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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각 이씨의 강정
“푸른 콩가루를 가는 체에 내리고 즙은 꿀을 많이 넣어 매우 졸여 강즙(薑汁, 생강즙) · 계피 넣어 하나씩 묻히지 말고 여럿을 즙에 담가 서로 엉기게 묻혀 가루에 묻었다가 떼면 즙이 많이 묻어 엉겨서 맛이 자별하니라.”1)
이 글은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의 1부에 해당하는 〈주사의(酒食議)〉(이후 《규합총서 · 주사의》라 칭함)2)一名)은 견병이니(고치 같다)”고 했으니, 강정을 두고 한 말이다. 강정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썰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긴 과자이다. 완성된 모양이 누에고치와 닮아서 한자로 고치 ‘견(繭)’ 자를 붙여 ‘견병’이라고도 불렀다. 한글로 쓰인 《규합총서 · 주사의》이지만, 요사이 사람들이 읽기가 쉽지 않다. 빙허각 이씨의 글맛을 알기 위해 원문 그대로를 한번 읽어보자.
“좋은 찹쌀을 정히〔깨끗이〕 쓿어〔도정하여〕 멥쌀 가려 담갔다가 얼지 아니케〔않게〕 찧어 가는 체에 여러 번 뇌어〔내려〕 좋은 술에 백청(白淸, 꿀)을 약간 단맛 있을 만치 타 반죽을 북금이〔부꾸미〕만치 하여 익게〔익도록〕 찌되 가끔 저어 속까지 익혀 내어 꿀 서너 술〔숟가락〕 더 넣어 꼬아리〔꽈리〕 일도록 극진히 개어”라고 했다.
빙허각 이씨가 살던 시절에는 설날을 앞두고 강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얼지 않게”라는 말은 추운 날씨에 물에 담가놓은 쌀이 얼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곱게 가루 낸 찹쌀에 꿀을 넣고 반죽하여 잘 익도록 충분히 찐 다음에 다시 꿀을 조금 넣고 꽈리가 일도록 갠다는 것이다. 이렇게 갠 재료를 다시 “떡치듯 홍두깨를 감아 쳐” 넓적하게 만들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강정 반대기 만들기의 1단계이다.
2단계는 넓적하게 만든 반대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뜨거운 온돌방에 두고 하룻밤 말린 다음에 술에 담갔다가 꺼내서 다시 말리는 과정이다. 빙허각 이씨는 이렇게 적었다. “분가루 두껍게 놓고 (반대기를) 펴 정히 썰어 방을 끓이고(절절 끓을 정도로 불을 때고) 종이에 강정 만든 것을 면 바로 줄지어 널고 손으로 모양을 바로 하여 자주 자주 뒤적여 속속들이 마르거든 마르는 족족 그릇에 담아 일야내(一夜內, 하룻밤 사이) 다 말리우고”라고 했다.
이렇게 말린 반대기를 “뼈가 없도록 술에 축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뼈’는 반대기 안쪽에 반죽 일부가 말라 뭉쳐서 마치 고기 안에 뼈가 들어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것을 가리킨다. 무슨 술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맑은 술인 청주일 것이다. 술에 젖은 반대기를 “그릇에 놓고 보(褓, 보자기)를 덮어 니욱이〔한참〕 두었다가 헤쳐보면 덩이졌거든 가만히 상하지 않게 뜯어 모양을 바로 하여 헤쳐 잠깐 널었다가”라고 했다. 강정을 술에 축이는 이유는 반대기가 잘 부풀어 오르도록 발효시키기 위해서이다.
3단계는 기름에 튀기는 과정이다. “몸이 반만 마르거든 기름을 두 그릇에 담고 꽤 끓여 중탕(重湯)하여 채워두고 서로 번갈아 올려놓아 강정을 알맞게 넣고 만화(慢火, 뭉근한 불)로 산저(散著, 젓가락을 슬슬)를 저어 오래 저으면 막 일고자 하거든 불을 세게 하고 자주 기름을 떠 위에 얹으면 극진히 일으니”라고 했다.
