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창에 투영된 홋가이도의 편린
홋가이도(ほっかいどう) 신치도세공항(しんちとせくうこう : 新天歲空港)은 국제선 보다 국내선 시설이 훨씬 규모가 크다. 이는 국내선 승객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방증이다. 극한 지역을 방불케 하는 겨울엔 스키 등의 스포츠 마니아들이, 여름엔 일본 남쪽 지방에서 피서객들이 시원한 곳을 찾아 몰려오기 때문이란다. 이런 관점에서 물 맑은 수청(水淸), 산야가 울울창창한 숲으로 덮여 산청(山淸), 사시사철 맑고 청정한 공기로 기청(氣淸) 등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의 기반이 튼실한 천혜의 섬쯤으로 치부해도 무리가 없지 싶다.
이 땅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왔던 우리 선조들이 짐승 취급을 당하며 노예처럼 온갖 고초를 겪다가 숱하게 목숨을 잃기도 했던 통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서럽고 어두웠던 과거사를 두루뭉술하게 넘기기로 작심했었던가. 이즈음 인천과 홋가이도를 오가는 우리의 국적기(國籍機)나 일본 항공기에는 우리 여행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다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오가는 경우를 더한다면 입이 절로 벌어진다. 이 때문에 유명 관광지나 대형 음식점 역시 샘이 날 정도로 옹골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 지역으로만 여행객이 몰리는 것이 아니다. 인천공항에서 줄줄이 떼를 지어 외국으로 떠나려고 분주히 종종대는 무리를 보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입국 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특이 사항에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먼저 모든 외국인은 두 손의 검지 지문과 양쪽 눈의 홍채(iris) 정보를 등록토록 했다. 이 과정을 아르바이트 노인들이 담당했다. 노란 조끼를 입어 공무원들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그분들은 지문이나 홍채 정보 등록을 비롯해서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 작성 방법, 줄서기 따위의 보조 업무를 침착한 자세로 능숙하게 처리했다. 장수시대에 노인 일자리를 정부에서 마련한 예로서 우리도 고려해 볼 만한 걸출한 책략으로 여겨졌다. 한편 여행 중에 호텔이나 관광지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노인 일자리 흔적이 눈에 띄었다.
비록 겨울 날씨는 혹한일지라도 맑은 공기와 풍부한 물 그리고 비옥한 화산재 쌓인 농토가 있고 여름의 기온이 작물 생육에 적합하다는 얘기였다. 이런 때문에 예로부터 농업과 낙농업이 발달했고 평지와 선선한 기후로 바이클(vehicle)의 마니아들의 성지란다. 하지만 겨울에 무지막지하게 내리는 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위험한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눈 커튼(눈 피해 방제 시설)’을 만들어야하는 특이한 지방이다. 아울러 무진장한 온천수를 활용하여 도로 바닥에 열선을 깔아 길바닥의 결빙을 방지하는 동토이기도 하다.
위도(緯度) 차이 때문일까. 새벽 3시 반을 지나면 완전히 날이 새고, 4시 조금 지나면 햇볕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 첫날 커튼을 열어 놓고 자다가 동창이 밝아 잠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보니 새벽 4시라서 떨떠름했다. 같은 맥락이리라. 드넓은 감자 밭에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했고, 밀보리가 겨우 누릇누릇 익어가며, 아카시아 꽃이 끝물에 다다른 점이나 밤꽃이 한창 피어나는 꼴이 분명 우리의 계절보다 한 박자 늦었다.
내 앎이 얇고 시야가 좁아 어리석은 단견일 게다.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몇 가지 소회이다. 일본의 국부(國富)는 우리를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개인의 삶은 어쭙잖게도 우리가 풍족한 모양새이다. 개인이 지니고 사는 집의 규모나 승용차의 크기를 통해 견주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한편 우리는 사회의 각 부문에서 다양한 다툼이나 첨예한 대립으로 시끄러운 파열음을 내며 굴러가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서 일본의 경우는 암묵적으로 공인된 틀이나 규범이 정해지면 특별한 변고가 없는 한 그를 준수하는 게 통념이지 싶다. 그러다가 정해진 틀이나 범위를 벗어날 때는 가차 없이 ‘왕따’ 시키는 흐름이 묵시적인 합의라고 투영된다. 단체 여행이나 모임에 나타나는 깃발문화를 위시하여 옷이나 행동 또는 관습 따위에서 남들과 판이하게 튀는 경우가 거의 없음이 예이리라. 아울러 일본의 주택 모양이나 색채 따위가 비슷하다는 점이 그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징표가 아닐까.
