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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9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여 그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마 1:19).
하지만 이는 결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보면 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언약을 깨트리려는 인간적인 남자였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대전제를 보기보다 사람들의 윤리도덕적인 모습에 관심이 많음을 일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동안 이런 요셉의 모습에 나 역시 감동하여 정말 의로운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던 자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의를 볼 줄 아는 자로 세워주옵소서.
아담 이후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누구 하나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기 의에 빠져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나를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하오니 이 종의 연약함을 하감하옵소서.
이 하루도 주의 진리가 나타나는 귀한 시간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16:1-10
제목 : 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상대를 위하여 내 생각과 의지를 절제하게 하소서.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나의 묵상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례를 가지고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성도들에게 전할 때 그 성도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마가의 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져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 때 바나바는 자기의 조카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루스드라와 더베에 도착하였다.
루스드라와 더베는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하였던 곳이다.
이곳에 디모데라 하는 믿는 자가 있는데 어머니는 유대인이며 아버지는 헬라인이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여행에 디모데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려가기 전에 먼저 할례를 행하였다.
이들 일행은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해준 규례를 가르쳤다.
그것은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여러 교회들의 믿음이 더 든든해지고 날마다 그 수가 늘었다.
한편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다.
그래서 이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무시아 지방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이것 또한 막으셨다.
하여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손짓을 하면서 마게도냐로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면서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내려놓고 마게도냐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의 믿음이 출중하여 바울은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가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유대인들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어떤 무리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파송 받아 가지 않았는가?
그 문제는 다름 아니라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인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도 그곳에 있던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이 또 나타나서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더더욱 예루살렘 공회로 모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거기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음행을 멀리 할 것에 대한 규례를 정하여 이것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꼭 지키도록 권고하였다.
이런 와중에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아무 것도 아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 하에서 할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는 것이나 받지 않는 것이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면서 혹시 걸림돌이 될 할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넉넉히 받아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 논리에는 100%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는 할례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예루살렘 공회에서 결정한 4가지 사항 역시 마찬가지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꼭 지키도록 한 결정사항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과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는 일과 짐승의 피를 먹는 일 그리고 음행의 일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 4가지 문제에 있어서 사실,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나 목매어 죽은 짐승을 먹는 일, 그리고 짐승의 피를 먹는 일 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는 할례나 무할례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 제물 역시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물질이다.
(딤전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물질이 선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그 물건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구약의 의미로 본다면 부정한 물질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거룩하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전 8:4-6)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만물은 선하고 거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한 자들은 이런 것을 먹는 것으로 인하여 걸려 넘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이 강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믿기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절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목매어 죽은 짐승을 먹는 일이나, 짐승의 피를 먹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려고 애를 썼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다.
그런데 그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손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계획을 수정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민감하게 깨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사람들은 계획도 내가 세우고 내 계획대로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도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나의 계획과 전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그 길이 막힐 때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주님께 질문을 하고 나서 항상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언제든지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실 수도 있고,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하실 수도 있다.
아니면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 아이의 말을 통해서도 들려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대답을 주셨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놓칠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어느 누구도 나는 주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노라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롬 1:20-23)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썩어지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는 우(愚)를 범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되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내가 세운 계획대로 하는 자였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이 주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종이 곧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종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삼고 그것을 이루어주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넓으신지, 그런 나의 이기적인 계획을 알면서도 때로는 이루어주기도 하신다.
그러면 나는 그것에 고무되어, 마치 나의 신앙이 좋아서 응답을 받을 것으로 착각하여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곤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거기까지였다.
나의 고집과 나의 이기적인 계획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멈추게 하였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 하여금 심판의 채찍을 맞는 수순으로 나갔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가 눈에 보여야만 안심한다.
양들도 곰이 자기들 앞에 있을지라도 목자가 자신의 눈에 보이면 안심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에 응답을 받아야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의 가장 초보단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에 응답을 받으면 그것이 진짜 믿음이 뛰어난 것인 양 얼마나 부러워하곤 하였는가?
내가 바로 이런 것처럼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눈으로 보고 믿으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그것을 자랑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간증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지금 그런 나를 돌아보면 정말 얼굴이 뜨뜻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
내가 만약 바울이었다면 내가 처음 세운 계획, 곧 아시아로 가려던 길이 막혔다면 어떠했겠는가?
예전 같으면 내가 다른 것 하려는 것도 아니고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왜 그 길을 막느냐고 하면서, 그 길을 열어달라고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는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정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복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항상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였음을 본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질문하는 자였다.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을 빌립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구약의 선진들도 질문하는 자들이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질문하였다.
다윗은 ‘어찌하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고, 어찌하여 악인이 득세하며.....
이런 질문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상 응답해 주셨다.
하박국 선지자 역시 ‘어찌하여’라고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온전히 믿고 신뢰하여 믿음으로 나가는 주의 종이 되었다.
나는 질문이 없이 그저 막연히 믿던 맹신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께 날마다 질문한다.
그 질문을 통하여 주님과 매일 말씀으로 교제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길 원한다.
오늘도 주님의 뜻인 영생을 위하여 나 자신을 내려놓으며 절제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영광의 빛이 내 심령에 가득 넘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도 무더운 날이 지속됩니다.
불쾌지수도 높고 밖을 나가기가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뙤약볕을 무릅쓰고 일하는 이들이 있기에 원망이나 불평이 사라지게 하시고 더욱 감사로 나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상대를 위해서 내 생각과 의지를 절제할 줄 아는 자 되게 하시고 비록 주를 위한 일이요 복음일지라도 주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나의 생각을 접을 줄 아는 자 되게 하소서.
나의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주님의 뜻으로 인하여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믿사오니 오늘 하루도 그런 은혜를 주옵소서.
내 생각, 나의 계획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인 영생을 위하여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소서.
영적 하루살이로 오늘 하루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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