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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보고(寶庫) 고양
고양의 문화유산과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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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역사선생님에게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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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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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에는 문화유산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고양에는 무슨 문화유산이 있을까?
고양의 문화유산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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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의 역사가 궁금하다!!!
‣ 도내동의 구석기시대 석기공장
‣ 대화동 가와지 볍씨의 비밀
‣ 백제시대의 군사기지인 법곶동 멱절산성
‣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이야기가 서린 고봉산성
‣ 행주산성에 묻혀 있던 고대사의 비밀
‣ 고려청자 탄생의 요람 원흥동 가마터
‣ 요동정벌의 기개가 서린 대자동 최영장군묘
‣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꾼 격전의 현장 행주산성
‣ 군사정보 네트워크의 기지국인 독산봉수와 봉대산봉수
‣ 한양 수호의 의지와 백성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북한산성
‣ 사또들의 비명횡사를 막아낸 이야기의 주인공 박충원의 묘
‣ 고양군 관아 자리에 들어선 서삼릉의 아픈 역사
‣ 191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행주외동 행주성당
‣ 민간인 학살의 현장 황룡산 금정굴
고양시의 산과 들에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차고 넘칩니다. 예로부터 고양은 한강 하구와 서울의 중간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 이에 대해 일일이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지역인으로서의 의식이 강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를 가로막아 온 것은 역사의 주인공을 국가로 배워 온 데 있습니다. 지역 문화유산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안내서가 부족한 것도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중 ․ 고등학교 이상의 상식이 있다면 고양의 문화유산과 역사에 대해 공감할 만한 답사기를 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문화유산과 관련된 용어를 최대한 풀어 썼습니다. 문화유산의 역사적 맥락은 역사적 상식으로부터 끌어와 풀어냈습니다. 문화유산의 동선별로 생각해 볼 점들도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책이 훨씬 흥미로운 문화유산 이야기를 일궈내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문 중에서]
도내동의 구석기 석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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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동 구석기유적에서도 석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된 곳은 권율대로에 가까운 A지구입니다. 지표면 아래에는 많은 토층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4-b층에서 석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 수량이 무려 47,000여 점에 이릅니다. 동남쪽의 야산에 가까운 B지구에서는 30여 점이 나왔습니다.
…… 이러한 돌은 일반적인 화강암에 비해 석기 제작에 유리하고, 보기에도 좋은 편입니다. 이 때문에 탄현동유적과 덕이동유적에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도내동유적에서 나온 석기에는 원재료로 사용된 몸돌, 여기서 떨어져나간 격지외에 주먹도끼, 찍개, 주먹찌르개, 여러면 석기, 밀개, 긁개 등이 있습니다.
대화동 가와지 볍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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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의 대화역 6번 출구를 나와 일산서구청 4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국립암센터로 향하는 일산로로 들어섭니다. 여기서 200m 좀 못 가서 오른쪽 도로변을 보면 화단 안에 ‘고양가와지볍씨 발굴터’라고 표시된 스텐드형 스테인레스 안내판이 보입니다. ……
안내판 위에는 고양 가와지 볍씨가 5,020년 전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볍씨 출토 위치를 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는데, 색이 바래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
…… 주엽동 새말유적의 기원전 7세기 전후 볍씨는 시기적으로 이러한 볍씨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대화리와 가와지의 볍씨처럼 기원전 24~21세기 것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합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조, 피 등의 밭농사만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와지 볍씨의 발견은 한반도에서 벼농사의 시작 시기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백제시대의 군사기지인 법곶동 멸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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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절산은 해발고도가 27m에 불과하지만, 『고양군지』(1755)에 따르면 한강 쪽 봉우리의 바위 형세가 기괴하고 절벽이 쭈뼛쭈뼛 높이 솟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목멱산(남산)과 마니산이 아득하게 보인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형조건 때문에 멱절산성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 산성 내의 서북 부분에서는 수혈유구 즉 구덩이가 14기나 조사되었습니다. 이는 주거지가 아니라 각 종 물품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였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무우나 배추를 보관하기 위해 구덩이를 팠던 것과 유사한 방식입니다.
