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은 혈액을 기증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혈장(plasma)으로 200만명 이상 아기의 목숨을 구한 오스트레일리아 남성 제임스 해리슨이 88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고인의 유족은 뉴사우스웨일즈(NSW)주 센트럴 코스트의 페닌슐라 마을에 있는 요양원에서 잠 자던 중 평화롭게 죽음을 맞았다고 이날 뒤늦게 알렸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호주인들에게 '황금팔 사나이'로 알려진 고인은 희귀한 항체 안티(Anti)-D를 갖고 있어서 임산부들을 위한 의약품으로 만들어져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공격할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호주 적십자 혈액원은 고인이 열네 살 때 가슴 수술을 받으며 수혈을 받은 뒤 기증자가 되겠다고 결심해 그 약속을 지켰다며 추모했다. 열여덟 살이던 1954년 첫 헌혈을 했고 여든한 살까지 2주에 한 번씩 꾸준히 63년을 해왔다.
2005년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혈장을 기부한 사람이 됐으나, 2022년 미국 남성이 앞지를 때까지 타이틀을 보유했다.
현지 채널 7은 고인이 평생에 걸쳐 왼팔로 1162회, 오른팔로 10차례 헌혈을 했다고 보도했다. 12년 전에 해리슨의 혈액을 수혈 받은 레베카 인드는 "그가 내 세상을 바꿨다. 난 그가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같은 일을 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인간이 됐다"고 말했다.
딸 트레이시 멜로십은 부친이 "어떤 비용도 없이 고통도 없이 그렇게나 많은 목숨을 구해낸 데 대해 아주 자랑스러워했다"면서 "그는 항상 다치지 않았으며 여러분이 구한 생명이 여러분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돌아봤다. 멜로십과 해리슨의 손자 둘도 안티-D 면역 수혜자였다. 그녀는 이어 "자신의 친절 때문에 존재했던 우리 가족처럼 많은 가족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제임스는 행복해 했다"고 덧붙였다.
안티-D 접종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태아와 신생아의 용혈성 질환(HDFN)이란 치명적인 혈액 장애로부터 보호해줬다. 임신 중에 엄마의 적혈구가 자라나는 아기의 적혈구와 양립할 수 없을 때 발병한다. 엄마의 면역체계는 아기의 혈액세포를 위협으로 보고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항체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심각한 빈혈, 심부전 또 심지어 사망을 초래해 아기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안티-D 개입이 이뤄지기 전에는 HDFN 진단을 받은 둘 중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왜 해리슨의 혈액에 안티-D가 그렇게 많은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데 몇몇 보고서는 열네 살 때 받은 다량의 수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안티-D 기증자는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호주 적십자 혈액원은 라이프블러드란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들은 매년 4만 5000으로 추정되는 엄마들과 아기들을 도왔다. 라이프블러드는 해리슨과 다른 기증자들의 혈액과 면역세포들을 실험실에서 복제함으로써 안티-D 항체를 키우는 월터와 엘리자 홀 의학연구소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실험실에서 만든 안티-D 항체가 언젠가 세계적 규모에서 임신한 여성들을 돕는 데 쓰일 것을 희망하고 있다. 라이프블러드의 연구 책임자 데이비드 어빙은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내는 일은 오랫동안 '성배'였다"고 말했다. 그는 충분한 질과 양으로 항체를 생산할 수 있는 정기적인 기증 약속에 전념하는 기증자의 부족에 주목했다.
HDFN을 예방하기 위해 창립된 호주 Rh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 로빈 발로는 60년 가까이 고인과 친구처럼 지냈다며 "항상 기부하는 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내 일을 쉽게 만들어줬다"면서 “난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난 절대 '당신이 오면 그때'라고 말하거나 전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바로 내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고인이 휴가 중일 때에도 다른 주에서 헌혈할 수 있도록 미리 약속을 잡는 등의 배려를 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제주도민 전성협(당시 61)씨가 지난해 7월 2일 생애 765번째 헌혈을 마쳐 전국 최다 헌혈자로 기록됐다. 전씨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1981년 재생불량성 빈혈을 겪은 친구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뒤 꾸준히 헌혈에 나서 '헌혈 정년'(70세)까지 1000회를 채우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5세 상한을 권고하고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76세까지 첫 헌혈을 할 수 있고, 81세부터는 5년 이내 헌혈 경험이 있으면 가능하다. 뉴질랜드는 81세까지 헌혈을 할 수 있다. 벨기에는 최근 연령 제한을 없애버렸다.
한국의 지난해 헌혈은 285만 건이었다. 2015년 308만 건을 정점으로 찍은 뒤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2050년이면 헌혈이 46% 줄고 수혈이 39%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오석 고려대 교수는 "70세 제한을 풀되 의사가 헌혈해도 된다고 진단한 경우로 조건을 붙이면 된다"고 제안했다.