원래 홋가이도의 원주민은 아이누(ainu)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래전 일본 남부 본토 사람들이 섬으로 몰려오면서 그들을 모질고 노예처럼 대접했던 몹쓸 역사가 있었나보다. 그런 시련을 겪으며 점점 설자리를 잃었던 때문에 지금은 순수혈통의 아이누를 찾기 어렵단다. 지금은 북해도에 겨우 2만 명 남짓한 아이누가 거주하는 정도란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미국의 개척 초기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아 소수집단으로 전락해 험준한 산속으로 쫓겨났던 인디언의 슬픈 역사가 아른거렸다.
이번 여정에서 발길이 닿았던 곳이다. 먼저 오타루(おたる)에서 운하, 창고, 오타루 증기 시계탑, 오타루 오르골 당(おたる オルコール堂)이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삿보르(さっぽろ) 시내 일원을 돌며 마주했던 시계탑과 오도리 공원을 위시해서 홋가이도 도청 청사와 방송탑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이곳저곳에서 조우했던 민속촌(登別伊達時代村), 화산(昭和新山), 민속촌(登別伊達時代村), 도우야(とうや : 洞爺湖), 사이로(サイロ) 전망대(展望臺), 욱산기념공원(旭山記念公園)의 전망광장(展望廣場) 등을 건성건성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봤다.
관광지나 명소를 둘러보며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편린들이다. 첫째로 언덕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며 인구 12만 명 남짓한 소도시인 오타루(おたる)의 관광거리를 걸으며 마주했던 오타루 증기(蒸氣) 시계탑은 세계의 최고라고 했다. 그런데 매 시간 마다 시계탑 상공으로 증기를 뿜으며 소리를 내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둘째로 홋가이도의 도청 소재지인 삿보르는 시내 전체를 바둑판처럼 나누어 개발한 점이 특이 했다. 그리고 방화(防火)를 염두에 두고 시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역할을 위해 동서로 길게 조성한 오도리 공원이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해거름 무렵에 방송탑 1층에 자리한 맥주 시음장에서 시원한 ‘삿보르 생맥주 글래식’을 한 잔(650¥) 시켜 놓고 잠시 쉬면서 목을 축이는 여유로움은 나그네의 여독을 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셋째로 민속촌(登別伊達時代村) 야외무대에서의 닌자(忍者) 공연이나 닌자(忍者)의 집은 닌자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봤으면 싶었다. 넷째로 도우야(とうや : 洞爺湖)를 높은 언덕에서 조망하는 사이로(サイロ) 전망대(展望臺)에서 판매하는 요구르트(250¥)의 맛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 다섯째로 욱산기념공원(旭山記念公園)의 전망광장(展望廣場)에서 삿보르의 야경 감상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불법 헌혈을 막무가내로 강요하는 모기떼의 끈질긴 구애 때문에 서둘러 발길을 돌렸던 게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집을 나서려 할 때 손주가 주문했다. 일본 라면과 젤리를 비롯해 초콜릿 등의 주전부리를 사다 달랬다. 아내는 늘 그렇듯이 껌 한 통 사다달라는 부탁이 없었다. 손주가 얘기한 선물을 꼼꼼하게 챙겼다. ‘라면 3개, 곤약 젤리 6봉지, 아주 작은 갑(匣)으로 포장된 초콜릿 6갑’이 구입한 적바림 명세서이다. 구매 액이 적은 때문이었을까. 멋진 비닐 쇼핑백이 아닌 허접한 종이봉투에 대충대충 담아줬다. 달랑 달랑 들고 집까지 오는데 봉투가 터질까봐 신경이 씌어 혼났다. 한편 이전의 다른 바깥나들이처럼 나와 아내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음으로써 궁상스런 좀팽이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문학공간, 2017년 10월호(통권 335호), 2017년 10월 1일
(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첫댓글 교수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교수님
자유게시판 처음 들어와 보았습니다. 귀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