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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일본 야스쿠니(靖国やすくに) 신사
야스쿠니(靖国やすくに)의 뜻은 나라를 안정케 한다라는 뜻이다.
한일관계 최대 쟁점 중 하나.
도쿄 치요다에 위치한 일본의 신사(神社)이자 일본 우익의 성지. 신사본청과 함께 동아시아 제국(諸國)들이 일본과 일본 신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 어려운 원인 중 하나다. 신토의 신사에는 사당에 토속신이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는데, 여러 혼들을 함께 모실 때는 '합사(合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는 영새부에 246만 6532명의 이름을 적어 합사, 봉안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합사자들 중에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 조선을 강제병합한 침략자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한 강제 징용자 등 합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인 위키러 누군가의 조상이 일제에 의해 탄광노동을 하다 죽었는데, 오늘날 일본 극우 세력들이 당신 조상을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바쳐 희생한 우국지사'로 기리면서 끌려간 경황조차 '전시 일본의 정당한 행위'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유족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극단적 종교행위에 거부 의사를 표현하고 있으나 묵살당해 왔다. 2차대전 중 동아시아 및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인 전범들까지 신으로 추모하고 있으며, A급 전범의 명부 축출 주장을 꾸준히 묵살하거나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각료가 꾸준히 참배하는 등 꾸준히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일으키는 촉매제이다.
때문에 일본 과거 반성 문제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논쟁의 주요 레퍼토리인 "우리는 수없이 사과를 했다!"에 맞서 "사과를 해 놓고 뒤로는 구 일제 침략자들을 호국영령으로 기리는 곳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는 것. 일본은 한일, 중일 외교관계가 순항하거나 과거사에 긍정하는 태도를 취할 때에는 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를 자중하고, 반대로 강경 모드에 돌입하거나 과거사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할 때에는 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를 종교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방치하는 식인데, 과거부터 이곳에 일본 고위 관료가 참배할 때마다 대일정서는 급격히 냉각되어 왔다.
또 제위 축출 문제에 대해서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는 "영새부에 이름을 적으면 그 혼령이 여타의 혼령과 합쳐져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므로, 한번 봉안된 이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뺄 수 없다."고 주장한다.
2. 역사
1867년 말 대정봉환이 일어나 에도 막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덴노가 이끄는 조정은 천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실제 국정에는 손을 놓았기 때문에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결여되었으므로, 거의 대부분 막부 시절의 인사와 조직이 실무행정을 맡았다. 또한 막부는 형식상으로는 대권을 덴노에게 반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교권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실제적인 권력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막부 세력과 반(反)막부 세력의 갈등이 점점 커졌다.
결국 1868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 5개월에 걸쳐 무진전쟁이 일어난다. 이때 메이지 덴노는 반막부 세력을 지지하였다. 결국 막부군이 패배하고 사쓰마 번 등 반막부 세력이 승리하여 새로이 조정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아직 무진전쟁 중이던 1868년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는 에도 성을 접수하고 (음)4월에 자군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해 (음)5월에는 교토의 태정관 명의로 포고령이 내렸는데, 1853년(흑선내항) 이래 순난자(殉難者)의 영혼을 제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포고령은 야스쿠니 신사 창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해에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을 내려, 기존의 일본종교계에서 불교와 신토가 습합된 것을 강제로 나누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 전역에서 많은 불상과 법구, 사찰이 파괴되었으며 승려들이 강제환속하였다. 국가신토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무진전쟁이 끝난 1869년 (음)6월 12일, 메이지 덴노는 나라를 위해 싸운(친덴노적인) 전사자들을 위해 (오늘날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쇼콘사(招魂社)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달 29일에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서 군무관지사(軍務官知事)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小松宮彰仁親王)가 제관이 되어 무진전쟁에서 사망한 정부군 사망자 3588위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창건 당시에는 도쿄 쇼콘사(東京招魂社)라 이름하였다. 즉 혼을 불러 진정케 하는 절이다. 사실 쇼콘(招魂), 즉 초혼(招魂)이란 단어는 음양도 계통에서나 사용할 뿐,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았다. 굳이 쇼콘이란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 기존의 일본 종교시설과는 뭔가 다르게 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일본 전통에서 일단 전쟁에서 승리하여 위령제를 지낼 경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으나 쇼콘사는 명백히 막부측 전사자를 배제하였다.
