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가스파르 싼스의 바로크 기타를 제외하고는 차분하고 경건한 느낌이었다.
숲의 정령들이며, 샘의 여신이여, 모든 나라의 숙련된 가수들이여, 목소리를 가다듬고 높이 하고서 슬픔을 소리 높여 외쳐라. 음악의 참된 보화이자 걸작인 오케겜을 운명의 여신이 냉혹하게 사로잡았으니... 조스켕, 브뤼멜, 피에르숑, 콩페르여 슬픔의 눈물을 흘려라. 그대들은 좋은 아버지를 잃었도다...
1. 조스켕 데프레 (c.1455~1521) 오케겜의 죽음을 기리는 라멘트 '숲의 정령들이여(Nymphes des bois)' - 올란도 콘소트 (4:33)
질 드 뱅수아(Gilles de Binchois, 1400-1460)의 제자로 추정되는 오케겜은 뒤파이, 조스캥과 더불어 15세기 후반 플랑드르 악파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된다. 출생 년도와 출생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의 어린 시절을 네덜란드 동부 지역에서 지냈을 것으로 추축할 뿐이다. 파리로 진출하기 전 1443-44년 앤트워프(Antewarp) 노트르담 대성당의 소년성가대 원으로 노래했다. 2년 뒤 무랑(Moulins)에 있는 부르봉 공작 샤를르 1세의 궁정에서 성가대 가수로, 1451년부터 프랑스 궁정으로 옮겨 그가 사망할 때까지 샤를르 7세, 루이 11세, 샤를 르 8세 등 3대에 걸쳐 40년 동안 처음엔 성가대 가수로, 만년엔 궁정악장으로 일했다. 1460 년부터 35년간 투르(Tours)의 생 마르탱 수도원의 재무관으로 임명받았다. 오케겜이 생애 마 지막 직책은 프랑스 왕실의 궁정악장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오케겜의 중요한 종교음악들이 작곡되었고, 미사곡에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오케겜은 13곡의 미사곡을 비롯해서 10개의 모테트, 20여개의 샹송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평 가되는 미사 레퀴엠(Missa Pro Defunctis)은 현존하는 진혼곡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미 사 ‘Caput’, 미사 ‘무장한 사람(Missa L'homme arme)’, 미사 ‘폴로라찌오눔(Prolationum)’ 등이 유명하다. 오케겜은 그의 미사곡에서 대위법적인 독창성을 발휘하였는데, 정선율을 테노 르에만 두지 않고 다른 성부로 이동시키거나 순서를 바꾸기도 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해하 기 어려운 신비주의자로 비판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완성도 높은 대위법과 아름다운 선율로 가 득 차 있다. 그래서 당대의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그의 천재성을 높이 사서 ‘음 악의 왕자’또는 ‘오르페우스 재현’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던스터블과 뒤파이의 음악이 수직적 인 풍부한 화성에 있다면 그의 음악은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수평적인 선율의 대위법적 발전에 있다.
그의 치밀하고 견실한 대위법적 기교는 플랑드르 악파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 다. 또한 조스캥 데프레, 피에르 드 라뤼(Pierre de la Rue), 루아제 콩페르(Loyset Compere)등 출중한 제자를 키워낸 뛰어난 선생이기도 하였다. 조스캥은 그의 스승 오케겜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명한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남겼다.
◈ 작품 ▶ 종교음악 오케겜의 종교음악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위법의 사용이다. 선율은 길고 유연한 대위적 기법을 사용하나 단순한 모방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온음계가 추가되어 반음계적 변화는 거의 없으며 규칙적인 종지는 주의 깊게 처리되어 대위적 흐름에 방해되지 않게 한다. 모든 성부는 거의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며 성부의 대조를 강조한다. 오케겜은 모방 대위법을 르네상스 음악에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 미사 현존하는 오케겜의 미사 10곡 중 두 곡만이 3성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4성부이다. 4성부의 미 사는 각각 독립적인 대위법적 선율로 구성된다. 베이스 선율은 G나 F음까지 하향하여 음역의 폭이 대단히 넓어졌고, 노르와 콘트라테노르는 음역의 차이가 크지 않아 자주 교차 (overlapping)된다.
▶ 네델란드 카논 오케겜은 음향의 변화와 대조를 위하여 4성부에서 듀엣과 트리오를 넣어서 전체 성부와 음향 의 대조를 주었고 때때로 동일한 리듬을 노래하게 하여 대위적인 것과 화성적인 것이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이와 같이 수직적인 화음을 통한 화성 구조를 친숙한 양식(familiar style)이 라고 하였다. 오케겜은 대위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부분적인 모방보다는 카논(canon)에 의지하 였다. 오케겜의 카논은 15세기 후반에 널리 사용되었던 네덜란드 카논과는 달리 성부의 진행 을 여러 형태로 변형시켜 만든다. 즉, 두 성부를 각기 다른 빠르기로 진행시키는 정량 카논 (mensuration canon), 둘째 성부를 첫째 성부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전위 카논 (inversion canon), 원래의 성부를 뒤에서부터 진행시키는 역행 카논(retrograde canon)과 같은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 모테트 오케겜은 전통적인 모테트 양식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창작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5세기의 모테트처럼 미사의 창작기법 뿐만 아니라 음역과 정선율의 선택이나 음악의 구조 등에 있어서 도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15개의 4성부 모테트와 3개의 5성부 모테트에는 15세기 의 음악양식은 물론 르네상스의 다성부 음악양식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모테트의 음악적 인 특징을 살펴보면, 음역이 이례적으로 높고 성부도 교환되지만 대부분의 모테트는 낮은 성 부까지 확대된 음역에서 선율이 진행된다.