그런데 빙허각 이씨는 강정 반대기를 튀길 때 사용하는 기름의 종류를 따로 밝혀두지는 않았다. 빙허각 이씨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법유(法油)라고도 불리는 들기름〔荏油〕이 병이(餅餌) · 어육(魚肉) · 약과를 지질 때 많이 쓰인다고 했다.3)正祖, 1776~1800)가 1795년 음력 윤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를 모시고 화성(華城)에 다녀온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서는 진유(眞油), 즉 참기름이 강정을 튀길 때 사용되었다.4)
반대기를 튀길 기름을 중탕하는 방법도 특이하다. 빙허각 이씨는 기름을 두 그릇에 담아 끓인 뒤 중탕하라고 했다. 아마도 기름이 빨리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끓인 기름을 팔팔 끓는 물에 띄워 중탕하라고 한 듯하다. 또 “중탕하여 채워두고 서로 번갈아 올려놓아”라고 했다. 곧, 중탕해놓은 기름 중 하나를 먼저 꺼내 약한 불에 놓고 반대기를 튀기다가 부풀어 오르면 불을 세게 하여 완전히 튀겨낸 뒤 가열된 기름 그릇을 다시 중탕하고, 또 다른 기름 그릇을 불에 올려 약한 불에서 센 불로 튀기는 방식으로 번갈아 반대기를 튀겨내라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조린 꿀과 생강즙, 계핏가루를 섞어 만든 즙에 담갔다가 푸른 콩가루에 묻힌 다음 떼어내면 강정이 완성된다. 빙허각 이씨는 그 맛을 자별(自別), 즉 특별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사가(私家)에서는 잔칫상과 차례상 · 제사상에 강정을 올렸다. 특히 왕실의 진연(進宴) · 진찬(進饌)에는 온갖 강정이 차려졌다. 조선시대 진연 · 진찬 의궤에서는 강정의 한자를 우리말 발음에 따라 ‘强精’이라 적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부편(附編)1의 ‘찬품(饌品)’에는 오색강정(五色强精)이 나온다. 즉, 잣가루〔實栢子〕 · 말린밥가루〔乾飯〕 · 송홧가루〔松花〕 · 참깨가루〔黑荏子〕 · 흰엿가루〔白糖〕 등 다섯 가지 재료를 강정에 묻혀낸 것이다.5)
빙허각 이씨 역시 “청태(靑太, 푸른 콩) · 신감초(辛甘草, 승검초) · 계피말(桂皮末, 계핏가루) · 백자말(柏子末, 잣가루) · 송화 · 흑임(黑荏, 검은깨) 등을 묻히고 홍색은 찰벼 튀긴 것을 작말(作末, 가루로 만듦)하여 지초(芝草) 기름에 섞어 쓰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푸른색의 청태강정, 초록색의 승검초강정, 밤색의 계피강정, 옅은 금색의 잣강정, 노란색의 송화강정, 검은색의 참깨강정, 붉은색의 밥풀강정 등 육색강정(六色强精)이 된다.
《규합총서 · 주사의》에는 강정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드는 과자류로 매화산자 · 모밀산자 · 빙사과 등의 요리법도 나온다. 빙허각 이씨는 “바탕을 강정과 같이 하되”라고 하며 매화산자 요리법을 소개했다. 산자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납작하게 만들어 말린 것을 기름에 튀기고 꿀을 바른 후 그 앞뒤에 튀긴 밥풀이나 깨를 붙여 만든 과자이다. 매화산자의 특징은 ‘매화밥’이다. 매화밥은 찰벼를 잘 말려서 밤이슬을 며칠 맞힌 후 술에 축인 다음 솥에 넣고 센 불에서 볶으면서 튀겨낸 것이다. 튀겨낸 모양이 매화를 닮아서 ‘매화밥’이라고 불렀다. 이 매화밥을 반대기에 줄지어 바르면 매화산자가 완성된다.
‘모밀산자’ 역시 처음 시작은 강정처럼 만든다고 했다. 주재료는 목말(木末, 메밀가루)과 진말(眞末, 밀가루) 반반 섞은 것이니 지금 말로 하면 메밀산자다. 메밀산자 역시 강반메밀산자, 청색과 검은색의 깨메밀산자, 흰색과 노란색의 참깨 메밀산자의 오색이다. 빙허각 이씨는 “보기 소담하고 맛이 절가하니라”고 했다. 여기서 ‘절가(絶佳)’는 더없이 훌륭하고 좋다는 말이다. 빙사과도 마찬가지다. “강정법과 같이 하되 썰기를 수단(쌀가루로 만든 은행 알 크기의 경단)보단 잘게 썰어 단단히 말려 일어 꿀을 묻혀 굳힌 후 네모지게 베어 쓰라”고 했다. 여기에다 백색, 홍색, 황색으로 색을 내어 삼색 빙사과를 만드는데, 달고 부드러워 먹기도 좋고 보기도 좋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강정 · 산자 · 빙사과 등을 통틀어 기름에 튀겨낸 과자라는 뜻으로 ‘유과(油果)’라고 불렀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유과는 만들어놓으면 보기도 좋고 맛도 좋다. 그뿐이랴. 만드는 중에도 고소한 기름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해 흡사 잔칫날 같다. 그런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이 유과를 두고 논란이 인 적이 있었다.