이들 유구에서는 삼족기(三足器), 장란형(長卵形) 토기, 심발형 토기, 단경호, 대호, 소호, 대옹, 컵형토기, 시루 등도 발견되었습니다. 토기들에는 조족(鳥足)무늬, 전(田)형무늬, ‘*’형 무늬 등을 눌러 새겼고, 흑색 간토기도 발견되었습니다. 이상은 백제시대 토기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 시기는 4~5세기가 중심인데, 흑색 간토기는 3세기 중후반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이야기가 서린 고봉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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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은 정상부에 남북으로 긴 장타원형으로 조성되었고, 둘레는 360m입니다. 성벽은 30~40cm 정도 크기로 다듬은 장방형 돌을 사용해 ‘바른층’ 쌓기로 쌓았습니다. … 현재는 성벽이 붕괴되어 돌들이 여기저기 뒹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서쪽 성벽이 꺾이는 곳에는 치성(雉城)도 남아있습니다. ……
…… 이후 545년부터 고구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큰 혼란이 일어났고, 남북조의 하나인 북위와 북방민족인 돌궐이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제의 성왕은 이 틈을 이용해 551년 고구려를 쳐서 한강 주변의 6군(郡)을 회복했습니다. 최소한 이때까지는 고양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다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한씨 세력에게 또 다른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들은 백제에 의해 탄압을 받거나 고구려로 망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는 고양 지역 세력에게 또다시 새로운 선택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행주산성에 묻혀 있던 고대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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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의 행주대첩비 주변은 1970년대에 성역화 과정에서 평탄하게 정비되었는데, 이곳을 둘러싼 바로 아래 경사지에서 2017년에 삼국시대의 석성(石城)이 발견되었습니다. ……
이 일대는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가 551년에 백제가 다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553년 진흥왕의 신라군이 이곳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탈취했습니다. 이에 격노한 백제의 성왕은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들어갔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한강 하류 일대는 신라의 영토로 굳어졌습니다.
고대의 평지성인 성저토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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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변은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평탄화되어 과거의 지형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1989년 덕이동 쪽에서 이 일대를 향해 찍은 사진을 보면, 들판 너머로 좌우로 길게 얕으막한 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 바로 앞으로는 대화천이 흐르고, 나머지 방향으로는 대체로 평지였습니다. 해발고도는 19.4m에 불과했지만, 이 야산은 주변에서는 꽤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
고봉산성은 고구려인들에 의해 이용된 적이 있습니다. 멱절산성은 백제의 산성이었지요. 성저토성은 유물만으로는 주인공들의 국적을 확인하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지형으로 보면 평지로 연결되는 동남쪽보다 북쪽과 서쪽의 대화천 방면을 방어하는 역할이 더 컸을 것입니다. 성저토성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면 ……
고려청자 탄생의 요람 원흥동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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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초입에서 서오릉로 716번길을 따라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좌회전하여 200m쯤 갑니다. 그러면 왼쪽으로 파란 철책 안에 ‘원흥동 신라말 고려초기 청자요’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
원흥동 가마터를 동북쪽에서 바라보면 경사면이 약간 올록볼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등요를 만들었던 흔적입니다. 등요는 원래 흙과 돌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동쪽 아래에서 불을 지펴 열기가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가마 안의 청자에 골고루 퍼지도록 했습니다.
토기를 한번 굽고 나면, 이를 꺼내기 위해 가마를 헐고서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벽돌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벽돌로 가마를 만들면 흙과 돌에 비해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겠지요. 하지만 벽돌 가마는 재활용이 가능했습니다 ……
요동정벌의 기개가 서린 대자동 최영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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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왼쪽 앞에는 팔작지붕을 얹은 묘비가 서 있습니다. 오른쪽부터 셋째줄까지는 최영장군이 고려에서 담당했던 관직이 나열되었고, 셋째줄 아래부터는 ‘동주(東州) 최공(崔公) 휘(諱) 영지묘(瑩之墓)’라고 했습니다. 동주(철원)최씨인 최영의 묘라는 것이지요. 맨왼쪽에는 ‘삼한국부인(三韓國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 부좌(附左)’라고 했습니다. 최영의 부인 문화유씨가 왼쪽에 같이 묻혔다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방향을 말할 때엔 묻힌 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탐방객의 입장에서는 오른쪽에 부인이 묻힌 것이지요. ……
