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가는 길
강 문 석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만개한 벚꽃은 하르르 하르르 낙화로 흘러내렸다. 해마다 새봄이면 바다 건너 탐라의 도시를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바로 그 왕벚나무 꽃이었다. 배롱나무처럼 석 달 열흘 피는 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화무십일홍이니 사람들은 가는 봄을 이처럼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금정산에도 초봄부터 연둣빛 새순을 틔우기 시작했던 수목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잎을 키우는 모양새다. 계명봉 자락에 빼곡한 나무들도 본격적으로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문학관을 나서선 혼자 호젓하게 범어사로 난 도로를 오르는데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초로의 사내가 금정산 오르는 길을 좀 알려달라고 했다.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 사하沙下에서 왔다는 그에게 북문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알려주면서 해발로 따지면 벌써 산을 반 가까이나 올랐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부산에 살면서도 오래 전 딱 한 차례 금정산을 올랐고 그땐 산성마을에서 화명으로 내려간 기억이 난다면서 앞서 갔다.
눈앞에 무르익은 봄 풍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팔렸다가 ‘사하’라는 말을 듣자 조금 전 나선 문학관이 떠올랐다. 요산 선생의 대표작 <사하촌>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나는 부산의 사하지역 어느 어촌을 그린 소설로 작품을 오해하고 있었다. 작가의 작품 중에 낙동강과 을숙도 그리고 모래톱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랬다가 문학관이 개관되었을 때 어느 소설가가 그곳에서 자신의 소설집 출판기념회를 가진다며 알려온 바람에 참석했다가 <사하촌>은 절 밑 동네이고 그 절이 바로 범어사란 걸 알게 되었다.
1936년 1월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하촌>은 사찰을 비방한 반종교 소설이라는 진정까지 일어 조사를 받아야했고 작가가 귀향했을 땐 테러까지 당했었다. 하지만 한국문단은 요산을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리얼리즘 작가이자 실천적 작가로 지금도 평가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하나같이 인간주의를 바탕에 깔고 생경한 이념적 주장이나 기교가 아닌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철저히 인식하려는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관 근무자인 여류소설가도 오늘 방문한 우리 일행에게 생전의 작가가 발로 뛰면서 꼼꼼하게 수집하고 메모한 취재자료가 지금 보아도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했다.
노년에 들어 혼자서 산을 오르자니 지난 세월 일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대부분 추억 속 잡상이지만 처음 떠오르는 것도 있어서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 부산에서 반세기 넘게 살다보니 금정산을 오르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그러고 금정산 밑에 바짝 붙어서 산 것도 온천동과 화명동을 합쳐 20년 세월이다. 돌아보면 사회단체인 금정산보존회에도 가입하여 삼사십 대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관통했던 그 시절이 흔히 말하는 인생의 봄날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도 사는 곳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고당봉이지만 직접 가까이에서 산의 기운을 받으면서 사는 것과는 천양지차이일 터이다. 그런 애착 때문인지 오늘 산을 오르며 느끼는 감회는 한마디로 안타까움이었다. 산의 이름이 된 ‘금샘金井’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그곳을 찾느라 고생했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땐 금샘으로 가는 길이 만들어지질 않아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찾아 헤맸다. 막상 당도하고 보니 거대한 산의 이름을 있게 한 바위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여 준비해간 카메라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금샘의 배경이 되는 금정산성 북문 쪽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는 날이면 좀 달라질까하고 두어 차례를 더 찾았으니 고생을 사서 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금샘바위는 놀랍게도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하여 금정산 자락에 들어선 천년고찰도 하늘의 물고기 즉 범어梵魚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월 셋째 주말. 평년 같았으면 봄철 행락객이 넘쳐날 범어사가 오늘은 조용한 편이었다. 미세먼지 경보가 자주 발령되다보니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눈여겨보니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 숫자가 비슷할 정도로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온 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인데도 휴휴정사 앞에 나붙은 템플스테이 안내문에 관심을 보이는 게 특이했다.
오늘 절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풍경은 대웅전 양옆 공간에 전선을 높고 넓게 매달아 땅콩만한 꼬마전구를 설치하는 공사였다. 공사장엔 많은 작업자들이 붙었고 간격을 한 뼘 정도로 촘촘하게 설치하는 걸로 봐서 금년 부처님 오신 날은 밝고 화려한 축제가 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산사가 대도시 번화가처럼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바뀌는 것은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부처님이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경내를 돌다가 종무소를 발견하자 민방위강의를 맡아 범어사를 오르내렸던 추억이 떠올랐다.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 넘는 세월이었고 당시 범어사 민방위대원은 스무 명이 채 안되었지만 구청에선 별도로 절을 찾아 교육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감지덕지해서 구청에서 받아야할 강사료까지 절에서 내주는지는 몰라도 강의료 때문에 난 종무소 근무자와 자주 마찰이 있었다.
당시 강의료는 한 시간에 7만원인데 차 기름 값이라며 3만원 얹어주는 돈을 난 거부했고 구청 공무원은 다른 강사들도 다 받는다면서 범어사 편을 들었다. 부산대학과 태화섬유처럼 대원들이 많아 찾아가서 강의하는 직장민방위대도 강의료를 그쪽에서 내지 않는데 절에서 왜 이러느냐며 나는 그들 말을 듣지 않았다. 부산에선 비교적 뒤에 생긴 금정구청이어서 청사도 다른 구청에 비해 번듯했고 민방위교육장도 그랬다.
다만 청룡동 남산동 지역 대원들 편의를 너무 배려한 때문인지 지하철 범어사역사 안에 마련한 민방위교육장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소음이 심해서 강사와 수강하는 대원들 모두 고충이 심했기 때문이다. 부산시 위촉을 받아 부산진구청에서 시작했던 민방위강의를 금정구 관내 여러 곳까지 돌면서 그 지역을 체험하고 출강한 여러 강사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던 것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범어사 계곡은 물이 졸졸 흐르며 편안한 느낌을 주는 오른쪽과 큼지막한 바윗장이 엉키듯 펼쳐져 있는 밑으로 물이 숨어 흐르는 왼쪽으로 나뉜다. 왼쪽 너덜지대 초입엔 등나무 6백여 그루가 소나무나 팽나무 참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진귀한 밀림풍경을 만날 수 있다. 매년 5월이면 보랏빛 등나무 꽃향기가 범어사 계곡에 은은히 퍼지는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등나무 군생지 등운곡藤雲谷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회장님 글과 사진 너무 좋습니다 대문을 못 열어서 이제껏 눈팅만 하다가 오늘은 작심하고 빗장을 풀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강녕하시길 빕니다 김홍두드림
과분한 격려말씀 고맙습니다. 편지형식을 빌어 삶에 얽힌 에피소드와 애환까지 적나라하게 나누는 재능과 용기에 경외감을 갖습니다. 쉬지않고 활동하는 무대가 있다는 것도 존경받을 만합니다. 건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