숙종조 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1679년 음력 12월 20일에 집안에 기름 냄새를 풍기며 유과를 만들어 제사에 써야 하느냐는 이선(李選, 1632~1692)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예기》에 ‘기름에 튀긴 음식물을 쓰지 않는다’ 하였는데, 유과는 튀겨서 만든 것이므로 쓰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하네. 삼대(三代, 중국의 하 · 은 · 주 시대) 때에는 제사에 냄새를 숭상하였는데, 유과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는 여러 음식에 비하여 뛰어나니 폐지하는 것이 혹 옳지 않은 게 아닐까? 윤황(尹煌, 1571~1639)은 쓰지 말라고 유언을 하였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은 일찍이 ‘유과는 가난하여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단지 한 층만 놓는다’고 말했으니, 이 몇 가지 말에서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네”6)
덧붙여 송시열은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하여 늘 폐하고 싶어도 폐하는 것이 서운한 까닭에 선례에 의하여 그대로 쓰면서 역시 높게 고인다네”7)朱子)’라 칭송받으며 ‘송자(宋子)’라고 불렸던 송시열 역시 제사에 유과를 쓸 것인지, 만약 쓴다면 접시에 한 층만 놓는 평배(平排)를 할 것인지, 아니면 높이 고이는 고배(高排)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제사에 유과를 올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선의 질문에 결국 송시열도 제사 때 유과를 올릴 뿐 아니라 고배를 한다고 고백하고 말았다.
반면, 송시열과 같은 노론 계열이었던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유과를 제사에 올리는 문제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 아들에게 관혼상제(冠婚喪祭)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면서 “지금의 유과는 불가(佛家)의 음식이다. 제사에 쓰지 않는 것이 옳다”8)安鼎福, 1712~1791)은 “유과는 고려시대 이래로 풍속의 물품이 되었으니, 쓰거나 안 쓰거나 관계가 없다”9)
빙허각 이씨는 1759년(영조 35) 서울에서 이창수(李昌壽, 1710~1777)와 문화 유씨(文化柳氏) 부인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 이창수의 집안은 세종의 열일곱째 아들인 영해군(寧海君)의 후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역임했던 명망 있는 소론(少論) 가문이다. 1740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창수는 같은 해 사간원의 정6품 정언(正言)이 될 정도로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이창수는 당시 소론 명문이었던 서명빈(徐命彬, 1692~1763)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자식 없이 일찍 죽자 유씨 부인과 재혼했다.
빙허각 이씨의 외숙부는 역산(曆算, 책력과 산술)과 율려(律呂, 음악)에 박식했던 유한규(柳漢奎, 1718~1783)이고, 외숙모는 임신부 교육서인 《태교신기(胎敎新記)》(1801)를 지은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 1739~1821)이다. 유한규와 사주당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사촌 동생 유희(柳僖, 1773~1837)는 《물명고(物名考)》의 저자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빙허각 이씨의 《빙허각전서(憑虛閣全書)》 목록에 〈태교신기발(胎敎新記跋)〉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외숙모 사주당 이씨와도 각별한 관계였을 것이다.10)
친가와 외가뿐 아니라 시가 역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학자 집안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15세에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혼인하였다. 서유본의 조부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천문학 · 지리학 · 농학 · 음악학 · 연단술 · 기술학 등을 다룬 거작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와 《고사신서(攷事新書)》, 부친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비롯하여 왕실 편찬 사업에 참여했으며,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집필하였다. 빙허각 이씨의 시동생은 조선시대 최대의 요리책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정조지(鼎俎志)》의 저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이다. 이러한 시가의 분위기는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를 집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규합총서》는 판본이 여러 가지이고, 판본마다 책의 구성이 약간씩 다르다. 빙허각 이씨는 책의 서문에서 “유취(類聚) 다섯 편을 만드니”라고 밝혔다. 다섯 편의 구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어놓았는데, 첫째 편은 〈주사의〉로 “무릇 장 담그며 술 빚는 법과 밥 · 떡 · 과줄, 온갖 밥반찬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둘째 편은 〈봉임칙(奉任則)〉으로 “심의 · 조복을 손으로 마르고 짓는 척수 겨냥 및 물들이기, 길쌈하기, 수놓기, 누에 치는 법하며 그릇 때우고 등잔 켜는 모든 잡방을 덧붙였다”고 적었다. 셋째 편은 〈산가락(山家樂)〉으로 “무릇 밭일을 다스리고 꽃과 대를 심는 일로부터 그 아래로 말이나 소를 치며 닭 기르는 데 이르기까지 시골 살림살이의 대강을 갖추었다”고 했다.
