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사욕
사람들아, 너희 자신에서 너희 비참의 구제법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너희들의 모든 빛은 너희들 안에서는 진리도 선(善)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그대들에게 이를 약속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철학자들은 무엇이 그대들의 참된 선이며 어떤 것이 그대들의 참다운 상태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지도 못한 그대들의 불행에 대한 치료법을 어떻게 마련하여 주었겠는가? 그대들의 중요한 병은 그대들을 신(神)에게서 잡아떼는 교만(驕慢)이요, 그대들을 이 세상에 붙잡아 매놓는 사욕(私慾)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한일이라고는 이 병중의 적어도 한 가지를 키워주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신(神)과 결합한다면 그것은 신의 은총(恩寵)으로 되는 것이지 그대들의 본성(本性)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들이 겸손하게 된다면 참회(懺悔)로 되는 것이지 본성으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대들의 감정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그대들 자신을 살펴보라. 그렇게도 많은 모순이 단일주체(單一主體)인 그대 속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파스칼이 그의 저서 ‘빵세(PENSEES)’에서 밝힌 그의 인간에 대한 견해이다.
생각건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인류의 역사상 수천 년 이상 살아남은 옛 가르침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찾는 길 밖에는 없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의 교만과 인간의 사욕이 인간을 망치는 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삼가 모든 탐심(貪心)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장 15절).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사람이 몸을 수양하는 데는 언제나 공경(恭敬)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용모(容貌)는 언제나 도의(道義)를 생각하는 것처럼 엄숙해야하고, 언어는 부드럽고 명확해야한다. 이리하면 몸에 덕(德)이 쌓아져 사람들과 함께함에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傲慢)한 미음이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욕심에 따라 마음대로 하려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뜻을 만족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즐거움을 다하려 해서도 안 된다.[곡례왈(曲禮曰) 무불경(毋不敬) 엄약사(儼若思) 안정사(安定辭) 안민재(安民哉). 오불가장(敖不可長) 욕불가종(欲不可從) 지불가만(志不可滿) 낙불가극(樂不可極).]”<예기(禮記)>.
교만한 마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욕심, 개인의 사사로운 욕구(欲求)를 충족시키려는 마음, 개인의 환락(歡樂)을 다하려는 것들은 인도(人道)에 벗어난 그릇된 생각이니, 이와 같은 욕구들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패망(敗亡)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따라오게 되니 신중(愼重)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자의 인생관은 먼저 자신을 닦아 인격을 단련하고 나아가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데 있으니, 이런 그의 철학의 집약이 바로 ‘인(仁)’이다. 이 ‘인(仁)’ 대해 그의 제자 안연(顔淵)이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자기 사욕(私慾)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克己復禮爲仁]. 하루라도 자기 사욕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가 그의 인(仁)을 인정할 것이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논어)” 하였다.
2024. 6. 3.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