최영은 요동을 정벌하여 명나라의 요구를 묵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요동은 원나라가 지배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명나라는 아직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의 거듭된 물자 요구 때문에 고려인들의 불만도 쌓여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요구에 끌려가면 집권력이 약해질까 두려운 마음도 최영에게는 있었습니다. ……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꾼 격전의 현장 행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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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 연합군은 벽제관전투에서 성급하게 일본군을 공격하다 패배해 고양동의 혜음령 이북으로 후퇴했습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평양성에 눌러앉아 일본군과 협상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이 한양을 안정된 기지로 확보하면서 조선군은 다시 위기에 빠졌습니다. ……
조선군과 함께 싸운 백성들의 눈물겨운 투쟁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당시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짧게 잘라 허리에 매고서 돌을 날라일본군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부엌에서 사용하는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행주(幸州)는 원래 살구나무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인데, 의미가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
군사정보 네트워크의 기지국인 독산봉수와 봉대산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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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로의 성석 3거리에서 벽제교로 가다가 보면 문봉 4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고봉동 행정복지센터 뒤쪽으로 400m를 가면 왼쪽으로 독산봉수대 표지판이 나옵니다. 이를 따라 200m를 올라가면 배수지 왼쪽으로 계단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해발 133.8m인 현달산 정상의 독산봉수에 도착합니다. ……
원래 봉(烽)은 횃불이고 수(燧)는 연기입니다.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긴급한 정보를 전달한 것이지요. 연료는 풀, 싸릿가지, 솔잎, 말똥, 소똥, 쑥대, 겨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평상시에는 연대 위에 횃불이나 연기를 한 개, 적이 출현하면 두 개,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피워올렸습니다. ……
한양의 출입국 관문 벽제관지
-일본으로 강탈당한 육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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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은 원래 고려시대에 개경으로부터 혜음령을 넘어 남경(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벽지역(碧池驛)이라 불렸지요.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부터 의주로 통하는 길목의 역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름이 벽제역(碧蹄驛)으로 바뀌면서 건물 이름도 벽제관이 되었지요. ……
벽제관지에서 남쪽으로 50m쯤 내려오면 고양초등학교 맞은편에 ‘육각정’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습니다. 이 주변의 연못에 육각정이 있었다고 추정한 것이지요. 중국 사신들이나 우리 관리들이 벽제관에서 묵다가 이 정자에서 쉬었다는 것입니다. ……
한양 수호의 의지와 백성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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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4월 3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군영의 하나인 훈련도감이 북한천 수문부터 북쪽으로 백운대를 돌아 용암문까지 2,292보(步)를 맡았습니다. 금위영은 용암문부터 보현봉까지 2,821보를, 어영청은 보현봉부터 북한천 수문까지 2,507보를 맡았습니다. 모두 합하면 12.7km에 이릅니다. 성벽을 쌓지 않은 바위절벽을 제외하더라도 8.4km가 됩니다. ……
이상은 1902년에 세키노 타다시가 찍은 모습과 거의 유사합니다. 다만 취두(용마루 끝)에 올린 잡상(雜像)은 위 사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잡상은 나쁜 기운을 내쫓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설치하는 상징적인 조형물입니다. 문 아래로 들어서면 뒤쪽 좌우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는 큰 문의 빗장인 장군목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입니다. <사진>을 보면 그 아래로는 문짝을 달았던 구멍인 지도릿돌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는 이런 구멍이 없어 문제가 있습니다. ……
사또들의 비명횡사를 막아낸 이야기의 주인공 박충원의 묘