넷째 편은 〈청낭결(靑囊訣)〉로 “태교, 아기 기르는 요령과 삼 가르기와 구급하는 방문이며 아울러 태살(胎殺, 태아에게 해로운 살)의 소재와 약물 금기를 덧붙였다”고 밝혔다. 다섯째 편은 〈술수략(術數略)〉으로 “집을 진압하고 있는 곳을 정히 하는 법과 음양구기(陰陽拘忌, 음양에 따라 좋지 않게 여기어 피하거나 꺼림)의 술(術, 술수)을 달아 부적과 귀신 쫓는 일체의 속방(俗方)에 미쳤으니, 이로써 환(患)을 막고 무당 · 박수 따위에게 빠짐을 멀리할 것이다”라고 적었다.11)
빙허각 이씨의 남편 서유본의 문집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권1, 〈강거잡영십오수(江居雜詠十五首)〉에 나오는 《규합총서》 관련 글.<출처: 필자 제공, 오사카부립(大阪府立) 나카노시마(中之島) 도서관 소장>
남편 서유본은 “시골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초목 · 새 · 짐승의 성미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12)13)
《규합총서》를 구성하는 다섯 부분 중 〈산가락〉과 〈청낭결〉에도 음식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지만, 오로지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와 요리법만 모아놓은 부분은 첫째 편 〈주사의〉이다. 요사이 일부 학자들 중에는 〈주사의〉의 내용이 한글로 쓰였기 때문에 빙허각 이씨가 부엌에서 실제로 만들어본 후에 적은 요리법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빙허각 이씨 본인도 《규합총서》 서문에서 “모든 글을 보고 그 가장 요긴한 말을 가려 적고 혹 따로 자기의 소견을 덧붙”14)
〈주사의〉는 크게 음식일반 · 술 · 장 · 초 · 밥 · 죽 · 차 · 반찬 · 고기 · 채소 · 병과(餠果) · 기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빙허각 이씨는 경우에 따라 해당 음식의 일반론을 쓰고 그다음에 요리법을 적었다. 가령 ‘술’ 항목에서는 여러 나라와 고금(古今)의 술 이름, 술잔 이름, 술 마시는 이야기, 약주 17가지, 술 빚기 좋은 날, 술 못 빚는 날, 꽃향내를 술에 들이는 법, 도화주 · 연엽주 · 두견주 등 15가지 약주 빚는 법, 술을 빚거나 빚고 나서의 관리법, 소주 고는 법, 술의 독, 술 마시고 먹어서는 안 될 것, 술이 깨고 취하는 법, 술을 끊는 방문, 술잔 만드는 법 등이 적혀 있다.
‘장’ 항목에서는 장 담그기에 좋은 날과 꺼리는 날을 적고, 그다음에 어육장 · 청태장 · 청장 · 고추장 · 청육장 · 즙지이 · 즙장 등의 제조법을 책에 실었다. 밥 3가지, 죽 8가지, 차 6가지, 김치 10가지를 비롯해 민물과 바다의 물고기 요리법, 쇠고기 · 돼지고기 · 개고기 · 사슴고기 · 꿩고기 · 닭고기 · 조류 등을 이용한 각종 고기요리, 화채 · 전유어 · 계란, 여러 가지 채소 요리법을 적었다. 또 떡 20가지, 국수 3가지, 과자 27가지, 각종 과일과 채소 보관법, 조청 · 광주엿 · 연안식해법 등의 요리법이 실려 있다.
빙허각 이씨는 “무릇 각각 조항을 널리 적기에 힘써 밝고 자세하고 분명케 하고자 하였으므로 한번 책을 열면 가히 알아보아 행하게 하고 그 인용한 책이름을 각각 작은 글씨로 모든 조항 아래에 나타내고 혹시 자기 소견이 있으면 신증(新增, 새로 찾아냄)이라 썼다.”15)己巳) 가을’에 썼다고 했다.16)
《규합총서 · 주사의》의 ‘장’ 항목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이 세 방문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초(抄, 필요한 것만 뽑아 기록함)하였으되 시험치 못하였다”고 했다. 여기에서 ‘세 방문’은 어육장 · 청태장, 그리고 급히 청장 만드는 법이다. 빙허각 이씨는 이 세 가지 요리법을 《산림경제》에서 옮겨 적었다고 했다. 그러나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지은 《산림경제》에는 이 세 가지 요리법이 나오지 않는다. 빙허각 이씨가 살던 당시 사람들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를 두고 《산림경제》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정확히는 《증보산림경제》를 두고 한 말이다. 《증보산림경제 · 치선(治膳)》에는 이 세 가지 요리법이 나온다.