오케겜은 그의 모테트에 기존하는 성가를 정선율로 차용할 경우에는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언 제나 장식하거나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다. 오케겜의 모테트 중에는 세속음악의 유형을 따라 작곡된 것도 있다.
▶ 세속음악 오케겜의 세속음악은 샹송이 주를 이룬다. 샹송은 비를레 형식으로 된 것과 4성부로 된 것이 있지만 주로 론도형식으로 된 3성부 곡이 많다. 오케겜 자신이 쓴 21개의 샹송 이외에도 기존 의 세속음악을 편곡한 샹송도 있다. 샹송은 오케겜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단순하며 보다 전통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다. 뒤파이의 샹송처럼 테노르가 윗성부와 함께 대위법적으로 노래 되는 샹송도 있지만, 윗 성부에만 가사가 있고 아랫 성부는 악기로 연주되는 독창곡 형식의 샹 송들이 더욱 많다. 註 : 비를레(Virelai) 원래는 무도가(舞蹈歌)이며, 론도에서 발전한 것이다. 기본적인 형식은 AB(합창-리프레인)-C (독창)-C(합창-리프레인)-ab(독창)-AB(합창-리프레인)이며, 맨 끝의 리프레인이 다음 마디 의 처음에 이어진다.
2. 루이 쿠프랭 (c.1626~1661) '블랑크로셰씨의 통보(Tombeau de M. de Blancrocher)' - 글렌 윌슨(하프시코드) (5:32)
하프시코드 소리가 영롱하고 경건했다. 하프시코드는 언제들어도 마음의 평안함을 준다.
3. 마누엘 데 파야 (1876~1946) '클로드 드뷔시의 통보(Le Tombeau de Claude Debussy)' - 카토나 트윈스 (3:15)
마누엘 데 파야는 1876년 스페인 카디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다가 9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13살 때부터 화성학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유년기에 파야는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질을 발휘해 친구와 함께 〈농담〉과 〈방울〉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간했는가 하면 연극과 문학, 그림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어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20살 때부터 마드리드 국립음악학교 교수 호세 크라고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파야는 22살 때인 1898년, 국립음악학교에 들어가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 피아노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피아노 레슨으로 돈을 벌며 틈틈이 곡을 썼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와 〈야상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타 안달루시아(Serenata Andaluza)〉 등이 이 시절의 작품이다.
1907년, 스페인을 떠난 파야는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작곡가를 만났다. 그중에는 라벨, 드뷔시, 뒤카 같은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도 있었다. 1908년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로부터 파리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낸 파야는 1910년, 이곳에서 러시아 출신의 젊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를 만났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파리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파야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 후 마드리드에 정착해 작곡에만 전념했다. 작곡가로서 성숙기에 접어든 이 시기에 〈스페인 정원의 밤(Noches en los Jardines de Espana)〉, 〈사랑은 마술사(El amor brujo)〉, 〈삼각모자(El Sombrero de tres picos)〉 등 그의 대표작이 연달아 탄생했다.
1917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의 초청을 받고 스페인에서 〈셰에라자드〉를 공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 디아길레프는 안무가이자 무용가인 마신느와 함께 스페인 여러 지방을 여행했는데, 이때 파야가 안내를 맡았다. 스페인에 오기 전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로부터 스페인에 가면 파야를 꼭 만나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파야를 만난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발레음악을 작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발레음악 〈삼각모자〉이다. 이 프로젝트는 유명 화가 피카소가 무대 장치와 의상 디자인을 맡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기획 디아길레프, 작곡 파야, 안무와 춤 마신느, 무대 세트와 의상 피카소라는 막강 드림팀의 합작품인 〈삼각모자〉는 1919년 7월, 런던의 알함브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21년, 파야는 그라나다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939년까지 18년 동안 살며 지역의 유력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는 동안 그 역시 그라나다의 중요한 문화계 인사가 되었다. 1922년에는 스페인 민요협회를 설립했고, 폴리나크 공주의 의뢰로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Les Treteaux de Maitre Pierre)〉을 작곡했다. 〈하프시코드 협주곡(Harpsichord Concerto)〉을 완성하고 이어 일생의 역작인 대편성 칸타타 〈아틀란티다〉의 작곡에 착수했다. 1924년, 앙헬 바리오스와 함께 그라나다 예술협회의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27년에는 스페인 음악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라나다에 있는 동안 파야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1937년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외부 활동이 뜸해졌다. 1939년, 파야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휘와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그동안 스페인 정부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말년에는 일생의 역작인 〈아틀란티다〉의 완성에 매달렸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76세 생일을 며칠 앞둔 1946년 11월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야는 전통적인 소재 속에 잠재해 있는 현대적 미의 가치를 찾아내 이를 수준 높은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곡가이다. 피아노곡에 집중한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와는 달리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드뷔시의 영향을 받아 아련하고 섬세한 색깔로 짜인 고전적 투명성을 지닌 작품을 썼으며, 후기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고전주의적인 작품에 몰두했다.