-주교동 밀양박씨 규정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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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때, 부임하는 사또마다 죽어나가다가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고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고양시 주교동의 밀양박씨 규정공파 묘역에 잠들어 있는 박충원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박충원은 단종의 시신을 찾아내 그 자리에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은 선조대에 마련되었습니다. 이 무덤이 숙종대인 1698년부터 장릉이라 불렸습니다. 이야기가 윤색되었지만, 박충원이 단종의 원한을 풀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
고양군 관아 자리에 들어선 서삼릉의 아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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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서 접근하기가 가장 쉬운 왕릉은 서삼릉입니다. 서삼릉은 원래 희릉, 예릉, 효릉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많은 왕실무덤이 더해져 방대한 단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
예릉의 석물은 중종의 정릉 것을 재활용하고 철종이 죽은 뒤에 만든 것도 있기 때문에 16세기의 위풍당당하고 육중한 느낌과 19세 중엽의 장식성이 강한 양식이 뒤섞여 있습니다. 문인석은 326cm의 키에 얼굴이 신체의 1:3 정도 되어 큰 편이고, 얼굴이 가슴 쪽에 많이 파묻혀 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왕릉 옆에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유리하도록 우리 왕실의 존엄과 전통을 말살하는 정책을 치밀하게 자행한 것입니다. 이는 해방 이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민간인 학살의 현장 황룡산 금정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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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마을도 아닌 곳에 이런 장승이 세워진 목적은 금정굴이 잊어선 안될 역사적 사건의 현장임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금정(金井)은 금이 나는 우물을 의미하지요. 일제강점기에 이 산에서 금이 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를 채취하기 위해 깊이 50m 가량의 수직굴이 만들어졌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금광을 개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폐광된 뒤에 남게 된 것이 지금의 금정굴인데, 장승으로부터 150m 정도만 올라가면 나옵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군이 퇴각하자 커다란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습니다. 좌익활동에 적극 협조했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습니다. 대신 능곡, 일산, 송포 일대에 치안대가 구성되어 경찰의 통제 하에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지하의 태극단도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이들을 비롯한 우익세력은 좌익혐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고, 그들을 구금하거나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
[차 례]
<답사를 시작하며>
Ⅰ. 선사시대의 고양시 문화유산 … 1
┃역사 개관┃ - 권력의 탄생 - … 2
1. 탄현동 일산 임광진흥아파트의 구석기인들 … 3
2. 도내동의 구석기시대 석기공장 … 12
3. 대화동 가와지 볍씨의 비밀 … 20
4. 화정동 국사봉과 지렁산의 고인돌 … 27
Ⅱ. 고대의 고양시 문화유산 … 37
┃역사 개관┃ - 고봉과 개백의 시대 - … 38
1. 백제시대의 군사기지인 법곶동 멱절산성 … 39
2.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이야기가 서린 고봉산성 … 48
3. 행주산성에 묻혀 있던 고대사의 비밀 … 59
4. 고대의 평지성인 성저토성에서 … 69
Ⅲ. 고려의 고양시 문화 유산 … 75
┃역사 개관┃ - 고봉과 덕양의 시대 - … 76
1. 고려청자 탄생의 요람 원흥동 가마터 … 77
2. 북한산의 고려시대 중흥사와 중흥산성 … 85
3. 북한산 태고사와 원증국사의 발자취 … 97
4. 요동정벌의 기개가 서린 대자동 최영장군묘 … 109
5. 고려 500년의 한이 서린 공양왕릉 … 120
Ⅳ. 조선시대 고양시의 정치․군사적 문화유산 … 131
┃역사 개관┃ - 고양의 탄생 - … 132
1.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꾼 격전의 현장 행주산성 … 133
2. 권율장군을 기리는 조선후기의 사립학교 행주서원 … 145
3. 부처님의 몸으로 의주로를 지킨 동산동 밥할머니 석상 … 153
4. 군사정보 네트워크의 기지국인 독산봉수와 봉대산봉수 … 161
5. 한양의 출입국 관문 벽제관지 - 일본으로 강탈당한 육각정 - … 169
6. 조선시대의 공립학교인 고양향교 … 177
7. 한양 수호의 의지와 백성들의 피땀이 스며있는 북한산성 … 188
Ⅴ. 조선시대 고양시의 왕릉과 무덤 … 221
┃역사 개관┃ - 왕릉과 무덤의 고장이 된 사연 - … 222
1. 기황후·기철 집안의 행주기씨 묘역 … 223
2. 이색 후손들의 터전인 도내동의 한산이씨 묘역 … 237
3. 사또들의 비명횡사를 막아낸 이야기의 주인공 박충원의 묘 … 248
- 주교동 밀양박씨 규정공파 묘역 -
4. 창릉천의 유래가 된 용두동의 서오릉 … 257
5. 고양군 관아 자리에 들어선 서삼릉의 아픈 역사 … 279
Ⅵ. 근현대 고양시의 문화유산 … 307
┃역사 개관┃ - 격동의 시대 - … 308
1. 격동의 구한말과 대자동 김홍집의 묘 … 309
2. 191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행주외동 행주성당 … 319
3. 경의선의 살아있는 증인 구 일산역 … 327
4. 행주내리와 한양을 잇던 강매동 석교 … 338
5. 서울 수복의 초석이 되었던 행주 도강작전 전첩비 … 348
6. 민간인 학살의 현장 황룡산 금정굴 … 355
시대공통 참고문헌 … 370
저 자 : 이부오
출간일 : 2020년 10월 15일
판 형 : 152 × 225mm
분 량 : 384쪽
ISBN : 979-11-90429-06-1 03910
정 가 :23,000원
발행처 : 도서출판 역사산책
도서문의 : 031-969-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