그렇다고 한문으로 쓰인 《증보산림경제 · 치선》의 내용을 그대로 한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가령 《증보산림경제 · 치선》에서는 ‘어육장 담그는 법〔沉魚肉醬法〕’을 “좋은 항아리를 먼저 땅에 묻고, 따로 비계와 껍질을 없앤 살이 통통한 쇠고기 10여 근, 노루고기나 양과 토끼고기도 모두 괜찮다. 털과 내장 및 위(胃)를 뺀 꿩 10마리, 그리고 닭 10마리도 꿩처럼 다듬는다. 거위, 오리, 기러기도 모두 쓸 수 있다. 소의 위(바로 소의 양이다)와 소의 심장은 칼로 자를 필요 없다. 그리고 숭어 · 도미 · 광어 · 민어 · 조기 · 준치[眞魚] 따위는 모두 창자 · 비늘 · 머리를 없애고 대충 햇볕에 말려 물기를 없앤다”17)
이에 비해, 《규합총서 · 주사의》에서는 “크고 좋은 독을 땅을 깊이 파고 묻고, 우둔(牛臀, 살이 통통한 쇠고기) 기름과 힘줄 없이 하고 볕에 말리어 물기 없이 하고 열 근, 생치 · 닭 열 마리 정히 튀하여 내장 없애고, 숭어나 도미나 정히 씻어 비늘과 머리 없이 하고 볕에 말리어 물기 없이 하여 열 마리, 생복 · 홍합, 대소 새우, 생선류는 아무것이라도 가치 아닌 것이 없고”라고 했다. 곧, 빙허각 이씨는 《증보산림경제 · 치선》을 읽고서 자신의 입장에서 내용을 정리했던 것이다. 청태장 요리법 역시 어육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증보산림경제 · 치선》를 참조하여 한글로 적었다.
《증보산림경제 · 치선》의 ‘급조청장법(急造淸醬法)’에는 두 가지의 요리법이 적혀 있다. 빙허각 이씨는 이 내용을 한글로 옮긴 후 “석화〔굴〕를 장에 넣으면 맛이 좋고 전굴젓국 해표〔여러 해〕된 것을 달이면 호품(好品, 좋은) 청장이 된다”18)
이처럼 ‘시험치 못한’ 것도 있지만 참고한 문헌에 나온 대로 실행해보고서 그 과정을 기록한 내용도 있다. 온갖 병을 낫게 한다는 술잔인 ‘유황배(硫黃盃)’ 만드는 법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사기그릇 안을 호두로 문지른 다음 겨자색의 석유황(石硫黃)을 넣고 뭉근한 불로 녹이면 물이 된다. 여기에 백반(白礬)을 넣고 녹인다. 다른 그릇에 무명을 덮고 이 녹인 물을 부어 찌꺼기를 거른다. 색을 푸르게 하려면 포도를 넣고, 붉게 하려면 주사(朱砂)를 넣는다.
만약 주사를 넣는다면 끓여서 녹인다. 유황과 주사가 녹은 뜨거운 물을 사기 술잔에 부어 안쪽에 골고루 묻게 한다. 식으면 삐져나온 것을 칼로 정리하고 술잔을 종이에 싸서 땅속에 하룻밤 묻어둔다. 다시 꺼내서 속새나무 줄기로 안쪽을 빛이 나도록 닦아 물에 씻는다. 매일 이른 아침에 술을 데워서 이 유황배에 담아 두 잔씩 마시면 “풍담(風痰, 풍증을 일으키는 담)에 신기하고 백병(百病)을 기제(치료)하나니라”고 적었다.
빙허각 이씨는 이 유황배 만드는 방법과 그 잔에 술을 담아 마시면 약효가 있다는 내용이 ‘본초총서(本草總書)’에 나온다고 했다. 아마도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비롯한 여러 의서에 유황배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밝혀놓은 듯하다. 빙허각 이씨는 “우연히 희롱〔장난삼아〕으로 만들어보니 과연 그대로되 병(病)에 유익한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재현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본방에 포도를 넣으면 푸르다 하였으나 포도즙을 시험하니 되지 않으니 그 연고를 알지 못한다”고도 적었다. 이외에도 문헌에 나온 그대로 되지 않는 점이 많았다. 특히 “더운 것을 부으면 터지니 본방에 열주(熱酒, 뜨거운 술)를 부으라 한 것이 극미해(極未解, 매우 이해 안 됨)하도다”라고 했다. 이 유황배 만드는 법은 유중림이 쓴 《증보산림경제 · 치선》에도 나온다. 그런데 빙허각 이씨는 그냥 한글로 옮겨 적지 않고 직접 시험까지 해보았던 것이다.