4.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1893) 피아노 트리오 A단조 op.50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중 마지막 변주곡과 코다 - 반더러 트리오 (6:49)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위대했던 선배를 추모하면서 쓴 이 곡은 차이콥스키의 휴머니즘이 알맞게 열매를 맺은 피아노 삼중주곡의 명작이다. 따라서 5편의 차이콥스키 실내악 작품 중에서 42세 때에 작곡한 이 곡이 실내악 부문에 있어 별로 그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차이콥스키의 면목을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기념하기 위하여'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여기에서의 위대한 예술가란 모스크바 음악원의 설립자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차이콥스키는 한때 그의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일찍이 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 작품23에 대하여 혹평을 가해 내성적인 차이콥스키를 대단히 격분시킨 일도 있다. 그러나 그후 이 협주곡은 붤러를 비롯한 명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고, 또 차이콥스키의 작품활동이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므로 마침내 루빈스타인도 후배인 차이콥스키에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 한편 차이콥스키도 존경할만한 선배에 대하여 품어왔던 오해를 풀고 나중에는 오히려 존경심마저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878년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자 그의 탁월한 연주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이 곡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차이콥스키와는 여러모로 인연을 맺었던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숨을 거둔 것은 1881년 3월 23일이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이었던 그의 후임에는 차이콥스키가 물망에 올랐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그해 11월 로마로 떠나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선배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삼중주곡의 작곡에 착수 다음해 1월 완성했다.
곡은 단 2악장으로 되어있으나 변주곡인 제2악장이 2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 3악장 형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마지막의 변주와 코다(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부분임.)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부분을 이루는 대규모의 것으로 악상은 이미 모두 나왔던 것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제3악장으로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선배의 죽음을 애도하여 작곡된 만큼 그렇지 않아도 특유한 감상(感傷)으로 채색되고 있는 그의 음악은 이 곡에서 더욱 더 구슬픈 정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더구나 치밀한 작곡기교를 구사한 점에 있어서는 그의 실내악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특히 피아노 파트가 웅장하고 화려하게 작곡되어 있는데, 이는 당대의 유명했던 피아니스트를 기억하는 것인 만큼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작품이 완성된 해인, 1882년 3월 루빈스타인의 1주기에 즈음하여 피아노에 타네예프, 바이올린에 그리말리, 그리고 첼로에 피첸하겐의 연주로 비공개 초연 되었다. 5. 가스파르 산스 (c.1640~c.1710) '카나리오스(Canarios)' - 호세 미구엘 모레노(바로크 기타), 오르페니카 리라 (4:09)
경쾌하고 맑은 느낌의 곡이었다.
[가스파르 산스Gaspar Sanz(1640 - 1710)] Robert de Vise(프랑스, 1650경 - 1725경), Fransico Corbeta(이태리, 1612경 -1681), Sanz를 일컬어 전고전시대(前古典時代)를 장식한 기타의 3대 거장이라 부른다. Sanz는 스레인의 가란다에서 태어나 살아망가 대학에서 신학학위를 얻고 이태리에 건너가 레리오 고리스다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그 당시 이태리는 기타음악의 전성시대였다. Sanz는 나폴리 음악교회의 오르간주자인 크리스토 바루.갈리산에게 오르간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에는 3권의 5현 기타책을 출판하였다. 제1권은 1674년 [기타의 理論과 奏法]에 곡집을 첨가한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중에 e단조의 조곡(組曲)이 몇해전 파리 국제기타 콩쿨의 과제곡으로 나타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Sanz의 곡은 de Vise의 곡과 같은 5현 기타용으로 되어있어서 현대기타의 제6현은 사실 사용하지 않아야 하지만 E. Pujol(1886년 스페인 태생 Vihella주자이며 기타리스트. 비엘라, 류트음악을 기타곡으로 옮기는데 공헌하였고 세계적 기타의 역사가로 권위를 갖고 있다.)의 편곡은 현대기타의 레파뜨와로서 제6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훌륭한 것이며 세계 기타리스트의 애주곡으로 되어 있다. 6. 호아킨 로드리고 (1901~1999)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Fantasia para un gentilhombre)> 중 4악장 Canario. Allegro ma non troppo - 존 윌리엄스(기타), 유진 오먼디(지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4:54) 여기서의 귀인은 세고비아를 말함. 7.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환상곡 B플랫장조 Wq 61-3 - 아나-마리아 마르코비나(피아노) (5:32) 동생이 형을 추모하여 곡을 썼다는... 나에게는 아픈 음악... 형이 재능이 있으나 사회성이 없다는 것까지 닮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