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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를 제압하는 왕의 산세다. 정선 가리왕산(1,562m)은 이름처럼 높고 커다란 제왕의 산세를 갖추었다.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중왕산(1,381m), 중봉(1,343m), 하봉(1,381m) 등 많은 봉우리와 계곡을 거느려 신하와 장수를 거느린 제왕마냥 위세가 당당하다. 거대한 육산이지만 둥글둥글한 산세는 평범하다. 기이한 암봉이나 눈길을 끄는 독특한 면모는 없다. 그러나 아름드리 원시림과 깊은 계곡의 자연미가 탁월하다. 특히 정상부의 넓은 초원지대에서 펼쳐지는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며 이곳에서 맞는 일출이 장엄하기로 알려져 있다. 일출이 좋은 만큼 달맞이도 좋다. 정상의 널찍한 헬기장은 여러 팀이 비박해도 여유가 있다.
가리왕산은 갈왕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동해안의 옛 부족국가 맥국의 갈왕이 피신해 숨어든 산이라 하여 갈왕산이라 불렸으며, 지금에 이르러 가리왕산이 되었다고 한다. 산 북쪽 골짜기의 장전리에는 ‘대궐터’ 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갈왕이 대궐을 삼았던 곳이라 한다. 전설이 사뭇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도 이 산이 산중에서 몇 년쯤은 숨어살 수 있겠다 싶게 크고 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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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리왕산 정상. 비박 중 악천후가 닥쳐와 소형 텐트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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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은 산나물과 약초 천국이기도 하다. 곰취는 물론 참나물, 산작약, 당귀, 산마늘, 더덕, 산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가리왕산 산삼은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세운 산삼봉표석(도유형문화재 제113호)이 가리왕산과 중왕산 사이 마항치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국가에서 산삼 주산지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채삼은 물론 출입을 금지시키려고 설치한 봉표다.
규모에 비해 산행코스는 비교적 단순하게 나 있다. 특히 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휴양림이 접근과 숙박이 용이한 데다 차량을 이용한 등산객들이 중봉을 통해 정상을 올라 어은골로 하산하는 원점회귀형 코스를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노는 용탄천을 거슬러 올라 가리왕산자연휴양림에서도 가장 위쪽에 있는 산림휴양관에서 비박 장비를 챙겨 산으로 든다. 산객을 맞는 건 투명한 물빛이 보기만 해도 시원한 어은골이다. 골에는 이무기바위라 부르는 길이 10m가량의 길쭉한 바위가 있는데 계곡의 물고기들이 이 바위를 두려워해 숨었다고 해서 어은(魚隱)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전한다. 한편으로는 물이 너무 차가워 얼음골이 변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물고기가 숨어드는 이끼 좋은 계곡
천일굴(千日窟)은 좁지만 은근히 깊어 보이는 굴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냉랭한 한기가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땀을 식힌다. 굴만 넓었다면 꽤 괜찮은 여름 명소가 되었겠다. 안내판에는 말을 삼가고 1,000일 동안 좌선 기도하면 득도할 수 있다는 수행길지로 옛날에는 많은 구도자가 찾아 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90년에 한 젊은 여인이 이곳에서 3년을 수도하고 떠났다고 한다.
괴암정(怪巖亭)을 지나 본격적으로 물고기가 숨어드는 골 깊숙한 데로 든다. 길은 계곡을 왼편으로 오르며 골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다가 반대편으로 건넌다. 오를수록 어은골은 차고 아기자기하다. 골을 메운 바위는 이끼가 덮여 신비의 원시림 같은 분위기를 더한다. 이끼는 단순한 초록이 아닌 형광빛을 내는 것도 있고 수수한 짙은 초록도 있다. 같은 색깔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 그늘이지만 무더운 탓에 옷은 땀으로 흥건하다. 물은 계곡을 떠나기 싫을 정도로 차가워 세수 한 번이면 더위가 가신다.
어은골은 가리왕산 산정을 가는 이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길이지만 풀과 숲이 울창해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울 정도로 좁다. 거대한 원시림의 산에 난 작은 통로에 불과하다.
점점 가팔라오는 길을 한동안 올라서자 임도다. 오랜만에 만나는 너른 휴식터라 반갑다. 임도엔 산불진화용 물탱크와 이정표가 있다. 물탱크에 사다리를 놓아 2층을 임시 대피소로 만든 게 독특하다.
임도를 지나면서부터는 길은 급격히 가팔라진다. 좁은 길이라 볼 건 없으나 흙과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디디며 올라야 하기에 지루하진 않다. 상천암이라 적힌 표지판 뒤에 바위가 있다. 숲에 뒤덮여 이름을 따로 붙일 정도로 잘생기거나 조망이 있는 바위는 아니다. 30분이 넘어도 길은 쉽게 쉼터나 완만한 데를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인다. 갈왕을 뵈러 가는 길은 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내의 오르막이다. 한 시간을 넘게 걷자 완만해진다 싶더니 간만에 하늘이 보인다. 무덤가다. 누가 이리 높은 데 묘를 썼나 싶은 엉뚱한 묘 몇 기가 이어진다. 완만해지는 길에 신갈나무숲이 있다. 나무 사이로 여유로운 틈이 있고 낮은 풀로 메워져 산소 같은 바람이 통한다.
주능선 삼거리, 이정표엔 ‘마항치 삼거리’라 적혀 있다. 마항치는 중왕산 사이의 안부이므로 마항치로 이어진 삼거리란 뜻일 것이다. 능선도 온갖 풀과 나무로 빽빽하긴 마찬가지다. 산행 시작 후 3시간이 넘도록 시야가 트이는 데 없이 좁은 오르막만 이어지니 답답하다. 게다가 안개가 자욱한 게 날씨도 심상찮다. 생각 없이 산에 몸을 맡겨 키 큰 풀숲을 뚫고 정상으로 향한다. 헬기장이 있으나 풀이 높아 알아채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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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봉 정상. 매력적인 신갈나무숲과 안개가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