빙허각 이씨의 남편 서유본은 1783년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과거공부에 정진했으나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다.19)
그러다가 서유본은 1805년 44세의 나이에 종9품의 동몽교관(童蒙敎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1806년 숙부 서형수(徐瀅修, 1749~1824)가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유배 길에 오르면서 서유본 역시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서유본은 사직 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며, 주로 아내 빙허각 이씨와 경서를 논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세월을 보냈다.20)
이 무렵에 서유본은 “아내가 해마다 누에 치고 길쌈하며 온갖 꽃을 따다가 술을 빚어서 나에게 준다”21)百花酒)’이다. 《규합총서 · 주사의》에도 이 술 제조법이 나온다. 빙허각 이씨는 이 술 제조법의 마지막에 ‘자제신증(自製新增)’이란 글귀를 붙였다. 이로 미루어 빙허각 이씨가 문헌을 참고하여 직접 만들어보고 보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규합총서 · 주사의》에 나오는 어떤 술보다 ‘백화주’ 제조법은 상세하고 길다.
먼저 백화주에 들어가는 꽃에 대한 설명이다. “겨울에 매화 · 동백으로부터 이듬해 가을 국화까지 100가지 꽃을 모으되 송이째 꽃술 없이 하지 말고 그늘에서 말리기 하여 각각 봉지를 지었다가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 때에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기에 이르러 술을 빚되 다른 꽃은 비록 향기 많다가도 마르면 향취가 가시나 국화는 마른 후 더욱 향기로우니 으뜸으로 하고 도(桃, 복사꽃) · 행(杏, 살구꽃) · 매(梅, 매화) · 연(蓮, 연꽃) 등과 초화(草花)에는 구기(枸杞, 구기꽃) · 제채화(薺菜花, 냉이꽃) 같은 성미가 유익한 것은 돈수 넉넉히 하고 다른 꽃은 각 1돈씩 하되 왜철쭉 · 옥잠화 · 싸리꽃은 지독하니 넣치 말라”고 했다. 말이 ‘백화(百花)’이지 꼭 100가지 꽃을 말려서 백화주를 담그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음은 밑술 빚는 법이다. “술 하는 법은 찹쌀 2되 가루 만들어 구멍떡 삶아, 되거든 삶은 물을 쳐서 치켜들어 떨어질 만치 개어, 이슬 맞힌 좋은 누룩가루 1되 바로 섞어 날물 들이지 말고 항아리에 넣어 쐐기 받쳐 덮지 않되 바람 없는 곳에 위는 덮지 말고 두면, 위아래 먼저 노랗게 괴이거든 멥쌀 4되 여러 번 씻어 담갔다가 가루 만들어 범벅 개어 얼음같이 차거든 먼저 한 밑에 섞고 누룩가루 1되 넉넉히 더 섞어 날물 치지 말고 개어 정한 항아리에 짚 냄새 쏘여 넣고 위를 여러 겹 봉하여 처음처럼 두었다가 다 괴거든 찹쌀 1말 반, 멥쌀 5되 깨끗하게 씻어 인절미처럼 물 주어 찌되 메밥에는 물을 더 주어 흠뻑 불게 하여 만든다”고 적었다.
이제 꽃을 넣고 백화주를 완성하면 된다. 앞에서 만든 밑술이 “얼음같이 식거든 밀을 섞되 너무 되거든 끓여 채운 물을 쌀 된 되로 2되만 더 섞고 알맞은 독에 밥 한 켜 넣고 백화를 다 각각 등분하여 달아 한데 섞고 국화는 말리지 말고 1되 남짓 꽃잎만 따 한 켜씩 백화와 밥을 떡 안치듯 하되 국화는 위에 뿌리고 진말 3홉 밥에 섞고 누룩 1줌만 위에 뿌려 눌러 고르게 하고 위를 김나지 않게 봉하여 익히면 국화는 개미와 한가지로 뜨고”라고 했다. 술밥 덩어리가 개미처럼 떠다닌다고 동동주를 ‘부의주(浮蟻酒)’라고 부르듯이 완성된 ‘백화주’ 또한 국화가 개미처럼 떠다닌다는 설명이다.
