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는 사진가가 세상을 보는 시선, 즉 ‘보는 방식’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보는 방식’에 의해 사진가의 의도가 구현 되는 것 같습니다.
2018년 4월,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자신들의 편향성을 고백하고 반성합니다. 그들의 편향성은 대상을 보는 방식의 문제에서 비롯 된 것입니다. 그 문제는 사진가의 판단, 의견, 신념 보다는 그들의 습관이나 사진분야 오랜 동안 베어 있는 관습이 ‘보는 방식’에 무의적으로 개입 됐기 때문이라는 군요.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자기반성은 그들의 사진이 표현한 인종차별, 고귀한 야만인, 문명과 비문명, 행복한나체족 사냥꾼 등이, 모든 유형의 관습적 표현을 동원한 편향적 시선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대상을 환상과 신화적으로 보는 것도 편향된 시선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바스티앙 살가두의 책 ‘창세기’에 수록된 브라질 원주민 조에족 사진이, 보도 사진가 그룹 ‘메그넘 포토스’의 회원인 스튜어트 프랭크린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습니다.
( 저자는 그 사진을 싣지 않았다. 아마도 저작권 침해 문제를 의식한 듯하다. 서울신문과 중앙일보는 이 사진을 소개 했다. google에서 이미지 복사가 허용된 것으로 봐서는 여기에 실어도 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
“ Genesis” 라는 title로 한국에서도 그의 전시회가 있었더군요. 검색을 해보니 온통 그에 대한 찬사로 가득했습니다. 누구로부터는 찬사를 받은 사진이 누구로부터는 비판을 받는 혼란을 감당하기 어렵군요.
사진은 살가두 특유의 톤으로 조에족의 나체와 비문명 상태를 현실과 달리 아름답게 묘사 하고 있지만, 선입견으로 세상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본질주의에 머무른 또 하나의 클리세라고 비판 받습니다. 클리셰 ? 나중에 유식한 체 할 때 써먹으려고 클리세라는 용어를 찾아 봤습니다. 클리셰는 남용의 결과, 의도된 힘이나 새로움이 없어진 진부한 표현과 개념이라고 합니다.
처음 볼 때는 감탄했다가, 편협하고 상투적인 사진이라 하여 자세히 뜯어 보니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군요. 아마도, 비판에 동조하도록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뜯어봤던 것 같습니다. 플랭크린과 공모한 샘입니다. 주재 넘게도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위 사진은 조에족을 향한 사진가의 환상과 신화가 개입됐다고 합니다. 저자는 그 환상이 현재의 욕망으로부터 상상해 낸 것이라고 하는 군요. 하긴 ‘창세기’라는 title이 신화적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긴 합니다만…하여튼, 욕망은 뭔가를 항상 굴절 시키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진솔하고 가식 없는 생활을 기록한다며 쪽방촌으로 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선한 가난’을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살가두의 조에족 사진이 상투적으로 표현한 신화, 즉 그의 편향된 시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편향된 시선이 담긴 사진은 보는 이에게 잘못된 인식을 전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조에족의 아름다운 사진은 그들이 태초의 순수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곳의 NGO 단체들은 그 와 반대 되는 그들의 삶을 목격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쪽방촌에 질솔함과 가식없음이 정말 있을까요 ? 아마도 그것이 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 수잔 골드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진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조심해야 한다 “
하여, 사진가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차별,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등 을 갖게 하는 사진을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결론입니다.
클리셰가 묻지 않은 사진, 편향적이지 않는 사진… 에고, 사진 참 어렵습니다. ㅎ
사진을 배우면서 무의적으로 스며든 클리셰와 관습, 그리고 환상을 어쩌란 말입니까 ? 라는 저의 절규 섞인 질문에 저자는 자신의 사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끊임없이 되돌아 봐야 한다고 답합니다. 사진이 어려운 건 확실하군요.
첫댓글 사진.... 들어갈수록 어렵네요.
정보 공유 감사합니다.
클리셰란 용어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남다른 글을 쓰는 님은
확실히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