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그리고 사랑.. 이 주제를 위한 이미지 설계를 고민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카메라를 망연자실 쳐다본다. 검은색의 카메라는 마치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육중한 무게감을 지키고 있다. 모서리에 반사되어 퉁겨져 나오는 차가운 빛에서 카메라의 냉정함마저 본다. 도대체 이 야박한 기계가 하느님의 숨이 생명으로, 그 생명의 궁극적 목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 나의 무능을 카메라 탓으로 돌리다니.
19세기 무렵 사진이 회화주의에 편입되려는 노력이 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노력의 근간에는 사진이 회화처럼 예술로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회화적 기법을 모방하기 위해 인화과정 중 사진조작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라이트 룸이나 포토샵을 활용한 사진편집기술이 보편화 되었다. 오늘날 광범위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집이 당시에 ‘조작’이라고 표현된 이유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지키려는 일단의 사진가 그룹이 견지한 반회화주의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사견이다.
괄목할 만한 사조가 드러나 있지 않고, 심지어 장르의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창조하려는 이미지 구현방법에 굳이 시비를 걸지 않는 요즘의 분위기는, 나 같은 보수적 초보자의 방향감각에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아득하게 먼 옛시장 신발가게 앞 바닥에 무질서 하게 펼쳐져 쌓여 있는 각양각색의 신발들 가운데에서, 내 취향과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내려는 듯 여기 저기를 뒤적거리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수작 “ 생 라자르역 뒤 “ 작품을 보고는 마치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은 듯이 환호 했다.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유지한 채 회화 못지 않은 예술적 작품이었다. “ 초보자의 무식한 해석 “ 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 보호 받을 권리가 있는 사견 “ 임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에 다시 전제 한다.
아래 그의 사진은 독자가 직관을 작동시키는데 있어서 아무런 방해를 주지 않고 있다. 그 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을 고스란히 기록했고, 배경은 그 사건을 선명하게 부연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진매체가 본래 갖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예술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기도 한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차별된다는 점에서 더 높은 위상차를 갖는 매체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의 ‘결정적 순간포착’은 독자의 직관을 견인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은 인간의 삶에 닥친 장애물, ‘고통’과 치환할 수 있는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애물인 물웅덩이를 뛰어 넘는 사진속의 주인공 모습이, 비 온후 고인 물위에 반영 되 있다. 이 반영은 묘하게도 배경의 포스터에서 보여지는 댄서의 춤사위와 동질화 되 있다. 무엇을 표현하든 춤은 아름답다. 고통을 뛰어 넘는 인간의 몸짓도 정녕 아름답지 아니 한가?
일상을 무중력 상태로 유영하던 어느 날,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 하느님의 거룩한 숨이 깃들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든 사물들이 생명으로 넘쳐 나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물 날 만큼 아름답고 생생한 그 광경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으로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그 때를 기억하여 전시회 주제를 “ 생명, 그리고 사랑”으로 제안한 것도 후회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런 체험을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책상 위 카메라를 가방에 넣으며 주제를 구현할 이미지 설계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생생한 순간의 체험을 다시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헤매 보자. 그리고 보고 또 보며 기다려 보자. 브레송이 찰라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기약없이 인내 했듯이... 또 다시 체험은 못해도 최소한 영감은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