술은 물맛이다. 그래서 빙허각 이씨는 “크고 묵은 구기자 뿌리나 송절(松節, 소나무 마디)이나 진하게 달여 채운 물을 술 빚을 적 다른 물 말고 이 물로 하면 더욱 유익하니”라며 특별히 좋은 물을 쓰라고 강조했다. “(물을) 각별히 가리어 강심수(江心水, 강 한복판을 흐르는 물)나 석천(石泉, 바위 틈에서 나오는 샘물)이나 쓰되 송순(松筍, 소나무 새순)을 말리었다가 긁어 데쳐 밑에 넣고 유자피(柚子皮, 유자껍질)를 썰어 위에 넣고 후추를 굵게 작말하여 주머니에 넣어 가운데 넣으면 더 좋으니라”고 했다.
빙허각 이씨는 “향취와 맛이 다른 술에 뛰어날 뿐 아니라 원기를 보익하는 공효(功效, 효능)가 기이”한 ‘백화주’를 가을만 되면 빚어 남편에게 마시도록 했다. 그런데 1822년(순조 22) 남편 서유본이 갑자기 앓아누웠다. 빙허각 이씨는 음식을 끊은 채 남편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사당 앞에서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했다.22)絶命詞)’를 짓고는 이후 모든 음식을 마다하고 자리에 누워23)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의 서문의 끝에서 “이 편(編)이 비록 많으나 그 귀취(歸趣, 귀결되는 취지)를 구한 즉, 이것들이 다 양생(養生)하는 선무(先務, 첫 일)요, 다가〔집안을 다스리는〕하는 요법이라 진실로 일용에 궐(闕, 빠지다)치 못할 것이요, 부녀의 마땅히 강구(講究)할 바라. 드디어 이를 써 서(序)를 하여 분내(分內, 집안)의 여부배(女婦輩, 딸과 며느리들)에게 주노라”고 했다. 한문으로 된 앞선 문헌에서 도움이 될 내용을 뽑고 여기에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방법을 모두 한글로 적은 이유는 바로 딸과 며느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서유구는 형수 빙허각 이씨의 묘비명에서 “《규합총서》는 형수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세상에 알려져 인척이 자주 베껴 갔다”24)25) 그중 목판본 1종이 1908년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지금의 숙명여고 전신) 교사 이숙(李淑)에 의해 인용 · 보완되어 《부인필지(婦人必知)》(상권)라는 이름으로 ‘우문관(右文館)’ 출판사에서 연활자본으로 출판되었다.26) 그리고 1917년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이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을 펴내면서 《부인필지》에 나온 요리법을 제법 많이 옮겼다. 이처럼 《규합총서 · 주사의》의 요리법은 빙허각 이씨의 바람을 훨씬 뛰어넘어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딸과 며느리’에 의해서 읽혔다.
《규합총서 · 주사의》의 번역본은 정양완 옮김, 《규합총서》, 보진재(寶晉齋), 1975를 주로 참고하였다. 다만, 판본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 인용글은 일본 도쿄대학 오구라문고(小倉文庫) 소장 필사본 《규합총셔 권지이》이다.
빙허각 이씨는 ‘酒食議’를 한글로 ‘주의’라고 썼다. 한자 ‘食’은 보통 ‘밥 식’ 자로 쓰지만, ‘먹이 사’ 또는 ‘밥 사’로 쓰기도 한다.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주각빙주일용변증설(廚閣氷廚日用辨證說)〉 : 荏油俗名法油, 凡煎餅餌魚肉藥果等.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권지4(卷之四) : 早茶小盤果初九日, (중략) 慈宮進御一牀十六器磁器黑漆足盤, 各色强精一器, 高四寸, 粘米三升五合, 實荏子八合, 細乾飯實柏子各一升五合, 松花七合, 眞油二升五合, 白糖二斤八兩, 淸五合, 芝草二兩.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부편(附編)》, 권지1(卷之一), 〈찬품(饌品)〉 : 五色强精一器, 高九寸, 粘米八升, 淸五合, 眞油四升, 實栢子・乾飯各三升, 松花黑荏子各二升, 白糖二斤三.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제72권, 〈서(書)〉, ‘답리택지(答李擇之, 己未十二月二十日)’ : 禮, 煎熬之物, 不用云云, 而油果是煎熬而成者, 則不用似宜. 而第三代之時祭尙臭, 油果之香臭, 比諸饌特異, 廢之無乃不可乎. 尹八松則遺命勿用, 愼齋先生則嘗言油果貧不易辦, 只欲平排云, 於此數說, 擇而從之可也.