1870년, 메이지 덴노는 대교선포(大教宣布) 칙령을 내린다. 이는 국가신토를 일본의 사실상 국교로 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
1871년, 도쿄 쇼콘사가 덴노가의 문장인 국화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879년(메이지 12년) 6월, 국가신토의 상징답게 신사로 개편하면서 이름도 야스쿠니(靖國),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신불분리령, 대교선포 칙령도 내렸는데 불교스러운 이름을 사용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확실히 신사(神社)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었다. 야스쿠니(靖国)는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같은 뜻의 야스쿠니(安国)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安国이 사찰 이름로 자주 쓰이는 등 불교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좌씨전에서 나온 야스쿠니(靖国)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1887년, 신사의 관할주체가 육해군성으로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육해군성뿐만이 아니라 내무성까지 3자가 공동으로 관할하였다.
패전 이전까지 일본의 신사는 관폐대사(官幣大社), 국폐대사(国幣大社), 관폐중사(官幣中社), 국폐중사(国幣中社), 관폐소사(官幣小社), 국폐소사(国幣小社) 순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여기서 관폐사와 국폐사가 나뉘는데 중앙정부 차원에서 파견하는 신기관(神祇官)이 신에게 폐백(예물)을 바치는 곳은 관폐사, 지방관(고구시国司)이 폐백을 바치는 곳은 국폐사라 하였다. 당연히 격은 관폐대사가 가장 높고 국폐소사가 가장 낮았다. 드물게 이런 체계에 잘 맞추기 힘든 신사가 있는데, 그런 곳을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로 나누어 관리하였으며, 대우는 관폐소사에 준하였다. 야스쿠니 신사도 이러한 별격관폐사였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1년이 지난 1946년 2월, 종교법인령이 공표되어 국가신토가 제도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9월에 야스쿠니 신사는 민간종교법인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신사본청(神社本庁)의 관할을 받지 않는 특수한 신사로 남았다. 1947년에 평화헌법이 공표되면서, 헌법의 종교자유 조항에 따라 일반 신사들은 압류된 재산 등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지방의 호국신사들은 제외되었다.
GHQ가 해산되고 일본이 다시 독립국이 된 1952년 10월에 쇼와 덴노 부부가 패전 이후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일본 유족회는 패전 이전 야스쿠니 신사가 별격관폐사였을 때처럼 정부에게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일본 유족회는 오모토에서 갈라진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 신사본청 등 관련 종교단체는 물론 우익단체까지 끌어모아 야스쿠니 국영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GHQ 시절에 철거된 충혼비 등을 복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스쿠니 신사와 자위대가 서로 노골적으로 결탁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1967년 일본 자민당에선 야스쿠니 신사의 종교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유는 헌법이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 때문에 종교단체 야스쿠니를 국영화할 수 없다면, 종교단체가 아니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나 신사본청이나 유족회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 또한 무산되었다.
자민당은 방책을 조금 바꾸어 68년부터 73년까지 5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특수법인화하는 시도하였다. 이는 평화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하기 때문에 민간종교단체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화할 수 없다면,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국영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반대세력, 종교계에 의해 뜻을 접어야 했다.
자세한 것은 전범 항목을 참조할 것. 아래는 A급 전범만 나열. 도쿄 전범 재판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사람들(평화에 대한 죄)이다.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며 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표시는 순국7사묘와 중복 합사된 전범이다.
1.도조 히데키⚠️(1884.12.30.~1948.12.23.) : 일본 제40대 총리이자 결정적으로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주범.
2.이타가키 세이시로⚠️(1885.1.21.~1948.12.23.) : 만주사변을 기획하였으며 일제의 중국 침략에 관여하였다
3.도이하라 겐지⚠️(1883.8.8.~1948.12.23.) : 관동군 사령관(1938~1940). 중국의 화북분리공작에 관여하였으며 포로 및 피억류자들에 대하여 야만적으로 대우하였다.
