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프랜시스 잠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 시계가 하나 있지요.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
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
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그 속에는 밀랍, 잼,
곡,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입에서
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므 씨, 어떠시오?”하고 물을 때
그가 살아 있는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떠오르지요.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 중 018
북오션 출판
[작가소개]
프란시스 잠(Francis Jammes.1868.12.2∼1938.11.1)
프랑스 시인. 투르네 출생. 프랑스 상징파의 후기를 장식한 신고전파 시인. 그의 시는 평명(平明)하고 유순(柔順)ㆍ우아(優雅)한 것이 특징이며, 격조(格調)가 매우 부드럽다. 많은 사람의 애송(愛誦)을 받은 제1시집 <새벽종으로부터 저녁종까지>(1898) 외에 <앵초(櫻草)의 우수(憂愁)>(1900) <생의 승리>(1902) <푸른 하늘>(1906)을 발표하였는데, 그 이후의 그는 전혀 가톨릭 시인다운 신중한 풍격(風格)을 나타내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여행과 약간의 파리 생활을 제외하고는 일생의 거의 전부를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의 풍물을 종교적 애정을 가지고 평명(平明)한 가락으로 노래하였다. 상징주의 말기의 퇴폐와 회삽(晦澁)한 상징파 속에서 이에 맞선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S.말라르메와 지드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지드와는 평생의 벗으로서 두 사람의 왕복 서한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1948년에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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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피레네의 베아른지방 출생. 전원의 풍물과 소박한 사람들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1897년 당시 쇠퇴기를 걷고 있던 상징주의와 그 인공적인 미학에 대하여 ‘자미즘’을 선언하고 시작품(詩作品)의 청순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실을 노래하고 새ㆍ꽃ㆍ양떼나 남ㆍ여, 따사로움과 쓸쓸함 등의 자연감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집 <새벽 삼종에서 저녁 종까지>(1898) <앵초(櫻草)의 죽음의 슬픔>(1900) 등에서 니체의 초인철학을 부정하였고, 마을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의 단순한 사랑의 생활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노래하였으며, 종교관을 가련한 당나귀에 비유하였다.
1905년 P. 클로델의 인도로 가톨릭에 귀의한 뒤, 시집 <푸른 하늘>(1906)에서 영적 고뇌의 종결과 신앙회귀의 도정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교도의 농목시(農牧詩)>(1925)에는 그의 시혼(詩魂)과 종교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외의 단편집 <산토끼 이야기>(1903)와 자전적 수필 <사랑ㆍ시신(詩神)ㆍ사냥(1922)> 등이 있다. 순결하고 우아한 은총의 작품을 써 ‘자연과 은총을 화해시킨 시인’이라고 일컬어진다.
【작품세계】
친구인 앙드레 지드와의 북아프리카 여행과 서너 차례의 파리 나들이를 제외하고 잠은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그는 오트 피레네의 투르네에서 출생하여 그 옆마을인 바스 피레네의 아스파렝에서 작고하였다.
토지 공증인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고 있을 때 최초의 시집을 파리의 친구들, 그가 존경하던 말라르메와 지드에게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과 평생의 우정을 맺게 되었다.
1906년경을 경계로 하여 그의 작업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하늘 속의 빈 터>(1906) <기독교적 농경시>(1912) 등에는 열렬한 가톨릭 시인 클로렐에 의한 영향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다.
시든, 산문이든 잠의 초기 작품에는 태어난 고향의 흙냄새와 먼 타향에 대한 꿈이 기묘하게 감미로운 우수(憂愁)를 지니고 혼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연인 것이며, 그것을 토대로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후년에 그가 ‘시로써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태도에는 항상 세상과 화해하고 있는 소박한 경건함이 배어있었다. 빛깔과 냄새가 깨끗한 이러한 시작(詩作) 태도에 의하여 잠은 상징주의 말기의 프랑스 시세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이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시가 깨끗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진실을 노래해야만 한다. 또한 유파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며, 그것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아름다운 글자를 배우려 하는 어린이와 같이 아름다운 새나 꽃이나 매력적인 다리와 보기 좋은 가슴을 지닌 서녀 등을 시인들이 의식적으로 묘사한은 유파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잠이 다룬 단순하고 소박한 주제는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 요소와 참신한 대조를 이룬다. 내성적인 시골 사무원이었던 그는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및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반발하고 '자연주의'(Naturisme)라는 새로운 시적 경향을 추구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연으로, 사소한 일상생활의 사건으로,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새벽의 삼종기도에서 저녁의 삼종기도까지>(1898)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1905년 시인 폴 클로델이 그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는데, 개종한 뒤에 그는 점점 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농경시>(3권.1911∼12)는 믿음이 깊은 농부 가문의 내력을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한 작품이다.
그는 명성을 얻은 뒤에도 시골에 남아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및 회고록(1923)도 역시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로 그의 문학적 성과를 완전하게 해준다.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존경받는 원로가 되어 있었다.
【시집】<새벽종으로부터 저녁종까지>(1898) <앵초(櫻草)의 우수(憂愁)>(1900) <프리물라의 슬픔>(1901) <생의 승리>(1902) <푸른 하늘> (1906) <4행시집>(1923∼5) <그리스도교도의 농목시(農牧詩)>(1925)
【소설】<클라라 델레뵈즈>(1899)
【단편집】<산토끼 이야기>(1903)
【수필】<사랑ㆍ시신(詩神)ㆍ사냥(1922)>
[출처] 프랑스 시인 프란시스 잠|작성자 틀
첫댓글 식당 안에는 과거가 흐른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