송시열, 《송자대전》 제72권, 〈서(書)〉, ‘답리택지(答李擇之, 己未十二月二十日)’ : 鄙家貧甚, 每欲廢, 而廢之缺然, 故依先例仍用, 而亦用高排.
김원행(金元行), 《미호집(渼湖集)》 제14권, 〈잡저(雜著)〉, ‘고아(告兒)’ : 今之油果, 佛家之食也. 不用於祭可也.
안정복(安鼎福),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제8권, 〈서(書)〉 ‘답이형중문목(答李瑩仲問目, 병신丙申)’ : 油果自麗以來爲俗品, 用不用無關.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 8권, 1997, 304쪽.
빙허각 이씨 지음, 정양완 옮김, 《규합총서》, 보진재, 1975, 1쪽.
서유본(徐有本),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권1, 〈강거잡영십오수(江居雜詠十五首)〉 : 無非山居日用之要, 而尤詳於草木鳥獸之性味.
서유본, 《左蘇山人文集》 권지1, 〈강거잡영십오수〉 : 余爲命其名曰閨閤叢書.
빙허각 이씨 지음, 정양완 옮김, 《규합총서》, 보진재, 1975, 1쪽.
빙허각 이씨 지음, 정양완 옮김, 《규합총서》, 보진재, 1975, 1~2쪽.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를 집필한 장소로 “내가 동호(東湖) 행정(杏亭)에 집을 삼아” 살 때라고 했다. 여기서 ‘동호’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초기의 연구자들은 ‘동호’를 한강을 부르던 명칭으로 여겨 지금의 서울 용산이나 옥수동 근처로 파악했다. 또 1939년 책이 발견된 황해도 장연(長淵)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또 서유본의 호 ‘좌소(左蘇)’가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장단 일대라서 이곳을 ‘동호’라고 파악한 학자도 있다. 한문학자 심경호는 ‘동호’를 전라남도 영암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심경호, ‘서유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2008). 1806년 서유본의 중부(仲父)인 서형수가 해도(海島)로 귀양 갈 때에 연루되어 관직을 빼앗긴 후 삼호 행정에서 교거(僑居, 남의 집에 임시로 삶)하면서, 학문에 주력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동호’를 영암으로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도 영암군 삼호읍에는 마을 이름으로 ‘동호’가 있어 가장 근거 있는 주장이다.
농촌진흥청, 《증보산림경제Ⅱ(增補山林經濟)》, 농촌진흥청, 2003, 196~197쪽.
홍만선(洪萬選), 《증보산림경제》, 권지8, ‘급조청장법(急造淸醬法)’ : 取經年醎石花醢汁, 煎一升至半, 成好清醬, 與眞莫辨. (해를 넘겨 맛이 짠 굴젓〔石花醢〕의 즙 1되를 반 되가 되도록 달이면 맛 좋은 청장이 되는데, 원래의 장맛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 8권, 1997, 307쪽.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 8권, 1997, 308쪽.
서유본, 《좌소산인문집》, 권1, 〈부첩전운시내자(復疊前韻示內子)〉 : 內子每歲養蠶斷匹帛, 採百花釀酒以供余.
서유구, 《풍석전집 · 금화지비집》, 권제7(卷第七), 〈수씨단인이씨묘지명〉 : 壬午七月, 伯氏疾亟. 端人水漿不入口, 齋沐禱于廟, 請以身代, 斮指進血不效 ;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 8권, 1997, 309쪽.
서유구, 《풍석전집 · 금화지비집》 권제7, 〈수씨단인이씨묘지명〉 : 端人恚曰使我一日不死, 是餉我一日毒也. 迺作絶命詞曰生醉死亦夢 ;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 8권, 1997, 309쪽.
서유구, 《풍석전집 · 금화지비집》 권제7, 〈수씨단인이씨묘지명〉 : 其閨閤叢書, 及端人在時, 已聞于世, 姻戚往往傳寫焉.
〈주사의〉가 들어가 있는 목판본은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가람문고본(가람 古396-G999)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536-1)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朝 29-114), 정양완 소장의 3종류, 도쿄대학 오구라문고(小倉文庫) 소장본(新L174593-4), 영평사(永平寺) 소장본(정양완, 《조선학보》 71집, 75집) 등이다(김영혜, 〈『규합총서』의 편찬과 필사(筆寫) 양상에 관한 고찰〉,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청구논문, 2016).
라연재, 〈근대 요리책의 계통과 지식 전승-출판인쇄본 『부인필지』, 『조선요리제법』,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중심으로-〉, 《민속학연구》 제42호, 2018, 53~57쪽.
발행일 : 2018. 08. 31.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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