해(蟹)(자해紫蠏) : 有一種名紫蟹, 渾身紫赤色, 大如罋. 腹中無膓, 都是魚蝦螺及沙石. 匡可容七八, 其股及肉肥甘.
허균(許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26권, 설부(說部) 5, <도문대작(屠門大嚼)> : 蟹. 三陟者大如小狗, 其足如大竹. 味甘, 脯而食之亦好.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부 해(자해) : 土人以爲脯, 色鮮紅可愛, 味甘, 眞珍品也.
저자 미상, 《윤씨음식법》 '포(게포육) : 포 셔울셔 들거시 모되여 변읍의셔 니 편은 쥬홍 고 편은 셜 흐니 두려 반듯게 버혀 너흐되 션이 브프 일 업싀 부서지기 쉬오니 츄긔야 두드리거라 만일 제 곳의셔 만나면 반건이 됴코 거 지져 국을 나 을 나 거믄 쟝의 구으나 마시 극히 아다 빗치 쥬황 여 황홀니라.
김려, 《담정유고》 제12권, 《보유집》, <답김계량서(答金季良書)> : 僕初到嶺徼, 僦栗峴村民田塩家舍. 薄處海口, 地性卑溼, 泉脈滑濁, 未及半載, 得癱瘓重膇之症, 昕夕叫囈. 素患嘔血, 日益橫決, 每喉嚨間, 腥臭衝突, 如飛鳥翺翔, 汩有聲, 輒咯唾鮮血若肝肺者十數片. 以玆未能久居, 移入城中. 雖瘴毒稍歇, 近市湫隘紛囂.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文魚) : 余自遭患以來, 長歲無睡, 遂成燥疾.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 : 土人言多食文則善睡.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 : 狀似鱖魚而稍小. 兩腮有肉, 鬣如犬乳. 形體表裏通明瀅徹, 如灰色曼胡. 吻傍及顴, 微紅而黃. 背有黑點如噀墨, 而甚細如撒芥.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 : 在海邊水淺沙肥處. 夜必成隊纍纍如貫珠然. 頭向水外, 身向水內而睡. 性甚愛睡, 睡熟則人以手摸之而不知.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 : 故土人編竹爲大桶. 桶上尖下濶, 無盖底, 中半爲長柄. 夜深則持松明火, 尋沙際魚所往來聚會之地, 以桶揜覆之. 桶半入水中, 半出沙上. 則魚盡在桶內, 從桶上孔, 以手探而獲之.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문절어 : 囑僦舍主人, 日買文, 或糝食或鱻食, 頗有效. 盖此魚性凉, 能伏心火, 且能肺也.
김려, 《담정유고》 제12권, 《보유집》, <답김계량서> : 聞縣北十里餘, 有義林僧寺. 洞壑幽邃, 南庵井水甘洌. (중략) 遂借住宗上人版頭方丈. 燒筍煑蕨, 喫澹度日, 身計益穩, 病勢益損.
《순조실록》 순조 6년(1806) 8월 21일 1번째 기사.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제우해이어보권후(題牛海異魚譜卷後) : 其在富寧者, 爲金吾隷所掠去無遺, 其在鎭海者, 因懶惰不能收拾. 豚犬輩皆不慧閪失, 過十之八九.
김려, 《담정유고》 제8권, 《우해이어보》, 제우해이어보권후 : 近於篋中得此譜, 使侄子鶴淵謄寫瀞紙爲一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