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당대표의 가족상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은 뉴스의 제목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장동혁00상'
대신
'가족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유족의 사생활을 배려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단어 속에는 어린 생명을 떠나보낸 가족의 참담한 슬픔을 최대한 조용히
감싸주려는 사회적 배려도 함께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가족상의 고인은 장동혁 당대표의 어린 외손자였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비할 만큼 어린 손자를 떠나보낸 비극은 감히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장례는 정치적 해석보다 애도가 우선되어야 할 자리였으며,
무엇보다 가족의 슬픔을 온전히 지켜주는 시간이었어야 했다.
어쩌면
한동훈과 이준석,
두 사람의 조문이 없었다면 이번 장례는 조용한 가족장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들의 조문은 곧바로 정치 뉴스가 되었고,
장례 본연의 의미보다
'앙숙의
만남'이
더 큰 화제가 되었다.
언론은 빈소에서 두 사람이 머문 시간과 대화 내용에 집중했고,
애도의 공간은 순식간에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는 무대로 변질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죽음 앞에서만큼은 정치와 이해관계를 잠시 내려놓는 문화를 소중히 여겨 왔다.
정치적 경쟁자라 해도 조문객을 박대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듯,
조문객 또한 자신의 존재가 유족의 슬픔보다 앞서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때로 상징을 통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한동훈과 이준석,
두 정치인에게 더욱 곱씹어 묻고 싶다.
어린 외손자를 잃은 비통한 장례식장이 자칫 정치적 화해나 관계 개선의
무대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정말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인지.
물론 두
사람의 조문 동기가 순수한 위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 장례는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보다 정치인의 행보가 더
큰 뉴스가 되었고,
유족의 비극은 그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렇기에 많은 국민은
'왜
하필 그 자리여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언제나 국민의 평가를 받는다.
특히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주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애도의 자리는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대가 아니라,
슬픔을 조용히 함께 나누는 공간이어야 한다.
정치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는 순간,
국민은 더 이상 그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