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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1-10절)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신앙이라는 것은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구조대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텔레비전에서 하수구에 빠진 아이를 구조대원이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혼자 길을 가다가 열어 놓은 맨홀속에 빠졌는데, 나올 구멍을 찾다가 남의 집 하수구 밑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 집 아줌마가 물을 붓는데, 하수구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나서 119구조대에 신고한 것입니다.
일단 구조대는 아이의 위치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들어가서 하수구를 깨고, 그 아이를 극적으로 건져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세상 욕심을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결국 채워지지 않는 탐심이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게 됩니다.
이런 경우 사람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차거나, 강퍅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애물을 이기고,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이미 예수님은 오래 전부터 그를 알고 계셨고,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순간 준비되었던 하나님의 축복이 그 사람과 가정까지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와도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방황하고, 무서운 탐욕의 죄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계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에게 접근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단도 직업적으로 자신을 나태내시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으실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간사해서 처음부터 좋은 것을 주면, 절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실컷 방황하다가 도저히 다른 길이 없을 때, 결정적인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때, 오래 전부터 우리에 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구원을 향해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서 한 사람을 극적으로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그 사람은 세리장이였고,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하여 자세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최악의 조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키가 너무나 작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로 예수님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무 밑에서 위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Ⅰ.여리고 성의 세리장
19:1-2절)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그 곳을 지나가신 다는 소문을 제자들을 통해서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지나가는 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앞(18장)장에서 본 맹인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렸다가 치료와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세리(稅吏) 삭개오였습니다. 여리고는 요단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천 번째로 들어가야 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거기 세관(稅官)에서 근무하는 세리(稅吏)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관(稅官)의 세리 장(세무서 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직업이 세리(세금 공무원)이기 때문에 돈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상대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리(稅吏)는 돈이 많은 깡패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도박을 하거나, 유흥가에서 나쁜 짓을 하여 돈을 버는 건달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사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로서 허전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 사회의 세리는 정해진 세금을 거두어, 이방나라(로마)에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종의 납입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정해진 돈만 입금시키고, 남은 돈은 전부 자기의 몫입니다.
세리들은 자기 민족이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세금의 세배 네 배의 돈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자라고 그를 정죄했고. 창녀들과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즉 창녀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했고, 세리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 전체를 범죄자로 취급했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삭개오라는 이 세리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3절)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세리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신앙이란 어떤 거창한 체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 처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들은 소문은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지고,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소문과 특히 *자신과 같은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의 제자 중. 세리인 마태가 한 명 있습니다.
삭개오는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세리를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같은 자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찬송가 547장 *나 같은 죄인까지도*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초청하고, 오늘도 만나 주십니다. 영혼이 죽은 자와 병든 자의 특징은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왜 돈 많은 세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을까? 그의 마음속에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전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고, 또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미 하나님이 이 사람의 마음에 진실한 마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사람은 돈으로도 또 출세로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은
사55:1절)..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목마름이란 곧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즉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속에 만족할 수 없는 허전함입니다.
삭개오는 영혼이 병든 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만족함이 없었고, 자존심도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도 몰랐습니다.
오직 돈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그의 복수하는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세리들도 주님은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고상한 사람들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마음이 갈급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 중에는 깡패도 있고, 창녀도 있고, 가난한 자도, 부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갈급한 마음을 주시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 526장 *목마른 자들아*
Ⅱ.삭개오의 장애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기다렸는데,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의 갈급함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마 삭개오의 키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완전히 파묻혀 버릴 정도로 작았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이 만나 보겠다는 열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아마 그는 맹인처럼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발 나를 만나 주세요...*
만일 삭개오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삭개오를 욕하면서 *너는 예수님을 부를 자격도 없는 도둑놈이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시 가장 큰 장애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면,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께로 나와 자신의 문제를 분명히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고, 또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의 눈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옮기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첫 걸음을 떼면,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여러 걸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큰 결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을 찾을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답답한 중에 예배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기도도 하지 않았고, 예배도 잘 참석하지 않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귀찮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면, 그냥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찮은 마음을 이기고, 예배에 참석했더니,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가 자기에게 하는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설교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볼 때, 두 종류의 방식으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①무심코 보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보는 것입니다.
②성경에서 자비하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 나는 실패했습니다. 이 고통 중에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만 바라볼 뿐입니다*라고 해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중환자가 의사를 찾아가 의사만을 쳐다봅니다. 환자의 눈빛은 *이제 내 병은 너무나 깊었습니다. 이제 저의 살 길은 의사 선생님의 도움뿐입니다.* 라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고 간절한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고난 중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Ⅲ.예수님의 반응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 위에까지는 올라갔지만, 다시 한 번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5절)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삭개오를 이미 알고 계셨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만 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사람의 집 앞까지 갔다가 용기가 없어서 결국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예수님께 했을리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고, 그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여는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즉 *000야...*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삭개오의 이름만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가서 유, 머물러야 하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삭개오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의 영접을 받으시고, 그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지금까지 삭개오의 집은 부잣집이었지만, 언제나 추운 겨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시므로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 집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가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듣고 6절)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삭개오의 집은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도둑의 소굴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모든 죄가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기쁨으로 모신 것은 *드러날 것은 드러나고, 깨질 것은 깨지고, 이제는 부정한 과거를 모두 다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죄악의 온상인 자기 집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기꺼이 예수님의 심판을 받고, 이제라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7절)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유대인들은 자기 집 문을 꼭 닫고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계13: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집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또한 셀 가족도 예수님을 주인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과 셀 공동체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534장 *주님 찾아 오셨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留),머물러 가신 것은 단지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고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회개의 역사와 심령 부흥의 새 역사가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 집에 가심으로 그 집 온 식구들이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지도 않고, 무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는데, 수군수군 거리는 것보다 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1:29절)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그것은 아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6:43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Ⅳ.삭개오의 회개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오신 후, 자기가 먼저 예수님께 이렇게 자백했습니다.
8절)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오늘날 국토부 소속 토공처럼 일제 강정기 때의 악법을 탐욕으로 이용하여 감히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서민의 재산을 착취하여 모은 자기 집의 많은 재물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혼란스럽고 위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 재물들을 부정한 방법으로 모았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회개는 단지 감정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정욕적으로 살았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결단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회개와 결단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오심으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크게 손해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회개했을 때, 영혼을 치료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포기한 것을 보면, 그 많은 재산들이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재산들은 삭개오의 마음을 억누르던 죄짐이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그 무거운 욕심의 죄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양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는 세상 욕심으로 살았던 삶을 과감하게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버렸을 때, 손해 본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행복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맛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롬14:17절)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삭개오는 자기 죄를 회개했을 때, 자기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사라지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9-10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제 삭개오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의롭게 살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즉 재물은 잃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혈통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며, 어느 순간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코너로 몰고 가서 결국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얼마나 손해를 보는 일이요, 마이너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는 것이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축복의 길입니다.
돈과 명예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영생(永生)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요6:27절)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돈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을 진리의 복음으로 인도하십니다. 각 셀(cell)가족 공동체는 이 세상에 진리가 밝혀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 갈급함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아-멘
요14: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찬송가 358장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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