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75
“너라뇨, 당신 진짜 신경정신과 의사 맞아요?” 아라이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때 낯이 익은 여자가 지나갔다. 나카지마 사쿠라였다. 프리랜서 편집자니까 출판사에서 보는 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어머, 나카지마 씨. 어쩐 일이에요? 일?”
아이코가 말을 건네자 사쿠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면이 있는지 아라이도 인사를 한다.
“아는 사람이 찍은 영화 홍보일로 왔는데 얄짤없네. 대형 출판사는” 사쿠라가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화제작이 아니면 박스기사도 안된대.”
담배에 불을 붙여 선 채로 피운다. 애가 타는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뿜어낸다. “아라이군도, 좋은 책 만들면 잘 팔릴 거야.”
“그래. 나카시마 씨, 말 한번 잘했어” 아이코가 끼어든다.
“당신과는 상관없어. 당신은 뭐 잘나가는 인기 작가 신분이잖아.”
사쿠라의 말에 기분이 팍 상했다. “잘나가는 신분이라니 그건 좀 심하잖아?”
“그럼, 내 책 얘기네”라는 이라부.
“누구야? 이 사람.”
“괜찮아요. 그냥 무시하세요” 아라이가 말했다.
“뭐라곳…” 덮칠 것 같은 기세다.
p.276
“그보다 신분이 뭐야. 그 말 취소해” 아이코가 이라부를 밀어내며 사쿠라와 마주 섰다. “내가 얼마나 고민하며 고생하며….”
“그럼에도 잘 나가는 신분이지. 1억2천만밖에 안 되는 일본어 사용권 안에 도대체 직업작가가 몇 명인지 알아? 수 백 명은 녹을 먹고 있잖아? 편집자가 온갖 편의를 다 봐주고 회의랍시고 맛있는 거 사주고 호화로운 접대여행 다니고. 그런 나라는 아마 일본밖에 없을 걸. 이 나라는 작가에게 천국이지.”
사쿠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는다. 아라이가 코를 실룩거렸다.
“아라이군, 잠깐만. 지금 말 한번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이코가 팔을 때리자아라이는 굳은 표정으로 볼이 빨개진 채 대답하지 않았다.
“우시야마 씨도 한두 번 좌절한 걸로 그러는 거 아냐. 나는 더더욱 냉혹한 현실에 몇 번이나 맞닥뜨렸어.”
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에요?“
“좋아, 얘기해 줄게” 사쿠라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내가 줄곧 응원해온 젊은 감독이 있어. 3년 만에 새 영화를 찍었는데 그게 엄청 좋은 작품이야. 마니아 취향도 아니고 독선적이지도 않고. 멋있고 수준 높은 양질의 오락물이야. 배우도 좋고. 촬영도 잘했고. 시사회 때 난 울었어. 마구 흥분했지. 이걸로 이 감독 이제 떡상이다.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그런데 관객이 들지 않아. 개봉 첫날 집에 멍하니 있을 수 없어서 영화관에 갔더니 감독과 프로듀서가 한산한 객석 구석자리에 있는 거야. 이제 어쩌냐고. 내가 온 걸 봤을 텐데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지 뭐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끝났을 때 나는 눈인사만 하고 돌아왔어. 그럼에도 감독은 씩씩하게 미소 짓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