4.마츠이 이와네⚠️(1878.7.27.~1948.12.30.) : 1937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당시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쪽은 억울할 수도 있다. 왜냐면 그 당시에는 폐결핵으로 누워 지냈으며, 오히려 난징대학살 당시 충격받고 자기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5.기무라 헤이타로⚠️(1888.9.28.~1948.12.30.) : 왜 야스쿠니 신사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는 항목. 그나마 다른 전범들은 그래도 제노사이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이 자는 제노사이드를 직접 주도했다. 관동군 참모장(1940~1941), 육군대신(1941~1943), 육군최고고문(1943), 버마 파견군 사령관(1944~1945). 그냥 사람이 아니다.이 놈이 저지른 학살은 난징대학살, 싱가포르 학살, 바탄의 행진, 산다칸 행진, 마닐라 대학살을 다 더해도 모자를 지경. 오죽하면 같은 A급 전범들한테도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참고로 이 자의 별칭이 '버마의 도살자'다.
6.무토 아키라⚠️(1892.12.15.~1948.12.30.) : 중국파견군 참모장(1937), 육군성 국무국장(1939~1942),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단장(1942~1943), 필리핀 방면군 참모장(1944~1945). 광범위한 지역의 침략과 난징대학살을 포함한 중국의 일련 사건들까지 폭 넒은 책임을 물었다. 다만 침략전쟁에 앞장선 죄는 있으나 마츠이 이와네와 마찬가지로 학살 혐의와는 관련이 없다.
7.우메즈 요시지로(1882.1.4.~1949.1.8.) : 관동군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냈고, 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8.마츠오카 요스케(1880.3.3.~1946.6.26.) : 일본 제국의 전 외무대신(1940~1941). 국제연맹의 탈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1937년 남만주철도 총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와의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1941년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 소련 개전을 주장하였다. 대미정책에서도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 진행 중 병사하였다.
9.히라누마 기이치로(1867.9.28.~1952.8.22.) : 추밀원 의장(1936, 1945), 수상(1938.1~8), 내무대신(1940.12.~1941.7.)을 지내며 히로히토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신토를 장려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가주의 우익 단체 국본사를 조직하였다. 복역 중 1952년 초 석방되었으나 그 해 병사하였다.
10.나가노 오사미(1880.6.15. ~ 1947.1.5.) : 일본제국 38대 해군대신 당시에 진주만 공습을 승인한 사람으로 체포는 되었지만 스가모 형무소에서 판결전에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으로 사망했다.
2010년 12월 카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유물 특별 전시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1층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갑옷과 투구를 전시했다. 조선시대 갑옷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고 투구에는 군최고통수권자인 '元帥(원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 갑옷에는 용, 기린 등이 새겨져 있어 왕의 갑옷으로 추정된다. 이들 옆에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글을 내걸고 있다.
• 日 야스쿠니 신사, 조선시대 갑옷. 투구 소장 확인
• 고려 갑옷·투구도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바다이야기, 장미아파트 공경비의 작가 박병규가 야스쿠니 신사 방명록에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내용의 그림을 남기고 온 적이 있다.
일본에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라는 명랑한 이름의 초정당 단체도 있다(...)
또한 서브컬쳐 관련해서는 소니애니가 이것과 관련된 요소를 넣어서 국내 방영사인 애니플러스가 방영중지를 하는 등 논란이 꽤 있었다.
위구르 족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독립 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도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
포켓몬 GO가 일본에 출시 되면서 중국인 트레이너가 이 곳과 일본 국회의사당을 2200-2400대 망나뇽으로 점령했다가, 한국인 플레이어가 ABEISASSHOLE이란 이름의 망나뇽으로 탈환.
사실 이곳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있다. 이런데도 야스쿠니 신사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과 중국 등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국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버락 오바마를 비롯한 미국 대통령들이 방일하게 될 때, 야스쿠니는 쌩까고 치도리가후치를 참배하러 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